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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부활 그 후에 (2)

부활, 그 후에 (2)

마가복음 16:14~18

Introduction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최대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와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전설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활이 중요한 만큼,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에 그 부활하심이 인류에게 영광이 되고 축복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것으로 모든 것을 종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에 그 은혜와 영광을 취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부활의 영광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주님의 부활과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영광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과 축복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앙과 완악함을 버리고,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 없이 살다가 부활하신 주님과 상관없이 되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 되어지는 귀한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예수님은 여인들과 몇 명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보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놀라운 사건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도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에는 부활을 증거하는 믿음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14절 말씀에 보니 두려움 때문에 한 집에 모여 밥이나 먹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증거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완악해졌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들었다면 의당 기뻐해야 했고, 그 말씀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악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왜 이렇게 완악해졌습니까? 분명히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평소에 이들보다 더 믿음 좋은 사람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 믿음은 어디 가고 완악한 모습만 남았습니까? 그들 중에는 변화산상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기적에 참여하며, 엄청난 구원의 역사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인들이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주었고, 또 다른 제자들이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언하게 되었을 때에 그 소식을 듣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활의 현장을 목격했던 여인들과 함께,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주님을 만났던 두 명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완악해졌습니다. 말씀을 듣고 복음의 소식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은 왜 완악해졌습니까? 완악함으로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까?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시기를 바랍니다. 14절 말씀... “그 후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여기에 누가 음식을 먹고 있었다고 합니까? 열한 제자라고 합니다. 여기의 열한 제자는 가룟 유다를 뺀 예수님의 특별한 제자들입니다.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사랑했고, 또 특별하게 가르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세워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최고 참모들이 열한 제자를 빼놓고, 다른 사람들, 여인들, 엠마오로 내려가던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은근히 비위가 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에게 먼저 나타나셨을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면, 우리가 아닌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실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은 더 특별하다는 영적 교만과 시기심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완악함에 빠지게 되었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고, 뛰어나는 교만, 그리고 시기심이 완악함을 만들고, 불신앙은 만듭니다. 다른 사람은 부활과 복음을 증거하는데, 여전히 두려움과 완악함에 갇혀서 집안에 꽁꽁 숨어 비판이나 일삼고 있는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완악함의 껍대기를 깨뜨려야 합니다. 교만의 감투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를 깨뜨려야 합니다. 직분의 껍데기, 신앙경험의 껍데기, 사회적 신분의 껍데기, 물질의 껍데기, 학식의 껍데기.. 이런 것들을 잔뜩 뒤집어 쓰고서는 결코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시는 주님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완악하게 하는 감투을 벗어 던지고, 껍데기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처럼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은 망각한 채, 비겁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고, 돼먹지 않은 고집으로 복음을 거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교만의 껍질을 벗고, 주님을 향한 참 믿음으로 복음 증거의 헌신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본문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부활 신앙을 갖고, 이 소식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 그 이후는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부활의 영광이 더욱 충만히 임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위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이 복음을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영광으로 알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에게 많은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자랑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자랑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생명을 던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바른 생활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데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힘 자랑하고, 돈 자랑하고, 지위를 자랑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복음을 자랑하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마치 주님의 제자들이 그래도 내가 사돈데 하면서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에 대하여 신통치 않게 여기고, 그것을 업신여겼던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데는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도 못하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것, 귀한 자리에 앉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 이것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무능력하게 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게 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복음을 자랑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복음을 힘써 자랑해야 합니다. 그것을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가 가진 직분을 자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돈을 자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재능이나 소유를 자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런 것을 자랑으로 삼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오히려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도들이, 그리고 교회가 복음은 자랑하고 전파하지 않으면서, 세상적인 것을 자랑합니다. 세상적인 겉모습만 번지르르 하게 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에 성도들이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겉모양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과 그 복음을 자랑하고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에게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게 될 때에 죽음과 같은 삶의 환경에 생명과 축복의 기운이 가득하게 된다는 사실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그런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직분의 높고 낮음을 자랑하지 말고, 우리의 지위나 소유를 자랑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조금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살았다 그렇게 소리치고 다니시면 곧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인데, 그렇게 몇 년만 친히 말씀하시면 제자들이 굳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지 않아도 될 것인데, 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복음을 전파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 때문에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에는 내포되어 있는 주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특별하신 주님의 소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1.

