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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Theological Seminar

성령신학의 현대적 의미

성령신학의 현대적 의미

(최종호/부산신학교 교수)

I. 들어가는 말
1. 성공회 신학자 John Macquarie는 "현대의 생명 있는 신학은 오늘 현재 인간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21 세기를 코 앞에 두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기술 정보화시대, 시장경제체제 시대, 우주과학 시대, 미래화 시대, 지구촌 시대. 미래의 충격을 예고하는 지표들도 한 두가지가 아니다. - 인구 폭발, 핵 폭발, 자원고갈, 식량 절대 감소, 생태계 파괴, 지구멸망 등. 과연 성령신학이 현대에 의미를 줄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때 성령신학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도대체 성령신학이란 무엇인가?
2. 1983년 캐나다 벵쿠버에서 열린 WCC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 이었다. 그 당시 논의 되었던 것은 군국주의의 팽창과 무기의 위협, 기계 문명에 의한 인간 부재현상, 자본주의에 의한 제 3세계의 종속관계 등이었다. 세상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숙지하고 그 세상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 속에서 내 걸은 주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오늘도 그 문제들은 해결되 지 않은 채 무서운 현실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성령신학은 오늘 현대 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 속에 뛰어들어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을 이땅위에 구현시키는 일에 봉사할 것이다.
3. 여기서 필자는 "성령신학"이 바로 "삶의 신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본 소고는 우선 "이성 중심" 속에서 기형적으로 발전한 현대 를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그리고나서 "생명 중심"의 성령신학의 특성을 생각해 보고, 마지막으로 성령신학의 실천적 의미로, 우리의 이웃, 즉 동료인간, 공동체, 자연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생명 존중"에 대하여 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가오는 21세기 신학을 전망하는 일도 될 것이다.
II. 현대의 형성과 문제점
1. "현대"(Modern Times) - 그것은 어떻게 형성 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만난 소위 "현대성"(Modernity)이란 개념은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 옮겨 가면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anthropos metron panton)라고 함으로 써 인간 존재를 "자율적 이성"으로 파악했다. 17세기에 데카르트(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를 통해 인간을 존재의 기초와 지식의 근거로 삼아 자아의식이 활발하게 싹트도록 했다. 18세 기 이르러 이성의 발전은 더욱 더 인간 중심적 사고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칸트(I.Kant)는 그의 책 "계몽주의란 무엇인가?"(Was ist Erkl rung?)에서 계몽이란 인간이 어떤 외적 권위에 매임이 없이 자신 속에 있는 이성의 소리를 따라 모든 것을 세워 나가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이성은 어떤 보편성 내지는 합목적적 의식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성의 이러한 절대적 보편성 내지 합목적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윤리와 도덕을 비롯한 삶의 규칙 전반에 많은 공헌을 하 기도 했지만 그 자체에 이미 문제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이성의 가치 평가는 19세기 문화 개신교(Kultur- protestantismus) 아래서 극도에 달했다. 이성의 극대화는 신이라든지 모든 궁극적 문제들이 인간성에 정초하게 되어 세계와 인간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몰고가는 운전수와도 같았다. 결국 그러한 자율적 사고는 세계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두번의 세계대전을 치루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이성 중심의 현대성(Modernity)이 보여준 낙제점의 예다.
2.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성을 매개로 한 과학 기술의 발달은 자연을 탈 마술(Entzauberung)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현대화, 산업화, 도시화를 만들어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는 것 같았으나, 동시에 그것은 그 자체의 많은 문제성을 안고 있었다.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경제적 블록현상이라든지, 생태계 파괴가 그것이다. 또한 현대는 고도의 성장과 발전으로 우주정복, 전자공학 발달, 인 조로봇, 심지어는 인조 생명(복제 인간)까지 만들어 그 자체의 병리 현상을 목도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인간성 상실이라는 큰 위기에 부닥치고 있다. 더 우기 그러한 성장과 발전의 뒷편에는 전쟁, 기아, 소외, 핵무기, 질병(Aids, 암, 피부질환 등) 등으로 인해 현대인은 사회적 심리적 불안과 갈등을 겪고 있다.
3. 이제 이러한 병든 현대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사고의 전환, 즉 이성 중심의 사고에서 "생명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는 일이 급선 문제다. 그것은 "더 많 은 발전", "더 많은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현대성(Modernity)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실천만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성장 과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현대성"을 주도해 왔던 "이성적 합리적 사고 방식"을 바꾸고(Shift!), 새로운 길, 즉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 뿐이다. 그 생명의 길은 현대를 넘어선 탈/후기 현대사회(Postmodern Society)에서 시작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생명 중심인 성령신학에서 기대한다.
