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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Theological Seminar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정치체계에 관한 연구

韓國 長老敎會 憲法의 政治體系에 관한 硏究

-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헌법을 중심으로 -

申 賢 澈

1. 서 론


1.1. 연구목적 및 동기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만약 교회가 그 정체성을 상실하면 그 순간부터 이미 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교회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도 부패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는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선교 2세기를 지나고 있는 한국의 장로교회는 그 본질에 있어서 장로교회의 모습을 상실하므로 많은 폐단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장로교회를 분열시켰고, 그 분열로 인해 105개가 넘는 교단으로 나뉘어졌고, 영적 감화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부흥을 체험하고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장로교회의 정체성(identity)을 찾아야 한다1).

한국장로교회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물론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막연하고,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성경의 절대성을 주장해 왔지만 그것이 교회적 실제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되지 않아 결국 한국의 장로교회는 정체성의 혼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즉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 상실은 성경을 경시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갈등, 교권에 의한 교단의 분열, 무자격 목사들의 난립, 무분별한 교회개척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2). 그러나 그것을 종합하면 교회론에 대한 실천적 이해 - 교회헌법 또는 교회정치에 대한 이해 - 의 부족3)이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했다고 해야 한다4). 그러므로 베자는 “사탄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교의를 뒤엎기보다는 그보다 쉬운 교회정치를 뒤엎기를 희망한다.”5)고 하므로 교회정치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교회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교회의 정체성을 흔들어버리기 위한 사탄의 전략이요, 이것은 교회의 교회됨을 기초부터 흔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정치에 관한 신학적, 실천적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6). 여기에는 몇몇 이유가 있음에 분명하다.

첫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견교회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2차적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7).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개별 교회들과 그 교회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관하여 주님께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고 보고, 그리스도인 자신들도 어디에서 예배해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그들의 교회가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가견교회에 관하여 엄청나게 많이 강조한다. 즉 하나님이 모으신 백성들이 있는 각 지역의 개별 교회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사도바울로 통하여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을 썼고, 사도 요한을 통하여 소아시아의 7 교회에게 주님은 편지하셨다. 우리 주님은 스스로 그의 교회에 죄를 다루는 방법을 제시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편지를 보내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며, 진리의 기둥과 터인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곳인지에 대하여 교훈한다. 이 모든 것은 가견교회와 그것의 운영(교회정치)이 우리 주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명백하게 설명해 준다.

둘째로 교회법에 관한 연구가 미진한 이유는 개혁파 교회의 성경중심적 견해가 불충분하게 이해된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의 모토가 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는 신학의 다양한 발전을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에 대한 폭넓은 실천적 이해에 이르지 못했다. 즉 신학의 다양한 분야에로 그 연구의 범위를 확대하기 보다는 성경의 문구해석을 최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성경 이외에 다른 것을 연구하는 것에 대하여 회의적이게 하며, 성경신학만이 가장 가치있고, 귀중하며, 권위있는 것인양 생각하게 했다. 이것은 성경중심주의에 대한 오해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성경신학의 중요성은 여타의 신학학문 보다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8), 결국 이러한 생각은 교회헌법 또는 교회정치에 대한 연구를 사문화시켰다. 이것은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를 규정짓는 헌법적 질서에 혼란을 가져왔고, 또한 그 신학적인 근거도 갖지 못하게 했다. 결국 교회헌법에 대한 부진한 연구는 교회법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허용하게 되고, 가장 비성경적인 교회 헌법적 실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셋째로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헌법에 대하여 좋지 못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교회헌법이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 또는 교권 획득의 도구쯤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교회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교권획득의 수단으로 잘못 사용한데서 기인한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교권의 잘못된 사용에 비관하고, 교회법으로 교권획득에 이용하는 목회자들을 일명 ‘정치목사’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즉 교회법을 연구하는 것에 대한 교회적인 불신이 결국 그것을 연구하고 실제에 적용하는데 걸림돌이 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교회헌법을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논의의 중심에 부상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라고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교회헌법에 대한 연구부진은 헌법 조문에 대한 평가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부정확한 법문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교회정치의 현실에서 가장 올바른 성경적인 가치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또한 헌법해석에 있어서도 아무런 원칙이 없이 교권주의자들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남용되도록 방치되었다. 한국교회의 교회법적 실재(reality)는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고, 헌법적 정신에서 벗어난 교회정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 상실이 개혁주의 교회정치관 - 하나님주권사상, 만인제사장설, 장로회주의 등 - 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함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한국 장로교회가 취택하고 있는 교회헌법이 교회정치체계의 신학적 배경을 살필 뿐 아니라, 교회헌법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켜서 성경적 원리에 적합한 교회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1.2. 연구방법


이 논문은 한국의 장로교회 정치체계(presbyterian system of church government)에 관한 것이므로 한국 장로교회가 취택하고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측) 헌법?(1993)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는 ?헌법?에 단순히 교회의 조직에 관한 것만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조, 요리문답, 정치, 헌법적 규칙, 권징조례, 그리고 예배모범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헌법 전체를 연구하는 것은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체계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헌법의 “정치”편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장로교회가 어떠한 정치체계(System of Church Government)를 갖는지, 그리고 그 신학적 배경이 무엇인지를 설명함과 동시에 궁극적으로 한국장로교회의 헌법이 나아가야할 지침을 제시할 것이다

이 연구를 위한 방법은 주로 헌법의 해석에 의존할 것이다. 교회헌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구해석에 치우치지 않고, 교단의 유권해석을 토대로 하지도 않으며, 오직 학리적 해석, 즉 신학적 배경을 토대로 한 해석에 집중하려고 한다. 헌법의 내용을 개별적으로 다루게 되면 결국 그것은 헌법정신을 바르게 표현하지 못할 것이므로 이 논문에서는 개혁신학이라는 신학적 배경에 토대를 둔 통전적 해석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정치체계를 설명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순서로 논문을 구성하려 한다.

제1장에서는 이미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한국 장로교회 정치체계를 연구하는 것이 헌법연구의 부진으로 인한 교회적 실재의 혼란을 해결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임을 밝히고, 그 연구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헌법해석이 바르게 이루어지므로 교회정치가 성경에 맞는 정치로 정착하도록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교회헌법을 개혁신학에 입각하여 종합적인 해석하겠다는 점을 밝힌다

제2장에서는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역사를 설명하고, 또 한국 장로교회 헌법이 어떤 수용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필 것이다.

제3장에서는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교회헌법이 갖는 신학적 의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밝히고, 한국장로교회 헌법의 구조가 어떠한지, 그리고 협의의 교회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편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하여 살필 것이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중심되는 신학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면서, 그것이 헌법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다루게 될 것이다. 특히 헌법이 표현하는 신학사상을 개혁신학이라고 간주하고, 그것은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 주권사상, 만인제사장설, 그리고 장로회주의가 그것이다.

제4장에서는 목회적 실제에서 교회헌법이 어떻게 남용되고 있으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를 위하여 어떻게 헌법을 보완, 또는 수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제5장에서는 본 논문의 본론에서 다룬 내용들을 요약하고, 정리하고, 결국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개혁신학에 입각한 장로회주의에 따라 목회적으로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한 다음, 그 방법으로 이미 제시한 헌법의 개선점들을 제시하므로 결론을 맺을 것이다.

2.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역사적 배경


한국의 장로교회 헌법 특히 교회헌법의 정치에 관한 연구를 하기에 앞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어떤 토양 위에서 세워졌으며, 그 역사가 어떠한가를 살피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과제일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무시한 채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에 관한 것을 논의하는 것은 마치 솔잎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소나무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적 배경을 두 단계로 살펴보고자 한다. 즉 먼저는 한국 장로교회는 어떻게 생성 발전했는가를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그 다음에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가에 대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2.1.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


역사적으로 한국에 최초로 거주했던 장로교인은 아마도 하멜(Hamel)이었을 것이다. 하멜은 화란의 개혁파 교회의 교인이었다. 그는 1653년 제주도 지역을 표류하게 되었고, 당시의 조선에 많은 기술적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 하멜 표류기는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멜은 한국인이 접한 최초의 장로교인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개혁파 신앙을 한국에 전래한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하멜의 제주지역 표류사건은 장로교인이 최초로 한국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의 장로교회는 그의 수고에 의하여 세워지지 않았고, 또한 그가 한국인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하였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9)는 점에서 하멜이 한국에 들어온 사건을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후에 한국에 장로교회가 들어오게 된 경로는 다양한다. 그러나 특히 중요한 것은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한국에 장로교가 정치체계의 형태를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장로교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한국에 들어온 사람은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이다. 그는 1884년9월20일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미국 공사관 관의로 내한하도록 승낙을 받았다. 알렌은 영국과 중국, 일본의 공의로 일하면서 의술을 통한 복음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는 병원을 통해 한국 선교에 앞장섰다. 특히 그는 청일전쟁, 노일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부상하였을 때 외국인보다도 한국인을 우선적으로 치료하여 한국인의 친구가 되었다10).

의사 알렌은 많은 의료사업을 통하여 기독교 복음을 증거할 수는 있었지만 그가 장로회 정치체계를 갖는 구체적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기보다는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에 더욱 열중하였다.

알렌이 의료선교를 전개하고 있을 때 장로교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오는 도중 피선교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본에 잠시 머물렀다. 일본에서 그는 이수정(李秀廷)에 의해 번역된 마가복음을 구하였고, 그것을 한국에 가지고 와서 서울을 중심으로 선교하였다. 그는 먼저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을 시작하였고, 나중에 그들을 위하여 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인 후에 경신학교가 되었다11).

알렌과는 다르게 언더우드는 직접적으로 한국에 장로교회를 세우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목사로서 교회를 세우는데 관심을 가졌고, 알렌의 선교정책과 마찰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장로교회의 정치체계를 한국교회내에 구체적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언더우드는 한국 장로교회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을 향한 그가 갖고 있었던 복음의 열정은 한국 장로교회의 초석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훗날 그를 한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로 불리우도록 했다12).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였다. 1889년10월 오스트랄리아의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Henry Davis)남매가 내한하여 부산을 중심으로 선교하였고,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레이놀드(W. D. Raynold, 한국명 이눌서), 전킨(W. M. Junkin, 한국명 전위렴)등이 내한하여 전라도 지방에서 선교하였다. 1893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의 존 매켄지(William John Mckenzie)목사가 도착하여 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일대를 선교하였는데 1895년 매켄지가 사망하자 캐나다 선교부는 1898년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한국명 구례선)목사 부부를 파송하여 매켄지의 뒤를 계승하도록 하였다13).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전도전략 선교거점을 중심으로 가까운 지방에 대한 순회전도(itineration)를 통하여 선교지점(substation)을 세우는 것이었다. 장로교회의 복음적 헌신으로 통하여 선교지점과 선교거점이 늘어가면서 선교사들의 내면에서는 ‘한국 장로교회의 창설’이라는 싹이 조용히 움트기 시작했다14). 이 아름다운 싹은 우선 미국 남·북 장로교 선교부가 1982년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므로 봉우리를 맺기 시작했다. 물론 선교사 공의회는 “개혁신앙과 장로교 정치형태를 채용하는 단일적인 한국교회를 조직하는데 목적이 있다”15)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국 장로교회 선교부의 의견차이와 불화로 구체적인 결실을 거두지는 못하고 오히려 선교지 분할16)만을 가져왔고, 이것은 후에 장로교회의 분열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단일한 장로교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01년 선교사 공의회는 한국인 대표를 참가시킨 韓·宣 연석회의를 만들어 대한 예수교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라 하고, 독립적인 한국 장로교회를 창설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한 예수교 공의회는 이를 위해서는 교역자를 조직적으로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신학교 설립을 결의한 후 평양에서 선교하던 마포삼열(Samuel Moffet)선교사의 자택에서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최초의 신학생은 김종섭과 방기창 두사람이었고, 마포삼열과 이길함(Graham Lee)선교사 두 사람이 교수로 수고하였다. 그 후 언더우드의 조사로 일하던 한석진, 만주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소래에 교회를 세운 서상륜, 그리고 길선주, 이기풍 등이 등록하여 7-8명의 학생이 공부하였고17) 1905년 선교사 공의회의 승인을 얻으면서 성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평양신학교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장로교회는 영적 대각성운동을 일으켜서 민족에게 소망을 심어주었다. 영적인 대각성은 원산에서 모인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시작되었지만 1907년1월초부터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모인 도사경회에서 행한 길선주 목사의 성경강해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도사경회는에서 길선주 목사는 성경강해를 통해 회개와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많은 무리가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 기도하면서 회개와 기도운동이 일어났다.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물론이고, 숭실대학교외 학생들도 수업을 제쳐두고 기도하는 것과 회개하는 일에 전무하였다. 이러한 대각성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영력을 얻었고, 교회확장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07년은 대각성운동 뿐만 아니라 교회의 조직면에서도 한국교회사에 기억될 만한 해였다. 첫째는 한국 장로교 역사상 최초로 노회가 조직되었다. 한국에 와서 선교운동을 펴던 4개의 장로교회는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독노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을 축소한 12신조와 소요리문답을 채택하여 장로교의 근본적인 신앙을 수용하였다. 둘째는 최초로 한인목사가 배출되었다. 독노회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 등 7인의 조사를 목사로 안수하였다. 마지막으로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독노회는 노회조직기념으로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18).

1910년에 모인 제4회 독노회는 100만명(당시 한국의 인구는 1000만명) 구령운동을 구상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전민족 10분의 1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교회는 매일 새벽기도를 가질 것을 결의하였는데, 평양에서는 1000여명이상이 개인전도에 참여하여 전도운동이 일어났다. 한편 교회가 성장해 가면서 장로교 총회조직이 구상되었다. 전국 각지에 교회가 세워지면서 1912년 소집된 독노회는 1907년 당시에 조직한 7개의 대리회를 개편하여 7개의 노회를 만든후 총회를 조직하였다. 총회는 1907년 독노회가 채택한 12신조를 다시 승인하고 총회헌법을 채택하면서 교회의 자유 등 기본적인 장로교 정치원리를 승인하였다19).

한국 장로교회는 일제의 치하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신사참배의 문제로 교회는 급기야 분열의 씨앗을 남기게 된 것이다. 교단 총회는 신사참배에 대하여 일본의 강제에 의하여 우상숭배로 규정하지 않고, 그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옥중성도들을 교권을 가지고 징계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다시 교회는 교권주의자들과 옥중성도간에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간의 갈등은 결국 한국 교회를 분열의 수렁으로 몰아갔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는 그 수에 있어서 엄청나게 많이 분열하였고, 현재에 이르렀다.

앞으로 한국 장로교회는 일치를 위한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어떻게 하나되고, 연합할 것인지에 대한 과제가 남은 것이다. 그리고 각 교단은 이를 위하여 서로간의 의견을 좁히고 있으나 그 실현은 좀더 시간이 걸릴 듯 싶다.


2.2.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정착과정


언더우드 선교사 이후에 많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복음을 전파했다. 그들은 선교거점을 중심으로 순회전도를 통하여 선교지점을 확장해 나갔고, 선교거점과 선교지점에 두 종류의 한국인 지도자를 세웠다. 그 하나는 조사(助師, helfer)요, 다른 하나는 영수(領袖, leader)였다. 전자는 비록 안수는 받지 않았지만 선교지점에서 목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한국인 지도자였고, 후자 역시 조사와 마찬가지로 안수를 받지는 않았지만 선교거점을 단위로 해서 장로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한국인 지도자였다. 이러한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한국인 지도자들은 목사와 장로가 배출되는 인적자원이 되었다20).

선교사 공의회가 한국인 목사와 장로를 배출하고 단일한 한국 장로교회를 이룩하려고 노력하므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헌장에 관한 준비를 하였다. 즉 1901년 만국장로회 헌법 번역위원을 선정하였고, 1902년에는 헌법준비위원과 노회규칙위원을 선정하였다. 1904년에는 웨스트민스터 헌법중 일부를 역간하여 소요리문답 5000부를 출판하였다21). 1905년에는 교회신경과 더불어 대한예수교 장로회 규칙22)을 공의회가 의정채용하였다23).

공의회가 채용한 교회신경은 인도선교를 위해 정리한 것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것은 자구수정(字句修正)을 거쳐 현재에도 신조 또는 12신조라는 명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05년의 대한 예수교 장로회 규칙은 4개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칙을 동반하고 있다. 제1조에서는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가 신봉하는 교회관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제2조에서는 예배의 절차에 대하여 설명하며, 제3조에서는 교회의 직원의 종류와 자격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4조에서는 교회의 치리기관, 즉 당회, 노회, 그리고 총회 등의 기능과 역할 뿐 아니라 외국목사에 대한 교회적 지위 내지 규칙개정에 대한 것을 간략하게 개관한다. 세칙은 직원의 임명과 이명 그리고 세칙의 개정에 관한 사항을 다루고 있다. 1905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가 채용한 교회신경과 대한 예수교 장로회 규칙은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원헌법으로서의 위상을 띠고, 한국장로회의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그후 1907년 9월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4개의 장로회가 하나의 독노회를 결성하고 신경과 규칙을 일년간 임시 채용하여24) 7인의 조사위원25)으로 명년 노회시에 보고케 한다. 그것이 한국 장로교회의 최초의 헌장이 되었다26) 그러나 그것이 독립된 헌법으로 발효된 것은 1912년 9월 1일에 진행된 “예수교 장로회 조선 총회”부터라고 해야 옳다. 왜냐하면 독립된 총회조직이 결성된 때로부터 헌법적 제반규정들이 비로소 완결성을 갖기 때문이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노회시 임시 채용된 신경과 규칙은 헌법적 효력을 갖는 것임에 분명하다. 물론 임시 채용되었던 신경이나 규칙이 독노회에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수용된 흔적은 없다. 즉 그것은 계속해서 임시로 사용될 뿐이었다.

