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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다시 없을 큰 믿음 (눅7:1~9)

다시 없을 큰 믿음

누가복음 7:1~9

Entrance Prayer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시편 62:1~2)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거룩한 성일을 허락하시며,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심령들이지만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 주심을 믿습니다. 또한 주 앞에 엎드릴 때에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이 주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을 경배합니다. 예배 중에 오셔서 축복하시고, 넘치는 사랑으로 채우시옵소서. 악한 마귀가 감히 우리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아멘 -

Introduction

한 주간도 믿음으로 살아오신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크신 축복으로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속에 참된 믿음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탄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18:8) 그러나 비록 참된 믿음이 희귀한 때이지만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을 놀라게 할만한 큰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도는 큰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은 큰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럴 때 원래 아멘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 교인들은 이런 것을 잘 못해요.. 너무나 점잖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아멘할 줄 알아야 멋진 신앙인입니다.... 그래도 아멘 안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우리가 큰 믿음을 소유해야 하는 것은 믿음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들어 저 바다에 던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큰 믿음을 갖지 말고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을 가지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위력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그의 제자들이 큰 믿음을 갖기를 소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나타내실 때마다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큰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큰 믿음으로 큰 축복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 L. 무디 선생이 미국의 영적 부흥을 이끌고 있을 때입니다. 무디 선생의 교회가 자리하고 있던 시카고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삽시간에 온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문사 기자들이 취재하다 보니 한복판에 있는 무디 선생의 섬기시는 교회도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 기자가 그것을 보면서 빈정대듯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주신다고 설교하셨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성전인 교회가 불에 타 없어지는 것을 보고 왜 가만 두십니까? 참 이런 질문 받으면 갑갑합니다. 속이 터집니다. 나같으면 이렇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글쎄 말입니다. 나도 그걸 하나님께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무디 선생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기자의 비아냥거리는 질문에 대하여 믿음으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하나님께 큰 교회를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하나님의 응답이 온 것같습니다. 큰 교회를 짓기 위해서는 이 교회를 헐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불에 태움으로 허는 비용을 덜어주신 것입니다. 기자 양반,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이제 앞으로 여기에 큰 교회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의 무디 선생은 화재를 피해 잠옷바람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빈주먹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돈은 갖고 계십니까?" 무디 선생은 옆구리에서 성경책을 꺼내면서, "나는 수표와 돈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써도 바닥이 나지 않는 하나님의 금고인 이 성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기자 여러분들은 이제 크고 훌륭한 교회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후 무디 선생의 교회는 믿은 대로 되었습니다. 이같이 믿음은 양을 결정합니다.

사람은 꿈을 꾼 만큼 이룹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 믿음의 그릇대로 이루어갑니다. 작은 믿음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큰 칭찬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면, 하나님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엄청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축복 또한 크게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상상할 수 없는 주님의 기적을 매일매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큰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큰 믿음으로 크게 칭찬듣고, 큰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본문에서는 이 세상에서 다시 없는 큰 믿음의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갈릴리뿐 아니라 수많은 지역을 다니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기적을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갈릴리 가버나움을 지나가시다가 참으로 큰 믿음의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고 감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누가복음7:9) 주님은 당시의 로마의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신 것입니다.

1.

그렇다면 백부장의 믿음을 어떤 것이기에 주님께서 감탄하셨습니까?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누가복음 7:2)

