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하나님의 축복
에베소서 2:11~19
Entrance Prayer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편57:7~11)
하나님 아버지 종교개혁 487주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도록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며,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헌신했었는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니 부끄러운 것 뿐입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였기에 교회가 짓밟힘을 당하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멸시를 받게 하고 말았습니다. 한국교회와 우리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시고, 오늘 예배를 통하여 다시금 신앙을 새롭게 하시며, 거룩한 삶을 결단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지금은 예배하는 처음시간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예배하는 모든 심령들마다 넘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Introduction
저는 요즘 신문보는 것이 재미가 없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신문 가득히 채워져 있는 내용들은 수많은 독설과 저주 뿐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의 행동거지가 철없은 어린아이들의 쌈박질만 같습니다. 그러니 신문을 보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나라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경제적으로 부강한 것, 사회의 제반질서가 제대로 확립되는 것,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는 것 등등의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조건들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회는 행복하고, 그 나라는 천국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나라에 천국과 같은 행복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를 향해 축복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낫다.”(잠언17:1)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은 모든 국민들이 서로를 향해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축복하고 격려하게 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자가 풍부하고, 또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최첨단의 IT산업은 물론이요, 인재가 풍부하다고 해도 서로를 향한 저주와 독설이 가득하다면 그 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고, 가난해서 외국의 원조를 받는 처지에 있다고 해도 서로를 향해서 축복하고 격려하며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면 그 나라, 그 백성은 행복할 것입니다.
교회가 천국같이 행복하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축복입니다. 서로를 향한 축복이 있는 교회는 천국같이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서 사랑을 속삭이며 축복하는 교회는 비록 건물은 화려하지 못해도, 재정은 풍성하지 못해도, 세상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은 전혀 없어도 그 교회는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를 향해서 축복하며 사랑의 말을 건네는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저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함께 해 봅시다. 곁에 계신 분들을 보면서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말을 하면서 험상궂은 얼굴이어서는 안됩니다. 아주 부드럽게, 아니 간드러지게 해도 됩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러니까 당장 천국이 된 것만 같습니다.
한 나라가 천국과 같이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은 그 나라에 축복과 사랑의 말이 가득할 때 이루어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이와같이 서로를 향해서 축복하는 것도 참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면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축복하실 때에 그 때 우리의 삶에는 넘치는 행복이 있게 됩니다. 가난해도 웃을 수 있고, 핍박 가운데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천국의 평안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과 축복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놈은 사랑하고 축복하는 자리를 찾아가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증오하고 비방하고 독설을 쏟아 붓는 곳에는 결코 찾아가지 않습니다. 행복은 그런 자리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축복하고 사랑을 말하므로 행복을 가져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함께하시고, 그로 말미암은 행복이 온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원래 축복이라는 말은 “빌 축(祝)” 자와 “복 복(福)”의 결합입니다. 즉 축복이란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복주시기를 기원하는 행위 자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축복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만 하나님께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에 복을 주시면 되는 것이지 다른 누구에게 복을 달라고 빌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지, 기도하시는 분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이분들의 주장은 참으로 옳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축복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말이지 하나님께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동안에 교회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복을 설명할 때에 세상의 복과는 다른 차원의 복이라는 의미로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마음에도 복이라는 말보다 축복이라는 말이 더욱 정감있는 말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한자어적인 의미에서 틀린 말이니 사용하지 말자고 하는 것은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은 오늘 설교 제목을 보시고 “목사님은 젊으신데 책을 안 읽으시나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면서 속으로 의구심을 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축복’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고, 우리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세상적인 복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특별하신 복을 의미하는 말로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아무튼 세상적인 복이든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이든 모든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복을 받으며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중의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분이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엄청나게 큰 복입니다.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을 아는 것은 많은 점에서 유익한 것입니다. 하물며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복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친근하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복보다도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시편 73:28절 말씀에서 “하나님과 가까이 함이 복이라 (시편73:28)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를 얻게 되는 것도 결코 복이 아닙니다. 명예를 얻게 되는 것도 부러움을 사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결코 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영원한 축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잠시 세상의 풍요만을 추구하고, 소유를 많이 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높아지기만을 힘써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인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없다면 결코 복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에베소서 2:12)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는 하나님과 그분의 축복에 가까이 있던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그들은 세상의 영광을 추구했고, 세상적인 풍요를 추구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복인줄로 착각하고 그것만을 얻기 위해서 애써왔습니다. 결코 하나님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않고 살아갈 때에는 소망이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것은 절망일 뿐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그저 세상의 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분명히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극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축복의 원천이 되신 아버지를 떠난데 있었습니다. 그는 크게 부유한 사람으로 떠났습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렸습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면 떠날수록 자유롭고 행복할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국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지꼴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생은 바로 돼지의 쥐엄열매를 먹으며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야 하는 탕자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그런 비참함이 찾아온 것은 바로 축복의 원천이 되는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비참한 영적 실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리고 떠날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힘주어 이야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께서 유다의 군병들에게 잡혀가실 때에 “멀찍이”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마26:58, 막14:54, 눅22:54) 베드로가 이와같이 주님을 멀찍이 따라갔음을 공간복음은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그는 주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더니 그에게 찾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적 실패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엄청난 상실감이 그를 엄습해 왔습니다. 