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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주의 고난을 생각하라

주의 고난을 생각하라

고린도전서 2:1~2

Introduction

사람에게 주어진 은총 가운데 두 가지의 상이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억을 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망각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을 잘 기억해야 하고, 또 잊어야 할 것을 잘 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은 기억할 것은 잊어버리고, 망각할 것은 죽어도 잊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나 잘 잊기 때문에 말씀을 통하여 기억하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르시고, 구원하신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합당한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누구든지 은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단 성경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필요를 공급받으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다른 사람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윤택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것도 다른 사람이 짓습니다. 자동차도 다른 사람이 만들었고, 밥을 해먹는 압력밥솥도 다른 사람의 기술과 재주로 만든 것입니다. 일상생활의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기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힘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은혜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해서 온갖 은혜를 주셨습니다. 삶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은혜를 기억하기를 바라십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다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하신 은혜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된.(로마서 3:24) 그 은혜는 어떤 경우에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핏값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Main Subject

1.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1.1.

첫째로, 고통의 십자가였습니다.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고통이었고,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끔찍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잡혀가신 예수님은 그곳에서 불법적인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원래 산헤드린 공회는 한밤중에 모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일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이런 불법적 재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심문하고, 조롱했으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당시의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마태의 기록대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군중의 요구에 떠밀려서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마태복음 27:26). 십자가형은 채찍질로부터 시작되었다. 죄인을 기둥에 묶고서 프라겔룸(fragellum)이라는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이 채찍은 가죽으로 감은 나무 끝에 가죽끈들이 여럿 달려 있었는데, 형벌의 강도에 따라서 가죽끈에 납으로 만들어진 작은 공이나 아령, 혹은 날카로운 금속을 달았습니다. 이 채찍질은 너무도 치명적이어서 채찍에 맞은 죄수는 등이 패여 피가 흐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채찍질만으로도 목숨을 잃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나서 가시나무관을 머리에 씌었습니다. (마 27:27~31)

십자가형은 죄수로 하여금 자신이 달릴 나무를 들고 가는 게 규정이었습니다. 십자가형에 사용되는 나무는 죄수에게 고통이 가중될 수 있도록 나무를 다듬지 않았고,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단단한 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성경을 토대로 예수님의 신체 상태를 연구하는 의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채찍질을 심하게 당해서 이미 폐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예수님은 십자가를 졌을 때 쇼크 상태에 빠졌을 것이라고 합니다. 채찍으로 맞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이라서 육중한 나무가 사정없이 그 상처를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27:32)

형장으로 사용되던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자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들이 죄수들의 옷을 벗긴 이유는 죄수들로 하여금 수치심과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모멸감을 줌으로써 본인은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이 반항할 수 없도록 기를 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처를 입은 사람의 옷을 벗기면 그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진물 때문에 짧은 시간에도 상처에 옷이 달라붙어 굳기 마련입니다. 이 상태에서 옷을 벗기게 되면 마치 화상을 입은 정도의 통증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처에 감은 붕대를 갑자기 뗄 때의 고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병사들은 준비해 둔 못을 예수님의 손과 발에 박았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못은 길고, 머리가 컸으며 각이 져 있었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이 겪은 고통은 어느 정도였을까? 의학자들은 이 순간을 전쟁터에서 손에 총을 맞은 아픔과 비교합니다. 손에 총을 맞게 되면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총을 맞는 순간 동맥 신경이 터지거나 상처를 입기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그런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몰핀을 주사했지만,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런 환자들의 환부에는 살짝 입김만 불어도 그 고통은 마치 번갯불에 맞아서 살이 타 들어가는 정도라고 의학자들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오래 달리면 급격한 신체의 이상이 찾아옵니다. 위장이 기능을 상실해서 멈추게 되고, 심장은 더욱 빨리 뛰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갑자기 멈추게 됩니다. 이 상태가 더 진행되면 입술이 붓고, 혀가 부풀어오르며, 근육이 움직이는 데 필요한 산소와 영양분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게 되어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갈증을 이야기하자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주었다고 복음서들은 전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이 신포도주를 마시게 되면 상처로 인한 고통이 더욱 심해진다고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며칠 뒤까지 생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겪으시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지 세 시간만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그만큼 무겁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잔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로마시민에게는 그런 형벌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식민지 백성이나, 이방인들이 죄를 범하게 되면, 그것도 중죄를 짓게 되면 이런 십자가의 형벌을 통해 로마의 권력에 복종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하는 죄로 말미암은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담당해야 하는 모든 고통의 표상이었음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주님께 생명 다해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둘째로 주님의 십자가는 무죄한 십자가 였습니다. 원래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입니다. 죄없는 의인이 십자가를 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더구나 로마의 법으로 십자가 형을 받아야만 하는 죄가 있어야만이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명확하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해 시기심을 품고 있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꼭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신성모독을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기들의 권한 밖의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빌라도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여달라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당시의 총독이었습니다. 총독은 식민지를 다스리도록 파견된 로마의 행정관이며, 동시에 사법관이었습니다. 모든 권한이 빌라도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법률을 다루는 사람으로 함부로 사람을 처형하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로마인의 자존심이요, 양심이었습니다. 그는 로마법에 의하여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일만한 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고차원의 형이상학적 정신세계를 갖고 계신 분으로 보였고,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던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다는 것은 로마인의 양심과 자존심으로 도저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유대인들이 극렬한 시위를 벌이는 것입니다. 곧 반란이라도 일어날 기세였습니다. 유대지방을 다스려야 하는 빌라도는 정치적인 이유로 예수를 유대인의 손에 맡깁니다. 그러면서 하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게는 책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죄없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또는 유대인들의 시기심으로 인하여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없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짐을 지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굳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셔도 되었지만,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1.3.

