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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삭개오야 내려오라 (눅19:1~10)

삭개오야, 내려오라

누가복음 19:1~10

Entrance Prayer

(9)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10)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9~12)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간을 은혜 가운데 인도하시고, 거룩한 성일 주님 앞에 예배할 수 있도록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다짐했지만 혹 실수한 것, 죄된 것 있으면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예배하는 심령들 위에 주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충만히 채워 주시옵소서. 악한 마귀는 틈타지 못하게 하시며, 오직 주의 이름만 높아지기를 소원하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 아멘 -

Introduction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Williams Barnes는 그의 불합리한 인간(Irrational Man)이라는 책에서 현대인은 불합리한 단편적 인간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성(reason)이 아니라 분노(anger)속에 사로잡혀 이것을 폭발시키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으며, “현대인은 이방인이다.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떨어진 이방인이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해서도 이방인이요,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이방인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방인이 되어버렸다고 역설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 역시 현대인은 고향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삭개오는 이런 현대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철저하게 이방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하며 손가락질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와 함께 식사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처럼 따돌림을 받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괴로움 가운데 하루 하루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찾아온 소외와 따돌림은 무엇 때문입니까?

Main Subject

1.

그것은 바로 삭개오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고 있던 열등감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이 말씀을 하는 데는 특별한 의도가 있습니다. 단순히 키가 작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뽕나무에 올라가야 했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것을 기록한 의도는 그는 키가 작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인식하지 못하고, 욕망의 포로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다는 열등감에 빠져 자기의 참된 가치를 바르게 볼 줄 몰랐습니다. 낮은 자존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깊은 소외의 늪에 빠져 허덕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1.

본문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누가복음 19:1~2)

여기에 보니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부자였습니다. 이 말은 그가 세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착취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향하신 비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며,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저 자기의 배만 부르게 하는 짐승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부모로 통하여 그에게 삭개오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어의 쟈카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의롭다,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가 순결한 사람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이스라엘 백성의 순결과 거룩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셨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고 싶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향해서 이런 기대하고 계셨는데, 삭개오는 키가 작다는 열등감에 빠져 하나님의 기대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분노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보다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세리가 된 것입니다. 민족의 반역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송두리째 착취하는 못된 매국노가 된 것입니다.

열등감은 이와같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상의 현상만을 바라보고 그것에 집착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가인이 열등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동생 아벨의 것은 하나님이 받으셨고, 자기의 것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열등감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있는 자가 되기를 기대하셨지만 그는 결국 죄에게 져서 동생을 쳐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내는 자신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립니다. 가정을 세우고 하나님의 동산으로 만들어야 하는 귀중한 비전은 망각하고 남편에게 집착합니다. 의부증 환자가 되어버립니다. 남편이 괴롭습니다. 자녀들에게 집착하여 그들을 괴롭게 합니다. 그들의 인격마저 파멸로 몰라압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가난한 사람은 가난함에도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든 부자들은 도둑놈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자는 다 죽어야 한다. 그래서 부자라고 하면 욕부터 합니다. 좋은 차를 보면 괜히 긁고 지나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열등감은 우리의 신앙인격을 파괴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방해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교회가 열등감을 갖게 되면 괜히 성장한 교회 욕만하고 있습니다. 성장한 교회 욕한다고 우리 교회가 부흥합니까? 아닙니다. 열등감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향하신 꿈과 비전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우리안에 있는 모든 열등감을 신속히 제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난미의 비전을 마음에 품고, 바라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2.

