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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복음과 함께 자랑 된 여인 (마가복음 14:3~9)

복음과 함께 자랑 된 여인

마가복음 14:3~9

Entrance Prayer

5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6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7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8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시편 71:5~8)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간도 은혜 가운데 인도하셨고, 오늘도 거룩한 성일을 맞이하여 주의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하시고, 예배할 수 있는 귀한 축복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늘 주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것 뿐이지만, 때로는 세상 때문에 울고,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며,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하던 우리의 모습을 참회합니다. 용서하여 주시고, 주님의 보좌 앞에 엎드린 심령마다 주님의 위로와 은총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이제 예배하고자 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고, 주의 백성들에게 한 없는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 아멘 -

Introduction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 기적같은 은총들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열심히 교회에 다닙니다. 매 주일 마다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여하기도 하고, 새벽기도회다 금요심야기도회다 하면서 온갖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바쁘고 힘든 때에 많은 시간을 들여가면서 까지 예배에 참석하며, 또한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 것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길래 세상을 편한대로 살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저는 그 문제를 가만히 생각해 봤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한 가지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적을 힘입어 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늘 하나님의 기적을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살았습니다. 때로는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로는 가뭄 가운데서도 백배의 결실을 하는 기적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아들이 없어 염려하고 있었는데 100세나 되어서 아들을 얻게 되는 기적들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무너뜨릴 것 같지 않던 골리앗을 단방에 쓰러뜨리는 기적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위인들은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지만 그 가운데서 일어나 걸으며 뛰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소경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기적적인 고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기도 했고, 인간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기적을 체험하는 것은 비단 성경시대의 인물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바닷가에 쳐 놓은 정치어망에서 커다란 밍크 고래를 잡기로 합니다. 수만 마리의 방어떼를 끌어올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이 시대에 포항에 살고 있는 김상태 집사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은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는데 우리는 왜 기적과는 상관없이 맹맹한 신앙인으로 예수 믿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힘도 없고 능력도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것은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놀라운 기적을 늘 이루며 엄청난 감격 가운데 예수를 믿으며 신나는 생활을 하고 있고, 축복의 맛은 마음껏 보며 살아가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매일 매일 힘든 나날을 지내며 전혀 재미없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저는 왜 그럴까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기적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그가 기도했더니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또 그가 기도했더니 하늘이 열리고 엄청난 비가 내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종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엘리야의 하나님은 엘리야만의 하나님인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다윗만의 하나님인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들에게만 기적을 주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너와 나 누구에게나 기적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다만 우리에게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요소에 막힌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놀라운 능력을 더하시고, 항상 기적적인 인도하심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는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는데도 기적을 누리며 살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동을 주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항상 기적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시달림이 컸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컸습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시니 한나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이스라엘의 놀라운 지도자요, 구원자 사무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기적같은 축복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사업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우리의 생업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돈 때문에 힘이 듭니까? 아니면 사람때문에 매일 눈물을 지어야 합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문제를 따라다녀 봐야 헛것입니다.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수 있는 만왕의 왕되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적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무엇인가 좋은 것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에 방법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잘 보이면 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고, 아이는 갖고 싶은 것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급이 잘되고, 성공적인 회사생활을 하려면 경영자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승진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자리가 보존되고,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성도의 모든 삶에 기적과 같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다른 것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적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그러므로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늘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성도들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회의에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항상 자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Main Subject

1.

예수님 당시에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온천하에 복음이 전해질 것이고, 마리아와 그의 행한 일은 복음과 함께 자랑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마가복음 14: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질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4:9)

우리 주님은 마리아와 그의 행한 일을 보시면서 이와같이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의 이런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마포중앙교회와 성도들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얼마나 멋집니까? 이런 축복이 우리 교회에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마리아처럼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만 하면 우리는 기적을 체험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게 되고, 주님의 자랑거리로 복음과 함께 온 천하에 존귀한 교회와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기쁨으로 자랑할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너무나도 사모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어떤 행동이 주님의 마음을 그토록 감동시켰습니까? 본문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가복음 14:3)

여기 마가복음에서는 한 여자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라고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방안 가득히 향기로 진동을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은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귀한 것이었습니다. 남는 것으로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고의 것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은 이런 마리아의 헌신을 보시고 기뻐하셨고 감동하셨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헌신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헌신을 합니까? 가장 귀중한 것으로 헌신합니까? 아닙니다. 짜투리 헌신을 합니다. 귀한 것은 내가 다 취하고 남는 것으로 헌신합니다. 버리기도 그렇고 갖기도 그런 것으로 헌신한다고 주님께 바칩니다.