셋째로 주님의 십자가는 저주와 멸시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는 멸시와 조롱이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심문 때에 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매질하도록 합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을 붙들어다가 매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매질하는 그들은 온갖 조롱을 퍼붓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또 홍포를 입히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조롱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침을 뱉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을 때에도 주님의 탄식 소리를 들으면서 네가 메시야거든 내려와 보라. 엘리야가 저를 구원하는가? 하나님이 저를 구하시는가 보자..고 하면서 깔깔 거리고 비웃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옆에 매달린 강도들마저도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주제에 자기 죄나 반성하고, 자기 죽음이니 안타까워 해야 하는 강도들 마저 예수님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은 발가벗겨졌고, 온갖 수치스런 모습을 다 들어내 보였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멸시와 조롱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하나님도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을 향해 눈을 두리번 거리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함께 계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님의 눈 앞에서 점점 멀어지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죽으심 직전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탄식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깊은 흑암이 찾아오게 됩니다. 신학자들은 이 흑암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많은 주장을 했습니다. 어떤 분은 아들의 고통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흐느낌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담당하고 있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우심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도 전혀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타당성이 있습니다. 분명히 주님은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외면을 당합니까? 비록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지만,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있는 것이기에 스스로 죄덩어리인 신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인류의 죄가 매달린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합니다. 나무 아래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 이 율법적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이며, 죄없으신 주님께서 친히 죄인의 모습으로 저주를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2.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빌립보서의 말씀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립보서 2:6)[1]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기는 했지만 결코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의로우신 분, 영화로우신 분이 무엇이 아쉬워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고통의 십자가, 억울한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를 왜 지셨습니까?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그가 없이는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능력이 부족할 까닭이 없습니다. 유대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아가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셨을 때에 베드로는 칼을 들어 예수님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으셨습니다. 지금이라도 기도하면 하늘에서 열두 영 더 되는 군대가 임하여 자기를 지키고 보호할 것이며[2], 또한 모든 원수를 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인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그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누가복음 23:34)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는 외식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체면에 의한 기도가 아닙니다. 자기를 멋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편안한 상황에서는 가식적인 축복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극도의 고통 속에서는 도무지 그런 용서와 축복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주님의 특별하신 사랑,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쳤지만, 죄인들을 사랑하신 주님의 그 사랑이 죄없이 의로우신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붙잡았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에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음성을 통해서 달콤한 유혹을 합니다. 거기서 내려가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메시야로 인정할 것이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3]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생각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신[4]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것은 다 잊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우리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배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주님의 곁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거꾸로 십자가를 지는 한이 있어도 기꺼이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기억한다면 이 세상은 천국과 같이 행복한 곳이 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강수와 같이 흐를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잊고 살아갑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쉽게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쉽게 말씀을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께서 생명 바쳐 사랑하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꺼이 주님처럼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5].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아름다운 장신구로 생각을 합니다. 교회를 가리키는 표시쯤으로 생각을 합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고통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억울한 탄식이 서려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저주와 사람들의 멸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주님께서 무능하기 때문에 지신 것도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는 무한한 능력이 있지만, 죄와 허물로 죽게 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우리가 그 십자가를 져야 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했기에 주님은 결코 그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그렇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마땅히 그 사랑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랑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서 사랑하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꺼이 우리의 몸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성도를 섬기며, 교회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울 수 있기를(골로새서 1:24)[6]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마포중앙교회



[1]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립보서 2:6)

[2]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태복음 26:53) : 여기에서 영은 헬라어로 “레기온”을 말하며, 로마의 군대의 한 개 군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약 6000명의 군대가 한 레기온이었다면, 12*6000=72000명의 엄청난 숫자이다.

[3]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마가복음 15:32)

[4]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5]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6]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