여기에 보니 백부장은 병들어 죽게 된 종을 사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의 맥락을 잘 보아야 합니다. 당시에 종은 사랑을 받을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 법률가 가이우스는 "주인이 노예의 생사를 주관할 권리를 소유한다"고 했고, 로마의 저술가 벌로는 농업의 도구를 셋으로 나우어 언어를 가진 도구, 소리있는 도구, 소리없는 도구로 구분하여 노예를 언어를 가진 도구라 하였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조차도 그의 책 [윤리학]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이 없는 물건에 대해서는 우정도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실로 말이나 소에게도 그러하며, 노예를 향해서도 우정이나 정의는 있을 수 없다. 주인과 노예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도구가 생명이 없는 노예인 것과 꼭 같이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 당시에 종은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단지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고통을 당하든지, 아니면 죽을 위험에 처해 있든지 주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질 않았습니다. 주인과 노예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우정이나 정의 실현 그런 것은 당시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병든 종은 사랑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버려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병들어 죽게 된 종을 사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칭찬하는 믿음, 주님을 감동시키는 큰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사랑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부장이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을 때에 그들이 말합니다. 저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누가복음 7:5) 이스라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시에 로마의 식민지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종의 신분은 아니었지만 종이나 거의 다름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들 역시 백부장의 사랑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관례로 볼 때, 이스라엘은 착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자기들의 이익을 취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기술적으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취하느냐가 그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백부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을 존귀히 여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부장은 사랑이 있는 믿음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저 이름뿐인 믿음으로는 안됩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을 그런 사람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우리를 크게 칭찬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큰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사랑없이 이름뿐인 믿음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받아, 목사요, 장로요, 안수집사요, 권사로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들을 도구로 보고, 소모품으로 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감당한다고 해도, 주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크다 평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를 향해서도 주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고 사역하던 부목사님이 간암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온 교회가 고통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 때마다 철야기도 때마다 병든 부목사님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회로부터 그 부목사님에게 사임하라는 통지가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교인들이 담임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 부목사는 소모품일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역을 감당할 수 없으니 사임케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부목사가 소모품이라니.... 이 말에는 전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론 맞을지 모릅니다. 더 이상 직무를 감당할 수 없으니 사임하라는 것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종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노예로 평가한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꾸미고 성장시킨다고 해도 그 목사님과 그 교회는 큰 믿음의 목사님이나 큰 믿음의 교회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 바로 그것이 주님을 놀라게 하는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서 좋은 일 하나 할게 없을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을까 궁리를 하는데 그 어느 날 밤에 잠이 잘 안옵니다. 그래서 그는 평복을 입고는 야전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남북 전쟁때 부상을 입었던 그 군인들이 아직도 고통하고 있는 그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병자들을 이리저리 돌아보는 중에 한 병사의 손에 뭔가 들려 있습니다. 한쪽에 종이, 한쪽에 펜을 들고 뭘 쓰려고 하는데 글이 잘 쓰여지지 않습니다. 링컨이 다가가자 그 병사는 미안하지만 내 편지를 대신 좀 써 주겠냐고 부탁합니다. 링컨이 쾌히 그 병사의 편지를 대필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마 저는 살아서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나라를 위해서 용기 있게 싸웠어요. 어머니, 정말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가족들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후에 천국에서 만나요."

병사가 불러 주는 되로 링컨이 편지를 씁니다. 그 병사의 이름을 싸인하고 그 밑에다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이렇게 싸인을 했어요. 그 병사가 대필해준 그 편지를 받아서 보니까 자기 편지를 써준 그 분이 대통령입니다. "각하 감사합니다." 그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아니요. 감사는 내가 해야 돼요. 당신은 바로 나를 위해서 싸웠고 미국을 위해서 싸웠오. 당신은 바로 나의 가족이요. 나의 아들이요. 당신은 미국의 아들이요." 그 병사는 링컨의 손에 붙잡힌 채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중에 링컨은 그 병사에 뺨에다가 키스를 하면서 크리스마스 인사를 보냈습니다. "my son, merry christmas(내 아들아, 복된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링컨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와같은 점 때문입니다. 그는 사랑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말뿐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있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끊임없이 사랑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아꼈습니다. 그의 믿음은 사랑이 있는 그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허울뿐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도무지 우리에게 쓸모없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아끼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될 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를 보시고 깜짝 놀라시고, 다시 볼 수 없는 큰 믿음이라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위대한 믿음의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백부장은 병들어 죽게 된 종을 사랑했습니다.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쓸데없는 짓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도, 도덕으로도 의미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실천하므로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종을 위하여 주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누가복음7:3)

백부장은 예수님께 사람들을 보내어 자기 종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단지 마음속에만 간직되어 있는 화석화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기도로 표현되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께 간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마음 속으로 품고 있다고 큰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간구하는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믿음은 큰 믿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큰 믿음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큰 믿음을 소유하시므로 우리 주님의 큰 칭찬, 주님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와 간구해야 합니다. 새벽에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밤에 기도해야 합니다.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고, 때로는 산에 올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결코 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와도 어려움이 다가와도 결국에는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태산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다고 해도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태산이 저 바다에 던져진 바 될 것입니다. 그런데 큰 믿음의 사람의 기도의 자세가 어떠한가를 보아야 합니다.

2.1.

첫째는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백부장은 당시에 로마의 군대였기 때문에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계급으로 볼 때는 중대장쯤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의 중대장과는 그 영향력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백부장은 단순히 군대만 지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군사, 행정 뿐만 아니라 경찰권까지 행사했습니다.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식민지를 지배하는데 있어서 위력을 과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로마군대에 있어서 백부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가인 폴리비우스(Polybius)는 백부장이 될 자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부장들은 위험을 쫓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명령을 내릴 수 있어야만 하고, 행동이 흔들림이 없어야만 하며, 믿음직스러워야만 한다. 그들은 전투에 뛰어들어가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되며 전투가 절실히 요구될 경우 진지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 역시 이와 같이 그 당시 백부장에게 요구되는 자격요건을 다 거쳐서 뽑혀진 사람었습니다.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가버나움을 좌지우지할 만한 대단한 실력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교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 앞에 최대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간구는 겸손한 간구였습니다.