이 규칙은 아직 임시적인 것인 만큼 허술한 점이 많았다. 물론 당시의 상황으로는 교회조직에 대한 헌법적 규정이 복잡할 필요도 없었고, 개략적인 장로회주의 정치관만 가지도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후에 1917년 9월 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소집된 제6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헌법책을 번역하여 총회가 작정한 대로 편집하여 국한문으로 출판하기로 했다28). 그것이 바로 한국 장로교회 헌법이 현재의 구조로 정형화되는 기초가 된 것이다29). 그러나 당시에 채택된 헌법은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적당히 수정, 채용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 그후 수차에 걸친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다. 특히 한국적 상황과 민족적 심성에 걸맞지 않는 헌법규정들이 다수 포함되어 이후 장로교 분열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30).

1932년 9월 9일 평양 창동교회에서 회집된 제21회 총회에서 15일을 택하여 한글 사용법대로 개역 수정하기로 가결하고 1933년 9월 8일 선천교회에서 회집된 제22회 총회에서 이를 승인하였다31).

1952년 제37회 총회에서 부목사 제도 실시에 관한 건이 상정되고, 1954년 4월 23일 안동중앙교회에서 회집된 제39회 총회에서 정치만 수정하기로 하고 전문을 수정 발표하였다. 부목사 제도가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한국 장로교회가 장로회주의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로교회가 지역교회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대형화를 구실로 부목사제도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결국 당회장의 독단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1969년 12월 1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된 제45회 총회에서 헌법과 총회 규칙을 수정하기로 하고 17인에게 위임하여 1961년 9월 21일 부산남교회에서 회집된 제46회 총회에서 보고받아 이를 채택하고 각 노회에 수의하여 1962년 9월 20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된 제47회 총회에서 수정안이 가결되었다32).

1968년 9월 19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회집된 제53회 총회에서 재수정하게 되고, 1990년 9월 18일 김제중앙교회에서 회집된 제75회 총회에서 헌법을 개정하기로 가결하고 위원 15일을 선정하여 일임하였다. 동위원회에서 정치와 예배모범 일부를 수정한 안을 1991년 9월 24일 대구 동신교회에서 소집된 제 76회 총회에 보고하니 채택하고 교회의 모든 직원의 연한을 만70세까지로 함을 본회가 결의하여 보고된 개정안에 포함시켜 이를 각 노회에 수의하여 1992년 9월 22일 인천제이교회에서 회집된 제77회 총회에서 이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33).

3.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에 대한 분석


3.1. 교회헌법의 의의

기독교에서, 또는 교회에서 교회헌법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질문은 교회헌법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즉 교회헌법이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바르게 인식하지 않고서는 헌법의 중요성을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한국 장로교회가 이해하는 교회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교회헌법은 교회의 규정이요,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관건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교회관은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교회관과 일치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각 지체들이 연합하고 상합하여 하나가 된 교회, 예수님이 구원하여 불러낸 구속받은 무리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특히 칼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회라고 하여 피택자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내적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구성된다34). 그러므로 이 은밀한 선택에 기초한 교회를 아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하나님만이 자기의 백성을 아시며(딤후2:19), 그들을 인치심으로 둘러 지키시기 때문이다(엡1:13)35). 이러한 교회관에 의하여 칼빈은 교회를 가견교회와 불가견교회로 구분한다36). 전자에는 참 신자와 위선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후자는 하나님 만이 아시는 택함받은 자만이 속한 것이다. 칼빈의 견해를 따라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교회에는 두가지 구별이 있으니 유형한 교회와 무형한 교회라. 무형한 교회의 교인은 하나님만 아시고, 유형한 교회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니 그 교인은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이다.”37) 라고 설명한다.

가견교회나 불가견교회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각 지체가 연결되고, 상합한다. 그래서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들은 교회의 속성을 다음의 네 가지로 설명한다. 즉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이 그것이다38). 이것은 니케아 신경의 교회관을 받아들인 것이다. 니케아 신경은 이미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One Holy Catholic Apostolic Church)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무형한 교회, 즉 불가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들이 가견교회에서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39). 다만 불가견교회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가견교회의 활동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교회의 표지가 되는 1)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의 설교와 가르침, 2) 성례의 정당한 시행, 3) 심급에 따른 교회법정의 성경적 권징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가견교회는 분명한 교회정치, 또는 권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를 구체화하는 제도적 장치를 요구한다. 교회헌법과 교회정치의 필요는 바로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헌법은 가견교회의 불완전함을 보완해 주고, 교회를 참된 교회되게 하는 실천적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현대 개혁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참된 교회의 표지(sign)는 대개 말씀의 참된 전파, 성례의 정당한 집행, 그리고 권징의 신실한 시행 등으로 이해된다40). 물론 칼빈은 말씀의 참된 전파와 성례의 정당한 집행의 두 가지를 교회의 표지로 제시하지만41), 그가 권징의 필요성을 무시한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칼빈은 권징을 말하면서 말씀의 순결함과 성도들의 성화의 생활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권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42). 또한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목사는 노회의 안수로 임직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자니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직분이다”43) 라고 규정하므로 교회가 교회됨을 나타내는 중요한 역할을 세가지 즉 말씀의 진실한 전파, 성례의 정당한 집행, 그리고 권징의 신실한 시행 등으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이 세 가지는 교회에 꼭 필요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아무튼 권징은 그것이 교회의 표지냐를 불문하고 교회에 필요한 것이다.

교회권징이 필요한 만큼 교회를 다스리는 정치도 필요하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정치의 필요?라는 항목을 통하여 교회헌법의 필요성을 암시적으로 규정한다. 즉 “교회를 치리함에는 명백한 정치와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전14:40). 정당한 사리와 성경 교훈과 사도시대 교회의 행사(行事)에 의지한 즉 교회 치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대회, 총회 같은 치리회에 있다.”44) 즉 교회정치는 치리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회헌법의 필요성이 발견된다. 교회헌법은 교회의 치리권이 바르게 행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유기적인 관계를 바르게 하며 교회의 통일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미 서론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는 교회 헌법과 그것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모든 개혁파 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 장로교회도 역시 성경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의 역작용으로 교회헌법은 성경에서 떠난 율법주의적 규제 내지는 교권주의자들의 교권획득을 위한 수단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은 교회헌법에 대한 오해이다. 교회헌법은 단순히 정치적 술수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교회적 일치 내지는 합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시될 수도 없는 것이요, 성경의 가장 실천적인 해설서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헌법의 의의를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임에 분명하다.


3.1.1. 교회헌법의 개념


교회헌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를 치리하고(discipline) 다스리는(govern) 기본법을 말한다. 불가견교회는 가견교회의 활동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 속에 드러난다. 그런데 가견교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45) 불가견교회의 속성 -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 - 을 충분히 드러낼 수가 없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교회정치가 필요하고 교회헌법은 이를 위하여 성경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교회헌법은 교회라는 가시적 기구를 운영하고 유지하기 위한 규정으로서46) 가견교회의 불완전함을 보완해 주고, 교회를 참된 교회되게 하는 실천적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헌법은 하나님이 직접 계시로 제정하신 말씀, 즉 성경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에 헌법이 성경과 같다면, 로마 카토릭에서 생각하듯이 전통과 성경을 동등시한다면, 계시의 완결성은 부인될 것이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는 성경은 완결되었으며, 성경으로 계시됨은 더 이상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계시하신 이전의 방법은 지금 정지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헌법은 성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원리를 교회법적 실제에 적용한 성경의 실천적-교회정치적 해석일 뿐이다.

교회헌법은 성경의 실천적-교회정치적 해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어떤 신학자 개인이 성경에 대하여 해석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어떤 신학자, 또는 목회자 개인이 성경을 해석하여 실천적으로 적용한다면 그것은 성경주석 내지 학설, 또는 이론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헌법으로 정착하려면 일정한 형식적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형식은 결국 교회적인 합의에 이르는 형식이다. 교회적인 합의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대한 교회의 일반적 동의가 수반된 채, 교회헌법으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이다.

결국 교회헌법은 공교회의 교회법적 사안에 대한 성경의 실천적-교회적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헌법의 이해는 다시 두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즉 그 하나는 교회헌법의 광의적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헌법의 협의적 이해이다.

일반 법학자들은 교회헌법(교회법)을 광의적으로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법 조문을 Canon이라고 하고 그 교회법 전체를 Canon법이라고 한다. 이 교회법은 그리스도교의 교의, 교회의 조직과 기능, 교회의식, 신앙생활 및 교회 재판에 관한 모든 규범의 총체를 말한다47).


광의적 의미에 있어서 교회헌법이라 함은 단순히 교회정치나 교회의 조직과 기능에 관한 규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전체를 담아내고 있는 그릇이며, 신조, 요리문답,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48). 여기에는 교회가 신봉하는 신앙체계와 신학사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교회적 합의49) 등이 전체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그러나 흔히 교회헌법이라고 말하면 협의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즉 교회 정치에 관한 부분, 즉 교회의 조직과 기능에 관한 부분만을 교회헌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협의적 교회헌법에 대한 이해는 결국 교회정치와 성경, 또는 교회정치와 교리가 상관없는 것이 되게 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병폐로 몸살을 앓아왔다. 신앙은 개혁신앙인데 교회법적 실재는 권모술수의 정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증이 결국 교권에 의한 교회분열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협의적 교회헌법의 중요성이 무시되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협의적 교회헌법은 교회의 조직과 기능에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교회법적 현상들에 대하여 가장 실천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즉 협의의 교회헌법은 광의의 교회헌법이 각 시대에 적합하도록 공적으로 해석된 보다 실천적인 것이라고 해야 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실제에서의 운용에 있어 광의적 의미에서의 헌법과 무관한 해석이 자행된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협의적 의미의 교회헌법은 부단히 광의적 의미에서의 교회헌법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교회정치에 대한 해석 원리 또는 교회정치의 근거는 성경, 교회교리, 내지는 교회적 합의에 달려있으므로 교회 정치에 대한 이해도 광의적 헌법이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헌법을 교회정치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교회헌법이란 기독교 신앙의 총체적 표현과의 관련 속에서 기독교인의 신앙과 생활을 치리하고 다스리는 교회적 합의 내지는 수용에 따른 제정법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헌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한국 장로교회가 신봉하는 신앙의 표준인 성경과 신조 및 교회 교의, 특히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Westminster Standards)와 깊은 연관 속에서 생각되어져야 할 것이다.


3.1.2. 교회헌법의 권위


교회헌법은 교회의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광의적이다. 그러나 협의적으로 이해된 교회헌법, 즉 교회의 조직과 기능에 관한 규정은 어떤 권위를 갖는가? 이것이 아무런 권위가 없이 목회자들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다루어져도 되는 것이라면 교회헌법은 존재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미 한국교회는 오랜동안 교회헌법이 자의적으로 다루어져 왔고, 그결과 교회헌법에 대한 불신 내지는 율법성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헌법은 권위를 갖는다. 그 이유는 두가지이다. 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모든 교회의 규정은 그분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교인들의 공적인 약속이기 때문이다.

교회헌법은 공교회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공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하며, 합의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 시대, 각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 바로 교회헌법이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므로 교회의 결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록 성경에 부합하느냐의 문제가 검증되는 한도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세가 행사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교회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의 모든 권위는 그분에게서 위탁된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에서의 권위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50). 그리고 그 권위의 정점에 바로 교회법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회헌법이 갖는 교회의 공적인 권위를 나타낸다. 이 헌법에 근거해서 교회는 교회의 치리권을 행사하게 된다. 모든 교인들은 여기에 복종해야 하고, 특히 직분자들은 여기에 복종할 것을 서약해야만 한다. 여기에 도전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교회헌법은 공교회의 약속이므로 권위가 있는 것이다. 장로교회는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를 취한다. 이것은 권위의 발현은 교인들의 약속에 의하여 나타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헌법은 공교회의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장로교회에 대한 권세가 있는 것이다.

비록 교회헌법이 교회의 공적인 해석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히 전 세대를 향하여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불변적 법칙이 아니라 가변적 규정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현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족장시대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치체계가 다르고, 사사시대가 다르고, 왕정시대가 다르고, 지금같은 민주주의시대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치체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헌법의 권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하여 법의 서열을 정하고 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법의 권위와 서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장 우선적인 지위에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성경이다. 이 성경은 모든 법적 권위의 기초이며, 여기에서 모든 법문이 구속력을 갖게 된다. 다음으로는 총회헌법, 그 다음에는 각 치리회와 기관 및 속회의 규칙이나 정관, 그 다음에는 장로회 각 치리회의 보통회의 규칙(제7회 총회에서 본총회 회의규칙으로 채택), 그 다음으로는 하지(J. A. Hodge) 저, 교회정치문답 조례(제8회 총회에서 참고서로 채택), 마지막으로 기타 만국회의법 등이다51).


3.1.3. 교회헌법의 성경과의 관계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고 할 것이다. 즉 개혁신학은 성경제일주의 내지는 성경중심주의를 표방한다. 이와마찬가지고 한국 장로교회도 개혁주의 신앙 노선을 따라 성경제일주의 혹은 성경중심주의를 취택하고 있다. 즉 12신조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本分)에 대하여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이다”52)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은 제3문의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다”라고 기록할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는 신구약 성경53)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다”라고 하고 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그러므로 칼빈의 교훈대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것에 침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성경 외에 다른 것에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은 오직 성경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성경관에 입각하여 본다면 교회헌법이 규정하는 다양한 내용들은 성경이 아니며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교회헌법의 다양한 규정들은 개혁신학에 위반한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다양한 제도가 있다. 예를들면 강도사, 전도사, 권사과 같은 직분은 성경에 없다. 당회, 노회, 총회, 제직회, 공동의회라는 말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원로목사, 공로목사, 담임목사, 부목사라는 개념도, 당회장, 공동회장, 제직회장 하는 말도 성경의 용어가 아니다. 이런 말들은 교회헌법적 용어요, 규정들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없는 용어와 제도를 함유하고 있는 교회헌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을 규율할 수 없다는 말인가? 즉 성경이 말하지 않는 제도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성경적이지 못하고 교회헌법은 성경중심주의에 이반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계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는 성경을 가리켜서 “본성의 빛과 또 창조와 섭리의 일들은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여러 때에 여러 방식으로 자기의 교회에 대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며, 자기의 뜻을 선언하시는 것”54)이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계시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제도요, 규범이지만, 그 자체가 전체의 제도가 되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전체 규범을 망라하는 것은 아니다. 역시 성경은 문구자체에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적으로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즉 해석되지 않은 성경은 오히려 율법주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구체적인 제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 제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의 원리에 바르게 해석된 것이라면 그것은 비록 성경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더라도 온전한 성경적 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교회헌법은 성경에 없는 용어와 제도, 또는 규정들을 사용하여 성경 이외의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을 삼으려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편협된 눈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 “장로”라는 용어가 성경에 있기 때문에 가장 성경적인 제도는 장로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른 성경적 대답이 아니다. 만약 그와같은 논리를 인정한다면 성경에 감독이라는 용어가 있으므로 감독주의를 취해야 하고, 성경에 왕정이 있으므로 현대의 정치제도는 왕정이어야 한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에 부인한다면 그것은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변경될 수 없고, 고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시대는 다양하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는 척도도 다양해야 한다. 각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뜻이 달랐듯이 각 나라와 각 시대적 특성에 맞는 성경해석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현장에서는 설교의 형태로 나타나고, 교육의 현장에서는 성경공부 또는 제자훈련 등으로 나타나며, 목회의 현장에서는 교회행정 내지는 교회정치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잘 반영되어 있는가 이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향하여 원하시는 바를 잘 반영한 설교, 교육, 또는 교회정치가 바로 성경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에 성경이 근본규범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정치문답13문답에서는 “모든 치리권은 ···· 주의 뜻을 받드는 종으로 그 뜻을 선언하는 것 뿐이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니 어느 교회 치리회든지 치리권을 가지고서 회원의 양심을 속박할 법을 만드는 구실을 삼지말고,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55) ”라고 하므로 신·구약 성경와 교회헌법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이것은 신구약 성경을 (교회헌법의) 법원(法源)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56).