III. 성령신학의 특성
1. 한글판 성서에서 "영" 혹은 "성령"은 희랍어 "프뉴마"( )와 히브리어 "루아흐"( ), "네페쉬"( )의 번역으로서 "육"( )이나 "물질"과 상반된 개념이다. 구약성서에서 "루아흐"와 "네페쉬"나 신약성서에서 "프뉴마"가 힘, 숨, 입김, 기운, 생기, 바람으로 표현 되었을 때, 성령은 "인디비디움(Individuum)으로서 인격"의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을 하느님의 영으로 보아 "인격을 가지신 영"(롬8:26), "예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으로 고백할 수 있다. "루아흐"와 "네페쉬"가 "하느님의 기운"으로써 세계 창조와 그 운행의 원동력이듯이 "프뉴마"도 성서문자, 성례전 그리고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 또는 역사 전체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기운이다. 성령은 역사를 변혁케 하는 영이다.
2. 성령의 자유성은 우선 내재적 삼위일체의 "신성 안에서 자유"와 경세적 삼위일체에서 "세상을 위한 자유"로 특징지어 진다. 하느님의 자유는 인간의 어떤 개념이나 유비적 지식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분이다. 우리에게 그 분은 신비이며, 예배의 대상일 뿐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이 인간에 의하여 조작 되거나 통제 되거나 지배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령은 마치 바람이 불 고 싶은데로 불듯이 그렇게 임한다(요3:8). 인간이 "바람아 바람아 불어라"고 외친다 하더라도 그 말 따라 바람이 불지 않는 것처럼 성령을 주문 외우듯이 부른다고 해서 성령이 임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인간의 이성으로 조작 될 수 있는 영이 아니다.
3. 바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질서와 법칙은 "바람아 불어라"고 외치는 인간 의 소리와는 다르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데로 분다." 성령의 역사, 위력, 개입도 전적으로 성령 자신의 주권이다. 성령은 전문가가 있어 성령이여 오시 옵소서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 폭발"이란 슬로건을 통해서 성령이 폭발 하는 것도 아니다. 최대의 기능과 행정력을 발휘하고 질서 정연하게 프로그램 을 계획적으로 그리고 완전무결하게 진행한다고 해서 성령의 폭발이 오는 것도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에 결코 끌려 다니지 않는다. 성령은 독 자적이요, 절대적으로 자유하다. 성령은 자체의 원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고 그 질서에 따라 개입하고 역사하고 스며든다. 성령은 바람처럼 임한다. 그리고 둘 러싸며 스며든다. 큰 바람이 생명을 앗아가고 재산을 파괴시키는 것처럼, 성령 은 위력을 가진다. 그러나 성령은 바람처럼 비 인격적인 힘은 아니다. 성령은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고, 인간의 삶을 보존하고 촉진해주는 인격적인 영이다. 그러나 성령은 자유의 영이다.
4. "나는 내 영혼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욜 3:1-4)라고 말한 요엘의 예 언(BC 830년경)은 약 900년동안 침묵을 했다. 그 예언의 바람은 너무나 오랫동 안 불지 않았다. 오랫동안 암담한 환경과 처지에도 그저 바람은 잠자코 있었 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했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는데도 바람 은 불지 않았다. 그런데 약 900년이 지난후 어느날 "갑자기" 성령이 강한 바람 처럼 "성도들의 모임"인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임한 것이다(행2:16-21). 이 "갑 자기"란 말 한 마디는 거기 모인 사람의 무엇 때문이나 인간의 무엇에 자극되 어 임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필요성과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서 임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령 강림"이라고 한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도 사멸할 수 밖에 없다. 성령은 "성도들의 모임" 을 통해 교회(Gemeinde)를 탄생 시킨다.
5. 성령 체험을 한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다"는 복음을 온 갖 박해와 환난과 죽음 속에서도 전파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한 후 예수께서 분부하신대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 음의 증인"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의 성령 체험은 바로 생명의 주님을 만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생명이었다. 그들 은 세상의 종교와 권력이 그를 죽였지만 그는 다시 부활한 생명체이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성령신학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고, 모든 사 람을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선포를 통해서 "인간성"을 회복해 준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 )는 것을 실현하신 분은 인간답지 않은 모 양으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성령신학은 인간성 회복에 기 초가 되는 신학이다.
