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
마태복음 15:21~28
Entrance Prayer
1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2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3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4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67:1~4)
추운 날씨와 힘겨운 세상살이 가운데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오늘 2월 첫 주일을 맞아 새롭게 용기를 얻어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 항상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경건에 힘쓰기를 원하지만 늘 부족하고, 여전히 아무것도 내어놓을 것이 없이 주 앞에 나왔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예배하는 주의 백성들 위에 함께 하시며, 부족함을 도우시고, 주님의 풍성하심으로 채우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Introduction
명절을 앞에 두고 마음이 분주한 가운데서도 주님께 예배함을 소중히 여기시는 여러분에게 크신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곁에 계신 분에게 축복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행복한 설날 되세요”
저는 늘 기도하며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생업이 축복되기를 사모합니다. 건강이 축복되기를 바랍니다. 가정과 자녀들이 형통하므로 축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영혼이 잘되는 축복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탐구하면서 어떻게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분명한 것 하나는 성도들이 서로 축복하는 말을 하게 되면 축복이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급적 축복의 말을 자주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축복의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만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밤새도록이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자신이 그 축복의 선언들이 자신의 것이 되도록 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칭찬거리,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 교회는 자랑스런 성도, 자랑하고픈 교회가 되는 것이 표어입니다. 온 교회가 주님의 자랑거리가 되므로 우리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귀한 축복으로 충만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Main Subject
1.
본문에는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주님의 칭찬거리가 되었던 한 이방여인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5:28)
주님께서 한 여자를 바라보시면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은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작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믿음도 아니었습니다. 살아서 역사하는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 축복하시는데 “네 소원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소원을 이루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가 큰 믿음을 가지면 우리의 소원이 크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믿음을 가지면 소원을 작게 이루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여인을 보시고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원을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본문22절 말씀에 보니 “가나안 여인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여기 예수님께 칭찬을 듣고 있던 여인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는 상관없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둘째인 함은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했습니다. 아비를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함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노아를 통하여 저주하셨습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종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를 지닌 가나안의 여인이었습니다. 구약적 관점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축복과는 도무지 상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에게는 엄청난 문제가 있었습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가나안 여인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태복음 15:22)
여인에게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은 귀신에 들렸습니다. 본문에 보니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흉악히 귀신 들렸습니다. 여인의 문제는 단순히 병에 걸린 것이나, 또는 물질 때문에 겪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신들림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더럽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귀신과는 가까이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귀신을 저주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여인의 문제는 주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신분을 가지고,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도무지 하나님 앞에 설 엄두도 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로부터 칭찬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문제를 모두 뛰어넘고 예수님께 나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여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비록 신분적으로는 구약의 율법적 저주가운데 있었지만, 도무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수 없는 귀신에 사로잡힌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주님께 나아가기만 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이러한 믿음을 보시면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신분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문제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영적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어서 그것이 쓴뿌리가 되어 자신을 얽어매기 때문에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늘 요모양 요꼴로 살아야 한다고 자포자기하며 탄식합니다. 자신을 둘러싸도 있는 문제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도무지 자기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괜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세상 탓만 하며 살아갑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믿음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별볼일 없으면 어떻습니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했으면 어떻습니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가 아무리 큰들 어떻다는 것입니다. 사실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신분이나 환경이나 문제들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탓만하고 원망하고 있지 결코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신분에 있든지, 또는 어떤 직분을 가졌든지,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크고 어려운 것이라도 주님께만 나아가면 됩니다. 주님께만 나아가기만 하면 문제의 해결을 받을 수 있고,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외쳤던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 앞에 나아와 목이 터져라 외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혹 말린다고 해도, 비웃는다고 해도 개의치 마시고 힘써 주님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찾으면 우리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우리를 바라보시며 감동하시고, 우리에게 크고 비밀한 은총을 더하실 것입니다.
2.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신분도, 문제도,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인은 분명히 믿음을 갖고 나왔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저주받은 가나안 여인일지라도, 세상에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문제를 가진 여인이라도 주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확신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은 참으로 냉담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태복음 15:23)
여인은 주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되는 줄로 믿고, 주님께 나아와 힘껏 외쳤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혹 주님께서 자신을 보지 못하셨고, 자신의 소리를 듣지 못하셨을까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몸부림을 치면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원문성경에 보면 여인이 소리를 지는 것이 한 번 소리를 지르고 만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22절에서는 여인이 소리 지르는 것을 미완료시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는 현재시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종합해보면 여인은 계속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므로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말하는 그 순간에도 주님의 도움을 구하므로 소리지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간절하게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마태복음 7:7)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잠언8:17)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의 외침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외면하셨습니다. 곁에서 보던 주님의 제자들도 여인을 바라보면서 귀찮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여자가 계속해서 시끄럽게 하면서 따라오는데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셔서 보내시든지 해야지 안되겠다.’ 생각하고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저 여자를 보내세요.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여인은 주님의 제자들로부터도 외면당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주님께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듣게 된 두번째 이유는 바로 포기하지 않는 믿음 때문입니다. 여인은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침묵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비아냥거림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주님을 바라보고 열심을 냈습니다. 주님께서 은혜가 있는 줄로 알고 열심을 다해서 기도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남다른 수고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허리가 휘도록 봉사하며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여전히 우리 앞에 문제가 있고, 여전히 우리의 사업은 부도직전이며, 가정의 장래는 암담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교회의 지도자들은 무시하며 외면합니다. 마음에 큰 상처가 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침묵과 성도들의 냉담함 앞에 상처를 받고 시험에 빠집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큰 믿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침묵에도, 제자들의 냉담함에도 시험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더욱 부르짖는 것입니다. 환경이 나빠지면 나빠질 수록 더욱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성도들이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에 주님께서 침묵하고 계실 때가 있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쳐보아도 주님은 주무시는지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과 지도자들은 우리의 가슴 아픈 사연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느니 하면서 냉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더욱 간절히 주님을 찾아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인이 주님께 칭찬을 듣고, 기도에 응답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큰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소원들이 크고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3.
