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종말론 요약
종말론이란 영어단어는 헬라어의 두 단어가 합쳐져 있는데(eschatos와 logos), “마지막의 일들에 관한 가리침” 이란 뜻이다. 관습적으로 종말론이란 개인과 이 세상에 관해서 장차 일어날 사건들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은 성경적 종말론이란 의미로 신자의 현재적 상태와 아울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면도 포함하고 있다. 다라서 이 책은 시작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제1부는 시작한 중말론을 다루고 제2부는 미래적 종말론을 다룬다.
제1부 시작한 종말론
제1장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 개관
자유주의적 전통에 서있는 학자들은 종종 구약에는 종말론적인 사고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구약의 저자들은 현재 우리들이 말하는 미래적 종말론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주제들-죽은 후의 생활,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에 관해서는 분명한 대답을 주고 있지는 않는다. 구러나 다른 의미에서 볼 때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론적 성향을 띠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구약의 종말론이 구약의 특정 성경에만 한정된것이 아니라 구약 전반에 걸쳐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구약이 보여주는 종말론적인 전망은 인류의 초창기부터 있었다. 뱀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한 구속자가 오리라는 기대가 그것이다. 이 기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풍만해지고, 다양해지며,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구약의 신자들이 본 종말론을 종합하면;
(1) 메시야 대망 (장차오실 구속자)
(2) 하나님의 왕국 (나라)
(3) 새 언약
(4) 이스라엘의 회복
(5) 성령의 부으심
(6) 여호와의 날 (주의 날)
(7)새 하늘과 새 땅
이상의 모든 것들은 기대라는 지평 위에서 각기 제 빛들을 발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다양하게 불려졌던 장래의 어떤 때에,이상의 모든 종말론적인 사건들이 함께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예언적 전망”이라는 특수한 관점 아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일들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괸한 일들과 함께 섞어서 미래를 내다 보았다. 즉 구약의 메시야 사상이 신약에 와서 초림과 재림의 두단계로 적용되었으며 더욱 분명해 진 것이다.
제2장 신약 종말론의 본질
구약의 신자들의 신앙은 종말론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사람들에 의해 맛본 영적 축복들이 구약시대 보다 더 풍부해졌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신약의 종말론을 특징 지워주는 것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란 신자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이란 신자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구약이 예언자들이 에언한 위대한 종말론적인 사건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또한 역사의 최종적인 완성이 장차 어떻게 전개될 지에 관하여 신약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에언되었던 한 위대한 종말론적인 사건이 이미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신약성경은 신약시대의 신자들이 마지막 때에 즉 종말에 살고 있다고 표현한다. 또한 그들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위대한 종말론적인 사건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왕국이 세워짐 속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이 점은 일반적으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alogy)의 선구자인 도드(C. H. Dodd)의 입장과 어느정도 연관되어질 수 있다. 이 책은 “시작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alog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종말이란 이미 시작하였으나, 아직은 마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2) 신약성경을 살펴볼 때 우린즌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묘사했던 내용이 신약성경에 와서 두 단계로 인식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현재적 메시야의 시대와 미래적 메시야의 시대.
신약의 신자들은 자기들이 지금의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새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이 새 시대가 장차 또 다른 시대를 잉태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약의 종말론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오심을 뒤돌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날들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신약의 종말론은 동시에 장차 일어날 최종적인 완성상태를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확증할 수 있다. 마지막날은 오고있는 중이며 최종적인 상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즉 신약의 종말론은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앞을 바라보는 것이다.
3) 두종말론의 국면들 사이의 관계성은 현 세대의 축복들이 장차올 크나 큰 축복의 보증이며 담보물이라는 것으로 규명되어질 수 있다.
