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1. 들어가는글오늘날 개신교와 가톨릭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일치점과 차이점을 논할수 있는 근거는 서로가복음에 대해 동일한 내용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고대 사도들의 신앙고백으로서, 칼세돈의 정통기독론을 따라 나사렛 예수가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vere Deus, vere Homo)”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신 중보자이며 우리의 죄와 죽음을 위해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복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모체인 것이다. 다만 양진영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이 복음 역사가 인간에게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과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에 관하여 개신교와 가톨릭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에 대한 공통분모를 근거로 하여, 이 복음이 우리 인간에게 역사하는 방법으로서의 방식을 서로 검토하면서 비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리라 본다.
적어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가 일치에로의 분위기 속에 있는 상황이기에 오늘 우리의 연구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먼저는 글을 전개하는 원칙으로서, WCC ‘신앙과직제(Fait and Order)’에서 나온 보고서로부터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히 고백하는 복음에 대한 정의를 인용함으로써 양 진영간의 일치점과 차이점을 논하고자 한다.
WCC의 ‘신앙과직제’에서 표명한 신앙고백은 1927년 로잔에서 열린 제 1차 신앙과직제세계대회의 제 4분과에서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라는 제목하에 다음과 같이 명시화되었다.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항상 복음이어야 한다. 복음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구속의 기쁜 메시지인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성령은 온 인류역사 속에서 활동하시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셨고, 무엇보다 구약 안에 주어진 그의 계시를 통해서 그의 오심을 준비하셨는데, 때가 차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성육하사 인간이 되신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가르침, 그의 회개에로의 부름, 그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심판에 대한 선포, 그의 고난과 죽음, 그의 부활과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로의 승귀, 및 그의 성령의 파송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셨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충만함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계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보이신 완전한 사랑에 호소하시사 우리들을 신앙에로 부르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기 위한 자기 희생과 헌신에로 부르신다.”1)
위에서 인용한 복음에 대한 정의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모두 고백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구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공히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복음내용이 인간에게 전해지는 과정에 대하여는 양측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연속성이 있다. 하지만, 현대신학의 논의에 의하면 그 방법에 있어서도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기에, 우리는 복음이 인간에게 전해져서 죄인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고찰하는 가운데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비교하여 보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사도적 신앙전통에 따른 ‘복음’에 입각하여 그 복음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은총, 칭의, 성화 문제를 통하여 개신교와 가톨릭의 구원론을 비교하려 한다.
글의 전개순서로, 개신교와 가톨릭의 구원모델을 검토하여 은총이 어떤 의미인지, 칭의와 성화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고 거기에 따른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원모델
1) 점진적변형모델과 순간적전가모델
개신교와 가톨릭이 복음에 대하여는 사도적 전통을 따라 내려오는 내용을 공히 고백하지만 거기에 따른 구원론의 전개방식에 있어서는 다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가톨릭의 구원 모델은 아우구스티누스이래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트렌트공의회로 이어지는 “점진적 변형(progressive Transformation)”인 반면에, 개신교는 루터, 깔뱅 이래로 이어지는 “순간적 전가(momentory Imputation)”를 유지하고 있는 바이다.2)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Justification’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에 기인한다. 가톨릭은 이것을 ‘인의’(인간이 실제로 의롭게 되는 개념)로 보지만, 개신교는 ‘칭의’(의롭다고 칭함 받음)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전통 이래로 가톨릭은 ‘Justification’을 인간의 실제적인 의화개념으로 보아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입(infusion)되고, 이 주입된 의를 가지고 인간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공덕을 쌓으면 종국에 가서는 영생이라는 구원을 이룬다고 본 반면에, 개신교는 ‘Justification’을 ‘법정적 선언(forensic verdict)’으로 보아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의롭지 못하지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이며, 이때 이루어지는 이신칭의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적어도 개신교에 있어서 칭의 교리는 단순히 여러 교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루터가 밝혔듯이, 이것과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며 교회의 전 교리가 의존해 있는, 신앙의 기본적이고 주된 조항인 것이다.