6. 성령은 "태풍"처럼 절대주권을 가지고 오신다. 태풍은 바람 자체가 지닌 큰 힘을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발휘한 예다. 그러나 성령은 태풍의 무자비 한 비 인격성과는 달리 "좋으신 하느님의 영"으로서 기존의 악과 불의로 가득 찬 질서를 뒤짚어 덮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매우 위력 있으나 온건하다. 그것은 마치 봄바람이 앙상한 겨울나무들과 마른 풀들을 변화시켜 새 생명이 약동하게 만들듯이 하느님의 영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조용하게 임한다. 성령은 폭력의 영이 아니라, 조용한 변화와 "부드 러운 혁명"을 이르는 영이다.
7. 자유의 영으로서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유에 참여할 수 있 도록 허락 하신다. 성령이 주시는 자유는 혁명가들의 구호나 열광주의자들의 무질서와는 다르다. 인간은 하느님의 영을 통해 실현되는 이 자유를 자기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한다. 주체로서 행동하시는 하느 님은 인간에게 고유한 주체적 자유를 선물로 주셨다. 인간의 자유는 노력해서 획득된 자유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자유다. 그래서 Augstinus는 "하 느님께 예속되는 것이 최고의 자유다"라고 했고, E. K semann은 "인간의 자유 는 선사된 자유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섬김 속에서 확증할 수 있는 자유다"고 했다.
8. 자유의 영으로서 성령은 인간에게 새로운 사고와 행동에 대한 기쁨을 일깨워준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유인이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것에 완전히 책임있는 종이며, 모든 것에 얽매인다"(M. Luther).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욕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 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갈5:13; Paulus). 바 울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욕심에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사랑으로 "종"이 되도록 섬기는 데 있다고 했다. 따라서 성령 이 주시는 자유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자유케하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역사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생명운동, 인권운동, 정의운동, 평화 운동 등과 연대를 하며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성령의 역사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건으로 역사에 임한 다. 따라서 성령신학은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는 신학이며, 하느님의 사건신학 이다.
IV. 성령신학의 실천적 의미
1. 성령신학이 제대로 소개되고 있는가?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성령신학은 소홀히 되거나 아니면 교리나 경건의 수단으로 축소 내지는 왜곡되어 소개되곤 했다. 소위 정통주의를 내세우는 교회들은 교리적으로 성령을 강조함 에도 불구하고 운동으로서 성령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오순절이나 순복음 계통의 교회 등의 소종파형의 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 신유 등의 체험으로 좌절과 불안에서 해방되고, 병에서 해방되는 일종의 해방 사 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율법화 되고 경직화된 보수 교회에 대한 반발 현상이라 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유형의 교회들에서 종종 성령이라는 이름 하에 인간의 이기심이 관철되고 이용되어 문제점을 야기시키곤 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들은 "성령의 자유성"을 남용한 것이다. 반면에 기존의 교회의 문제점은 성령을 교회의 예배나 성서문자 혹은 성례전 등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교 육하기 때문에 성령의 자유성을 특수한 영역에 국한시켜 신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점이다.
2. 전통적 기존 교회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땅의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해 지극히 피상적이거나 소홀히 하고 있는데 반해, 이와는 대조적으로 상황신학 (Kontext-Theologie)은 땅의 현실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가운데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정치신학, 흑인신학, 생태학적 신학, 평화신학, 혁명 신학, 그리고 한국에서 민중신학 등이 있고, 또한 아프리카 신학, 아시아 신학, 여성 신학, 토착화 신학, 포스트모던 신학 등이 있다. 이러한 신학들은 현실 상황의 문제점을 직시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윤리적 시도들이다. 필자는 이러한 신학적 태도를 "수평적 신학"이라고 우선 명명하고자 한다.
3. 나는 여기서 "수평적 신학"을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차원의 신학 즉 "수직 적 신학"의 지평 속에서 전개하고 싶다. 말하자면 수평과 수직 즉 현실과 초월 을 동시에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수평이 인간의 현실 문제를 말한다면 수직은 하느님과 관련된 예배를 말한다. 여기서 성령신학이란 이 두 신학을 각각 두 개의 촛점으로 하여 만들어진 타원형과 같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사는 것은 성령의 현실 속에서 사는 삶을 말한다. 성령신학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세상, 성서와 신문을 구별하면서도 분리시키지 않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구현하도록 안내한다.