그는 가야바의 뜰 밖에서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차마 주님을 뵈올 면목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복의 원천이 되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교회가 떠나가라 “아멘!”하고 화답해야 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하늘의 복과 땅의 복과 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멀찍이 서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분을 따르되 멀찍이 따라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또 때를 따라 말씀을 묵상하며, 예배에 최선을 다하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복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나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가까이 가고 싶다고 가까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정치적인 최고의 실권자와 친하게 지내면 좋다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모두가 대통령에게 연줄을 대려고 합니다. 정계에 힘있는 사람에게 연줄을 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뇌물을 주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높은 분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그러면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대통령을 만나고 그분에게 가까이 갈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대통령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대통령을 만나려고 청와대를 방문했다고 합시다. 대통령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대 마포중앙교회의 담임목사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정문 앞에서부터 쫓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아들은 어떤 방해없이 항상 대통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정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가슴에 자신의 신분을 표시하는 명찰만 달면 언제든지 대통령과 만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아무나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비록 한 나라에서 최고의 실력자이지만, 그와 친하게 지내게 되면 많은 유익이 있지만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분과 가까이 하기만 하면 그는 복덩어리가 됩니다. 복에 겨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된 인류는 어느 누구도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뭐라고 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뵈옵고 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인생도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가까이 하게 되면 우리의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공의의 불꽃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분에게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던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므로 그분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에베소서 2:13)
우리는 원래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망없는 이 땅의 것을 가지고 그것이 복인 줄로 착각하며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물과 피를 쏟으시고, 대신 저주의 형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케 하기 위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며, 동시에 자신의 몸을 그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전에는 도무지 가까이 할 수 없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와 기도하고 간구하고, 축복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16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찌니라”(히브리서 4:1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와지고, 또 하나님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간구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축복의 샘에서 마음껏 퍼마실 수 있게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충만하면, 풍성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우리는 도무지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힘입어 나아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축복의 샘에서 은혜의 물을 길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3.1.
첫째는 신분변화의 축복입니다. 본문 1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에베소서 2:19)
여기에서 신분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저주의 자식이었지만 이제는 축복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별볼일 없는 가문에 속해 있다고 해도 예수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아들로, 딸로 신분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의 신분을 가리켜 말할 때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베드로전서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면 이와같은 놀라운 신분의 변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신분에 속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복음으로 충만케 되어, 그 신분에 합당한 온갖 선물들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3.2.
그리고 또 복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응답의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16:24절 말씀에 보면,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 16:24)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와지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구하는 모든 것을 허락하십니다. 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것을 허락해 주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아버지도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를 위해서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얼마 안되는 생애를 살아왔지만 가끔씩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에 대하여 몹시 억울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것이고, 보다 좋은 실력을 쌓을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왜 아버지를 일찍 데려가셨느냐?” 따지면서 기도했었습니다. 얼마나 오랜기간동안 그런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기도라기 보다는 분풀이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우리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선한 분이셨습니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를 위해서 준비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간구하는 모든 것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나 이런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모시고 가까이 하는 사람,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3.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축복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형통케 하시는 축복입니다. 시편 1: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1:1~3)
복의 원천되는 시냇가와 같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는 형통하게 됩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형통하게 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형통하게 된다고 하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겐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모시기 바랍니다. 시냇가가 있을 뿐이지 가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있을 뿐이지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서 가장 형통한 축복을 받은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형통함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형들의 시기심 때문에 애굽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했음으로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있는 문제가 사라지기를 시작했습니다. 문제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시작합니다. 보디발의 가정에서 요셉은 지극히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보디발의 아내가 성적으로 유혹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적타락에 빠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는 모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억울한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감옥에서 요셉을 붙드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급기야는 그곳에서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함이라는 것은 고난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이 없고, 항상 순풍만이 불어온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옵니다. 풍랑이 옵니다. 그러나 이 풍랑인연하여서 더 빨리 가는 축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환란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으로 말미암아 축복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허락되는 축복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멀찍이 떨어져 소망없이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서 댓가를 지불하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제물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축복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그 은혜의 샘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축복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므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신분변화의 축복, 기도응답의 축복, 모든 것에 형통케 되는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축복의 원천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므로
신분변화의 축복, 기도응답의 축복, 형통케 되는 축복을 얻기로 소망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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