예전에 교회를 건축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 때 건축헌금을 하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것으로 헌금하는지 모릅니다. 그 때에 자기가 갖고 있던 금반지며 보석을 교회에 바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가진 가장 귀중한 보석을 주님께 바친다고 하며 드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지금 갖고 있는 보석이 유행에 뒤진 것이고 보잘 것없으니까 이번에 그 보석을 바치고, 건축헌금할 돈으로 다시 보석을 마련하는 경우를 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지금 우리의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시간의 옥합을 드려야 합니다. 물질의 옥합을 깨드려 드려야 합니다. 건강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남는 것으로 드립니다. 귀한 것으로, 소중한 것으로 드리는 것이 아닌 남는 것으로 드립니다. 하나님은 남는 것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분의 것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먼저 주님께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를 원하셨습니다. 한나에게 사무엘을 바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 그 사람에게 감동하십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낭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그를 자랑하시고 그에게 기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중에 교회의 가장 귀중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서 원하시는 본질적인 사명을 위해서 기꺼이 낭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지내는 교회가 있습니다. 모든 교회의 재정을 자기들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꽤 괜찮은 교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저는 부러운 교회가 있습니다. 상계동에 있는 서울광염교회입니다. 지금 이 교회는 얼마나 열심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는지 모릅니다.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재정을 헌신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늘 옥합을 깨는 교회입니다. 지금 스리랑카에 지진해일 피해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본부를 설치하고 집중적으로 그들을 구호하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이 놀라운 역사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당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든지 함께 울고 함께 고통하며 그들의 아픔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 교회가 그렇게 큰 교회는 아닙니다. 수천명이 모이는 교회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비전과 사명을 위해서는 자기들은 조금 덜 쓰더라도 힘써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자랑하십니다. 이런 교회를 자랑하시는데 불교도가 운영하는 출판사를 통해서 이 교회를 자랑하십니다. 신문마다 이 교회를 자랑하십니다. 복음과 함께 이 교회는 주님의 자랑거리가 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이런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낭비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람들은 이것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헌신을 불필요한 헌신이요 과도한 섬김이며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에 보니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말했습니다. 세상에 저렇게 멍청한 여자가 어디에 있느냐? 저것을 팔면 300데나리온을 얻을 것이고, 그 돈이면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가? 가난한 자를 도울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 귀한 것을 낭비하느냐? 고 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참으로 합리적이었습니다. 타당한 말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 근으로 매우 값진 것이었습니다. 내다 팔면 최소한 300 데나리온은 받을 수 잇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통화기준으로 보면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일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약 5만원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향유는 한 병에 1500만원 정도되는 것입니다. 조그만 향유가 1500만원이나 합니다.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아까운 일입니까? 사람들의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결코 어리석다거나 낭비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마리아의 헌신에 감동하시며 칭찬하셨습니까? 마리아가 비싼 것을, 귀한 것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혹시 오늘 성경의 본문을 보시면서 아하, 오늘 목사님이 헌금 설교를 하겠구만, 돈 많이 내라는 말이지 하면서 지레 짐작을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 그 정도 통박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혹시 그런 삐딱한 생각을 가지신 분이 계셨다면 신속히 그 생각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많은 재물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이 마리아의 헌신에 감동한 것은 그가 비싼 옥합을 깨뜨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수천만금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두 렙돈에 더욱 감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돈의 헌신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 어딜 봐도 많이 내는 헌금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라는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있어도 많이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즐겨 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헌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옥합을 깨뜨리는 것을 기쁨으로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옥합 아니라 옥합 할아버지를 깬다고 해도 기쁨으로 드리는 헌신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감동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것을 기뻐하시고, 그것에 감동하신 것은 바로 그 옥합이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의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2.1.

마리아의 헌신에 대하여 사람들은 낭비라고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칭찬하시고 감동하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마리아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순전한 나드 한 근의 옥합 정도로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은 옥합을 보았고 그것의 가치를 보았지만, 그리고 그것이 낭비된다고 여겼지만 주님은 그 옥합 속에 담긴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칭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와 성도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때문에 어떤 희생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자신의 귀중한 몸을 깨뜨렸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드린 것처럼 주님은 그의 몸을 깨뜨리시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되 미지근하게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열정적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우리에게 주님 사랑이 잊혀졌다면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힘써 실천했습니다. 아름다운 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멋지게 성장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주님을 사랑함이 식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는데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것을 회복하지 않으면 너희에게서 촛대를 옮길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함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성도는 이미 성도로서의 자격과 영광을 상실한 것입니다. 주님을 결코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단순히 의무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빨리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될 때에, 그리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은 헌신을 주님께 보이게 될 때에, 우리의 옥합을 깨뜨리게 될 때에 주님을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감동하시고, 우리의 삶을 향해서 놀라운 기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2.2.