그렇다면 교회헌법은 성경을 법원으로 하여 그것의 해석을 통해 교회의 정치현실 또는 교회헌법의 실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고,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헌법은 항상 성경의 해석에 근거해야 한다. 성경적 정치원리를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헌법은 성경에서 위반된 아니, 비성경적 내지는 율법주의적인 규정으로 전락하고 만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교회헌법은 성경의 형상화이고, 그 실천적 구현이기 때문에 항상 성경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호세 욥바르트는 교회헌법이 성경과 교의 그리고 교회적 합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회법”이라는 말은 다의적이다. 광의적으로는 교회에 관한 온갖 법(神法, 자연법, 교회의 제정법)의 의미로 이해되는데 협의로는 인간으로 구성되는 지상의 교회라는 조직에 의해 제정된 법, 즉 교회의 제정법에 국한된다. 이러한 교회의 제정법(lex ecclesiastica)은 국가법으로서의 실정법과 마찬가지로 불변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교회에 있어서 절대적인 완전한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교회법은 광의적으로 이해되어 왔고(ius canonicum), 교회자체가 신법없이 이해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제정법도 신법과 무관하게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57).


비록 교회헌법의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정치제도와 꼭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성경을 근본규범으로 하여 형성되었기에 교회헌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에 규범적 권위를 가진다.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이 장로회주의를 취택하고 있다면 한국 장로교회는 장로회주의가 가장 성경적이 원리에 따른 것으로 받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장로회주의와 같은 형태의 정치제도는 가변적이다. 그것은 교회의 제정법이요 인간적 고안에 불과하다. 그것이 비록 성경적 원리에서 추론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정 혹은 수정의 요소를 갖고 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작품임에 반하여 교회헌법은 인간의 작품이요, 하나님의 작품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작품은 완전할 수 없고, 착오가 없을 수 없으니, 성경은 고치지 못하나 교회헌법은 고칠 수 있고, 또 고쳐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58). 그러니 제정된 헌법이 설혹 인간의 착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해도 당시의 나라형편과 교회 형편, 혹은 성직자나 교인들의 신앙 수준과 상황에 따라 합당하게 이를 소화하며 적응해 나아가기 위해서도 법은 고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59).


3.2.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구조


교회헌법은 성경의 정신을 반영한 교회적 합의로서 교회교의, 교회의 조직 및 기능, 교회의 예전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에는 교리를 비롯하여 교회 운영을 위한 다양한 규정들이 제시되어 있다. 즉 제1편에서는 12신조, 제2편에서는 성경 소요리문답, 제3편 성경 대요리문답, 제4편에서는 정치, 제5편에서는 헌법적 규칙, 제6편에서는 권징조례, 제7편에서는 예배모범, 그리고 부록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를 담고 있다.

12신조를 비롯한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과 부록에 첨가되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는 한국 장로교회가 지향하는 신학적인 기초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즉 한국 장로교회는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에 근거하여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헌법의 정치는 교회정치의 원리를 양심의 자유와 교회의 자유라는 구도 아래서 교인의 기본권과 교회의 교권과의 견제·균형의 원리를 설명한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한 가견교회가 어떻게 조직되고, 어떤 기능을 갖는가를 설명하며, 동시에 그 교회에서 교회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교회의 직원의 정체를 확인해 준다. 헌법적 규칙에서는 교인의 권리와 의무, 학습과 성례, 교회의 선거투표, 혼상례, 병자에게 안수하는 것 등에 대하여 설명한다. 권징조례에서는 국법의 형법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각종 소송에 관한 것을 설명한다. 즉 교회적 재판에 관한 것을 다룬다. 예배모범에서는 주일성수를 필두로 하여 교회의 예전에 관한 다양한 설명을 하고, 유아세례, 입교예식, 혼례 및 장례, 그리고 시벌과 해벌 등에 관하여 다룬다.

특히 협의적 의미에서의 교회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정치에 관한 헌법의 규정은 총론을 비롯하려 총 23장 120개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의 여섯 가지를 다루고 있다. 즉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정치편은 1) 교회의 정치형태와 그 원리를 필두로 하여, 2) 교회의 직원, 3) 교회의 치리회, 4) 직원의 임직과 면직, 5) 지교회의 각종 회의와 의회, 6) 헌법개정에 관하여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크게 세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1) 교회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며, 2) 교회의 직원에 관하여, 3) 교회의 치리회에 관하여 설명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교회헌법은 교회론의 핵심을 이룬다고 생각된다. 박형룡 저작전집에 나타난 교회론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교회헌법에 얼마나 합치하는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60). 즉 그의 조직신학적 교회론의 문제들이 교회헌법에서 구체화된 것같은 인상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회헌법은 교회적 실제를 신학적 차원에서, 혹은 실천적 차원에서 정리하여 형성시킨 공인된 교회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3. 교회 헌법의 내용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교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헌법은 신앙과 표준이 되는 성경의 공적 해석으로서의 효과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적 활동의 구체적 내용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많은 내용을 전부 기록하는 것은 조직신학과 실천신학 모두를 망라하는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교회헌법의 중심과제, 혹은 협의적 의미에서의 교회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부분을 해석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3.3.1. 장로교회와 교회정치원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의 정치 총론 및 제1장과 제2장에서는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형태와 그 원리를 다루고 있다.

총론은 한국 장로교회가 감독정치, 교황정치, 자유정치, 조합정치와는 달리 장로회 정치를 취택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장로회 정치야말로 가장 성경적인 제도이며, 교회역사상 가장 오래된 제도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장로회주의의 기본적인 틀이 설명되는데, 즉 1)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 2) 치리기관의 최소한으로 장로와 목사로 구성된 당회, 3) 그리고 삼심제의 치리회 등이 그것이다.

총론은 한국 장로교회의 뿌리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헌법에 근거함을 밝히고 있다. 이 헌법은 1643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장로교 청교도들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헌법의 총론에서 헌법의 역사적 근거를 설명하고, 한국의 장로교회가 장로교파 청교도 신앙에 입각한 것임을 강조한다.

제1장에서는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를 8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양심 자유, 교회 자유, 교회의 직원과 그 책임, 진리와 행위의 관계, 직원의 자격, 직원의 선거권, 치리권, 권징 등이 그것이다.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진리와 행위의 관계를 토대로 하고, 양심의 자유와 교회의 자유를 두 개의 축으로 하여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취하고 있다. 교회헌법은 양심의 자유를 중심으로 한 교인의 기본교권과 교회의 자유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의 치리교권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불균형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진리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심상을 토대로 한 두 권한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에 교인의 양심의 자유만을 강조하게 되면 교회는 자유정치로 되어 교회의 연합을 이룩하지 못할 것이고, 삼심제로 나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치리교권을 동등하게 인정하므로 장로교회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치리교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황주의 또는 감독주의로 변화되어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인본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에 교인의 기본교권을 동등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와 관련하여 교회정치의 실제에서 직원을 선거할 수 있도록 하고, 교회의 자유을 중심으로 치리교권을 설명하면서 교회의 직원과 그 책임, 직원 자격, 치리권, 권징 등을 설명한다(표1).


(표1)장로회 정치 원리의 체계61)



진리와 행위의 관계(제4조)

양심자유(제1조)

교회자유(제2조)

직원선거권(제6조)

교회의 직원과 그책임(제3조)

직원자격(제5조)

치리권(제7조)

권징(제8조)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진리와 행위와의 관계를 규정한 것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설명한 것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것은 지극히 개혁신학적인 근거에서 출발하고 있다 할 것이다. 즉 이것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 신앙을 전제로 교인의 기본교권과 교회의 치리교권을 조화하겠다는 결단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 정치원리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정치원리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개혁신학에 근거하고 있으며, 교인들의 기본권과 성직자의 치리교권 사이의 갈등을 조화하여 가장 합리적인 장로회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헌법 정치 제2장은 교회헌법적 교회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는 교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설립되는지를 설명함과 함께 그 교회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교회의 집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하여 설명한다.

교회헌법에 따르면 교회는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즉 교회는 1)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교회요, 2) 예수의 몸이요, 3) 성령의 전이라, 4) 전과 지금과 이후의 만국의 성도니 그 명칭은 거룩한 공회라 한다. 이것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한국의 장로교회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이다62). 이것은 결국 교회의 유기적 관련성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은 교회를 두 가지로 구별되는데, 유형한 교회와 무형한 교회가 그것이다. 이러한 구별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루터이고, 그 후에 많은 개혁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칼빈은 루터의 이러한 구별을 받아들여 교회를 가견교회와 불가견교회로 구별한다. 한국의 장로교회 헌법은 이점에서 칼빈의 용어를 선택하기 보다는 루터의 용어를 따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교회헌법은 교회의 기본법으로 무형한 교회를 규율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무형한 교회를 이상으로 삼고 유형한 교회를 치리하고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헌법은 그 관심을 유형한 교회로 돌리고 있다. 결국 교회의 집회는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집회의 단위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교회의 집회는 지교회에서 이루어져야함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그 이유는 모든 기독교인이 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지교회는 일정한 장소에서 합심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경에 교훈한 모범대로 연합하여 교회의 헌법에 복종하며 시간을 정하여 공동예배를 회집하게 된다63).

한국장로교회 헌법은 교회의 통일성을 무척이나 강조한다. 합리적 이유 때문에 지교회를 설립하고 각 지교회를 집회의 최소단위로 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몸이기 때문에 결국 연합의 과제를 가지고 있음에 대하여 강조한다.


3.3.2. 교회의 직원


한국 장로교회 헌법 제3장은 교회의 직원을 창설직원, 항존직원, 임시직원, 준직원 등으로 구분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직분이 어떤 것이며, 그 직분에 해당하는 자의 권한, 자격 및 직무에 관하여 설명한다.

교회헌법은 “우리 주 예수께서 최초에 이적을 행할 권능이 있는 자로(마10:8) 자기의 교회를 각 나라 중에 선발(選拔)하사(시2:8, 계7:9) 한 몸(고전10:17)이 되게 하셨다”고 기록하며 여기에 해당하는 자를 교회의 창설직원이라고 한다. 창설직원은 다른 말로 비상직원(extraordinary)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덕성함양과 성도의 온전함을 위하여 교회에 세우신 자로 사도와 복음전하는 자 그리고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단회적인 직원들로서 사도시대의 교회에만 존재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 직분들은 이미 끝이 났다64).

그래서 교회의 창설사역을 계승하게 하기 위하여65) 다른 항구적이고 영속적인(ordinary and perpetual) 직원을 세우셨다. 즉 항존직원을 두신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항존직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회의 항존직원은 다음과 같으니 장로(감독) (행20:17, 28, 딤전3:7)와 집사요, 장로는 두 반이 있으니

1.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일컫고

2.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일컫나니 이는 교인의 대표자이다.

3. 항존직의 시무연한은 만 70세로 한다.


즉 한국 장로교회헌법은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를 교회의 항존직으로 설명한다. 물론 헌법에 따라서는 칼빈의 전통에 따라 목사와 교사 그리고 다른 교회의 치리자들과 집사66)를 교회의 항존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67). 그러나 이들은 그 구체적인 이름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항상 있는 직무과 관련하여 항존직으로서 의의를 갖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항상 있어야 하는 직무는 복음전파, 성례의 거행, 그리고 교회의 치리 및 구제와 관련되어 있다68).

흔히 항존직원은 교회에 항상 존재해야 할 통상직원(ordinary and perpetual)을 가리킨다. 여기서 항존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 하나는 교회에 항상 존재하는(perpetual) 해야 한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의 통상적인(ordinary)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하여 항존직원이 없거나 혹은 항존직원의 수가 부족하여 교회의 덕을 세움에 어려움이 있을 경우에 교회의 덕을 위하여 항존직원을 돕도록 세운 직원이 있게 마련이다. 교회헌법은 이를 임시직원이라고 하며, 전도사, 전도인, 서리집사, 권사 등을 여기에 포함시킨다69).

교회헌법은 목사후보생과 강도사70)를 준직원이라고 분류한다. 이 직원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교회 직원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신분과 지위에 있어서 독특한 점을 지니고 있다. 헌법은 이들의 소속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신분적으로는 목사가 아닌 평신도이므로 당회의 관할에 있고, 직무상으로는 목사의 직무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노회의 관할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71).

교회헌법은 이와같이 교회의 직원을 네 종으로 분류하고 각 직원의 임기에 대하여 독특한 규정을 두고 있다. 즉 항존직원은 그 신분상으로는 종신직일 수 있으나 직무상으로는 70세로 직무연한이 한정된다. 그리고 임시직원의 경우에는 70세를 미만으로 그 직임에 임할 수 있다고 설명하므로 사실상 70정년제를 채택하고 있다. 즉 모든 교회의 직무는 70세를 연한으로 한다. 직원의 직무연한을 제한하는 것이 성경적 제도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성경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즉 “성경적”이라는 말을 “성경에 명문으로 기록된”, 또는 “성경에 그와 같은 사례가 있는”이라고 해석한다면 직원의 직무연한을 제한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직무를 수행하는데 연령에 한계를 둔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고령에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사역자로 수고한 사람이 수없이 많이 있고, 똔 성경은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의 뜻에 알맞는” 이라고 이해한다면 교회의 직원의 직무연한을 정한 것은 무조건 비성경적 제도라고 단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본연의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수임자, 즉 교회의 직원들은 그 직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구비해야만 하고, 그것을 판단하는 가장 적합하고 손쉬운 방법이 연령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 않게 건강한 사람이 있고, 나이가 젊음에도 교회의 직원으로서 직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특수한 경우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70세가 되면 활동적으로 일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특히 성직의 귀중한 영역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교회조직의 효율적인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다. 교권의 정체(停滯)와 계획없는 목회자 양성의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이와같은 제도를 통하여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가 완전히 고정된 법칙으로 자리잡는다면 오히려 성경의 원리를 망각하는 결과가 되기 쉽다. 단순히 연령을 조건으로 교회 직원의 직무연한을 제한한다면 정작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직원의 직무연한을 제한하는 것은 70세를 기준으로 하되 개별 직분자의 건강 및 능력을 고려하여 유동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1) 목사직

교회헌법은 목사를 “노회의 안수로 임직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자니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직분이다(롬11:13)”72)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목사가 어떠한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즉 형식적 요건으로 목사는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아야 한다. 안수를 베푸는 주체는 바로 노회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노회의 관할에 속한다. 그는 자동적으로 노회의 회원이 된다. 여기서 안수를 받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수권(授權)에 의하여 교회의 목사로 세움을 받는 표시이다. 결국 노회에 의한 안수식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목사로 임직될 수 없는 것이다. 실질적 요건으로 목사는 다음의 세 가지 직무를 행하는 자이어야 한다. 즉 말씀 선포, 성례의 거행, 그리고 권징의 시행 등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직무는 교회의 3대 표지와 관련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직무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회의 직무 전반을 관장하는 자로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목사직은 이와같이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맡겨져서는 안된다. 교회헌법은 목사의 자격을 말하는데;


목사될 자는 신학을 졸업하고 학식이 풍부하며 행실이 선량하고 신앙이 진실하며 교수에 능한 자가 할지니 모든 행위가 복음에 적합하여 범사에 존절함과 성결함을 나타낼 것이요,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며 외인에게서도 칭찬을 받는 자로 연령은 만 30세 이상자로 한다. 단, 군목과 선교사는 만27세 이상자로 한다(딤전3:1-7)73).


목사가 이상과 같은 자격요건을 갖추었더라도 각자가 가지 은사와 재능은 다를 수 있다. 교회헌법은 이를 인정한다. 그러므로 헌법은 “하나님께서 모든 목사되는 자들에게 각각 다른 은혜를 주사 상당한 사역을 하게 하시나니 교회는 저희 재능대로 목사나 교사나 그 밖에 다른 직무를 맡길 수 있다”74)고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각 지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 종교상 도리와 본분을 교훈하는 목사, 선교사, 신문이나 서적에 관한 사무를 시무하는 기관목사, 기독교 교육 지도자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행정목사, 음악목사, 교육목사75) 등등의 현대적 용어를 수용하지는 못했지만 공동목회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 정치 제4장 제4조에서는 목사의 칭호를 규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목상으로 단순한 목사의 칭호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 그것은 목사의 계급, 또는 목사의 등급을 나누는 것이다. 또한 실제에서 이 규정은 성직계급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한다. 헌법에 규정된 목사의 직분은 결국 위임목사에게 한정된 것으로 나타나고 나머지 칭호로 불려지는 목사들, 특히 부목사는 위임목사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의 성직 계급주의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반해,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여전히 성직계급주의를 헌법규정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2) 장로직

한국 장로교회는 헌법 제5장에서는 치리장로에 관하여 규정한다. 헌법은 먼저 장로를 목사와 협력하여 교회를 치리하는 자76)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협력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협력하다”이라는 말을 “보조하다”(assist)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의 본래의 의미는 “협동하다77)”(associate)라는 의미는 갖는다. 전자의 해석에 의하면 장로는 목사의 직무에 종속된 지위에서 조력자의 역할만 할 뿐이지만 후자의 해석을 따르면 목사와 장로는 동등한 지위에서 서로간의 협조를 통해 교회를 치리하고 다스리게 된다. 이미 교회헌법은 목사와 장로가 그 치리권에 있어서는 동등한 지위에 있음78)을 증언하고 있음을 볼 때 후자의 해석이 더욱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헌법은 치리권에 있어서는 목사와 장로가 동등하지만 장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강도권 앞에 복종해야 하고 조력자(assistant)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79).