4. 성령신학은 "더불어 사는 삶" 즉 "호프-신학"(Hof-Theologie)에서 실천적 의미가 나타난다("호프신학"에 대하여서는 {기독교사상}, 1995년 5월호, pp.145-154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인간의 삶은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을 범주로 하는 "삶의 마당"(Hof)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인간성 자체의 문제를 내 포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삶은 "나"는 물론 우 리가 사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성령은 나로 하여금 이웃이 있고, 그리고 "나" 주위에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생태계도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참 안식을 주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케 한다. "호프"신학은 인간이 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는 신학이다. 그것은 마치 자석을 모 래에 놓으면 자석 주위로 쇳가루가 모여들어 자기장의 모양이 생기는 것처럼 "나"는 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여 나와는 다른 피조물인 동료 인 간과 그리고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여기서 성령신학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다시 말하면 나-하느님-이웃-자연을 잇는 "마당"(Hof)을 형성하면서 삶의 질을 향상 시킨다.
5. 이 세계는 어디에나 "삶의 마당"(Hof des Lebens)이 있고, 그리고 그 삶의 마당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희망"(Die Hoffnung der Welt)으로 나타나야 하는 과제가 있다. 성령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희망, 기쁨, 생명"이라는 전제 하에 기쁨과 희망과 생명이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결단에 동참하여 "복음"(Good News)을 전파하도록 역사한다. 그것은 현대성(Modernity)이라는 그늘 속에서 강도 만난 우리의 이웃과 연대(Solidarit t)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받은 사람은 절대 빈곤 속에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차별받는 흑인과 여성, 착취받는 민중, 파괴된 생태계 문제를 위하여 함께 연대하는 자들이다. 만약 우리가 오직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 의적으로만 생활한다면, 거기에는 삶이 없다. 20세기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칼 바르트는 "개인적 실존은 도둑놈 실존이다"(Privatexistenz ist R uberexistenz)고 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성령신학(삶의 신학, "호프" 신학) 에서 "네가 구원 받아야 내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유기적 상호 관계하는 삶속에서 연대하는 삶을 배울 수 있다.
6. 나는 혼자 살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실존하고 있다. 나 주위에는 "나와는 다른 네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지 않는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가족 공동체, 함께 일하고 있는 직장 공동체, 믿음의 삶을 나누고 있는 교회 공동체, 내가 매일 만나는 마을 공동체, 그리고 크고 작은 익명의 공동체들이 있다. 성령신학은 이 공동체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안내해 준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대로 빛이어야 하고, 소금이어야 한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빛을 발하기 시작할 때, 그 공동체에 있었던 어두움은 사라지고 온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기쁨을 경험한다. 한 그리스도인이 살 맛이 없는 공동체에 소금이 될 때, 그 공동체는 작은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7. 어떻게 그것이 현실성으로 나타날까?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그 기적은 위에서부터 내려온 성령이 임할 때다. 성령은 나 안에, 공동체 안에 거하여 사고의 축을 바꾸도록 역사하신다. 그 사고의 축이 바로 성령신학이 말하는 "성 령 중심적 사고"(Pneumatisches Denken)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깊은 반성없이 이성 중심의 사고의 틀 속에서 갇혀서 오히려 비 이성적이고,비 인간적인 "현대주의"(Modernism)를 건설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식하고 그 길 에서 돌아서서 성령 중심의 사고를 하기 시작해야 한다. 패러다임(Paradigm)을 바꾸어야(Shift) 한다! 그것이 회개다.
8. 성령신학은 자연과 인간이 다함께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떨어질 수 없는한 조(Set)로 지음받은 공동 운명성을 지닌 생태계 신학을 지시한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세계는 참으로 조화롭고 아름다왔다(창1:31). 하느님께서 자연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런 다음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자연은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한 원천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전달자(시19:1)이며, 또한 우리 자신의 보잘 것 없음과 동시에 끝없는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해주도록 하기 때문이다(시8:3-4). 따라서 생태계의 보호와 조화를 생각하는 성령신학은 자연과 인간이 불가 분리의 피조물의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생태계 구원에 참여케 한다. 그것을 우리는 생 명보존의 신학, 생태학적 신학, 환경보존의 신학 등으로 부르고 있다.