이상의 칭의교리에 따른 개신교와 가톨릭의 구원교리는 은총의 개념, 칭의와 성화의 개념들과 그 관계, 이에 따른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가 서로 얽혀 있다. 그러므로, 개신교와 가톨릭의 구원교리에 대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비교함에 있어서는 칭의개념을 중심으로 은총과 자유의지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2) 논쟁적 대결로서의 두 구원론에 관한 역사적인 검토
(1) 점진적 변형의 구원모델
점진적 변형의 구원모델은 아우구스티누스전통3)을 기점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트렌트 공의회로 이어지는 가톨릭의 구원모델이다. 여기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단계와 트렌트 공의회의 구원과정을 살펴보아 그 속에서 은총이 어떤 의미이며, 칭의와 성화는 어떤 위치에 있는지, 더 나아가서는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겠다.
①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과정
Justification을 구원론의 핵심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기인하며 그의 구원론을 살피기 위해서는 은총론을 얘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의 은총의 3단계가 곧, 구원을 이루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은총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나누어서 말한다.
첫째는 선행은총(Gratia praeveniens)이다. 이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불가항력적 은총은 우리의 의지 안에서 활동하여서 의지가 선을 의지하도록 준비시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어떤 창조적인 힘(creative power)4)라는 것이다.
둘째는 협력은총(cooperative Grace)으로, 이것은 선행은총에 의해 준비된 인간의 의지가 은총과 협력하여 선한 행동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은총이 협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하나님)은 우리들이 밖에서 활동하셔서 우리의 의지가 움직이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하게 되고 의지대로 움직이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와 협력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경건한 선행도 할 수 없으며, 우리의 의지가 움직인다거나 아니면 우리의 의지가 움직일때 하나님이 협력하게 하실 수도 없게 된다.”5)
셋째는 견인의 은총(persevering Grace)으로서, 이것은 선행은총과 협력은총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안에서 나중까지 참고 견디는 선물이다. 이 견인의 은총이 있어야만 죽는 날까지 신앙을 신실하게 지켜 나갈 것이고 결국에는 최후의 면류관 즉,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이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의 3단계를 살펴보았는데,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견인의 은총까지 선물로 받아 선을 행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자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그에게 있어서 은총이란 하나님의 능력 혹은 유동적 흐름으로 인간 안에 주입되는 어떤 것(gratia infusa)이며, 하나님 쪽에서 취하시는 태도(actitade)가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안에서 활동하시는 양식(manner)으로 이해하였다고 정리 할 수 있다.5)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을 ‘주입’, ‘활동 양식’으로 이해한 것은 ‘칭의’6) 개념과도 직결된다. 그의 칭의 개념은 종교개혁기의 칭의 개념인 ‘법정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의롭게 되는 ‘인의’개념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어떤 창조적인 힘이 은총이라면 은총 작용의 결과인 구원은 악한 인간 본성의 회복을 의미하며, 이 악한 본성의 변화를 위해서는 칭의를 과정(progress)의 산물로 이해하여 인간은 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계속 의롭게 되어가고, 이 과정의 종국에 가서야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6) 그러므로, 칭의를 과정의 산물로 이해하여 그 결과까지를 포함하는 의미로 파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을 점진적인 변형 모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② 트렌트공의회(Concilium Tridentium : 1545-1563)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을 ‘창조적 은총’이라는 주입(infusio)개념으로 파악한 전통을 따라서, 가톨릭은 이 은총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서는 은총을 ‘habitus’, 즉 ‘하나님에게서 생겨서 인간에게 내재하는, 어떤 확실한 초자연적인 것’ 즉, ‘영혼의 본질에’ 거하는 주입된 상태(habitus infusus)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이 은총은 창조된 은총(created grace)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자질(quality)을 의미하는 품성적 은총(habitual grace)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은총 개념은 종교개혁의 거센 도전에 반대하여 칭의를 둘러싼 트렌트공의회의 구원론 부분에서 더욱더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총25차 회기를 이루고 있는 트렌트공의회 내용중 제6차 회기가 바로 ‘칭의교령(Decretum de iustificatione)’이며, 이 교령은 ‘칭의’에 관해 현재까지 유효한 가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이 된다. 칭의 교령은 모두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칭의의 잠정적인 첫번 논술(제3-4장),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을 인도해 가는 칭의에 이르는 길로서의 ‘준비’라는 옛 주제(제5-6장), 그 다음에는 더 상세한 칭의의 본질 규정(제7장), 이신칭의에 대한 바울의 명제를 이해하는 교회의 가르침의 입장(제8장), 구원의 확실성(제9장), 칭의 은사에 있어서의 성장(제10장), 하나님의 계명에 따른 삶(제11장), 예정의 문제와 그것이 기독교적 생활에 끼치는 영향(제12장), 견인의 은사와 과제(제13장), 새로 짓는 중죄의 가능성과 제거(제14-15장), 그리고 선행으로 나타나는 칭의의 열매(제16장)에 대하여 가르친다.7)