한국의 교회헌법은 목사의 직분이 중요한 것만큼 장로의 직분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장로가 되는 자격요건에 각종 제한을 두고 있다. 즉 “만 35세 이상된 남자 중 입교인으로 흠없이 5년을 경과하고 상당한 식견과 통솔력이 있으며 딤전3:1-7에 해당한 자80)”에 한하여 장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자격이 있기만 하면 모두가 장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절차가 필요하다. 즉 일정한 교인들의 지지를 얻어 장로로 피선되어야 하고, 노회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 후, 장로로 안수받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절차가 끝나면 그는 장로로서 그 직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1)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2)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한다. 3) 교우를 심방하여 위로, 교훈, 간호한다. 4) 교인의 신앙을 살피고 위하여 기도한다. 5) 특별히 심방할 자를 목사에게 보고한다81).


3) 집사직

교회헌법 제6장은 “집사직은 목사와 장로직과 구별되는 직분이니82)”라고 규정하므로 집사직의 독특한 지위를 설명한다. 즉 집사는 안수받은 직분, 항존직원이라는 점에서는 목사와 장로와 동일하지만 설교권도, 치리권도 없이 오직 봉사의 의무만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집사의 봉사의 의무는 사실상 봉사권이라고 해야 더욱 바른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직분은 봉사를 위한 특별한 권한을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헌법은 “봉사적 의무는 일반 신자의 마땅히 행할 본분인즉 집사된 자는 더욱 그러하다”83)고 규정하여 집사직은 특별한 봉사의 권한이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이 집사의 봉사권은 목사나 장로의 봉사권에 비추어 전혀 열등한 것이 아니다. 교회헌법은 “집사의 직무는 목사와 장로와 합력(合力)하여 빈핍 곤궁한 자를 권고하며 환자와 갇힌 자와 과부와 고아와 모든 환난 당한 자를 위문하되 당회의 감독 아래서 행하며 교회에서 수금한 구제비와 일반 제정을 수납, 지출한다(행6:1-3)84)”고 하는데, 즉 집사는 봉사권에 있어서는 “목사와 장로와 합력하는 지위”를 갖는다고 한다. 즉 봉사권에 있어서는 목사와 장로와 동등한 지위를 갖고 상호간에 협력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교회헌법은 집사의 봉사권은 “당회의 감독 아래”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봉사권에 있어서 목사와 장로와 동등한 권한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당회의 감독 아래”라는 말은 실제로 집사는 치리권에 있어서 당회의 지도를 받는 자리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즉 집사직은 봉사권에 있어서는 목사와 장로와 동등하며 협력적 관계에 있지만, 여전히 당회의 치리권에 복종해야 하는 종속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3.3.3. 교회의 치리회

교회헌법은 제8장에서 교회정치와 치리회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교회의 치리권은 어떤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회, 노회, 대회, 총회와 같은 각 치리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은 중세기에 교황권의 독단에 대항한 공의회주의 시대를 연상케 한다. 즉 교회의 치리권이 한 개인에게 국한되면 한 개인의 잘못된 생각으로 교회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할 수 없기 때문에 공의회라는 과정을 통하여 전체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교회의 치리권을 개인에게 국한시키지 않으므로 결국 공의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주의 시대에는 단 하나의 공의회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 잘못된 결의조차도 마치 그것이 가장 바른 견해인 것처럼 오해되곤 했다. 그러므로 각급 치리회에 등급을 두고 상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보다 정당한 판단에 이를 수 있도록 했다.

당회와 노회는 매년 1회 이상, 대회나 총회는 매년 1회 회집하고, 모두가 노회적 성질을 가진다. 여기서 노회적 성질을 갖는다는 말은 그 구성에 있어서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며, 그 결정은 전국 교회의 결정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장로교회는 노회적 제도라고 하는데, 그것은 교회행정의 핵심단위가 노회(classis)라는 말이 아니다85). 즉 각급 장로교회의 치리회는 그것이 당회든, 노회든, 대회든, 총회든 장로회(presbytery)로서 목사 장로(pastor)와 치리 장로(ruling elder)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치리회는 각립한 개체가 아니요, 일정한 관할 지역을 갖고86), 서로 연합한 것이므로87), 어떤 치리회의 결정이든지 상급심에 의하여 번복되기까지는 전국교회의 결정으로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 치리회는 국법상의 시벌을 과할 수는 없고, 오직 도덕과 신령상 사건에 대하여 교인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순종하게 하는 것뿐이다. 교회헌법은 네 종의 치리회에 관하여 설명하는데, 당회, 노회, 대회, 총회가 그것이다.


1) 당회

한국 장로교회 헌법에 의하면 당회는 지교회 목사와 치리장로로 조직된다. 물론 목사는 노회에서 파송되고, 장로는 지교회 교인들의 대표이다. 교회헌법은 세례교인 25인을 기준으로 장로를 세울 수 있도록 하여 비례대표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같이 조직된 당회는 장로과반수와 목사1인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 이때 당회장은 반드시 노회에서 위임을 받은 목사가 된다. 다만 부득이한 경우에 한하여 당회는 목사없이도 재판사건과 중대사건 외의 사무는 처리할 수 있다.

교회헌법은 당회의 직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교인의 신앙과 행위의 총찰, 2) 교인의 입회와 퇴회 관리, 3) 예배와 성례거행, 4) 장로와 집사의 임직, 5) 각 항 헌금 수집하는 일의 주장, 6) 권징의 시행, 7)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며 각 기관을 감독, 8) 노회에 총대를 파송하며 청원과 보고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88).


2) 노회

한국 장로교회 헌법에 의하면 노회는 일정한 지방 안에 모든 목사89)와 각 당회에서 총대로 파송된 장로90)로 조직되는데 단 해당 지역 내에 21 당회 이상이 있어야 한다. 현대교인들은 점차 개교회중심이 되어가고, 특히 한국장로교회는 개교회중심주의적으로 운영되어 왔기 때문에 노회 자체가 필요성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헌법은 노회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나뉘어 여러 지교회가 되었으니(행6:1-6, 9:31, 21:20) 서로 협의하며 도와 교회도리의 순전을 보전하며, 권징을 동일하게 하며, 신앙상 지식과 바른 도리를 합심하여 발휘하며, 배도(背道)과 부도덕함을 금지할 것이요, 이를 성취하려면 노회와 같은 상회가 있는 것이 긴요하다” 고 한다. 개별 지교회의 목회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지극히 이기적이다. 그것은 전체 하나님 나라의 균형있는 발전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는 자유정치를 취하고 있는 교회들과는 달리 교회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가 연합하여 전체 하나님 나라의 성숙을 도모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교회연합의 한 형태인 노회가 필요한 것이다.

교회헌법은 당회와 달리 노회의 직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1) 노회는 그 구역에 있는 당회와 지교회와 목사와 강도사와 전도사와 목사후보생과 미조직 지교회를 총찰한다. 2) 노회는 헌의와 청원과 상소 및 소원과 고소와 문의와 위탁판결의 접수하여 처리하며, 재판건을 재판국에 위임 처리하게 할 수 있고, 상소건 등은 상회에 보낸다. 3) 목사후보생, 강도사, 목사의 임직, 이명, 권징 등을 관리한다. 4) 지교회를 시찰한다. 5) 지교회의 설립, 분립, 합병, 폐지와 당회를 조직하는 일, 그리고 목사를 청빙하는 일 등을 지도 방조한다. 6) 청원과 헌의를 상회에 올려보내고, 상회에서 내려보내는 공한을 접수하며 그 지휘를 봉행한다. 결국 노회는 일정한 지역의 지교회와 목사를 돌아보며 전체 교회와의 연합을 도모하는 매개적 기구인 것이다.


3) 대회

한국 장로교회는 한국 내에 대회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재미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미주대회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한국 영토 내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아마도 이 규정은 미국 장로교회의 헌법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인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대회는 일정한 지방안에 있는 노회들을 관할하는 회를 말하고, 그 구성원은 역시 목사와 장로이다. 그리고 총회와 마찬가지로 매년 1회 회집한다. 다만 총회와 차이가 있다면 그 관할 영역이 총회보다 지협적이고, 총회의 관할을 받는다는 것 뿐이다. 또한 대회는 노회와 달리 총회에 총대를 파송하지 못하고 총회에 헌의와 청원을 제출할 수 있을 뿐이다.


4) 총회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총회를 가리켜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모든 지교회 및 치리회의 최고회(最高會)”라고 한다. 여기서 “최고 치리회”라는 말은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원본인 웨스트민스터 헌법에는 없는 표현이다. 거기에는 다만 “전국회”(National Assembly)라고 하였을 뿐이다91). 즉 이 말은 총회는 일정한 지방의 치리기관이 아니라 전국적인 치리기관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는 총회를 가리켜 최고 치리회라고 한다. 이것은 전국적인 치리회라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총회의 결정은 번복할 수 없고, 전국교회는 반드시 총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92).

총회 역시 장로회이므로 그 구성원은 목사와 장로가 된다. 즉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와 장로가 총회의 구성원이 되는데 이때 목사와 장로의 수는 같다93). 그리고 총회는 노회의 과반수, 목사 장로 각 과반수가 출석하여야 개회된다. 그러므로 총회는 각 노회의 의견을 가장 적절하게 반영할 수 있고, 목사들의 의견과, 장로들의 의견을 편중됨이 없이 반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조직된 총회는 독특한 직무와 권한이 있는데, 한국 장로교회 헌법에 의하면 총회는 소속 교회 및 그 치리회의 모든 사무와 그 연합관계를 총찰하며, 하회에서 합법적으로 제출하는 헌의와 청원과 상고와 소원과 고소와 문의와 위탁판결을 접수하여 처리하고, 각 하화록을 검열하여 찬부를 표하고 산하 각 교회간에 서로 연락하며 교통하며 신뢰하게 한다.

이를 위하여 총회는 교회헌법을 해석할 전권을 갖고, 전국 교회를 통솔하며, 본 총회와 다른 교파 교회간에 정한 규례에 의하여 교통한다. 이것은 총회가 전국 교회에 대한 재판권과 입법권과 행정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총회는 교회정치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일부 학자는 총회를 상회라고 하는데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은 총회가 결코 상회가 아니며 동등한 치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헌법은 명백히 총회가 상회임을 설명한다. 총회는 모든 치리회 뿐만 아니라 전국 교회의 재판권, 입법권, 행정권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하회(노회, 당회)에 대하여 규제하고 명령하며, 또 각종 보고를 받으며, 하회의 활동사항에 대하여 검열한다. 즉 노회나 당회는 총회의 감독을 받아야 하며, 총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하회라 아니할 수 없고, 총회는 모든 교회적 사건의 최고 결정권을 갖는 치리회이므로 상회라 할 수 밖에 없다.


3.3.4. 교회헌법의 개정

성경은 불변적인데 반하여 교회헌법은 가변적이고, 성경은 신법임에 반하여 교회헌법은 인간이 제정한 인정법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달린 교회헌법은 수정 및 개정을 할 수 있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교회헌법에 대하여 개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을 개정함에 있어서 헌법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개정의 경중을 설명한다. 즉 신조와 요리문답을 개정하고자 할 때와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변경하고자 할 때를 구분하고 전자의 경우에는 노회 3분의 2와 모든 투표수의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야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보다 조금 쉽게 노회 과반수와 총 투표수 3분의 2의 찬성을 얻으면 개정할 수 있는 것으로 하고 있다.


3.4.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주요신학사상


“장로교회 헌법의 중심 신학사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개혁파 정체의 근본원리는 무엇이냐?” 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생각이 있다. 그 하나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취하고 있는 장로회 정치 8 원리94)이고, 다른 하나는 화란의 개혁파 5 원리95)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상호 보완적 성질을 가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미 장로파의 정치8원리이든지, 화란 개혁파의 5 원리이든지 그 중심에는 칼빈주의 개혁신학이 기초하고 있으며, 그것이 교회 정치와 관련하여 다음의 세가지 신학적 원리로 표현된다고 할 것이다. 즉 1) 하나님 주권 사상, 2) 만인제사장 원리, 3) 장로회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장로회 헌법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며, 한국 장로교회 헌법 역시 이 세 가지 원리를 반영하고 있다.


3.4.1. 하나님 주권사상


장로교회란 칼빈주의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을 일컫는 말이다96). 다시말하면 개혁신학에 기초를 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신학은 1)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2)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3) 오직 그리스도만으로(Solo Christo), 4)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 5) 오직 신앙으로(Sola Fide) 라는 슬로건을 모토로 하는데97),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주권사상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예정론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칼빈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배경을 가진 한국 장로교회는 하나님 주권사상을 받아들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98).

교회헌법은 하나님 주권사상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미국장로회 헌법은 그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하나님의 주권이란 유일의 영원불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만이 충분히 아시는 바 완전히 지혜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사랑하시는 목적을 위하여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현재있는 것이나 장차 있을 것이나 그 전체를 포함한 전 우주를 절대로 친히 지배하시고 통치하심을 의미한다.”99) 결국 하나님이 전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하나님 통치사상이요, 교회정치의 실질적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다스리시고, 그 통치의 주권자가 되신다는 말이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 역시 하나님이 교회의 통치자이심을 증언한다. 즉 교회헌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을 증거한다100). 또한 교회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교회”101)라고 한다. 이것은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뿐이시요, 어느 누구도 교회의 주인일 수 없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은 애매한 말로 하나님 주권사상에 혼동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총론에서 다음과 같이 장로회 정치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장로회 정치-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102)


한국 장로교회는 장로회 정치를 택한 교회임을 설명하고, 그 원리가 바로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에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사상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개혁신학은 분명히 하나님 주권사상을 증거하고,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의 터 위에 있다고 하면서 교회헌법의 총론이 “교인에게 주권이 있는”, 다시 말하면 교인주권사상을 강조하고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일 뿐이다. 왜냐하면 교회헌법은 장로회 정치가 “가장 성경적인 정치원리”103)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가 택하고 있는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 교인들의 양심적 투표104)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믿는 정치라는 말이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이 말하는 하나님 주권 사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개혁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 주권사상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넘겨버리는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책임있는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예정론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과 동시에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105). 교회헌법 역시 “진리와 행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책임있는 행동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교회헌법에 의하면 한국 장로교회는 책임있는 신앙인의 양심적 결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주권을 행사하신다고 믿는 하나님 주권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할 것이다.

하나님 주권사상은 교회헌법에서 두가지 양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성경중심사상이요106),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전적부패와 무능함이다.

1)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이러한 성경중심주의를 취하고 있다. 즉 “신구약 성경107)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108)라고 고백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모든 신학적 배경이 바로 이러한 고백 위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완전한 법은 성경이며, 모든 규정들은 성경적 원리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신조에만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대요리문답 제3문과 소요리문답 제2문109)에도 신,구약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임이 강조된다. 또한 헌법의 각 규정들은 교회의 직원들로 하여금 임직시에 신,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유일한 법칙임을 믿는다고 서약하게 하고110), 이 서약이 있을 때에만 교회의 직원으로 임직하게 된다.

재판국의 설치에 있어서도 목사의 수를 장로의 수보다 항상 꼭 한 사람 더 많게 한다111). 이것은 한국장로교회가 말씀 담당자의 의견을 존중하므로 성경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목사와 장로의 불평등을 시사하는 것이요, 교회정치의 현장에서 목사의 발언권을 강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그러한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하더라도, 그 결과 한국 장로교회가 교권주의로 흘러갔다 하더라도 교회헌법이 재판국 설치에 있어서 목사의 수를 더 많게 한 것은 성경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모든 문제를 목사와 장로의 동수로 구성된 회의에서 처결해야 한다고 하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근거가 없어지고, 비성경적 다수의 횡포가 교회 안에 만연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은 재판사건에 있어서 찬반이 동수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되 보다 성경적이 결정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목사의 수를 더 많게 하면 성경적인 결정이 나올 수 있느냐에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성경에 관하여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이므로 평신도 장로보다 더 성경적인 결정을 내릴 개연성이 높다. 그러므로 재판국을 설치함에 있어서 목사의 수를 장로의 수보다 하나 더 많게 한 것은 성경을 존중하는 신학사상이 교회의 권징조례에 반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개혁신앙은 이러한 말씀중심의 사상에서 목사를 하나님의 대표자로 상정한다112).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그 말씀을 토대로 교회를 치리한다. 또한 하나님을 대표하여 성도를 축복하고 모든 목회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인 것이다. 교회헌법은 목사의 이러한 지위를 인정하고, 헌법에서 목사의 발언권을 우위에 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는 성경중심주의를 토대로 하여 하나님 주권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 주권사상은 인간의 전적부패와 무능을 나타낸다. 한국 장로교회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을 표현하므로 하나님 주권사상을 시사한다.

