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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Theological Seminar

깔뱅과 바르트의 성경해석방법

깔뱅과 바르트의 성경해석방법...

목 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깔뱅(CALVIN)

1) 성서해석의 원리

2) 깔뱅의 말씀론

ㄱ. 설교된 말씀과 성령

ㄴ. 기록된 말씀과 성령

ㄷ.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

2. 칼 바르트(K. Barth)

1) 바르트 신학의 특징

2) 성서해석의 원리

3) 말씀의 3중직

ㄱ.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

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ㄷ.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3. 깔뱅과 바르트의 성서해석관에 따른 연 속성과 불연속성


Ⅲ. 결 론

Ⅰ. 서 론

교회사의 입장에서 볼때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가져다 주었다. “sola scriptura”이 한마디에서 중세와 16세기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즉, ‘성서를 볼때 어떻게 이해하느냐’ 라고 하는 관점은 성서 해석의 열쇠를 교회의 권위에다 두느냐, 아니면 성서는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하느냐의 문제 곧, 신학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일으켰다. 중세 4주덕의 성서해석에 反하여 16세기 루터는 “Scriptura est sui ipsius interpres”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루터는 성서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내적인 증거(testimonium internum Spritus Santi)”라는 해석학적 원리를 내세워 ‘은총과 복음’에 의해 성서를 해석 해야한다1)고 주장하였다. “sola scriptura”와 “성령의 내적인 증거”라는 규준은 바야흐로 개신교 신학의 초석을 이루게 될 명제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창시자인 깔뱅과 20세기 개혁교회의 대표격인 칼바르트의 성서해석관을 서로 비교하면서 그 유사점과 상이점을 찾아보려 한다. 글의 전개 방식은 먼저 깔뱅의 성서해석의 원리와 그 내용을 살펴보고, 다음 칼바르트 엮시 같은 방향으로 서술하여 둘을 비교하려 한다.



Ⅱ. 본 론


1. 깔뱅(CALVIN)

1) 성서해석의 원리

깔뱅이 성서를 해석하는 원리로 삼고 있는 것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성령의 내적인 조명이다. 이것을 깔뱅 자신의 말을 통해 살펴보자.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고수하자.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자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나 이성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 자체의 위엄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성경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흘러나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2)


둘째로 깔뱅이 위에서 전제로 하는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한 성서해석관’은 곧바로 “성서는 그 자신의 해석자이다”라는 명제와도 연결된다.


이상의 해석학적인 원리를 전제로 깔고 있는 깔뱅의 성서해석관은 루터의 성서해석관과 동일한 것인데, 이들이 ‘성령의 내적조명’과 ‘성서는 자신의 해석자’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데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다. 그 이유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외적 권위에 의하여 성서의 신빙성을 확신시키려 한 점과, 교황의 가르치는 권한과 교리확정의 권한에 의하여 성서의 진리성을 중명하려고 한 것, 그리고 로마 교황청이 성서가운데 불투명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를 잘 해명하고 교리화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3) 이들의 주장에 反하여 루터와 깔뱅은 성서의 주제에 관한한 그것이 결코 불투명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깔뱅과 루터는 다른 점도 있다. 루터에게는 경전을 경전으로서 판가름하는 내용상의 경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복음(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이었다. 이것을 가리켜 “경전속의 경전(Kanon im Kanon)” 이라고 하는데, 이것에 의해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추구하는가 아닌가?(Treibt es Christum oder nicht?)”라고 하는 원칙하에 성서를 경전비평 하여 야고보서 같은 서신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깔뱅은 성서의 내용상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영감론을 주장하였으며, 성서 전체를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루터와는 다르다. 이제 깔뱅의 성서해석관에 입각하여 그의 말씀론을 살펴보자.


2) 깔뱅의 말씀론

깔뱅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3중직적인 말씀론을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루터보다 기록된 말씀과성령의 내적조명을 더욱 강조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3중적인 말씀론을 “설교된 말씀과 성령”, “기록된 말씀과 성령”,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의 틀거리로 살펴보고자 한다.


ㄱ. 설교된 말씀과 성령

깔뱅에게 있어서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신·구약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하나님(Deus loquens)’ 으로 본다. 하나님은 단순히 침묵의 하나님이나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나 어떤 추상적 전제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계시하셨고, 인류를 구속하셨으며, 종말을 향한 역사를 펼치시는 하나님으로 깔뱅은 이해하였다.