제3장 역사의 의미
이 책은 역사의 의미르 밝히면서 배격해야할 역사에 관한 해석을 두가지로 제시한다. 그것은 유형론적인 해석과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의 해석이다. 전자는 고대 헬라인들의 순환적인 견해에서 발견되며 오늘날 일어난 것이 미래의 언제인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다. 후자는 역사를 의미없는 것으로 보고 단지 의미없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이 두가지 견해는 기독교적인 견해와 병존할 수 없다.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역사는 ㅇ하나님이 여러 목적들을 이루시는 작업이다. (2)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3)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다. (4) 새로운 세대는 이미 시작하였다. (5) 역사의 모든 것은 목표를 향하여 움직여 가고 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 현세대의 특징적인 활동은 선교사역들이다. (2)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 속에 살고 있다. (3) 역사는 두줄기의 발전을 하고 있다. 즉 하나님 왕국의 줄기와 사탄의 왕국의 줄기가 있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왕국이 지배케 해야 하며 그것 속에 진정한 역사의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4)우리의 역사적 판단은 모두 잠정적이다. 이 것은 역사의 모호성을 넌즈시 알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판단이 잠정적이라고 해서 역사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5)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이해는 난관적이다. (6) 이세대와 다음세대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 뿐만 아니라 연속 상태도 존재한다.
제4장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의 왕국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이며 따라서 사도들의 전도와 가르침의 중심주제이기도 하다. 구약의 신자가 바라고 기대하던 사건 중의 하나가 하나님 왕국의 도래였으며 이런 기대는 특히 다니엘에 있어서 인자의 미래에 나타나심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의 계속성과 최후의 절정 뿐만 아니라 하나님 왕국의 도래는 성경적인 종말론의 중요한 부분능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을 어떻게 정의 할 것인가?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왕국의 중심적의미를 찾는데 있어서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왕국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이나 영토를 상징하는 것인지, 혹은 하나님의 통치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후자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 왕국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인류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사역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통치 사역의 목적은 죄와 사탄의 세력으로 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최종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징조들인가? 그 징조들 중의 하나는 예수님이 귀신들을 쫓아 내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단의 떨러짐이다. 세째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기적이 일어남이다. 그리고 또다른 표징은 복음의 전파이다.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다는 표징과 연결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는 선과 악의 투쟁이 끝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통해서 하나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 사이의 질투와 반목은 계속되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몇몇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이미 현존함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미래적인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많은 비유들은 왕국의 미래적 절정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신약 종말론이 이미 실현된 종말론과 실현되어져야할 종말론으로 나누어 말해야 하며, 따라서 신약 신학의 모든 것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에 의해 그 질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신앙과 생활의 측면에서 왕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무슨 의미를 가져다 주는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를 왕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상 하나님의 옹국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 시민이라는 것은 우리의 살과 실체의 모든 것을 우주의 구속의 목표의 빛에서 바라보아야만 한다.
제5장 성령과 종말론
구약에서는 최소한 성령이 세가지 방법으로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다. (1) 구약은 성령이 어떤 예언적 징표들을 수반하는 최종적인 종말론적 세대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말한다. (2) 성령은 장차 오실 구속자 위에 강림하여 그에게 필요한 은사들은 채워주실 분으로 말하고 있다. (3) 성령은 물질적인 축복들과 윤리적인 재생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미래적인 새생활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구약의 에언을 성취하는 일에 여러모로 연관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이란 미래가 현재 속에 돌파하여 들어오는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미래세대의 능력들과 축복들이 이미 성령으로 통하여 우리에게 와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구속된 미래의 능력이 성령이라는 인격으로 현재에 발휘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미래세대와 연관되어 있는 새로운 존재의 양식 속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을 소유하므올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은 장차올 세대의 축복들을 우선적으로 맛보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담보와 보증은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첫열매를 가진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축복들을 향유하는 그때, 곧 하나님의 왕국의 최종적인 완성의 때를 갈망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제6장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신약이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신자들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에언된 종말론적인 시대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인상태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신자들은 이미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부활될 육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날들 속에 살고 있으나 아직도 마지막날은 임하지 않았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이러한 긴장은 신약의 종말론의 중요한 전망이기 때문에 우리 신자들의 삶과 생각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긴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자극제가 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와 어느날 변하여 되어질 우리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조명해야 한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들과 예수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승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간절한 소망중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스런 왕국으로 들어가시며 그가 우리 안에 시작하셨던 선한 일들을 완성하시게 될 시기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제2부 미래 종말론
제7장 육체의 죽음
죄와 죽음의 필연적인 관계성은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죽음은 지의 결과로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며 그것의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지만 육정니 죽음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속의 빛 아래서 죽음은 다른 의미가 있다. 죽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결코 죄의 보상이 아닌 것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에게 대한것이지 우리에게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죄에 대해서 죽음이다. 현세에 있어서의 죄는 우리가 져야할 가장 무거운 짐이다.