교회헌법은 정치의 필요를 이야기한다. 즉 교회를 치리함에는 명백한 정치와 조직이 필요하다113)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행정의 효율성을 위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 저변에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교회정치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5대 강령을 통하여 인간의 전적부패와 전적무능을 강조한다114).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정치는 연약한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구하는 도구인 것이다.

교회헌법은 인간의 무능함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은 선한 양심을 얻는다. 물론 이 양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교인들은 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교회를 보존, 유지하는 것이다. 특히 교회헌법이 교회에서 주권을 행사를 세례교인에게 한정한 것115)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들의 양심만이 하나님의 주권을 발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이 인간을 부패한 자로 여기고, 세례교인에 한하여 교인의 권한을 주는 것은 하나님 주권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3.4.2. 만인제사장주의


역사적으로 만인제사장설은 루터에게서 기원한다. 루터는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제사장적인 나라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 세례를 통하여 축성된 사제들이다”(벧전2:9)116) 라고 주장하므로 사제직만이 신성하다는 로마교회의 관념을 부정하고 모든 소명의 신성함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담을 깨고,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다. 즉 우리는 말씀과 성례에 관하여 동일한 권세를 갖는다고 말하므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본질적인 차이를 부인했다117). 루터가 모든 믿는 자의 제사장됨을 강조한 것은 루터에게 있어서 모든 믿는 자들은 제사장으로서 동료 믿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118).

보편적 사제직 또는 모든 믿는 자들의 사제직 교리는 루터의 개혁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었다119). 보편적 사제직에 대한 루터의 진술은 교회에 대한 그의 근본적 개념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것이다. 복음은 교회의 진정한 보고요, 그 생명의 원천이다. 복음은 모든 진정한 신자의 소유물이다. 그리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은 복음에 의하여 그것의 이중형태인 말씀과 성례전을 위한 사제들이 된다. “모든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며 하나님에 의하여 사제가 되도록 가르침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120).”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의 특별한 목회적 집단의 필요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는 특별히 공적인 질서를 위해서 이러한 목회적 집단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루터에 의하면 목회사역의 기본적인 두 가지 척도가 있는데, 하나는 세례에 기초하여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공통의 사역이고, 다른 하나는 사제와 감독 모두를 포함하는 말씀과 성례의 특별한 사역이다. 루터는 실제로 두 개의 제사장직을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시편82편의 주석에서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목회자는 아니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인이요 제사장이라는 것에 넘어서서 그의 책임으로 맡겨진 직분과 사역의 분야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121). 또한 루터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한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제라고 부르는 이들은 우리의 이름으로 활동하도록 우리 가운데서 선택된 사역자(Diener=섬기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제직은 우리의 사역이다.” 라고 말했다122).

결국 루터의 만인사제주의는 중세기의 성직에 의한 계급적인 인식과 구조를 바꾸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기독교인의 평등을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평등은 단순히 수평적인 동등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인 사역으로서의 평등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섬길 수 있는 자격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헌법적인 측면에서 이해된 만인제사장설은 1) 모든 교인은 교회정치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요, 2) 모든 교인은 은사에 따라 직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요, 3) 모든 교인은 평등하게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한국 장로교회는 총론에서 민주정치를 표방하고 있다. 즉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고 특별한 잘못이 없는 자는 모두가 교회헌법적 권리를 갖는다는 말이다. 즉 공동의회에서 세례를 받고 일정한 기간동안 교회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므로 무흠하게 되면 장로나 집사로 선출될 수 있고123), 또 지교회의 목사를 청빙할 수 있으며124), 교회의 직원을 선거할 수 있다125). 그뿐 아니라 공동의회의 회원으로서 교회의 일반적인 사항에 대하여 알 권리126)를 갖게 된다. 여기에는 학벌이나 문벌, 또는 성별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물론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여자가 항존직원이 되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이것은 만인제사장설에 대한 예외라 할 것이다. 물론 신학적인 논쟁이 많이 있다. 그리고 현대적 경향은 여성들에게도 모든 직분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27).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하여는 만인제사장설과 성경의 문구해석의 간격을 어떻게 좁혀야 할지에 대한 보다 많은 신학적 연구가 필요된다고 할 것이다.

아무튼 한국 장로교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인이 투표권을 가지고 피선거권을 가지며128), 개별적인 교회운영에 관한 보고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바로 한국장로교회가 만인제사장설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바로 모든 믿는 자는 서로 섬기는 자이어야 함을 설명한다. 즉 모든 교인은 섬김의 직분을 가진 자이며, 특히 은사에 따라 평등하게 직분은 받을 수 있음을 설명하다. 즉 헌법은 “봉사적 의무는 일반신자의 마땅히 행할 본분인즉”129)이라고 규정하고, 또 “교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분량을 따라 일할 특권이 있다”130)고 한다. 이것은 모든 교인은 제사장적 기능을 가지고 교회를 섬길 수 있고, 또 교인을 서로 섬겨야 하는데, 이러한 직무에 어느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것이다. 즉 “교인은 노력과 협력과 거룩한 교제로 교회발전에 진력하며 사랑과 선행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131)는 것이다. 모든 교인은 이와같은 섬김의 직무를 가지고 있다.

한편 교회헌법은 특별한 사람에게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주어 교회를 섬기게 하는데 그것은 은사에 따른 것이다. 결국 은사에 따른 직분론은 이중제사장직은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 헌법이 단순히 평신도주의만을 취하지 않고, 성직의 신성함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만인제사장의 원리를 바르게 수용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3) 한국 장로교회는 만인제사장설에 의하여 모든 교인이 예배에서 평등함을 강조한다. 헌법적 규칙은 무흠입교인은 성찬에 참여할 권한이 있다132)고 하고, 예배모범은 “출입하는 자에게 인사···하지 말 것이요”133) 라고 한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하나는 모든 믿는 자는 예배에 참여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믿는 자는 예배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 카토릭에서는 교인들이 성찬에 불완전하게 참여한다. 즉 그리스도의 떡과 잔에 모두 참여하지 못한다. 사제만이 잔에 참여하고, 교인들은 덕에만 참여할 수 있다. 즉 예배에 완전하게 참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결국 만인제사장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성찬에 참여할 권한을 인정한다. 그 말은 완전한 예배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한편 모든 교인은 예배에서 평등하다. 웨스트민스터 헌법이 생겨날 당시에는 신분상에 차이가 있었다. 즉 귀족이 있었고, 평민이 있었다. 그렇다면 귀족과 평민이 한 자리에서 예배했을 것이다. 이 때 왕이나 귀족이 예배실로 들어오면 평민이나 하인은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을 것이다. 이것은 만인제사장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법에 인사하지 말라고 규정하여 존경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현대 교회가 예배시 성도의 교제를 위하여 서로 인사하는 것은 예배모범에 어긋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결국 예배모범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천명하는 것이다. 사제도, 왕도, 귀족도, 평민도, 천민도 평등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모든 교인을 형제로 본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이해한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만인제사장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의 만인제사장설은 자유정치가 주장하는 모든 성도의 절대적 평등을 주장하므로 극단적 평신도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반대하고 이중만인제사장설을 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3.4.3. 장로회주의(Presbyterianism)


한국 장로교회는 헌법 총론에서 장로회 정치를 선언하고 있다134). 그것은 교황정치(敎皇政治)와 감독정치(監督政治)에 상반되는 대의적(代議的) 공화정치체제인데135), 이것을 주도하는 정치사상이 바로 장로회주의이다.

장로회주의는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유태인 회당, 산헤드린 공회를 거쳐 사도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 공회를 비롯하여 니케아(Nicea) 회의 등으로 연속성을 이루어왔다. 특히 씨프리안(Cyprian)은 공의회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1518년 루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력 있는 교회정치의 모습은 대의회제도라고 하였고, 에라스무스(Erasmus)는 공의회 체제를 제안하였으며, 부쳐(Bucer)는 총대의회(General Council)를, 멜랑히톤과 칼빈은 성도의 연합(Christian Union)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가 대의회 정치(Council Government)의 개념을 지닌 교회정치를 고조하였다.136) 칼빈도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장로회주의를 설명하는데, 즉 바울 서신에서 나타나는 프로스뷰테리온(πρεσβυτεριον)과 프레스뷰테리움(πρεσβυτεριυμ), 콜레기움(colleguium)과 세니오룸(seniorum)이란 어휘에 준하여 장로회주의를 재천명하였다137).

장로회주의라는 어휘가 사용된 때는 1644년으로 죠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가 쓴 리크리미네이션(Recrimination)에서 처음으로 쓰여졌다138). 그후 장로교를 논할 때마다 정치사상면을 다룰 때면 반드시 장로회주의라고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장로회주의의 신학사상과 정치체제와 정치방침을 통하여 장로회주의라고 한다139).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사상은 장로교회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감독주의, 회중주의 교회들의 신경들 속에 반영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장로회주의를 개혁주의와 동일시하는 것, 또는 장로교회의 신학사상과 장로회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장로회주의를 칼빈주의적 교리나 청교도적 예배의식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면 틀린 것이다140). 그러므로 장로회주의는 단지 교회정치의 형태(The Form of Church Government)에 관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141), 그것은 교회정치의 다른 두가지 형태 즉 감독주의와 회중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142) 1) 성직자 평등, 2) 장로에 의한 정치, 그리고 3) 교회법원을 통한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정치의 형태라는 보아야 할 것이다143).


3.4.3.1. 성직자 평등주의


장로회주의는 모든 장로(Presbyter)의 평등을 주장한다144). 이것은 만인제사장주의의 새로운 표현이다. 특히 장로회주의는 모든 성직자의 평등을 강조한다. 아마도 이것은 강도권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감독주의를 채택한 교회 - 로마 카톨릭 교회, 희랍정교회, 성공회 등 - 은 성직자의 계급적 차이를 인정한다145). 성직자를 조제(Diacon), 신부 혹은 사제(Priest), 주교 혹은 감독(Bishop)으로 나누어 계급화한다. 이 제도 아래서 사제는 각 교회에서 설교, 기도, 성례를 맡아보고 사죄의 선언을 한다. 조제는 사제의 보조자이다. 주교는 일정 구역 내의 교회와 신부, 조제를 관할하고 임직과 견신을 맡아보고, 교구통치의 임무를 맡는다. 이것은 상호간에 평등한 지위에서 직무를 분할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계급적 구조 속에서 조제는 사제에게, 그리고 사제는 주교에게 종속되는 관계인 것이다.

감독주의가 성직의 위계성을 인정하는 근거는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장로와 감독이라는 용어가 서로 다른 직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로회주의자들은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직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며, 다만 쓰임에 있어서 다르게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즉 장로는 연령, 권위, 지혜에 관해서 쓰는 말이고, 감독은 신자들의 영적 지도라는 기능을 가리켜서 한 말146)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회주의자들은 성직의 위계성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장로회주의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직자 평등주의를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므로 어느 누구도 스스로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 대신에 교회를 다스리거나 인간을 속죄하고 인간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147). 그리스도만이 교회에서 높임을 받으셔야 하고 인간은 다만 그분의 통치를 받을 뿐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와 생명적 유기적 관계를 지니고 스스로 생명을 갖고 교회를 채우시고 교회를 영적으로 다스리신다는 의미에서 유기체적인 머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곧 제도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그의 교회를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신다148).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교회의 머리로 교회를 주관하지 못한다. 로마 카토릭에서는 교황이 교회의 머리가 되고, 감독정치를 취하는 곳에서는 감독이 교회의 머리가 되지만 장로교회는 예수님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가 동일한 지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성직자 평등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즉 교회헌법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149)이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사람도 교회의 주인일 수 없으며, 교회의 주권자이지 못하다. 그러므로 모든 성직자는 다만 하나님의 일군일 뿐이다. 여기에 높고 낮은 계급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의 차이가 있듯이 강도, 치리, 봉사로 구분된 직무를 수행할 직분자가 있을 뿐인 것이다.

교회헌법은 어떤 사람의 강도권은 누군가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의 원리를 먼저 해석하고 헌법에 나타난 규정들이 갖는 의미가 실제로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죤 맥퍼슨(John Macpherson M.A)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강도권의 독립성을 주장했다. 즉


그러나 신약성경은 복음에 대한 설교가 최상위의 교회직분이 가져야 하는 기능이라고 한다. 이러한 기능이 수행되는 곳에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종속될 수 없는 직분을 생각하게 된다. 치리와 행정의 기능들은 어떠한 교회직분자에 대하여도 이 단순한 설교자보다 우월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장로회주의는 복음에 대한 설교를 위하여 안수받은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의 계층적 평등을 주장한다.150)


그렇다면 한국 장로교회 헌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강도권은 강도사로 인허되는 그 순간에 취득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고, 이 때부터 강도사나 목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증거할 수 있게 된다151)고 보아야 한다. 즉 목사로 임직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강도사나 목사가 다른 목사에게 종속되어 설교의 내용에 간섭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장로회주의의 성직자 평등원리에 맞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의 실제에서 목사와 목사간에 불평등이 발견된다. 부목사의 담임목사에 대한 종속관계가 부목사로 하여금 담임목사의 모든 것을 재생하도록 하고 있다. 비록 헌법이 강도사나 부목사의 치리권을 제한하고 있다손치더라도152) 담임목사는 그들의 강도권 내지 말씀선포권 까지 침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강도권이 강도사 자격을 얻은 사람이면 모두 갖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면서도 그것이 어떠한 경우에게 다른 사람의 권위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치리권의 실재를 가지고 강도권을 침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헌법정신에 위배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성직자평등주의와는 다른 차원이지만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목사와 치리장로는 동등한 치리권을 주장한다153). 그리고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동등한 봉사권을 주장한다154). 이것은 사람마다 갖는 은사의 차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말씀을 설교하는 직무를 더 받고, 어떤 사람은 치리하는 직무를 더 받고, 또 어떤 사람은 봉사하는 직무를 받지만, 그 받은 직무의 영역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이러한 평등의 원리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장로보다 높고, 장로는 집사보다 높다는 생각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개혁교회가 새로운 교황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3.4.3.2. 장로에 의한 정치


장로회주의는 장로(Presbyter)들에 의해서 치리되는 교회정치의 한 형태이다. 여기서 장로라는 말은 프로스테로스(προστερο?)라는 말에서 기원한다155). 성경에는 장로를 지칭하는 다양한 말들이 있다. 특히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장로에 대한 이해는 두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장로라는 말과 감독이라는 용어이다. 이 두 용어는 서로 같은 직분을 말하는 두 가지 다른 용어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두 직분인지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감독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체계에서는 장로와 감독은 엄연히 다른 것이며, 장로는 감독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결국 장로와 감독의 엄격한 구분으로 감독의 지위를 높이려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설명에 따르면 장로와 감독에 대한 다른 설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로와 감독을 그 지위와 자격에 있어서 같은 것임을 설명한다. 장로회 정치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같은 직분을 말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그 용어를 장로라는 말로 통일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개혁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한 것이며, 비록 장로와 감독 사이에 어떤 계층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교황주의가 말하는 사제와 감독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156).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장로는 크게 둘로 설명되는데 그 하나는 치리장로(Ruling Elder)요, 다른 하나는 치리와 강도(Teaching)를 겸하는 장로, 즉 목사이다157). 이들을 통하여 교회의 치리권이 행사된다. 즉 교회의 치리와 권징은 교회의 치리를 위하여 안수받은 장로들을 통하여 교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집행된다. - 장로교의 특징적 제도인 치리장로직은 기독교 교인들의 권리를 간과하지 않는다. 그것은 치리와 정치의 직분이 성경적 위임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직분을 가진 장로들은 교인들의 대표이다. 그 직분의 기능을 수행하는 직분자이다. 그들은 단순히 교인들의 대표자만은 아닌 것이다.158) - 그리고 그 치리권은 개인으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치리회, 즉 당회, 노회, 총회 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간접민주정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인의 의사를 장로들이 반영하는 대의민주제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대의제이다. 왜냐하면 대의제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대표가 선출되어야 하는데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종신대의제159) -한 번 장로면 죽을 때까지 장로다 - 를 따로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성직계급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대의제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현대의 정치의식에 따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종신대의제를 택하기 보다는 일정한 임기를 두고 그 기간동안 교인의 의사를 대변하는 대표로서의 역할을 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시무임기가 끝나면 다시 교인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지 검증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헌법은 그 규정에 치리장로의 임기를 규정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권고 사항이며 실제에 있어서 장로의 임기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

장로교회가 택하는 대의제는 본질적으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즉 치리장로의 치리권(교인의 기본권을 대변하는 치리권)과 목사장로의 치리권(강도권에 기초한 치리권) 사이에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그러므로 장로회주의는 성직자의 치리권과 평신도의 기본권을 서로 동등하게 하며, 또한 이를 상호 견제케 함으로써 그 어느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건전한 발전과 부흥을 도모하는 정치형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로회주의는 교인의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는 성직자의 치리권을 배제하고 성직자의 치리권을 인정치 않는 교인의 기본권을 배제한다. 이것은 장로회 정치의 원리가 양심의 자유 원리를 인정치 않는 교회의 자유 원리를 배제하며, 교회의 자유 원리를 인정치 않는 양심의 자유 원리도 배제하는 것과 같다.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는 치리권은 제도적으로 성직자의 부패와 횡포를 부르는 온상이 되고, 치리권을 인정치 않는 기본권은 제도적으로 평신도의 타락을 가져오게 하는 죄악의 온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양심의 자유원리와 교회의 자유원리도 꼭 같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160).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장로를 교인의 대표라고 하며 치리기관에서 교인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주체로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목사가 전횡적으로 치리권을 휘둘러 교인들의 양심의 자유가 억압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흔히 장로의 치리권을 목사의 치리권과 동등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정답이다. 그러나 그 기원에 차이는 있다. 즉 목사의 치리권을 말씀에 기초한 치리권이요, 장로의 치리권은 교인들의 기본권, 즉 양심의 자유를 최대한 구현하도록 하는 차원에서의 치리권이다.