“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복음의 교훈의 완전함을 찬양해서 우선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하고(히 1:1), 다음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첨부하는 것이다(히 1:2)··· ”4)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설교를 통하여 선포된다. 그런데, 이 설교된 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적 교사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전파하더라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 ····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의 앞에만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5)


깔뱅은 교회에서 설교된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결코 성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ㄴ. 기록된 말씀과 성령

깔뱅은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의 신앙을 경험한 사람은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원초적 말씀의 형태는 입을 통해서 선포되었지만, 이것은 기록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깔뱅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될 때도 성령의 조명과 인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깔뱅은 기록된 말씀의 저자가 하나님 혹은 성령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이 성서를 통하여 친히 말씀하신다고(itaque summa Scripturaeprobatio passim a Dei loguentis Persona sumitus)한다.6)

그러나 깔뱅은 축자영감설을 내세우지는 않았으며, 글자 그대로의 영감된 성서를 ‘믿지도’ 않았다. 비록 그가 성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된 것이라고 말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결코 성서가 현재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진리인 것처럼 이해하자는 것은 아니었다.7) 다만 17세기 정통주의와 20세기 초 미국의 근본주의의 영향으로 문자주의(biblicism)이고 율법주의적인 성서이해가 있었을 뿐이다.


ㄷ.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

깔뱅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위격과 사업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부활·승귀·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 그리고 재림까지의 모든 행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으로 성육하셨으며, 이 사람의 아들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시다.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주(the Reconciler)로서 혹은 중보자(the Mediator)로서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셨다. 바로 이 분이 우리의 말씀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그리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야 한다. 이 말씀은 그 어느 하나도 다른 둘 없이 이해될 수 없는 3중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8)

깔뱅은 성경을 읽는 주된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려는 데 있다고 말하며, 더 나아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구약 성경의 주제라고 주장한다.


“··· 그리스도는 성경 자체가 자기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문제를 분명히 해명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이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성경을 죽은 문자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의 우매함을 고발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이들이 성경에서 생명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주어진 목적이 이 생명을 위해서이다.”9)


이상으로 우리는 깔뱅의 성서해석의 원리와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적어도 깔뱅은 계몽주의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성서해석 방법과는 다른 기준에서 성서를 해석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서해석의 열쇠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 칼 바르트(K. Barth)

칼 바르트는 오늘날 개신교 신학의 대표격이라 부를수 있다. 소위 루돌프 불트만, 고가르텐과 더불어 변증법적 신학을 전개한 그는 신정통주의 노선을 만들면서 쉴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거센 저항을 나타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기독교와 신학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바르트는 초기에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한다. 그는 당시 19세기의 자유주의적인 성서해석관을 거부하고 성서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증언한다.


“성서 안에는 신기한 새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대답은 최후의 순교자 스데반에게 왔던 바와 같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내가 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열심히나 경험의 깊고 많은 것으로도 우리는 이 대답에 대한 당연한 권리를 얻지 못하였다. 그에 대해서 내가 말해야 할 것도 다만 충분치 못한 적은 부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훨씬 넘어서 뻗어 나가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그런데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성서의 내용을 파악하기에 이르고자 한다면 감히 우리 자신을 훨씬 넘어서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책은 이 이하의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읽는데 열심이고, 한 때는 근시안과 서투른 손으로 우리가 받을만한 대답을 그 안에서 찾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각자에게 그가 당연히 받을 만한 것을 - 한 사람에게는 많이, 딴 사림에게는 조금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 주는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우리에게 남겨 주지 아니 한다. 그런 대답은 어떤 무엇일 뿐이요, 우리가 곧 알게 되는대로, 그것으로 전부는 아니다.”10)


우리가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르트는 성서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학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성서해석에 있어서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따라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개혁교회의 창시자인 깔뱅과 그 뒤를 잇는 칼 바르트의 성서해석관을 비교 하려 한다. 나중에 거론하겠지만, 이 둘은 상당히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둘의 시대상황이 같은 것은 아니기에 출발점이나 전개방식에 있어서 다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깔뱅과 같은 방식으로 칼 바르트도 성서해석학적 원리와 그 내용을 다루려 한다. 글의 전개상 우리는 칼 바르트의 후기 사상(특히, 교회 교의학에 초점을 맞춤)에 근거하여 그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바르트의 성서해석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교회 교의학]1/1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이미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의 신학”을 교회 교의학의 중심내용으로 구성하였으며,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곧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아 자신의 신학의 특색을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1/1을 중심으로 그의 성서해석관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그의 신학적 특색을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되기에 그의 신학사상을 먼저 서술하려 한다.


1) 바르트 신학의 특징11)

먼저 바르트는 이원론적 신학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아간다.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신앙과 이성, 계시와 자연,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은 질적인 차이와 함께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위에 있다.”