트렌트공의회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총이해를 따라 은총을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힘으로 이해하였으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해 품은 호의(favor)가 아니라 인간에게 객관적으로 제공되어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효력적인(effective)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은총 개념에 근거하여 트렌트 공의회는 칭의론(구원론)을 다섯 단계, 즉 ①선행적 은총(gratia praeveniens) → ②준비(praeparatio) → ③칭의(인의, iustificatio) → ④선한업적들의 공로(meritum bonorum operum) → ⑤영생(vita aeterna).8) 이 다섯단계에서 ①,③,⑤는 하나님의 작용에 속하고 ②,④는 인간의 반응으로 이 둘이 서로 맞물려 함께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인 것이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다. 따라서 이 다섯 단계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
그러면 이 다섯 단계에 맞추어 트렌트공의회의 칭의론(구원론)을 살펴보자. 첫번째, 선행적 은총은 인간에게 칭의를 위한 준비를 마련케 하는 것으로 이 은총에 의해 칭의는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간의 협력과 동의가 또한 필요하다.
“더나아가 공의회는 다음의 사실을 선언한다. 성인(adultis)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칭의의 시작은(ipsiui iustificationis exordium) 예수 그리스도 즉, 인간들편의 어떠한 공로도 없는 자들을 부르시는 그분의 초대를 통한 하나님의 선행은총(praeveniente gratia)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격려와 도움을 통하여 자유롭게 동의하고 협력함으로(libere assentiendo et cooperando) 자신들의 칭의를 향해 돌이키도록 성향이 조정된다.”9)
여기에서 ‘자신들의 칭의를 향해 돌이키도록 성향이 조정된다’는 말은 인간이 칭의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 의지가 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여기에는 신인협동론이 내포되어 있다. 둘째, 칭의에 이르는 준비과정을 언급함에 있어서 그 과정을 세분하여 보면,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믿음 →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함 →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생각·소망함 →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신뢰함 → 의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함 → 죄를 증오함=세례이전의 회개 → 세례받을 의향 → 새로운 삶의 시작 → 계명의 준수과정으로 나눌수 있다.10) 셋째, 이렇게 준비된 영혼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한 원죄와 실제 죄의 제거가 세례에서 일어나고, 믿음·소망·사랑이 주입되면서 실제적인 칭의가 일어난다.
“이러한 성향조정과 준비는 실제적인 칭의(iustificatio ipsa)로 나아가는데, 이 칭의는 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은총과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내적 인간의 성화와 갱신으로 나아간다(sanctificatio et renovatio interioris hominis per voluntariam susceptionem gratiae et donorum). 그 결과 그 사람은 불의한 사람에게서 의로운 자가 되고, 원수가 친구가 되어 결국에는 영생에 대한 상속자가 된다. ...... 그 결과 칭의의 과정에 있어서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제거와 함께 믿음.소망.사랑(fidem, spem et charitatem)이 동시에 인간에게 주입된다.”11)
넷째와 다섯째에 관하여는 칭의를 통해 의롭게 된 사람은 선행이나 선행의 공로인 칭의의 열매가 넘쳐야 하며, 이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행위와 공로에 따라 신실하게 주어지는 보상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사를 인간들의 공로로 인정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12)
위에서 언급한 트렌트공의회의 칭의교령을 요약하면, 선행적 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칭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만들고, 이 준비에서 하나님을 의의 근원으로 사랑하게 되며 죄를 미워함과 동시에 증오라는 회개가 생기고, 이러한 준비에 이어 신·망·애가 주입되면서 칭의 자체가 이루어지며 이때 성화도 동시에 일어난다고 본다. 그리고 계속된 칭의의 증가를 통하여 선행을 하면 그 공덕으로 영생(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하여 볼 것은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루터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여 생각한 것과는 상반된 개념이다. 트렌트공의회는 칭의를 성화와 구분하지 않으면서, 칭의 자체를 실제적인 인간의 의화개념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트렌트 공의회는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을 이어받아 Justification을 인간의 실제적인 의화개념, 곧 성화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였고,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인간의 협력이 함께한다고 생각하였다.