장로교회는 이러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의하여 교회를 효율적으로 치리한다. 그결과 감독주의가 갖고 있는 폐단도 극복하고, 자유정치가 갖은 약점도 보완하게 되는 것이다.


3.4.3.3. 삼심제에 의한 교회연합


장로교회는 분리주의집단이 아니다. 한국장로교회는 근본주의적 경향 때문에 간혹 분리주의로 비쳐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연합을 추구하는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수 많은 분열의 역사를 안고 있지만 또한 부단히 연합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 그 반증이다.

그렇다면 교회헌법은 한국장로교회가 어떻게 교회연합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헌법은 “예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성경이 교훈한 모범대로 연합하여”161) 지교회를 이룬다고 하여 교회연합의 기초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연합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삼심제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162). 물론 진리와 행위와의 관계원리는 자율적인 최선책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자율적인 방비책은 무능하고 무의미하므로 장로회 정치는 제도적인 최선책으로 삼심제를 두고 있다. 자율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는 자라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삼심제를 통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163).

삼심제는 당회의 치리에 불복이 있으면 노회가 그것에 대하여 치리권을 행사하고, 또 노회의 치리에 불복이 있으면 총회가 그것을 치리하여 최종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교회의 통일성에 신학적 기초를 두는데, 교회는 하나의 교회이므로 그 하나됨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하나됨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나 지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한 것처럼 전세계적인 통일된 유형교회를 지향하는 것은 사리에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국가, 언어, 공간과 수의 상황에 의하여만 조건지워진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또는 같은 한민족(韓民族)이라는 조건하에서 하나의 교회로 간주된다.

이러한 하나됨의 관념은 교회법정의 교류로 대표되는 관계와 같은 수단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통일을 나타내는 가장 합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념을 실재화하기 위하여 당회에 우선하는 것으로서 노회의 설립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러 개의 노회는 다시 하나의 총회를 이루고 당회와 노회의 상회로서 그것들을 감독한다.164)

그러므로 한국의 장로교회의 치리 권한은 첫째로 각 지교회의 당회에 있다. 이것은 장로가 각 지교회의 회중에 의해 직적 선거를 치루고 임명되기 때문이다. 상회인 치리회의 권한은 이 각 지교회의 당회에서 위탁된 것이고 각 지교회는 자치적 공동체로서 완전한 권능을 갖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자치 공동체로서 각 지교회는 서로 연합을 결성하고 교리와 정치의 일치를 표명해야 하고, 이러한 것들을 통치하고 교회회의는 단계적으로 구성된다165). 그것이 바로 당회(Session), 노회(Classis), 대회(Synod), 총회(General Assembly)인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그 헌법에 이와같은 조직을 이미 갖추고 있다. 그리고 당회를 기초로 하여 연합적 조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장로교회는 교회의 속성을 가견교회 속에서 표현하려고 한다. 특히 삼심제는 교회의 연합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무능함을 반영한다. 인간은 오류가 있는 존재이므로 한 번의 판결로 완전한 결정을 내릴 수 없고, 부패한 양심이 판결을 구부러지게 할 수 있음을 감안하여 보다 최대한 객관적인 판결을 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166).


3.5. 요약 및 평가


한국의 장로교회는 헌법을 통하여 장로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물론 이 장로회주의는 단순히 장로들에 의한 정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은 장로회주의를 가장 성경적인 제도로 받으며, 모든 교인들의 주권이 장로들로 구성된 치리회를 통하여 발현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교회헌법은 단순히 교회정치만을 다루고 있지 않고 신조와 요리문답, 그리고 교회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 등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교회헌법이라고 하면 교회정치에 관한 규정들을 가리키는 것이 통례이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정치에 관한 헌법의 규정들을 문구해석을 통하여 교권획득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향을 낳게 했다. 이것은 교회헌법의 본질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교회헌법은 성경과의 관련 속에서, 신조와 요리문답, 또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진리와의 관련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가 교회헌법을 말하면서 신조와 요리문답, 그리고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대개의 경우 교회헌법을 교회의 조직과 직무 및 교회 문제에 관하여 실제적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보고, 교회정치와 관련된 부분은 헌법의 핵심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헌법의 정치편을 협의의 교회헌법이라고 부른다.

헌법의 정치편은 공교회가 고백하는 교회론을 실제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여기에는 교회의 일치와 거룩에 관한 내용을 규정하고,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명하면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일치와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지역에 세워져 있는 지교회는 그 몸의 지체가 된다. 그러므로 각 지교회는 서로 연합해야 하고, 일치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거룩한 성도들의 회(會)이므로 거룩한 공회인 것이다. 즉 교회는 거룩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교회의 일치와 거룩의 필요는 결국 교회정치를 요구하게 되고 각 치리회를 통하여 보다 실제적이도록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교회의 치리회를 치리권을 가진 장로(목사와 치리장로)들의 모임으로 인식한다. 즉 모든 치리회는 노회적(presbyterian) 성질을 갖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어떤 치리회의 결정이든지 전국교회에 유효한 결정으로 받아들인다.

교회헌법은 치리회를 넷으로 설명한다. 즉 당회(session), 노회(classis), 대회(synod), 총회(general assembly)가 그것이다. 이 각 치리회는 직무와 역할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당회는 지교회를 치리하는 조직으로 지교회의 신앙과 행위에 관하여 치리하고 다스린다. 그리고 노회는 일정한 지역 안에 있는 목사들과 지교회들에서 총대로 파송된 장로들로 구성된 치리회로 각 지교회의 사무를 보고받고, 미조직 교회를 돌아보며, 각 지교회를 감독하는 치리회이다. 대회는 일정한 지역의 몇몇 노회에서 파송된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나 실제에 있어서 국내에는 대회가 존재하지 않고 재미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미주대회가 있을 뿐이다. 총회는 전국에 있는 노회의 총대로 구성되어 전국교회 및 모든 치리회의 최고 기관이 된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이런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신학사상으로는 일반적으로 장로교회가 수용하는 신학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개혁신학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 주권사상과 종교개혁의 위대한 모토였다. 만인제사장주의, 그리고 성경적 원리를 정치적 실제에 반영한 장로회주의(presbyterianism)가 그것이다. 특히 장로회주의는 교회정치의 핵을 이루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즉 1) 성직자 평등주의, 2) 장로에 의한 치리, 3) 삼심제에 의한 교회연합 등이 그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 헌법은 그 정신에서 이러한 사상을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장로회주의를 가장 성경적인 정치제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한국의 장로교회 헌법적 실재는 그 주된 신학사상에 맞지 않는 경우가 없지 않다. 즉 하나님 주권사상도, 만인제사장주의도, 장로회주의(Presbyterianism)도 망각한 채 개교회주의라는 기형적인 정치형태를 낳았다.

장로회주의는 하나님 주권을 주장하고 있고, 헌법의 실제적 규정에서도 하나님 말씀의 우위를 강조하는데, 그 권위를 최상의 것으로 인정하는데 실제에서는 왜곡된 교인주권사상으로 전락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교회헌법의 구체적 규정이 교인주권을 말하고 있고, 많은 학자들을 통하여 장로회주의의 장점이 교인주권사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주권사상을 배제한 채 사용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주권이 발현되는 방법을 교인들의 의사표시로 확인한다는 것일 뿐이다. 또는 하나님의 주권적 요구가 “교인뿐 아니라 외인의 칭찬을 듣는 자”를 교회의 직분자 또는 치리권자로 세우도록 하기 때문에 투표라는 방식을 사용해서 교인들의 의사를 묻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는 헌법의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적인 정치”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여 진정한 장로회주의에 반한 개교회주의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또한 만인제사장의 원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종교개혁시대에 이미 확정된 의미를 잊고, 모든 교인이 동등하다는 원리만을 내세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만인제사장원리를 모든 교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동등한 자격이 있지만 교회적 제도를 위해서는 여전히 성직자와 평신도가 구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교회헌법은 성직자, 즉 목사의 강도권이 갖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즉 목사와 장로가 치리권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보다 정확한 결정, 판결을 위해서는 목사의 강도권에 기초란 치리권을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장로교회는 개교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교회연합을 거의 도모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바로 만인제사장 원리를 잘못 받아들이 결정적인 해악이다.

그리고 장로회주의 원리를 받아들이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장로회주의에는 전통적인 장로회주의의 원리와 다르게 성직불평 등을 반영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당회와 노회는 일정한 지역 내에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한국장로교회는 무지역 노회가 있고, 지교회의 지역분할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 결국 개별 지교회는 연합적이지 못하고 경쟁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장로교회는 그 헌법의 규정에서 장로회 주의를 취택하고 있으며 , 이 제도는 감독주의와 회중주의의 중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권적 권능과 성도의 보편적인 직무론을 보기좋게 표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167). 그러나 여전히 교회헌법적 실재에 있어서는 그 적용의 많은 빈곤을 드러낸다. 이것은 물론 장로회주의의 발전을 위한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개혁되어야 하고 보다 성경적인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면 현재의 장로회 정치의 단점들을 과감히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만약 교회헌법의 규정들과 그 전통을 보수하는데 그친다면 한국의 장로교회는 개혁하지 못하는 개혁교회로 고사하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4. 목회적 적용에서의 문제점과 그 해결방안


4.1. 목회적 적용의 문제점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헌법을 어떻게 목회현장에 적용할 것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즉 교회헌법을 이용하여 교권을 획득하고, 탄탄한 목회를 위한 법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헌법을 목회적으로 적용하는 것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 속에서 많은 교권주의자들이 자기들의 교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회헌법을 활용해 왔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다. 그러므로 교회헌법을 이용하여 교권을 추구하는 교권주의자들을 한국 장로교회는 정치목사, 또는 정치하는 장로 등으로 악평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교회정치의 중요성과 교회헌법의 긴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잃어버린 채 목회적 적용에 몇 가지 문제를 드러내게 되었다. 즉 1) 성직의 계급화와 직분간의 갈등, 2) 개교회주의, 그리고 3) 궁극적으로는 교회헌법의 교권획득의 도구화를 초래했다.

4.1.1. 성직 계급화와 직분간의 갈등


4.1.1.1. 성직의 계급화


한국 장로교회는 그 헌법적 기초가 장로회주의, 즉 성직자 평등주의는 물론이요, 모든 직분의 평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장로교회는 유교적인 전통에 따른 관료주의적 생각, 또는 왕도사상에 영향을 받아 한 명의 성직자를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즉 당회장으로 지칭되는 목사 한 사람을 최고점으로 하여 여러명의 부목사들이 있고, 또 장로들이 있다. 그 밑에 안수집사들이 있고, 권사들이 있고, 서리집사들이 있다. 그리고 최저층에 일반성도들이 있다. 교회헌법은 각 직분은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른 것일 뿐이지 그것이 교회직분의 계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힘에도 불구하고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그것이 관행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에는 일반 교인에서 서리집사를 거쳐 안수집사 또는 권사가 되고, 그 다음에 장로가 되는 공식이 보편화되었다. 이것은 바른 직분론이 되지 못한다. 직분은 은사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합당한 은사에 따라 주어진 직분을 평생을 들여 감당해야 옳다. 한국 장로교회의 직분관은 마치 모든 직분을 장로가 되기 위한 장로후보생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 직분론이라 할 수 없고, 한국의 유교적 관료주의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목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반직분과 달리 목사직은 후보생이라는 과정을 겪는다. 그러므로 교회헌법은 목사후보생(강도사 포함)을 규정하고 그들이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청빙을 받거나, 또는 노회나 총회로부터 기관사무를 위탁받을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목사가 당회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동적으로 당회장이 되는 목사는 위임목사 뿐이다. 그외의 다른 목사는 당회장이 될 수가 없다. 다만 비록 허위당회일지라도 당회가 있는 교회를 전담한 임시목사의 경우에는 노회의 허락을 받아 임시당회장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목사는 평등하다는 사상은 현실적으로 적용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위임목사 밑에 임시목사가 있고, 임시목사 밑에 부목사인 임시목사가 있고, 그 밑에 전도목사가 있는 것같은 피라미드 구조가 존재한다. 특히 헌법은 부목사의 지위를 임시목사라고 하면서 위임목사를 돕는 목사로 설명한다. 이것은 교회헌법의 착오일 것이다. 임시목사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당회장도 될 수 있고, 총회장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위임목사를 돕는 목사라는 말은 애매하다. 그런데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반적으로 부목사의 지위를 “위임목사를 돕는 목사”에 강조점을 둔다.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동등한 지위에서 협조한다는 말은 아닌 듯 싶다. 다만 위임목사의 직무가 너무나 과중하기에 위임목사의 뜻에 맞게 그 일을 방조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목사에게 주어진 고유한 직무가 위임목사의 지시 내지는 요청에 의하여 제한된 목사라고 이해된다. 결국 부목사는 위임목사에 종속된 지위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장로교회의 헌법적 실재이다.

이러한 계급구조는 부목사의 목회윤리라는 묘한 관습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각노회에서 목사를 안수할 무렵에는 부목사의 윤리강령이 강조된다. 즉 부목사는 담임목사의 조력자일 뿐이다. 또는 부목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담임목사의 편을 들어야 한다. 그뿐인가 부목사는 항상 담임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등등의 윤리가 강요되고 있다. 또한 설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부목사의 담임목사에 대한 종속성을 강조한다. 즉 :


교회 안에서 장로가 아니라 부교역자라 하더라도 담임목사가 전수해 줬거나 허락해 준 것 외에 임의로 자기의 소견대로 가르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 목사가 어떤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면을 특별히 중요시하는가를 배우면서 동질화 되어야 합니다168).


이는 한국장로교회가 개혁주의 신앙에 입각한 정치구조를 포기한 채 유교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로마 카톨릭으적 반동종교개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간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 성직자(목사후보생을 비롯하여 전도사, 강도사, 목사)와 평신도(장로, 집사, 권사, 교인)는 그 신분에 있어서 엄청난 간격이 있는 것처럼 인식된다. 성직자는 높은 지위에 있고, 평신도는 그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물론 최근에는 교회의 치리권을 누가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직분의 서열을 정하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16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생각은 성직자 아래에 평신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장로교회 헌법의 기본 정신에 위배된다. 헌법은 만인제사장 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직분은 평등하다고 먼저 주장한다. 만인제사장 원리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성도는 평등하다는 주장이라면 교회내의 모든 직분은 사실상 평등한 것이다. 그런데 감독주의 교회와 같이 교회내에 직분을 수직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교회헌법의 왜곡인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상명하복의 관계는 없다. 다만 모두가 형제일 뿐이다. 서로를 돕고 위하며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형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직분을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교회를 온전히 세운다는 말은 성도의 약점을 서로 보완해 주고 도와주는 섬기는 직분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섬기는 직분이다. 그것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높은 직분을 가진자는 더욱 형제를 섬겨야 하는 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장로교회는 헌법의 갖가지 규정을 이용하여 목사의 강도권을 하나님 말씀 처럼 높이고, 그 다음에 당회의 치리권을 강조하고 그 다음으로 집사의 봉사권을 말하고, 나머지는 그 권세 앞에 복종할 의무만 있는 것처럼 해석한다.


4.1.1.2. 직분간의 갈등초래


칼 맑스는 인류역사를 계급간의 투쟁으로 보아왔다. 즉 계급이 존재하면 그 계급간에는 투쟁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역사는 이러한 계급간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계급이 존재하는 곳에는 대립이 있게 되어있음이 분명하다. 이와같이 수직적 구조와 권력의 차등분배는 권력을 좀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상승욕구를 부채질했고, 동시에 이미 차지한 권력에 대한 집착을 낳음으로써 한국 교회 전체를 거대한 권력투쟁의 싸움터로 변질시키고 말았다170). 직분의 계급화, 또는 신분화는 계급간, 신분간의 마찰이 생기게 했고, 실제로 이러한 갈등과 마찰로 한국 장로교회는 몸살을 앓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직분간의 갈등을 교회를 분열시켰고, 결국은 복음전파의 길을 막아버렸다. 그 대표적인 예는 두가지이다. 즉 1) 목사와 장로간의 갈등, 2) 목사와 목사간의 갈등이 그것이다.