신학의 학문성은 이성의 보편적인 길을 통하여 근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의 계시를 통하여서만 근거된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보편적 학문이 아니라, “신앙의 학문”이다.

바르트는 질적으로 다른 이원론을 상정하고 이것을 연결하는 방식으로서 존재의 유비를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원론의 극복을 언급한다. 신학의 모든 사유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성육신된 말씀인 그가 신앙과 신학의 근거요, 그 기독교성을 검증하는 규범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만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기독교와 문화, 계시와 종교, 신학과 철학의 긍정적인 관계를 부인한다.


2) 성서해석의 원리

바르트는 <전적타자>에 대한 경험, 즉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성서를 해석하는 핵심이라고 한다. 이 경험은 성경의 주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혹은 복음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르트는 성서에는 주제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은총과 신앙에 의해 성서의 주제를 경험할 때 성서의 해석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성서 이해에 있어서 성서의 중심 메시지를 포착하면서 ‘성서로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는 루터의 성서해석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바르트는 십자가와 부할에 의해서 특징지워지고 거룩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신·구약 성경의 주된 내용을 보고, 이 하나님이 바로 전적 타자인 것이라고 한다.


“참된 이해와 참된 해석이란 루터가 그의 성서주석에 있어서 직관적 확신을 가지고 발휘하였던 저 창조적 에너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루터의 창조적 에너지가 바로 깔뱅의 조직적 성서해석 밑에 깔려있다.”12)


3) 말씀의 3중직

바르트의 말씀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깔뱅과 마찬가지로 말씀의 3중직과 그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바르트는 성서해석의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며, 이 분만이 참된 ‘계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이 인간들 사이에서 말씀하셨고, 말씀하시고, 말씀하실 말씀이다. 사람들이 듣든지 말든지 이 말씀은 인간을 향해 발해지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말씀인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행하신다. 그의 행위는 벙어리가 아니다. 그의 행위는 크게 외치는 소리요, 말씀이다.··· 하나님은 행하신다. 하나님은 행하시기 때문에 또한 말씀하신다.”13)


바르트는 이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3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한다. 이것은 깔뱅의 말씀론과 대등소이한 것이다. 따라서 깔뱅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의 형태로 바르트의 말씀론을 살펴보려 한다.


ㄱ.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

바르트에게 있어서 설교는 대단히 중요했다. 그의 신학이 설교에서 나왔고, 설교를 위해서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설교를 통한 선포는 교회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며, 선포의 전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선포사이에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바르트는 말하기를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선포가 거기에 근거해야 할 “사명”이라고 한다. 선포는 결코 인간과 사물들의 존재 속에 내재하고 있는 내용이나, 가치질서를 인식하고자 하거나 인간의 내적 확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선포를 명령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14)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선포가 참된 선포로 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질 수밖에 없는 “대상”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기 위하여 인간에게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만일 대상이 아닐 경우 그것은 선포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 의하여 소유될 수 없다. 선포되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15)

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바르트는 앞에서 선포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 때에 발해지는 교회의 선포란 이미 과거에 일어난 계시를 회상하고 장차 이 계시가 다시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즉 “교회에서 설교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말씀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바르트가 여기에서 말하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계시”란 “하나님의 말씀”인 바 “교회의 머리,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주종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주종관계에 유비하여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인 성경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선포는 과거에 일어난 계시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일어날 계시에 대한 “기다림” 가운데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 회상은 교회가 그의 선포에있어서 “그 자신의 존재에로” 돌아가는 것을, 다시 말하여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교회와는 “다르며, 그 질서에 있어서 교회 위에 있는 존재”, 곧 “성서”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성서는 “이미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정경”이기 때문이다.16)

바르트는 성서와 선포 사이에 먼저 유사성이 있다고 한다. 성서도 “사람의 입을 통하여 일어난 선포의 기록”이라는 사실에 양자의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선포에 비하여 성서가 위에 있고 선포에 대하여 구성적 의미를 가진 반면, 선포는 성서에 근거하며 성서에 묶여 있는 그의 제한성에 양자의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르트가 성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의 명제”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정통주의의 성경영감설이나 축자적 무오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성서해석을 비난한다.