여기에 백성의 장로들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건방지게 백성의 장로들을 보내서 자기의 힘을 과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생각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율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을 짓기까지 유대인을 사랑했다는 것을 볼 때에 그렇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이 어떠한가를 알았습니다. 지금 그는 백부장으로서 막강한 군사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유대의 위대한 랍비, 이스라엘의 메시야 앞에는 한낱 이방인이요, 부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사람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감히 이스라엘의 왕 메시야 앞에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그들에게 간곡한 부탁의 말을 담아 예수님께 보냈던 것입니다.

백부장의 겸손한 간구를 보신 주님께서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시기로 작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집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부장은 자기의 친한 친구들을 보냈습니다.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백부장의 집이라고 한다면 으리으리했을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로마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백부장의 집은 화려했을 것입니다. 그 화려한 집에서도 그는 예수님을 맞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보잘 것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백부장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겸손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볼 수 없는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시고, 백부장을 주님의 자랑거리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노벨평화상도 받고, 20세기 성자로 알려졌고, 아프라카에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아주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고향도시는 발끈 뒤집어졌습니다. 온 시가가 들떠서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시장이 슈바이처 박사를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기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일등칸을 바라보았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등칸을 보니까 슈바이처 박사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차를 못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싸구려 삼등칸에서 나오는 중에 허술한 영감이 터덜터덜 내리는데 가만히 보니까 슈바이처박사였습니다. 시장이 나가서 왜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슈바이처는 "이 차에 4등칸이 없어서 3등칸 타고 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미담이며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높을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있을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직분이 중할수록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분들을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고 사람들도 그를 존경할 수 있습니다. 『좁은 길』을 쓴 '앙드레 지드'는 '겸손은 천국의 문이요, 교만은 지옥의 문이라'고 그랬습니다. 톨스토이는 "겸손하여라 진실로 겸손한 것이 자기 완성의 토대가 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겸손한 간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저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겸손하게 주님을 찾고, 또한 간구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어야 합니다. 항상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자인하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간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 주님 앞에 너무도 당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당당하다 못해 교만하기까지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모든 간구는 겸손한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2.

둘째로 백부장의 기도는 주님을 높이는 기도였습니다. 7~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하여 주옵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누가복음 7:7~8)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다시 볼 수 없는 큰 믿음으로 평가하시고 칭찬하시고 자랑거리고 삼으신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백부장의 기도가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기도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지극히 높인데 있었습니다. 당시에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구경하고 즐기며 신기해하기는 했습니다. 놀랍다고 감탄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결코 높이지는 않았습니다.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저 사람의 누이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는가? 하면서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촌놈이 출세했네!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내가 감히 나가서 맞을 수 없는 위대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감히 우리 집에 모실 수 없는 높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명령은 천하를 다스리시는 명령이 되어서 온 천하가 그 앞에 복종하는 능력있는 명령이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집에 들어오시지 않더라도 말씀만 하시면 천하가 예수님 앞에 복종할 것이라고 믿고,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높이 평가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제대로 보았습니다. 제대로 믿었습니다. 그는 그 믿음의 큰 그릇대로 놀라운 주님의 칭찬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높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천지가 떫니다. 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셔도 사납게 흉용하던 풍랑조차도 잠잠하게 되어집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귀신들도 그 말씀 앞에 기겁을 하고 줄행랑을 놓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말씀입니다. 치료하는 말씀입니다. 능력을 힘입게 하며 새 힘을 얻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백부장을 주님의 말씀의 이런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철저하게 의존하므로 간구했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종이 낫겠나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질병에 대하여 주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한 마디만 하시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과 권세를 철저하게 믿고 주님께 간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권세를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높이므로 기도하고 간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큰 그릇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축복하시고, 기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별볼일 없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고, 우리 교회는 주님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런 교회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백부장과 같이 큰 믿음을 갖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놀랍게 축복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자랑하실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주님의 손에 쓰임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과 함께 땅끝까지 자랑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없는 큰 믿음으로 주님의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게 될 때, 간구하되 겸손으로, 또한 주님을 높임으로 간구하게 될 때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한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의 칭찬을 가득히 소유하는 복된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백부장의 믿음과 같이 “다시없는 큰 믿음”을 소유하기로 결심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