1) 목사와 장로간의 갈등


장로교회의 정치는 한 사람의 독주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민주적인 절차를 통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수용한다. 즉 성경이 말하는 조화의 원리에 의하여 교회정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감독 개인의 독주에 의하여 교회가 운영되는 감독주의와 다른 점이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는 당회장 1인의 독단에 의한 교회정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장로교회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고 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차원을 넘어 직분간의 양극화의 지경에 이르렀다. 즉 목사는 장로를 휘어 잡으려고 하고, 장로 역시 목사를 다루려고 한다171). 이것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대한 오해라고 할 것이다. 즉 목사와 장로의 두 직분은 서로간에 견제와 균형이라는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고 부조화와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았고, 장로는 사람이 세우는데 장로가 목사에게 까불어서야 되겠는가?”172)라고 말하면서 장로의 권위를 묵살시킨다. 교회정치에 있어서 목사만이 유아독존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마치 신적권위가 온통 자신에게만 위탁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장로도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임을 증언한다. 아니 모든 직분은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목사라 하더라도 장로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아야 한다. 특히 교회를 치리함에 있어서 장로들의 식견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마치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의 의견을 받아들여 재판사무를 분담한 것과 같이 장로들의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이 목회적 사역에 명하시는 음성을 발견해야 한다.

목사가 장로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목사직의 고귀함만을 강조하는 반면 장로는 각종 절차를 통하여 스스로 교회의 주인됨을 주장한다. 흔히 장로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목사는 노회에 소속된 사역자일 뿐이지 그 교회의 실질적인 주인은 아니다. 그러나 장로는 교회에 소속된 교인의 대표이므로 교회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것이다. 일부 장로들의 생각에는 목사를 월급 사장 쯤으로 생각하는 예가 있다. 그리고 장로는 그 월급장이 목사를 고용하여 봉급을 주고 설교를 하게 하고, 목회를 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헌법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라고 한다. 여기에 인간의 어떠한 주권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로는 교회의 주인이요, 목사는 교회의 고용인이라는 견해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나 장로나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에 봉사하도록 부른 사역자일 뿐이다.

목사와 장로와의 갈등은 결국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장로교회의 정치원리가 견제와 균형의 원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직분의 권위를 내세우는 방향으로 내닫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하여 서로간의 의견에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현대 한국장로교회는 목사와 장로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심지어는 목사의 축도 내용이 건방지게 들린다는 이유로 축도의 용어에 대하여 시비한다. 그뿐아니라 장로직이 성직인가 아닌가에 대하여 공방한다. 이 모든 것은 서로가 교권의 주체가 되겠다는 지극히 비성경적인 발상이다. 성경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사와 장로간의 갈등의 이유를 교회헌법에서 굳이 찾는다면 그것은 목사와 장로의 직분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헌법에 명백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헌법은 목사를 교회의 대표로 설명하는 반면에 장로를 교인의 대표로 설명한다. 또한 목사가 교회에 치리권을 행사할 때 장로는 목사와 협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있다. 목사와 장로의 헌법적 관계가 불투명하므로 실제에 있어 교권에 관한 문제로 다툼을 일으키고, 결국 하나님의 교회에 치명적인 해를 입히게 된다.


2) 목사간의 갈등


장로회주의는 성직자간의 평등을 원칙으로 한다. 즉 목사들은 평등하다는 말이다. 목사들은 모두가 강도권을 가질 뿐 아니라, 교회를 치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왜냐하면 헌법은 장로를 두 반으로 나누고, 그 하나는 목사요, 다른 하나는 장로라고 한다. 그리고 이 두 반으로 되어 있는 장로들은 항존직으로 교회의 치리권의 주체가 됨을 설명한다. 즉 이들은 자동적으로 치리기관의 회원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동일한 강도권과 동일한 치리권으로 인하여 서로가 동등한 지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목사간의 불평등을 인정하고 있다. 즉 어떤 목사는 온갖 교회의 권세를 다 누리고 있는 반면에 어떤 목사는 마치 전도사와 같은 지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사직의 계급구조는 결국 목사와 목사간의 갈등을 초래한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목사간의 갈등은 바로 1) 원로목사와 담임목사간의 갈등과 2) 담임목사와 부목사간의 갈등이 그것이다.

우선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와의 갈등은 대개 새로운 목회계획을 가지고 진취적으로 도전하는 담임목사의 교회운영에 전통을 이유로 원로목사가 간섭 내지는 제동을 가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반대로 원로목사에 대하여 전혀 예의를 지키지 않는 담임목사의 무례함이 갈등을 조장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원로목사와 담임목사를 한 지교회내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목사간의 갈등은 바로 담임목사와 부목사간의 갈등이다. 그 이유는 우선 숫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부목사들이 현재의 한국교회 실정으로 볼 때 담임목회를 할 수 있는 기반이 거의 조성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는 부목사를 동역자로 인식하기 보다는 언제든지 자기의 담임목사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요인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한국교회는 담임목사와 부목사와의 관계를 ‘동역자’, ‘형제애’로 생각하기보다는 권위주의의 산물이 종속관계로 보려는 경향이 많다는 지적이 높게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담임목사와 교인들은 부목사를 ‘인격체’로 생각하기 보다는 ‘종’, ‘비서’ 등으로 생각하여 부목사들이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173).

담임목사들은 부목사를 철저히 통제하고 목회윤리라는 이름으로 올가미를 씌워 자기 자리 확고히 한다. 결국 부목사는 담임목사의 권위에 완전 종속된 부품으로 취급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목사들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교인들의 접근을 경계해야 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는 담임목사를 내세워야 하며, 당회장의 허락없이는 교인들과의 접촉을 삼가해야 하고, 교인들로부터 얻은 정보는 신속·정확하게 보고하고, 담임목사를 항상 자랑해야 하며, 담임목사보다 설교를 못해야 한다.’는 등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174).

여기에 대하여 부목사들은 그들 자신도 하나님의 사역자로 소명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동일하게 말씀의 강론, 성례의 집행, 권징의 시행에 대한 자격이 있음175)에도 불구하고 신교황주의(neo-papism)의 구조 속에 있는 지금의 교회현실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 되어 있는 것이다. 즉 교회헌법의 규정에 의하면 부목사도 목사임에 분명한데, 전혀 목사의 직무를 담당할 수 없고, 오직 담임목사만을 높여야 하는 불합리성 때문에 부목사 자신도 목사라는 정체감이 반발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담임목사와 교인들 간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는 교량적 역할도 언제부터인지 부목사의 역할로 고정돼 버렸다. 더군다나 부목사의 역할 중에는 담임목사의 비서와 같은 역할도 첨가돼 있어 부목사의 스트레스를 한층 가중시키고 있는 현실이다176).

이것은 현재의 장로교회 헌법에 끊임없이 암시된 교회의 목사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산업혁명 당시에는 아마도 교회의 목사는 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는 모든 교회적 사역을 홀로 담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복잡하고 다원적인 시대에 한 사람의 목사가 수많은 교인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그 대답을 아니다 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공동목회를 지향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부목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어있다. 즉 부목사도 목사로서의 정체감을 갖고 사역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목사와 장로간의 갈등 이외에 목사와 목사간에도 깊은 갈등이 있다. 그것은 결국 교권을 지향하는 욕심의 결과일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이미 장로회주의를 취택하고 있으므로 교권에 대한 충분한 암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적인 욕심이 그것에 대한 해석을 흐리게 한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는 조화적 관계에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목사와 목사간에는 동역자 의식으로 교회의 통일적 발전을 위한 평등이 유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가 높으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대개의 경우에 한국의 장로교회는 담임목사를 하나님 대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다만 목사가 자기에게 맡겨지 말씀을 전파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사역자임을 공고히 한다. 신교황주의적인 사고가 한국 장로교회에 들어와 목사와 장로간에, 목사와 목사간에 갈등을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장로회주의의 인본주의적 오용의 결과이다.


4.1.2. 개교회주의 지향


한국 장로교회는 선교 1세기를 지나면서 개교회주의의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극단적인 교인주권사상에 근거한 교회, 즉 자유정치 또는 조합정치를 채택하는 교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는 교인주권사상에 대한 오해로 나머지 개교회주의를 표방하게 되었고, 결국 개교회 이기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한국 장로교회는 교인 뺏기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177).

아마도 이것은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라는 헌법의 규정을 잘못 이해한데서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즉 교인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결국 교인의 대표인 장로들의 교회를 만들었고, 그 교회는 다른 교회와 협력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노회나 총회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독자성을 가지고 개교회의 사무를 담당한다. 물론 헌법은 교회의 자유를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가 개교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교회적 사무를 개교회에 위임하고 그 독자권을 인정해 준다는 것임에 반하여 한국 장로교회는 그것을 자의로 해석하여 노회나 총회의 간섭이 배제된, 혹은 보편교회의 원리가 배제된 정치체계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가 갖고 있는 개교회주의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교황주의(또는 감독주의)와 독립교회주의의 기형적 결합178)이다. 우리는 흔히 장로회정치를 이야기하면서 감독정치와 자유정치의 조화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감독주의가 취하고 있는 보편교회의 이론을 어느정도 수용하면서 동시에 만인사제설에 근거한 개별교회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것이지만,179) 한국의 개교회주의는 교회연합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자유정치 형태를 취하고 있고, 개교회 내에서는 당회장 또는 당회원의 교권을 극대화하는 교황주의 또는 감독주의를 택하고 있다180).

그 결과 한국 장로교회는 노회는 물론 지교회의 지역구분(Local Church System)을 상실하고181), 개별교회의 성장에만 몰두하고 있다182). 이것은 미국의 교회성장론이 잘못 정착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에는 한국 장로교회가 교회헌법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갖지 못한 결과라고 해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헌법에서 규정한 내용들이 추구하는 원리들을 오해하므로 개교회주의를 추구하고, 보편교회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한국 장로교회는 1) 장로회주의를 오해하고 2) 교회의 자유권을 남용하며, 3) 지교회의 성장의 교단적으로 교권을 획득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정치구도가 결국 한국교회를 장로회주의의 타락이라고 할 수 있는 개교회주의를 한국에 정착시켰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는 더 이상 세계 장로교회와 그 동질성을 확인하기가 힘들게 되었다183).


4.1.3. 교권획득을 위한 도구


한국교회는 교회법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교회법 악용의 사례가 많이 나타난다. 교회법에 대한 교육부재로 말미암아184) 대다수 교인들은 - 목회자들 역시 - 교회법에 무지한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각 총회석상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법이요’라는 발언과 그것에 대한 반론이 없는 모습들이 이를 잘 반증한다. 근거도 제대로 대지 않고 유권해석도 없는 ‘법이요’라는 선언은 만능적 힘을 발휘한다185). 즉 교회헌법은 교권획득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신앙생활의 규범이 되어야 하고 일상생활의 시금석이 되어야 할 교회법이 사문화(死文化)되어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의 편의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 해석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186). 그러므로 헌법해석의 합리성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헌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장로회주의적 사상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교회법이 교권획득의 도구로만 이해되고, 권위주의적인 교회체제에 결국은 평신도들만이 소외된다. 목사와 장로간의 다툼에 평신도들의 의견만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장로교회는 교회헌법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므로 결국 교회헌법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게 했고, 한국에 장로회주의를 자리잡게 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교회헌법은 하나님의 교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교회적 실제에서 단순한 권징의 도구, 또는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것은 헌법의 정신과 동떨어진 것이다.


4.2. 헌법 오용에 대한 해결방안


4.2.1. 신학적 원리에 따른 해석과 애매한 문구의 수정


1) 신학적 원리에 따른 교회헌법의 해석


지금까지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적 실재가 혼란한 것은 그 원인의 대부분이 교회헌법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헌법이 추구하는 원리를 망각한 채 자의적으로 헌법의 문구가 해석되고, 그것으로 통하여 교회정치는 교권을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이 실제이다.

그렇다면 헌법적 실재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헌법해석의 척도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신학적이요, 실제적인 것이어야 한다. 또한 가장 성경적인 원리이어야 한다.

즉 교회헌법의 해석원리를 성경의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가장 성경적인 헌법해석의 원리는 바로 장로회주의라고 할 것이다. 장로교회는 그 신학사상에 있어서 하나님 주권 사상을 취하고 있고, 또한 만인제사장주의를 받아들이며, 정치적으로는 장로회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즉 장로회 교회정치에 관한 어떠한 적절한 토의도 장로회적 입장에 따른 교회 교의의 해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187).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헌법을 해석하게 되면 헌법적 실재가 가장 성경적인 제도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애매한 헌법 문구의 수정


헌법의 해석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헌법규정의 애매성이다. 애매한 헌법규정은 그것을 읽는 사람으로 혼란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다. 대개의 경우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그 용어에 있어서 혼란이 있다. 즉 교회는 장로교회라고 한다. 이 말은 마치 장로가 교회의 주인인 것같은 인상을 준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나 그것은 장로가 교인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자라는 대의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교회정치적으로 사실상 교회를 대표하는 자는 목사이다. 그러므로 이 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헌법해석에 오해를 피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인이 주권을 갖는다는 헌법 규정은 사실상 하나님 주권의 원리가 교인들의 의사를 통하여 반영된다고 보아야 하는데, 헌법규정만으로는 하나님 주권사상을 상실하기 쉽다. 그러므로 이러한 규정은 교인들의 투표로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반영되는 민주적 절차를 따른 제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헌법은 불합리한 규정을 담고 있다. 그것은 부목사에 대한 규정과 전도목사에 대한 규정이다. 부목사는 담임목사와 동등한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헌법이 그 종속관계를 규정하므로 장로회주의의 일반원칙에 어긋나게 하고, 또 전도목사는 분명히 지교회를 담당하는 독립적인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노회의 회원권을 제한한다. 이것은 결국 교권의 다툼에서 전도목사의 의견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한국교회의 특성상 장로와의 양극화를 두려워한 나머지 조직교회를 구성하려 하지 않는 목사들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회의 회원권을 제한하는 방식은 적합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임시목사의 시무연한을 충분히 보장하게 되면 전도목사라는 규정을 따로 둘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이다.

대개 한국 장로교회는 목사의 권위를 하나님과 동등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헌법의 규정이 “목사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축복하며”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목사가 하나님 대신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막연히 기록하고 있으므로 교회내에서 목사의 독주가 나타나고, 궁극적으로 개교회내에서 목사가 교황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분에 관하여 헌법은 명백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제도변화를 전부 수용하고 있지 못하다. 이미 헌법은 70 정년제를 시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한 목사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지 않다. 그들의 명칭에 관하여는 차치하고라도 그들의 처우에 관하여는 명백한 규정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규정도 없이 총회의 결정으로 무마하려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헌법은 여기에 대하여 명백한 규정을 가져야 한다.

그 뿐 아니라 교회적으로 전혀 사용되지 않는 ‘연합당회’ 같은 제도를 여전히 기록하고 있어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고 있지 못한 낙후성을 드러내고 있다. 교회헌법은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뒤따라가지 못하며, 사문화된 규정들만 가득 담고 있다면 그것은 폐단이 아닐 수 없다.


4.2.2. 현행 장로회 정치제도의 개선점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은 제도적 개선점은 많이 가지고 있다. 특별히 사회의 다원화를 통한 교회조직의 변화에 맞추어 수용되어야 할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각종 갈등을 낳고 있다. 그 한 예가 직분자간의 갈등이다. 지금의 한국 장로교회는 직분자간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서로가 교권을 얻기 위한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교회적 실제에 맞도록 수정함이 필요하다.


1) 부목사에게 당회원 자격 부여하는 공동목회제의 도입


현대의 한국교회는 목사와 장로의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양극화의 가장 주요한 원인은 개교회의 당회에서 목사와 장로가 수적으로 불균형하다는 것이다. 이미 장로들은 목사의 압력기구 또는 목사의 감찰반과 같은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고, 목사의 근무를 평가하는 것을 그들의 사명으로 인식하기에 이루렀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목사의 목회에 대하여 평가하며, 무엇을 위하여 목사의 목회에 대하여 압력단체로서의 역할을 하는가? 대부분은 그들의 경험과 기존에 조직되어 있는 장로회188)를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과 신학의 가르침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목사의 목회를 평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장로들은 성경과 신학의 내용에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이것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는데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이지도 않고, 바른 신학입장에 서 있지도 않는 다양한 생각들이 목회현장에 들어와서 목회를 평가하고 감독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회는 거의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직무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학의 전문가인 목사가 숫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목사들이 당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189).