“저들의 주장은 성경자체가 자기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바를 진지하게 읽고 해명해 낼 때에 그리고 성경의 기원과 전승에 관한 사실을 정직하게 이해할 때 도저히 인정될 수 없다.”17)


그러면, 바르트가 말하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서의 중심 내용 때문에 성서가 성서로서의 권위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성서의 중심내용이란, “하나님의 자비의 약속”,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성육신”, “화해와 구원”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이란 문자적으로 영감된 책으로서 ‘계시된 신언집’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증언으로서 이 성경의 해석은 이 성경의 주제를 보면서 그리고 이 주제에 일치하게 이루어졌다.”18)


ㄷ.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바르트는 앞에서 말하기를, 성서는 과거에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를 교회가 회상하고 미래의 계시를 기다리도록 요청하며 그것을 선포하고 또 선포의 권한을 얻게 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또한 성서는 “참된 계시를 증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그것은 “증거의 형태를 가진 하나님의 이미 일어난 계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서와 계시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계시는 그것에 대하여 증거하는 말, 곧 성서와 구분된다. 이것은 어떤 사건과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서와 계시의 동일화는 사건으로서 발생할 뿐이다. 곧 성서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사건 속에서 성서와 계시가 하나될 뿐이다. 그러면,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는 성육신된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된, 성육신된 말씀이다.


“계시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그 안에서 성취된 화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계시를 말하는 것은 ‘말씀의 성육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시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근거한다고 할 때 이것은 삼위일체적 근거를 갖는다. 즉 성부의 뜻과 성자와 성령의 보내심에 근거한다.”19)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르트는 “계시된 말씀”과 “성경” 사이에 간격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계시”와 “성경”의 직접적인 동일화란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이 역사할 때 혹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화 할 때 그리고 성서가 진정 계시에 대한 살아있는 증언이 될 때 이 양자는 동일화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3. 깔뱅과 바르트의 성서해석관에 따른 연속성과 불연속성

우리는 이상으로 깔뱅의 성서해석관과 바르트의 성서해석관을 살펴보았다. 적어도 이 둘은 다음과 같은 일치점과 상이점이 있음을 우리는 말 할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말씀의 3중직을 거론한다. “선포된 말씀으로서의 설교,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서,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는 깔뱅과 바르트에게 있어서 일치점을 이루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바르트는 루터·깔뱅의 개신교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서의 핵심이며 모든 성서해석의 열쇠라고 한 점엮시 둘은 일치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시대적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 깔뱅은 계몽주의를 거치지 않은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성서의 “역사-비평학적 연구”라는 것은 알지도·듣지도 못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정통주의나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문자주의는 아니더라도, 성서자체의 권위를 루터나 후대의 바르트보다는 훨씬 강하게 내세웠다. 하지만,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의 출발점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에 기인하였기 때문에, 그가 깔뱅과 동일하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였지만은 깔뱅과는 다른 강조점을 취한다. 바르트는 성서의 중심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따라 성서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깔뱅만큰 기록된 성서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르트는 성서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신 복음”을 더욱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깔뱅과 바르트는 성서에 대한 입장에 약간의 상이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Ⅲ. 결 론

이상으로 우리는 깔뱅과 칼 바르트의 성서해석에 있어서 연속성과 불일치성을 논하여 보았다. 이들은 모두 개혁교회의 중심 교리를 형성한 신학자들이며 모두가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교회의 존재근거를 말씀과 계시라는 원칙에 두어 시대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 불트만의 “전제없는 해석의 불가능성”에 의해서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의 불가능성을 보았다. 물론 그후 예레미아스나 보른캄 같은 후기 불트만 학파에 의하여 새로운 시도가 진행중에 있지만, 불트만의 통찰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교회 밖으로부터 끊임없이 존재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속에서 오늘날의 성서해석 방법론(역사-비평적 방법)을 그대로 따르기 보다는 오히려 바르트의 성서해석방법론, 즉 원초적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복음)를 가장 위에 두고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이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근거와 사회에 대한 변증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 ·깔뱅을 이어 바르트의 성서해석은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오늘날에도 그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참 고 문 헌


20). 이형기, 종교개혁 신학사상,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93년.

21).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 김종흡·신복 윤·이종성·한철하 공역,「기독교 강요」上 (생명의 말씀사, 1995)

3. W. Nisel, DIE THEOLOGIE CALVINS, 「칼빈의 신학」

이종성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93.

4. 김균진, 「헤겔과 바르트」(대한기독교출판사, 1994),192-195쪽.

5. 이형기, “Karl Barth의 초기작품에 나타난 성경의 주제와 성경 해석의 문제”, 1985: 교회와 신학.

6. 이형기, “후기 칼 바르트에 있어서 신학적인 성경해석의 문 제”, 1992: 장신논단.

7. 칼바르트 저, 전경연 옮김, 「성서안의 새로운 세계」, 대한기 독교서회,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