우리의 죽음은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후의 적인 죽음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통하여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적이 우리를 위하여하늘의 복락에 들어가게 하는 문을 열어주는 하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제8장 영혼 불멸론
영혼불멸사상은 기독교의 사상인 것 같았고 초기의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기독교 신앙과 영혼불멸 사상이 마찰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빙크와 벌카우어에 와서 영혼불멸이 기독교 교리와 명백히 다르다고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있으나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아.
(1) 성경은 영혼불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2) 성경은 영혼이 본래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본체이기에 영혼의 계속적인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3) 성경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림직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선이라고 말한다.
(4) 인간의 미래에 관해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중심적인 메시지는 육체의 부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영혼불멸의 개념은 기독교 특유의 개념은 아니다. 오히려 육체 부활의 교리가 성경의 종말론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인간에 관하여 불멸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영혼불멸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인간은 불멸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불멸성을 충분히 누리기 전에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만 할 것이다.
제9장 중간상태
칼빈은 신자들의 중간산태를 축복과 기대의 상태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축복의 상태는 잠정적이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이후로 중간 상태의 교리는 개혁주의신학자들에 의하여 가르쳐져 왔으며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반영되고 있다.
구약과 신약은 인간의 사망시에 멸절되지 않고 음부나 낙원 또는 아브라함의 가슴이라 불리우는 축복의 장소 중 어느 한 곳에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하여 독립된 이론을 갖고 있지 않다.중간상태 교리는 육체의 부활, 땅이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않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미래에 괸해 이중적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기대를 갖는다. 우리는 사후에 그리스도아 함께 할 영원하고 영광스런 존재, 곧 부활로 인하여 절정에 이르게 될 존재를 대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가지 측면으로 생각되어져야 한다. 중간상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신자에게 큰 위로를 준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순례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진정한 집에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10장 재림의 기대
신약의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괸한 바울의 견해는 재림의 때는 불확실하지만 재림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림에 대해 계속적이고도 기쁜 기대속에 살아야 한다. 비록 그때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그때를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성경의 재림에 괸한 ?씀들이 재림의 시기를 측정하는 자료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신약의 저자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재림의 가까움은 연대기적 가가움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가까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초림이 재림의 확실성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재림이 확실하기에 재림은 항상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재림의 지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열심을 내야 하는 것이다.
재림에 대한 기대는 거룩한 삶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13장에서 제시된, 재림의 가가움은 우리로 하여금 어두움의 일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육체의 일을 도모하지 말며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재림에 대한 우리의 대망은 여러면에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대하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한 삶의 계속적인 촉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11장 시대의 징조들
일반적으로 시대의 징조들이란 표현은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거나 재림을 선행하는 사건들이거나 상황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징조들의 기본적인 향방은 미래지향적이며, 특별히 재림 사건을 둘러싼 사건들을 가리킨다.
시대의 징조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다음과 같다.
1) 시대의 징조들을 전적으로 세상 끝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려는 것이다.
2) 그 징조들을 비정상적인, 극적인, 혹은 큰 재앙의 사건들로만 생각하려는 것이다.
3) 그것들을 그리스도의 재림의 정확한 대를 계수하는 방법으로써 사용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4) 이 징조들로 통해서 미래사건들의 정확한 시간표를 반들려는 시도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징조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1) 비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대의 징조들을 미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징조들은 무엇보다조 먼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2) 시대의 징조들이란 앞으로의 역사의 종말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다.
3) 그것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 사이에 끝없는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4)시대의 징조들은 결단을 촉구한다.
5)시대의 징조들은 우리들에게 계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시간상으로 임박했다고 말하지 말고 상황상으로 임박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재림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언제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끊임없는 기대와 준비 속에서 살아야 한다. 다음의 모토가 이것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어제 죽으셨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셨으며,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자.”