첫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담대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확신이 있을 때 주장도 할 수 있고, 확신이 있을 때에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습니다. 확신이 없다면 자신있게 이야기하지도 못할 뿐더러 누군가의 작은 반론에도 이내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복음이 확장되어야 하겠기에 그것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목회에 자신이 없어지면, 메가폰을 들고 전도하러 나간다고 합니다. 나가서 누가 듣든지 안 듣든지 예수 믿으라고 외친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전도하고 나면,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이 마음 속에 찾아오시고, 구원의 확신과 소망이 가슴을 벅차게 한다는 것입니다. 감격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마음을 꽉 잡고 있던 어두움의 권세가 물러가고, 모든 스트레스가 한 방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옳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복음을 담대하게 전파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을 확신하기 때문이고, 또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하나님은 마음 속에 확신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므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고, 더 견고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3.2.

둘째는 복음의 가치를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긍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복음이 가치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복음은 온 천하에 필요한 복음이요, 또 만민에게 필요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동산 전체에 걸쳐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교회에 출입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확신을 있지만, 복음에 대한 자긍심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를 부끄럽고 민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랑 삼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복음을 전합니다. 구걸하듯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렇습니다. 복음은 온 천하, 만민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이 돈이 많은 사람이기에 누군가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나 선물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그것을 주면서 부끄러워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이아몬드 반지야. 하면서 당당하게 선물할 것입니다. 이 부끄러운 것을, 제발 좀 받아 주세요... 이러면서 비굴하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당하게 줍니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마치 구걸하는 사람이 사정하듯이 복음을 전합니다. 당당하지 못하고, 부끄러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누가 볼까 봐 몰래 숨어서 합니다. 무슨 죄 짓는 것처럼 쭈삣 거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함께 복음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당당하게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들고 비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숨어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3.

세째는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걸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목숨입니다.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목숨을 잃으면 헛것입니다. 권세가 아무리 좋아도 목숨보다 귀할 수는 없습니다. 목숨이 있어야 그 모든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불과 며칠전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는데, 그런데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의 잔당을 잡아들인다고 하여서 그들을 붙잡을 것이고, 결국은 죽일 것이 분명한 일입니다. 불을 본 듯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은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며, 또 그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까?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것 때문에 울고 불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의 가치를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은 세상의 허접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축복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된 이 영광된 은총입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별볼일 없는 세상 것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아이들 죽자고 공부합니다. 정말로 죽자고 공부합니다. 공부를 죽자고 했으니 결과는 무엇입니까? 죽는 길 뿐입니다. 사람들 죽자고 성공합니다. 성공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자고 공부하고, 죽자고 성공해서는 안됩니다. 다 헛된 일입니다. 부활 소망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죽을만한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영생의 삶을 위해서 지금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 땅의 목숨이 아닌 영생의 축복, 부활의 생명을 위해서, 육신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까?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해서 나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그 이후에 할 우리의 일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 부활의 영광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 복음의 길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것을 자랑하거나 그것은 전파하는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기쁘고 좋은 소식인 믿음으로 말미암은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는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고 그것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또 다른 축복의 섭리입니다. 우리의 삶이 복음을 전파함으로 부활소망에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부활의 가치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예수 부활을 피상적으로 믿는 그런 교회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부활 그 이후에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확신에 차서 복음을 전파하러 나가기를 바라셨던 주님의 기억하고, 힘써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부활 소망에 대한 분명한 확신, 그것의 귀중함, 그리고 이 땅을 사는 가장 바른 지식을 얻어 주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마포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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