(2) 순간적인 전가의 구원모델
순간적인 변형(momentory imputation)의 구원모델은 개신교의 구원론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루터의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개신교의 칭의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루터에게서 비롯된 ‘칭의’ 개념이 루터교의 중심교리일 뿐만 아니라, 깔뱅, 바르트로 이어지는 개혁교회의 중심신학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회심을 한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 역시 루터의 ‘칭의와 성화’를 발전시켜 ‘온전한 구원’개념을 유도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루터의 ‘칭의와 성화’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루터에게서 이미 가톨릭과의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의 이신칭의 개념과 나아가 구원의 본질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타락하여 이미 노예의지로 되었음을 살펴보고, 다음에는 은총의 의미와 칭의의 의미를 통하여 본 신앙의 본질 곧, 구원론을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① 인간의 노예의지
루터는 인간의 자연적인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은 인정한다. 이 의지에 의해서 인간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선악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양심의 기능’, 그리고 지적 능력과 양심의 기능이 제공하는 정보에 따라 선택, 결단, 추구에 이르는 ‘의지 능력’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데는 무력하다고 루터는 여긴다.이것은 아담이 타락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원죄에 근거를 둔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는 왜곡되어 전인적으로 자기 사랑과 자기 우상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사랑, 자기우상화로의 지향을 루터는 “자기 자신 안으로 꾸부러져 들어간 것(incurvatam in se)” 혹은 “자아에로의 굴곡(sibi inflectere)”이라고 불렀으며13), 이것을 ‘죄’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죄이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를 ‘욕정(concupiscentia)’이라고 부른것 보다 훨씬 더 과격한 이해로서 ‘죄=불신앙’이라는 공식까지 이르렀다.
루터의 이러한 죄이해는 인간에게는 구원에 이르기 위한 의지의 자유가 없다는 주장까지 이르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결코 구원에 이르는 선을 할 수 없다고 루터는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자유 의지’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악의 영속적인 죄수이자 노예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자유 의지는 선을 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자유 의지’의 권능은 무(Nichts)이고 자유 의지는 은총 없이는 선을 행하지 않고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14)
루터는 왜곡된 의지가 바른 의지로 바뀌게 하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때의 은총개념은 가톨릭의 주입된 은총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로서의 은총개념이었다. 그러면 이제 루터의 은총 개념을 살펴보자.
② 율법과 복음 속에서 등장하는 은총
가톨릭은 트렌트공의회에서처럼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휘하여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하면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이 효력적(effective) 은총으로서의 신·망·애를 주입한다는 말한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은총이해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호의(favor)로서의 은총을 주장한다. 이 호의로서의 은총은 말씀의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속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고 복음에 주어지는 은총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 율법과 복음
루터는 노예의지 가운데 처해 있는 인간을 성령이 말씀속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이라는 이중적 방식을 통하여 구원에로 이끈다고 말한다. 그러면 먼저 성령이 율법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에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살펴보자.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고 그것을 증가시킨다. 율법은 끊임없이 인간을 고발하고, 그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한다. 이것이 율법의 힘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의 힘을 알거나 느끼지 못해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어떤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율법의 설교를 통하여 일어난다. 율법은 인간을 무지로부터 일깨우고, 그들에게 율법의 힘을 깨닫게 하고,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체험하고, 회개로 인도되도록 실제 그렇게 한다.”15)
이처럼, 율법은 고발기능을 통하여 인간의 양심을 위협하고 죽이고, 소멸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상한 일(opus alienum)이며, 결국 우리를 복음으로 이끈다. 복음은 율법과 완전히 다르고 심지어 정반대의 기능을 갖고 있다.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고 책망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전파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복음의 주제이다(Christ is the subject of the Gospel).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르치는 것은 전적인 은총에 의해 우리에게 제공되어진 신적인 행위이다. 어떤 인간의 지성이나 지혜도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도 이것을 가르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이 선물(복음)을 받는다. 하나님의 아들을 계시하신다는 교리는 인간의 어떠한 지혜나, 율법 자체에 의해서 가르쳐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저는 외적 말씀에 의해, 다음에는 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었다.”16)
“그리스도는 율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과 행위의 주인이 아니라 세상죄를 제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 그런 까닭에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는 우리의 의지나 율법의 공적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온다.”17)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복음의 핵심이다. 이 복음은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율법을 완성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율법이 다 완수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복음은 아무런 일이나 공로도 전혀 없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총에 의한 구원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18) 더 나아가 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힘에 의해 영생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길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전혀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동시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죄에 대하여 죽고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된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의와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이 때에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라기보다는 구원의 능력이다.”19)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는 이 복음 선포가 곧, 은총이고 구원이다.