마리아의 헌신이 사람들의 생각처럼 낭비가 아닌 주님을 감동시키는 헌신이 되었던 두번째 이유는 그는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다가 기회를 포착한 헌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8)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께 부어 낭비하게 될 때에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것을 팔면 300데나리온이나 될 것이고, 그 돈이면 이 어려운 때에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고, 가난한 자들에게 많은 이로움이 될 것인데 어찌하여서 그것을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리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마리아를 비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말씀을 믿고 기회를 포착한 헌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어떤 여인인지 잘 압니다. 그는 나사로의 여동생입니다. 그의 언니는 마르다입니다. 어느날 주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가셨습니다. 마르다는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부엌에는 꼴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곁에 착 달라 붙어가지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르다의 눈에는 참으로 괘씸했습니다. 참으로 싸가지 없는 짓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함께 수고해야 할텐데 마리아는 꼼짝도 않고 주님의 말씀만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다는 그것 때문에 속이 상했습니다. 주님께 따졌습니다. 어째서 동생을 끼고 앉아서 내어보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 죽도록 고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말씀이 범상치 않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않으리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좀처럼 알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마르다를 도와서 주님을 함께 섬겨야 할 것인데 말씀만 듣고 있던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헌신의 기회를 포착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 최대의 헌신이 어떤 것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게 되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헌신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가장 적절한 헌신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 공부하는 일을 위해서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헌신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주님께 감동을 주는 것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하는 일을 위해서 열심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조금 답답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배우는 자리에 많이 참여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관심을 갖고 따라오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주님께 감동을 주는 헌신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무릎 앞에서 항상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야 하며, 다시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제자들도 다 듣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온천하에 충만케 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으면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 의해서 이 일이 진행될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앞두고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죽음과 같이 힘든 싸움을 하고 나면 메시야의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주님께서 진짜 죽으신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여인, 그렇지만 말씀을 경청했던 마리아는 주님의 죽으심에 관한 말씀을 듣고, 그 죽으심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죽으실 주님을 위해서 드릴 최대의 헌신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칭찬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정말로 기회를 잘 포착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가운데 깊은 영적 통찰력을 갖게 되니 그는 주님께 드릴 최대의 헌신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포착해서 주님께 헌신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감동이 되는 헌신은 말씀을 따라 기회를 포착해야 합니다. 기회를 놓치게 되면 주님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기적같은 은총을 체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봉사는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헌신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예요. 봉사할 수 있을 때 봉사해야 하고, 헌신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심방을 하는 중에 몸이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 마비가 된 성도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의 하는 말이 '목사님, 다른 소원은 없어요, 단지 건강해서 교회 나가서 한번 봉사하고 세상 떠나갔으면 좋겠어요'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나니 봉사하고 싶어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봉사와 헌신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봉사의 기회가 있습니다. 순종의 기회가 있습니다. 헌신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봉사하고 순종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헌신했습니다.

옛날 희랍에 기회의 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날개가 어깨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발에도 날개가 달려 있다고 합니다. 앞 머리는 수풀처럼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예요. 어깨와 발에 날개가 있기 때문에 빨리 빨리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머리는 무성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쉽게 붙잡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뒷머리는 대머리입니다. 왜냐하면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회는 그런 것입니다. 기회는 지나가 버리고 나면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나가기 전에 헌신 할 수 있고, 지나가기 전에 봉사할 수 있고, 지나가기 전에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께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기적을 맛보고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기적과는 상관없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 믿는 기쁨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자랑할 만한 사람, 주님이 감동할만한 사람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키기만 하면 우리 주님으로 부터 모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인데 우리의 삶이 주님을 감동시키지 못하니 기적은 우리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교회,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므로 날마다 주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기적들로 인하여 신나고 즐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이 우리 가운데 충만해야 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낭비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다하는 헌신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에 경청함으로 헌신할 기회를 포착해서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헌신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을 사랑하므로 우리 각자의 옥합을 기꺼이 깨뜨릴 수 있기를 바라고, 또한 말씀에 경청하므로 헌신의 기회를 잃지 않는 복된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또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며, 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마포중앙교회와 성도들의 이름도 전하여 기념하라고 하는 이 귀한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감동케 하므로

늘 주님이 주시는 기적을 체험하기로 소망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