삭개오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아지는 데만, 성공하는 데만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은 사람입니다. 아이였을 때에 친구들의 놀림거리였습니다. 큰 친구들로부터 늘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 소원이 생겼습니다. 저 키큰 녀석들을 언젠가는 납작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키가 작으니 무조건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모자랐습니다. 더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높아짐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혔습니다. 끊임없이 높아지기를 추구했습니다. 자기가 높아지는 일을 위해서 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뇌물을 받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에게 아부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측면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리장이 되었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위해 매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삭개오의 이런 성품이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본문 3~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누가복음 19:3~4)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예수라는 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기는 들었는데 그분이 정말로 어떤 분일까? 세리들의 친구이기도 하신다는데 정말일까? 삭개오의 마음에 예수님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주변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도무지 가까이 갈 수도 없었고, 예수님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 때 삭개오는 주위에 있는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삭개오에겐 체면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높이 올라가는 것만이 목적이었습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무조건 높아지려고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조건 높은 데만 올라가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아지기만 하려는 삭개오의 성향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열등감을 높아지는 것으로 극복해 보려고 했습니다. 높아지면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높아질수록 더욱 소외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성도들이 모두가 성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회사에서도 늘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사업을 할 때도 망하는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요 성공하는 사업을 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물질도 많이 얻기를 바랍니다. 권세도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잃어버리고 그저 성공과 출세를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몰염치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높은 신앙인격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의한 짓을 함으로 그 이름에 먹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높은 자존감이 있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조건 높아지려고만 합니다. 힘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꿩잡는 것이 매지 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행동입니다. 간혹 돈만 벌면 된다고 하면서 도무지 엉터리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시는 성공한 것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끝없는 소외의 심연일 뿐입니다. 따돌림의 고통과 외로움일 뿐입니다.

2.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리로 행하시다가 삭개오를 보았습니다. 쳐다보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거룩한 이름은 가졌으나 열등감에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도 잃어버렸고, 그저 세상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짐승이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삭개오를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누가복음 19:5)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에 보니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삭개오가 올라가 있지 말아야 하는 자리에 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열등감과 낮은 영적 자존감 때문에 하나님의 비전을 잃어버린 채 그저 세상의 것만을 따라 올라갔던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삭개오가 있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삭개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하면 된다는 되지도 않은 높은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내려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를 향한 모든 조롱과 저주, 그리고 소외와 따돌림은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소외를 극복하고 주님의 축복을 얻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영예를 얻고,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섬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향해 높아만 가려는 낮은 영적 자존감의 뽕나무에서 급히 내려와야 합니다.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깊은 소외의 수렁으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에게 급히 내려와야만 살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것에 여전히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세상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끝날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바쁘게 살아갑니다.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고 비전이고 뭐고 없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일을 위해서 삭개오처럼 열등감의 뽕나무에 매달려 그리로 올라가기에만 급급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곳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때에 소외는 사라지고 주님의 축복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대심방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현대 교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심방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해는 됩니다. 남들에게 자신의 가정살림을 공개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을 주님께도 공개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렇다면 문제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이번에 우리의 가정을 방문하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삭개오야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난 안 내려 갈겁니다. 주님은 왜 우리 집에 들어오시려고 합니까? 베드로의 집도 있고, 요한의 집도 있는데.. 왜 바쁘고 시간없는 우리 집에 들어오시려고 합니까? 안됩니다. 고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삭개오가 지닌 열등감의 뽕나무에 매달린 신세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하나님의 따돌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정을 향해 무엇을 원하시는지 바라보며 소망해야 합니다. 바쁜 일 다 뒤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소망하며,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대심방을 맞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삭개오를 향해서 속히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삭개오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급히 내려왔습니다. 자신의 가정을 심방하시는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영접했습니다. 내동댕이치지 않았습니다.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귀찮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삭개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에게 비전이 회복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순결한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비전이 그의 마음 가운데 살아났습니다. 삭개오는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내가 토색한 것을 갚겠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서 재산을 내어놓겠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전에는 복수심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긍휼의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전에는 세상밖에 모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비전을 꿈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향해서 선언하셨습니다.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누가복음 19:9)

구원과 함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높은 영적자존감의 사람이 되어지게 되었습니다. 질 낮은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의 존귀한 축복의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 철저하게 극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등감입니다. 세상의 열등감에 매여살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비전을 상실하게 되고, 세상의 높아지는 것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통해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깊은 소외와 고통에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열등감으로 오른 뽕나무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세상의 욕심 때문에 허겁지겁 올라갔던 뽕나무에서 신속히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금번 대심방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열등감과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주님을 맞이하므로 비전을 회복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영적 자존감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열등감과 욕심의 뽕나무에서 신속히 내려와

찾아오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비전과 영적 자존감을 회복하기로 소망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