9. 현대의 기술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생태계 파괴의 촉진을 가져왔고, 결국 그로 인해 모든 피조의 세계가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가령 각 개인 스스로가 환경 오염을 무의식적으로 승인한다면, 그는 환경 파괴에 대한 다수의 무의식적 합의를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성령신학은 이러한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생명 중심의 사고"로 전환을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만의 구주가 아니라 만물의 구주다(골1:18-20). 그는 타락한 인간을 찾아가는 것은 물론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그 강가에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 거하게 하신다. 성령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화친하는 삶을 살도록 "사고의 전환"(Umdenken)을 일깨워 주는데, 그것은 예를 들면 개개인의 생활 습관, 가치 기준, 신념들이 "생명 중심의 사고"로 변화된 "삶의 전환"(Umleben) 속에서 현실화 된다.
10. 나아가서 성령신학은 환경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소극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적극적 관심에서 참다운 인류의 해방을 위해 생태학의 정립을 위한 범 지구적 관심을 설정해 나아가야 한다. 성령신학은 생명의 신학으로서 네 "이웃" 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이웃의 개념을 지구 공동체로 확대하여, 이기적인 "인간 중심적 이성적 사고"에서 탈피해서 "성령론적 생명 중심적 사고"로 전환하여 그 자리매김을 한다. 그것은 이미 파괴되었고 지금도 파괴 되어가고 있는 지구를 보존하기 위한 환경 회복 선언을 의미한다. 환경 회복의 관심은 우리가 매일 숨쉬고 살아가야 할 장소, 즉 땅과 바다와 공중에 서 인간이 자연 경험에 기초된 새로운 유기체적 실재관을 통해 우주적 차원의 생명 중심에서 표현된다. 가령 먹이사슬 문제가 발생하여 생태계가 균형이 깨 져 나아가는 것을 경험하고 실천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영성 이 더욱 깊다면 나무 한 그루가 병들어가는 것을 내 몸 어딘가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것과 일치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11. 성령신학은 "생명 운동의 신학"으로서 하느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과 뜻을 인류에게 전달하며, 인간은 그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이끌어준다. 성서는 끊임없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 았던 자연"을 말하고 있으나 인간 중심적 신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자연적인 것 모두를 경시하고 발전과 성장에 촛점을 맞추었다. 결 국 자연은 황폐화 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인간성 자체의 문제로 드러났다. 여기에 반해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의 세계에서만 하느님의 능력과 임재를 추구한 나 머지 결과적으로 자연과 환경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정복하려는 종교가 되어 버렸고, 신도들은 현대라는 괴물 앞에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을 잃고 초자연적 기적만을 추구하는 나약한 신앙인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성령신학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는 신학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새 일을 하게 한다. 성령 은 나에게, 우리의 공동체에,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에 "생명의 영"으로서 거하여 맨 처음 하느님께서 지으시고 아름답다고 하신 세계를 재 창조하시고자 하신다. 이 일을 시작하는 첫 출발은 "창조주 성령이여, 오소서!"하고 간구하는 일로 시작된다.
V. 맺는 말
1. 우리는 성령신학의 현대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오늘의 현대성(Modernity)의 근원을 따져 보았다. 그것은 "이성" 중심의 세계였다. 인간의 이성을 존중 하여 발전한 현대는 기술 혁신과 과학의 발달이 첨예화 되었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세계는 점점 더 비 인간화 되어갔고, 생태계 파괴로 인해 지구가 병들어 갔음을 알았다. 여기서 성령신학은 "이성"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패러다임(Paradigm)의 전이(Shift)를 의미했다. 성령신학은 한편으로는 현대성을 주도해 온 인간의 자율성에 문제점을 던지고, 또 다른 편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Dimension)의 인간의 자율성을 내세웠다. 그 자율성은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선물로서 나 안에, 우리 안에 거하여 우선 "예수그리스도-세상의 구원"이라는 것을 고백케 하고, 그런 다음에 성령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케 한다는 것을 말했다.
2. 성령신학이 현대에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을까를 정리하면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성령신학은 " 나-하느님-동료 인간-자연"이 "호프"(Hof: 마당)를 이루면서 산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성령신학은 "호프"의 신학이다. 둘째, 성령신학은 "공동체적 사고의 신학"으로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빛과 소금이도록 인도하는 신학이다. "개인적 실존은 도독놈 실존이다". "네가 구원 받아야 내가 구원 받을 수 있다". 셋째, 성령신학은 인간의 생명은 물론 "생태계 보호"를 위한 "생명의 신학"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병들면 나의 몸 어딘가에 병이 들고 있다." -성령 신학은 삶의 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