㉡ 은총의 의미
그러면 이제 루터가 말하는 은총의 의미를 말할 수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복음선포가 하나님의 은총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서 우리에게 자비로서 나타나며 이것은 은사와도 구별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은총은 가톨릭이 말하는 창조된 은총(created grace)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는 호의(favor)이다.
“은총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우리를 향하여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라는 사실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그리스도를 주고 우리 위에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부어주신다.”20)
이상으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속에서 나타난 은총을 이해하여 보았다. 다음으로 우리는 루터의 은총 개념을 이해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구원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칭의 문제로 넘어가고자 한다.
③ 개신교 구원론의 핵심 : 이신칭의
루터는 율법이 우리 양심에 고발하는 기능과 복음이 죄용서를 약속해 주고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일깨워 줄 때 회개가 일어나며, 이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을 통해 칭의가 주어지며(justificatio per fidem propter christum), 이 “이신칭의”에 의해 인간은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호의로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에게 ‘칭의’를 불러 일으키는데 이 때의 ‘칭의’개념은 가톨릭의 그것과는 상반된 개념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가톨릭은 ‘칭의’를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주입되어 인간이 실제로 의롭게 된다는 ‘인의’개념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는 ‘신·망·애’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의 루터는 가톨릭의 주입된 개념으로서의 하나님의 의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뛰어난 또 하나의 의가 있다. 즉, 믿음의 의, 또는 그리스도의 의가 있다. 이 의를 우리는 앞에서 말한 다른 의로부터 부지런히 구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의들은 이 의와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 의들은 황제들의 법, 교황의 전통들, 하나님의 계명들로부터 나오고 우리의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적으로 우리의 자연적인 힘이나 하나님의 은사에 의해 우에게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런 유의 의들은 우리가 누리는 그 밖의 좋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사에 속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행위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하시는 이 가장 뛰어난 의, 믿음의 의는 정치적인 것도, 의식과 관련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율법의 의도 아니며 우리의 행위들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그와는 반대로 깨끗하다. 즉, 위에서 말한 다른 의들이 능동적인 의(iustitia actina)라고 한다면 이 의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의(iustitia passiva)이다. 이 의와 관련해서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고, 단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며 경험한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믿음의 의 또는 그리스도의 의를 수동적인 의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 싶다.”21)
루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동적 의의 전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신칭의’ 신앙이 모든 기독교 지식의 핵심이며,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하는 결정적 요소로 보았다. 루터가 말하는 칭의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믿어주거나 전가하거나 인정하는(imputare, reputare) 행위로, 즉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에게 가치를 주는 행위를 의미하며 그 본질에 있어서는 죄를 전가하지 않음, 곧 죄의 용서에 있다.