침묵하시는 예수님과 냉담한 제자들의 외면 속에서도 가나안 여인은 주님을 향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고, 또 실망하고 주님을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끈질기게 주님을 찾았습니다. 이런 여인의 모습을 보시고 큰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칭찬하실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5:24, 26) 주님은 상상할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을 했던 것입니다. “넌 개다. 난 너에게 은혜를 줄 수 없다.” 왠만한 사람같으면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께 대하여 실망했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떠날 것입니다. 지가 능력이 좀 있다고 사람을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며 떠났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주님의 실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신 주님께서 홧김에 여인에게 툭 던진 말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을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음에도 하나님의 축복과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자존심도 지키고, 세상의 영광도 얻고, 부귀도 얻으며 그렇게 살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개가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신중하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마치 귀신들린 것과 같이 도무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저마다 안고 살아갑니다. 지옥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인생의 어떠한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의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애굽의 영광을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개가 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악인의 집에 있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는 악인과 함께 영광을 누리며 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더 기뻐했습니다. 비록 천박한 문지기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것을 선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바로에 버금가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로가 죽은 이후에 애굽의 바로로 추대될 수 있는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것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11:24~26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11:24~26)
그렇습니다. 세상의 군왕이 되는 것보다, 세상의 부귀와 권세를 얻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개가 되는 것을 선택하는 믿음을 주님을 기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냉담한 말씀 앞에 여인은 결단의 고백을 했습니다. 본문 27~28절 말씀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도부터 그의 딸이 낳으니라 (마태복음 15:27~28)
여인의 고백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주님, 나는 이방 여인입니다. 가나안 여인입니다. 주님의 축복과 거리가 먼 존재입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문제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는 인격적으로 존귀할 수 있고, 영광스러울 수 있습니다. 재물도 얻을 수 있고, 권세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 존귀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개가 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로 하나님의 축복의 부스러기라도 얻으며 살겠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어떤 영광이나 보화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난 그것을 믿습니다.” 여인은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고백을 들으시고 감동하셨습니다. 감탄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말씀하시면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부스러기의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가운데 토막의 축복이었습니다.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하는 고백이 우리 안에 풍성하기를 바라랍니다. 세상의 풍성함으로, 존귀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어도 교회 안에 오면 별볼일 없는 대접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교수요, 국회의원이요, 성공한 사업가라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그저 이름없는 평범한 신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도 인정해주지 않고, 높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축복된 백성 가운데 개로 사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믿음을 주님께서는 크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시는데 그의 모든 소원을 크게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가나안 여인처럼, 하나님 나라의 개가 될지언정 멸망하는 세상의 높은 것을 추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던 모세처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으며 멸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최고의 칭찬, 최고의 축복을 소유하는 저와 여러분, 온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소원을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이 한해동안 우리의 사업에, 가정에, 자녀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거룩한 소원을 이루고, 항상 축복된 삶을 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감동시키고, 주님의 칭찬을 듣게 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주님께로부터 큰 믿음을 소유했노라 칭찬을 받았고, 그의 간절한 소원을 기적적으로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큰 믿음을 소유하길 바랍니다. 큰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큰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분과 부끄러움을 뛰어넘고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주님께 무릎을 꾸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나오기만 하면 주님은 그에게 축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는 것입니다. 큰 믿음은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도, 주님이 침묵하고 있는 순간에도, 제자들의 외면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리는 신앙입니다. 큰 믿음은 세상의 영화를 다 잃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개로, 하나님의 부스러기의 축복을 더 사모하고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을 소유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축복은 부스러기의 축복이 아닙니다. 최고의 축복입니다. 기적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가 될지언정 하나님의 축복만은 빼앗기지 않겠노라고 철저하게 매달리는 신앙인이 되시므로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축복의 소유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소유하므로
주님의 기적과 축복이 자신들의 삶에 넘쳐나기를 소원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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