제12장 특별한 징조들
시대의 징조들처럼 적그리스도라는 징조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면면히 나타나고 있다고 할것이다. 이 징조 역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가 될지 정확한 날짜를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반면에 우리는 시대들 사이 속에 살고 있다는 끊임없는 증표들 중에 하나로서, 늘 적그리스도의 세력들, 운동들, 지도자들에 대해 각성해야 한다.
제13장 재림의 본질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론을 배격해야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신약의 단어들로 부터 두 단계 재림 이론을 내세울 수 없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고 있는 신약의 용어들로서는 파루시아(현존)아포칼륍시스(계시), 에피파네이아(출현)등이다. 이 세단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번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전환란기론자들의 구별에 어떠한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2) 대환란을 묘사하고 있는 신약의 구절들은 교회가 환란을 시작하기 전에 땅에서 부터 들림을 받을 것이라고 가리키지 않는다.
(3) 휴거를 묘사하고 있는 중요한 신약구절마저도 전환란기 휴거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
(4)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백성과 함께 오심과 그의 백성들을 위한 오심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5) 두 단계 재림설을 주장한 어떠한 학설도 대환란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쏟아짐이라는 가르침으로부터 추론되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은 첫째 한 인격의 오심이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인격 속에 오신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은 눈으로 볼수 있게 오심이다. 의심할 바없이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심이다. 세째 그의 재림은 영화로운 오심이다. 즉 영광스런 정복자요 만유의 심판자 온세계의 창조자 만왕의 왕으로 오심이다.
제14장 천년기에 대한 주요한 견해들
이책은 무천년설을 실현된 천년기론이라고 주장한다. 무천년론자들은 계시록 20:4-6절에 언급된 천년기를 이미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ㅍ현재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무천년론자들은 미래의 영화롭고 완전한 왕국이 장차 올 새삶의 새 땅위에 건설되리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왕국은 승리하신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백성을 통치하심으로써 지금 이세상 속에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천년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한번 일어나지 두번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후천년기설은 세가지 점에서 무천년기론자들과 일치한다. (1)그리스도께서 지상적 왕위를 가지고 가현적으로 통치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2) 그 기간이 천년동안만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3) 그들은 천년기 이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천년기설에 의하면 복음이 전파되어 현세대가 점차로 천년기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같이 참되게 그리스도화된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역사적 전천년기설에 의하면 몇가지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발생한다. 교회는 최후의 환란을 통과해야만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사건이다. 천년기는 최종상태와 혼돈되어서는 안된다. 천년기 동안에는 죄와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천년기가 끝난 후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게 된다.
제15장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비판
(1) 세대주의는 성경계싱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공평하게 다루는데 실패했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서로 다른, 분리된 계획들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3) 구약은 장차 미래의 지산적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4) 성경은 유대인들이 천년기에 그들의 땅으로 회복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5) 왕국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가르치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뒷바침을 결여하고 있다.
(6) 교회는 괄호에 해당한다는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다.
(7)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후에도 사람들이 구원에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8)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천년기는 계시록 20:4-6에서 묘사한 천년기가 아니다.
제20장 새로운땅
성경에서 새로운 땅에 대한이론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1) 장차 올 생명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이 교리는 중요하다. 2) 새땅의 교리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충만한 다양성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3) 구약의 언약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새땅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은 완전히 이전의 땅이 소멸된다는것이라기보다는 우주가 새롭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 이유는 1)새우주의 참신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neos가 아니라 kainos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시간의 기원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본성이나 질에 있어서 전혀 새롭게 된 것을 의미한다. 2) 롬8장이 창조의 세계가 고대하는 바를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심이라고 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3) 새땅과 신자들의 육체들을 비교하여 설명하면 명백하다. 그것은 서로 다르지만 연속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현재의 우주를 완전히 소멸시킨다면 결과적으로 사탄이 승리하는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사?이 현재의 우주와 창조질서를 치명적으로 부패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되기 때문이다. 새땅에 관한 주요 성경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이사야65:17-25, 66:22-23, 그리고 벧후3:13, 계21:1-4등이다.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을 주고 확신을 준다.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이세상 속에서 낙관적으로 살게끔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 주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무한한 안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역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역사가 끝날 때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어린양께 찬양을 드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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