“어떤 죄도 ···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양, 죄 용서에 의해 이럭저럭 하는 동안에 제거된다. 인간은 그리스도 덕분에 그가 죄를 갖고 있지 않는 듯이, 죄가 사해진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지와 하나님의 무상의 용서이다.”22)
루터에 의하면, 죄의 용서나 죄를 전가하지 않음은 곧 의의 전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 때문에 죄인을 의롭다고 여기신다. 따라서 죄인에게 주어진 의는 자신에 의해 생성된 자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밖으로부터 온 의’(alien righteousness)이다. 이 때의 의는 인간의 자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은혜스럽게 전가시켜 주심을 통해서만 의롭게 되는 데 그 본질이 있는, 인간의 ‘외부에 있는’ 의이다. 인간은 스스로 이것을 획득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마암은 하나님의 무상의 은총을 통해 그에게 수여되고 주어지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죄인의 의는 ‘능동적’ 의가 아니고 그가 ‘당하고’ 받을 수 있을 뿐인 ‘수동적’ 의이다.23)
루터는 ‘칭의’를 순전히 전가(imputatio)로만 파악하는데, 이것은 가톨릭이 주장하는 실제적으로 인간이 의화된다는 주장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보면 루터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루터는 칭의 받는 순간 인간이 죄의 신분에서 하늘나라 백성의 신분에로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구원론을 전개한 반면, 가톨릭은 실제적인 칭의를 시작으로 하여 견인에 이르기 까지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가톨릭에 있어서는 칭의와 성화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개신교 루터에게 있어서 이 둘은 분리는 아니지만 구분은 되는 것이었다.
정리하여 보면, 루터는 적어도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는 결코 구원에 이를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의 공로에 의해 발전되어가는 인간의 실제적인 의화개념을 거부하려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루터를 ‘순간적 전가 모델’이라는 새로운 구원개념을 창출한 인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3) 개방적 구도로서의 두 구원모델의 가능성
이상으로 우리는 구원론의 두 양상인 점진적 변형모델과 순간적 전가모델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소 논쟁적인 구도로 양진영의 입장을 압축 정리 하여서, 언뜻 보기에는 양 진영 사이에는 연속성의 여지가 전혀 없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가톨릭의 트렌트공의회의 ‘칭의교령’에 관한 다음의 내용과 개신교 루터의 ‘칭의와 성화’ 관계를 토대로하여 양 진영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비교할 수 있는 개방적 국면을 볼 수 있다.
(1) 가톨릭 : 트렌트공의회는 ‘칭의 교령’ 중 ‘칭의에 대한 규범(Canones de iustificatione)’ 제1항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적 은총없이 인간 본성의 힘(humanae naturae vires)이나 또는, 율법의 가르침(legis doctrinam)을 통한 자신의 공적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파문될지어다.”24)
이 말에 의하면, 트렌트공의회는 개신교 교리와 동일하게 인간의 자력구원이란 없다는 것을 명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2) 개신교 : 루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받아들여져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을 맺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그의 설교 ‘두 종류의 의(Two Kinds of Rrighteousness)’에서 두 종류의 의를 제시한다.
“첫번째는 외래적인 의(iustitia aliena)로서 밖으로부터 스며들어온 다른 분의 의입니다. ......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되며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 그러므로 사도는 로마서 1장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고 부릅니다. ...... 이 의가 일차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실제적 의(iustitia propria = actual righteousness)의 근거이며 원인이며 근원입니다.”25)
“두번째 종류의 의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입니다. .... 이것은 첫째로 육을 죽이고 자기와 관련된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가운데 선한 행실을 하면서 유익하게 보내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의는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유순하고 경외하는 데 있습니다. ....... 이 의는 첫 번째 유형의 산물인데, 실제로 그 열매이자 결과입니다.”25)
루터는 구원을 하나님의 죄용서를 통하여 칭의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지만, 이 때 주어지는 칭의는 동시에 ‘선행’을 하기 위한 근원과 원천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의의 전가(the imputed righteousness) 속에 존재하는 신앙은 성령의 첫 열매로서 이해될 수 있다.26) 비록 성령의 열매로서의 성화의 과정이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분리할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로서 신앙의 윤리적 열매를 선포한다. 따라서 ‘칭의’는 구원과 관계해서는 하나님의 죄용서를 의미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분리할 수 없는 성령의 열매로서 인간을 그 자신 안에서 의롭게 만드는 효과적인 것이며, ‘과정’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는 이중적 의미 곧, ‘수동적 의’ 이면서 동시에 ‘능동적 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루터 사이에 연속성을 거론할 수 있는 개방적 국면을 살펴보았다. 서로는 서로에게 교리적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과 지금까지의 구원론 전개 과정을 종합하여 구원론에 관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3. 연속성과 불연속성