부목사들도 교회의 사역자이고, 목사로 부름을 받은 자이며 그들의 본연의 임무가 교회를 치리하며 강도하는 것이라면 이들도 마땅히 당회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헌법은 부목사에 대하여 목사로서의 그의 직무에 어떠한 제한도 두고 있지 않으며, 이렇게 되면 당회 내에서 목사들의 소리가 무시할 수 없는 정도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회 내에서 목사와 장로의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한 바른 교회정치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목사를 당회원으로 편입하게 되면 당장 당회장 목사에 대한 입지가 불명확해진다는 난점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교회역사상 서방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동방교회는 로마교회의 교황주의에 반하여 키프리안의 “primus inter pares” (동등한 자들 중 기능상 으뜸)의 원칙을 세웠다. 즉 동방정교회들은 이미 “Patriachs”를 가지고 있는데 이들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높은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자격을 지니면서 이들 중 한 사람이 회장격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190) 그러므로 당회장과 부목사 당회원간에 기능상 으뜸의 문제를 노회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면 큰 무리없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제도를 취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다. 그 교회들에서는 두 종류의 목사가 있다. 하나는 공동의회의 투표에 의하여 부임하는 부목사(the associate pastor)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같이 당회의 결정에 의하여 부임하는 부목사(the assistant pastor)이다191). 후자의 경우는 한국 장로교회의 현행 부목사 제도와 유사한다. 그리고 미국 장로교회의 헌법에 의하면 “지교회의 당회는 목사 또는 동사목사들(co-pastors = 협동목사), 부목사들(the associate pastors)과 시무장로들로 구성한다. 목사과 협동목사들, 그리고 부목사들은 모두 당회원으로서 투표권이 있다192). 그러므로 현행 제도를 개선하여 부목사를 공동의회에서 투표하여 청빙을 받게 하고, 그들의 지위를 당회원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다원적 구조 속에서 새로운 공동 목회193)를 위한 패러다임의 기초가 된다. 공동목회란 단독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닌 2인 이상이 협력하는 팀(team)목회이다. 다시 말해서 지교회의 사역에서 담임목사가 부목사들과 각자의 전문성을 살려 목회의 영역을 서로 나누어 맡아서 하는 목회를 말한다194). 과거의 목회는 전천후 목회였다. 그러나 사회가 다원화되고 분업화되면서 목회의 사역에서도 전문성이 요청되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실제에서 여러 종류의 부목사를 활용하고 있다. 즉 행정목사, 음악목사, 교육목사, 심방목사, 상담목사 등의 제도를 활용한다. 그러나 이 제도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각 부목사들이 목사로서의 충분한 기능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제도적 약점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 헌법은 부목사가 전문성을 지닌 목사임과 동시에 당회원이 되어 그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2) 효율적인 임기시무제 도입


모든 권력은 고정되면 썩게 되어있다는 것은 이미 정치학 뿐 아니라 상식으로 알려질 정도이다. 그런데 장로교회의 각 치리회는 교회의 최고의 권력기구이며, 그것도 전혀 삼권이 분립되지 않은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교회권력의 요체이다. 그런데 현행 장로교 제도는 모든 치리회의 구성원이 되는 목사와 장로의 직을 항존직으로 설명하며 그것을 종신직과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195). 즉 신분상으로는 종신직이요, 직무상으로는 만 70세의 한도 내에서 종신시무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적인 정치원리에 맞지 않는다. 한국장로교회의 헌법에 의하면 교회는 세례교인 25명을 기준으로 한 명의 장로를 세울 수 있다. 세례교인 수를 기준으로 장로를 뽑아 그들의 양심에 따른 의견들을 반영하여 교회의 독단을 막고 합리적인 교회운영을 하게 하는 대의제를 취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의 종신시무는 이와같은 대의민주정치 원리의 제대로 반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왜냐하면 교인이 그의 양심의 자유를 따라 행한 한 번의 의사결정은 다시 번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치리회의 구성원이 되는 목사와 장로에게 교권이 종신토록 고정화되어 버리게 된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권력의 부패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장로와 목사의 갈등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그리고 목사와 장로의 교회 내에서의 횡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구조는 임기시무제를 도입해야 한다. 물론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도 임기시무제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임기시무제가 특별히 요구되는 곳은 당회라는 치리회이다. 즉 임기시무제를 당회제도에 적용하면 목사와 장로가 개교회의 당회장과 당회원의 지위를 종신토록 갖지 않지 못하고, 일정기간동안만 그 직에 시무할 수 있게 된다. 가령 교회헌법이 임기시무제를 도입하여 당회원의 임기를 5년으로 규정한다면 5년마다 - 국회의원 선거하듯이 - 공동의회에서 장로를 다시 선거해서 교회의 당회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의제 민주정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장로회 정치의 정신에 맞을 것이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목사가 안정된 목회를 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목사는 교회에 그 생계를 의존하고 있고, 시무임기가 끝나면 자신의 생계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목사의 불안정한 목회로 인하여 교회는 발전할 수 없게 된다. 목사는 하나님의 대표하여 교인들을 치리하도록 노회에서 전권을 위임받아 파송된 사람이며, 동시에 교인들을 대표하여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기시무제에는 여기에 대한 보완이 있어야 한다. 즉 목사의 생계는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보장되고, 노회적 차원에서 목사수급정책이 마련되어 목사로 임직을 받게 되면 시무할 교회가 마련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한편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장기목회의 현실적 효용성이 많음을 고려할 때 임시목사196)의 경우에도 당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경우에 장로와 마찬가지고 일정한 기간동안 교회를 시무하고 그 시무기간이 끝나면 장로와 함께 시무투표를 하여 재임여부를 결정한다. 현행 교회헌법은 임시목사의 임기를 1년으로 정하고 조직교회에서는 즉 당회가 구성된 교회에서는 임기목사의 시무를 원칙적으로는 인정하고 있지 않다197). 그러나 시무임기제를 적용하면서 현행 제도를 보완하여 임시목사에게도 조직교회의 시무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시무기간을 장로와 동일하게 한다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어떤 사람을 위임목사로 청빙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종신시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198).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서 이다. 목사는 장로와 달리 하나님을 대표하고199) 교회전체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으므로 목사는 안정적으로 목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정기간 동안에 - 약 10년 정도 - 임시목사로 교회를 시무하던 목사가 그 교회 교인들에게 전적으로 신뢰를 얻고, 그 목회적 성과가 인정될 때는 교회가 투표하여 그를 위임목사로 받고 종신시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대의제에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복음사역의 효율적 성취라는 대과제를 위하여 함께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 노회나 총회의 임원에 대하여는 임기시무제가 사용된다. 그러나 그 임기가 1년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효율적인 행정이 되지 못한다. 즉 임기라는 것은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 만큼의 기간이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노회나 총회의 임원의 임기는 비효율적인 임기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만 임원을 지낸 자라는 명예만을 안겨줄 뿐이다. 그러므로 총회나 노회의 임원의 임기를 직무를 수행하기에 적정한 임기를 제시해야 한다. 대개 약 4-5년을 임기로 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결국 임기시무제는 한국 장로교회의 약점인 직분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대의제원리를 최대한 반영할 뿐만 아니라 한국 장로교회의 효율적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제도인 것이다.


3) 장로수에 비례한 목사의 수


장로회 정치의 근간을 이루며 민주적인 정치를 반영하는 원리로서 만인제사장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의 동등한 권리 또는 평등사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평등의 원리는 현재의 한국 장로교회 정치 구조 안에서는 적절한 시행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즉 한국 장로교회는 귀족적 민주정치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각 치리회가 모든 성도들이 평등하다는 이론적 토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즉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구조는 모든 성도들의 평등함을 반영하기 보다는 치리회원 즉 목사와 장로의 평등만을 반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물론 칼빈은 그의 교직론을 이야기하면서 위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모든 성도들이 정치적인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고 그들에 의하여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회중민주주의 원칙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뽑혀진 목사와 뽑혀진 장로들로 구성되는 당회, 뽑혀진 제직들로 구성되는 제직회, 세례교인들로 구성되는 공동의회 등의 일종의 귀족주의적인 민주정치200)이고, 따라서 장로교의 교직론은 로마카토릭, 동방정교회, 영국성공회, 루터교회의 감독체제와 회중교회, 침례교회, 퀘이커교도 등의 평신도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201)

그러나 이러한 민주정치의 형태는 칼빈이 생존해 있을 시대적인 상황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도 실상은 민주정치의 원리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가 장로교의 원리를 표방함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의 장로교 원리는 다시 표현하면 그가 살던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귀족적인 형태의 민주정치로 표현된 것이지 귀족적 민주정치가 성경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사료된다. 그러나 칼빈의 귀족적 민주정치형태를 현재 정치의식에 비추어 재고해 보면 그는 아마도 대의적 민주정치체계를 지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것은 교회헌법 속에 교인 수에 비례하여 장로의 수를 정하는 비례대표제로 나타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결국은 목사와 장로간의 숫적 불균형을 가져왔고, 한국 장로교회의 양극화를 초래한 것이다. 원래 장로교회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치리회가 교회적 사건에 대하여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가지고 처결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목사와 장로를 그 치리권에 있어서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그런데 한국의 장로교회는 장로수는 교인 수에 비례하여 증감하지만, 목사의 수는 단 한 명으로 한정한다. 물론 부목사를 두는 경우에는 개별 지교회에 많은 목사가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은 당회의 회원이 되지 못한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는 목사 1인에 다수의 장로가 하나의 치리회를 구성하여 교회정치에 임하게 된다. 즉 한국 장로교회는 목사와 장로의 양극화 속에서 목사의 열등한 지위를 인정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람직한 장로교의 원리에 어긋난다. 장로회의 정치는 목사와 장로의 동수가 함께 하되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는 목사의 의견을 더욱 중요시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게 되면 목사들의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지도원리가 더 잘 관철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의 수를 같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목사와 장로의 수를 같게 하면 교회의 많은 재정적 부담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별 지교회에 목사와 장로의 수를 같게 하면, 숫적으로 늘어난 목사들의 생계를 교회가 전부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로의 숫자는 교인의 수에 비례해서 증감되도록 하고, 목사의 숫자는 장로의 숫자에 비례해서 증감하게 하는 것이 현실의 교회형편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령 장로 한 사람을 뽑을 수 있는 세례교인의 수를 25명 이상으로 한 경우와202) 마찬가지로 목사와 장로의 비율을 1:3 또는 1:4의 비율로 당회를 구성하게 하고, 모든 목사와 장로간에 견련성을 유지시키면 현대 한국 장로교회가 안고 있는 목사와 장로, 그리고 목사와 목사의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장로는 목사를 보호해야 자기의 장로직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목사는 서로간에 특별한 경쟁의 구실이 없기 때문이다.

5. 결 론


교회헌법은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연구의 영역에서 기피되어 왔다. 왜냐하면 개혁신앙이 성경을 모토로 한 결과, 교회헌법에 대한 연구는 항상 제2위의 자리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교회적 실제는 교회헌법에 대하여 좋지 못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흔히 정치목사라고 일컫는 교권주의자들의 전용물인 것처럼 생각되고, 경건한 목사에게는 교회헌법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조차 금기시 되어왔다.

그러나 이미 제3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교회헌법은 교회론에 대한 해석의 공적 결정이요, 그것에 대한 공교회의 합의인 점을 고려하고, 또 그것이 목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성경제일주의에 의하여 결코 희생될 수 없는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즉 교회헌법은 성경의 원리에서는 떠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성경에 대한 교회의 합리적인 해석이며, 총체적 기독교 신앙을 삶의 실제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이 교회헌법에서 그 신학적 배경이 개혁주의 신학임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한국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과 신도게요, 그리고 장로회 신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또한 구체적인 내용에서 장로교회의 헌법은 1) 하나님 주권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2) 만인제사장설에 입각한 교인이해, 그리고 3) 정치체계에 있어서 가장 성경적 원리에 적합한 장로회주의를 택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장로교회는 그 헌법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개혁신학적 토대를 상실한 모습을 나타냈다. 물론 그것은 헌법의 규정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목회적 실제에서 교회헌법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므로 장로교회의 본질을 떠나 한국 장로교회는 그 정체감의 혼동을 낳았던 것이다. 즉 한국 장로교회는 장로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점에서 개교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가 목회적 실제에서 추구하는 개교회주의는 교회정치체계라는 큰 주제를 놓고 볼 때 자유교회의 형태를 취하면서 동시에 교회자체적으로는 교황주의를 취하고 있는 기형적인 정치형태인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지극히 개교회적이다. 즉 개별 지교회는 노회나 총회로부터 독립적 권한을 가진다. 이것은 결국 개교회의 교회성장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교회들간의 연합보다는 경쟁을 추구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지역분할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노회의 경우에도 무지역 노회가 있는 반면, 개별 지교회들도 이미 일정지역에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전국망 교회로 등장하고, 개별교회의 이기적인 성공을 위하여 교인뺏기라는 경쟁까지 하고 있다. 물론 헌법은 지교회를 설립함에 있어서 지교회간에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제에 있어서 유명무실한 것이 되고 만다. 즉 개교회주의는 교회간의 연합을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경쟁적 구조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교회적 모습이 그 지교회 자체 내에서는 단일 목회자의 전권에 의하여 주도되는 교황주의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당회라는 구조 아래서 일인 당회장의 무소불위이 권세가 행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당회장과 부목사의 관계 속에서 특히 심하게 나타난다. 헌법에 규정한 장로회주의는 분명히 목사와 목사간의 평등원리를 취하고 있는데, 한국 장로교회는 그 헌법의 애매성 때문에 목사와 목사가 불평등하며, 당회장의 치리권에 의하여 부목사의 강도권까지 침해되는 불합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회의 직원은 오직 당회장을 위한 직원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폐단은 장로교회 헌법에 대한 오해, 또는 규정의 애매성이 자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가 그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헌법의 규정을 명백하게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현대적 정치의식에 맞추어 그 규정들을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가 개교회주의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 바로 헌법의 규정이 오해의 여지를 안고 있기 때문이므로 한국장로교회는 그 규정들의 애매성을 수정하고, 또 개혁신학에 기초한 바른 헌법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즉 교회헌법이 “장로회 정치는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라고 규정하는 것은 오해하여 하나님 주권사상을 배제한 채 인본주의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려고 할 뿐만아니라, 각 직분간에 평등한 협력관계에 관한 설명을 조직적 상하관계 규정으로 파악하여 장로회주의의 근본취지에서 떠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는 헌법규정의 애매한 문구를 적절하게 수정하고, 모든 규정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개혁신학, 즉 하나님 주권사상과, 만인제사장설, 그리고 장로회주의에 적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 장로교회 헌법 조문들 중에는 현대적 정치의식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결국 개혁신학의 근본취지를 흐리게 하는 규정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장로교회의 기본치리기관인 당회의 조직과 구성에 관한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당회제도는 장로회 정치의 핵심을 이루면서도 현대적 정치의식을 반영하지 못하고, 여전히 귀족정치와 농경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시대가 되었고, 사회구조는 복잡한 산업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장로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맞는 정치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당회구조의 개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1차적 과제는 당회원의 구성을 새롭게 해야 한다. 기존의 방식은 신교황주의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은 일인의 목사 당회장와 수인의 장로 당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이를 장로회 정신에 적합하게 하려면, 그리고 교역의 전문화에 따른 부목사들의 역할이 커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부목사가 당회원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헌법이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명의 목사와 여러명의 장로가 당회를 구성하고 전문적인 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현행 당회제도가 목사와 장로의 수적 불균형을 가져오므로 당회내에 평신도의 지위가 강화되는 것은 하나님 주권을 신봉하며 말씀중심주의를 취하는 개혁신학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반드시 목사와 장로의 수를 일정비율로 조정하여야 할 것이다. 즉 헌법은 장로를 교인의 수에 비례하여 뽑게 하듯이, 목사를 장로의 수에 비례하여 뽑게 하고 그들이 당호원이 되어 목사와 장로가 교권에 있어서 평균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에 지교회에서 목사와 장로가 당회원으로 시무할 수 있는 임기를 제한하는 것이 필요한다. 즉 당회원의 임기를 정하여 일정기간동안만 당회원으로 시무하고, 그 기간이 지나면 다시 시무투표를 하여 당회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물론 헌법은 이러한 규정을 가지고 있지만 권고사항일 뿐, 명령규정이 아니므로 이것을 구체적인 명령규정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만인제사장설에 입각하여 전 교인이 항상 교회에서 양심의 자유에 따라 교인으로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현행제도가 종신시무제를 취하고 있는 것은 개교회주의 내에 교황주의가 고착하는 것을 부추기는 결과가 되어 궁극적으로 교회의 타락을 가져오기 때문에 일정한 임기동안 당회원으로 시무하는 임기시무제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특별한 경우 위임목사로 받은 자에 한해서는 헌법이 정한 만70세가 되기까지는 계속시무할 수 있도록 하여 장기목회의 이점을 적용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에 근거한 교회정치체계이므로, 그 헌법 규정들 속에 하나님 주권사상, 만인제사장설, 그리고 장로회주의가 농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헌법규정을 해석함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은 이러한 개혁신학적 퍼스펙티브를 가지고 헌법의 개별 규정들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장로교회는 개별 규정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왜곡, 또는 오용되었으므로 이를 재해석하여 목회적 실제에 적용할 뿐만 아니라 가장 성경적인 교회정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보다 효과적인 제도의 개선을 위한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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