우리는 서론에서 이미 개신교와 가톨릭이 복음에 대해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이 ‘복음’에 대한 일치점을 근거로 양 진영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비교하기 위한 구원론의 전개과정을 고찰하여 보았다. 이제 이상의 논지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1)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 2)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관하여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
A. 연속성 : 개신교와 가톨릭은 공히 인간의 자력구원을 거부한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는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선결조건으로서 모두다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을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B. 불연속성 : 개신교의 루터는 인간의 전적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모두 사라졌고 오직 은총에 의해서만 이를 회복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오직 은총(sola gratia)’만을 주장한 반면, 가톨릭은 인간이 은총에 협력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인정하여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역사를 위해 은총과 협력할 가능성을 가지는 접점이라고 말한다. 다음의 인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탁월성에서부터 나오는 구원과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구원에의 길을 함께 가도록 그를 해방시킨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가 전적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역사를 위해 은총과 협력할 가능성을 가지는 접점이다.”26)
또한, 개신교는 은총을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호의’(favor)로 이해한 반면에, 가톨릭은 은총을 두가지로 구분하여 ‘창조되지 않은 은총(uncreated gratia)’과 ‘창조된 은총(created gratia)’으로 나누어, 전자는 개신교의 은총개념과 동일하나, 후자는 인간을 실제로 의롭게 하는 효력적인 개념으로 여긴다.
2)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관하여
A. 불연속성 : 개신교는 은총을 인간에게 호의로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비27)로 보았기 때문에 ‘justification’을 ‘인의’ 가 아니라 ‘칭의’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반면에 가톨릭은 은총의 두가지 국면에 의하여 'justification'을 인간에게 효과적으로 주입되어 인간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키는 ‘인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인간영혼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쁘게 만들기 위해 초자연적인 사건을 인간의 영혼과 융합시키는 장식품 정도의 역할만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28)
가톨릭은 ‘인의’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선행을 통하여 공적을 쌓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여 칭의와 성화가 분리, 구분되지 않고 구원의 과정으로 등장한 반면에, 개신교는 칭의를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신 사건으로 보아, 성화는 실제 인간의 구원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B. 연속성 : 개신교는 칭의를 성화와 구분되는 법정적 개념으로 상정하였지만, 성화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면에서 성령의 열매로서의 성화의 시작이며, 이 때 주어지는 칭의는 ‘죄인의 용서’ 뿐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실제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산출시킬수 있는 ‘우리 고유의 의’가 된다고 한다. 다음에서 우리는 루터의 칭의 교리에 대한 칼 홀의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가톨릭의 인의개념과의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두 가지 효과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죄의 용서와 또한 그와 함께 의의 전가를 가져온다. 신앙은 또한 새로운 존재를 확립하고, 인간을 그 자신 안에서 의롭게 만든다. 이 두가지 신앙의 효과는 루터신학에서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가 신앙 그 자체인 의, 신앙이 제공하는 의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 두가지 곧 그리스도로 인해 전가된 의와, 새로운 순종으로 변하는 인간의 변화를 함께 본다. ...... 신자는 죄가 더 이상 아무 효력도 없는 것처럼, 그의 죄의 용서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죄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 철저하게 전투를 벌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의는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동시에 장차 미래에 올 것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신 것은 완료시제로 서술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이미 의롭다. 우리 자신 안에서 의롭게 된 상태는 현재시제로 오직 시작된 것으로 묘사될 수 있으나, 그 완성은 미래에 있다. 즉 우리는 오직 의롭게 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 바로 이런 관점에서 루터는 칭의에 대한 이중적 용례, 즉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새로운 존재와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29)
4. 나오는 말
이상으로 우리는 구원론에 관한 개신교와 가톨릭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고찰하여 보았다. 칭의론을 둘러싼 양 진영간의 대화 가능성은 그 근본(루터와 트렌트 공의회)에서부터 이미 존재해 있었다. 복음 내용에 대한 일치점, 은총의 선행적 작용에 대한 일치점, 성화부분에서 인간의 실제적인 의화 부분내용 등이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연속성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은 은총의 개념에 대한 불일치, 칭의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등은 여전히 서로에게 닫혀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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