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2)
- 부제: 보는 자는 살리라 -
민수기 21:4~9
Entrance Prayer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편 103:2~5)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시며 새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은혜를 생각하면 무한 감사하건만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매여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연약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시며, 큰 믿음을 주옵소서. 예배하고자 모였습니다. 악한 마귀는 틈타지 못하게 하시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으로 독수리같이 힘있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아멘 -
Introduction
지난 월요일에는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목사님을 방문했습니다. 목사님 댁에 들어서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장경동 목사님께서 MBC에서 강의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공영방송에 출연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어디든 가야 하는 것이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날 장 목사님께서 강의는 감동적이었습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죽이는 생각이 있고, 살리는 생각이 있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죽이는 생각을 따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살리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는 살아나게 되고,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음식을 먹어도 우리 몸을 죽이는 음식과 살리는 음식이 있는데, 담배, 마약, 술 같은 것은 죽이는 음식이요, 좋은 음식은 살리는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이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죽어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생각이나 음식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말도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이 있는 반면에 죽이는 사망의 말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새벽에 함께 묵상하고 있는 야고보서 3: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새의 바퀴를 불사르니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야고보서 3:6)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어되지 않는, 통제되지 않는 말은 무시무시한 지옥불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정화되지 않은채 토하여 내는 성내는 말, 독한 말, 저주의 말은 사람을 죽이고, 그 가운데 모든 기쁨과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살리는 말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살리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위에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구원하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Main Subject
1.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십자가의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1~3절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부 가나안을 정복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함께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가나안 땅의 남쪽 지방을 정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겠건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르산을 거쳐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둘러 지나게 하셨습니다. 본문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민수기 21:4)
이스라엘 백성들이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가나안 땅의 남쪽을 정복하였으면 그 땅에서부터 가나안을 정복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편히 살게 되면 좋을텐데 모세는 그들을 데리고 자꾸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갑니다. 가나안 땅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데 자꾸만 어려운 길로, 힘든 길로 데리고 다니기만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짜증이 났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참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쉽게 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좋은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길로 우리를 이끌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로 이끌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기에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도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손해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보다 뛰어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명하심과 인도하심에 묵묵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때로는 자존심을 포기하게 합니다. 경험도 포기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말씀을 따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자아가 살아있어서는 주님을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말씀 앞에 우리의 자아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크게 실수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뒤로 물러섬이 없습니다. 저돌적으로 공격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에서 답을 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저돌적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앞에,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묵묵히 순종해야 합니다. 벳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와 같이 말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귀중한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장 존귀히 여기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목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도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것으로 억지 주장을 해서는 안됩니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누구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또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이루어가시는지 묵묵히 바라보며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주님의 인도하심에 묵묵히 순종하고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어도 십자가의 말씀 앞에 자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묵묵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날개 아래 품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 묵묵히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원망했습니다. 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수기 21:5)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때문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광야의 길을 걷고 있어도, 박한 식물을 먹게 되어도, 대로는 물이 없어 탄식해야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세상 때문에 눈물 흘려도 주님 때문에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감사가 넘쳐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은 보지 못하고 험한 길만 보았습니다. 물 없는 광야만을 보았습니다. 험한 십자가의 고난의 길만 보았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힘든다고 고통스럽다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광야의 길은 고난이었습니다.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주님의 품에 안겨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리 모진 풍파가 몰아쳐도 주님은 그것을 막아주실 것이고, 광야 한 복판에서 먹을 물이 없다 해도 하나님은 그곳에서 샘이 터지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만나와 메추라기로 함께 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광야는 고난의 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기적이 동행하는 참으로 신나는 주님의 품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광야의 길이 힘들다고 하면서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힘든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답답해 죽겠다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암탉이 그 병아리를 날개아래 품은 것같이 품어주시고, 인도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심장을 향해서 배반의 비수를 꽂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모습입니까? 혹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길 때문에 원망하고, 광야 때문에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힘든 직장 때문에 원망하고, 풀리지 않는 어려운 고민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공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래서는 안됩니다. 원망은 망하는 길입니다. 원망하므로 하나님의 심장에 배반의 비수를 꽂게 되면 하나님은 그것에 대하여 진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을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복수하셨습니다. 진노하셨습니다. 복수와 진노의 불뱀을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민수기 2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망하면 불뱀이 찾아옵니다. 이 불뱀은 인정사정 없습니다. 무조건 물어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의 무서운 독으로 생명을 앗아가고, 축복을 앗아가고, 행복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술에서 원망을 제거해야 합니다.원망의 말은 우리를 죽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황폐화시키고, 우리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버립니다. 천국과 같은 행복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올의 고통이 있는 곳으로 바꿔 버립니다.
광야같은 세상을 지나는 중에, 때로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사는 일이 답답할 수 있습니다. 암탉의 품에 있는 병아리가 답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답답해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원망이 나와도 불평이 나와도 주님을 믿고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넘치는 행복을 주십니다. 평강과 만족을 주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놀라운 역사와 기적을 이루어주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데 답답하다고 뛰쳐나오기 때문입니다. 성급히 원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을 믿고 광야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반석에서 샘이 나게 하시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게 하시고..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원망하므로 불뱀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순종하고 인내하여 기다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다가 불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망의 고통이 이스라엘 진영에 가득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속히 모세를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민수기 2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원망도 잘했지만 그 사람들은 회개도 참 잘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신속히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악을 깨달았으면 신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간혹 이런 분들을 만납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교회에 나갈 수가 없답니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지...” 하면서 절대로 교회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을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회개하는 자리로 오기를 바라십니다. 자신의 죄악을 깨달았으면 신속히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그 낯짝을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개하고 나오는 마음을 긍휼히 여기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모세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에게서 우리 주님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2:3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평가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를 가리켜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하시는데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마태복음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우리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모세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를 원망하며, 그에게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던 사람들이 불뱀에 물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속으로 “고 놈들 고소하다.” 그랬을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광야의 길로 인도했는데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원망이나 해대고.. 그러니 불뱀이 와서 무는 것도 당연하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앞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할 때에 모세는 서운한 마음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그대로 가슴 아파했습니다. 온유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전에 쓰라린 배신을 당했고, 멸시를 당했고, 또 온갖 저주와 욕을 다 들어먹었지만 사랑하는 그의 백성들이 아파할 때에 모세는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들이 눈물 흘릴 때에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곡하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저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저들에게 찾아와 있는 불뱀을 제거하시고, 사망의 독을 제거해 주세요.” 모세는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 간구하십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저들을 저 사망의 고통에서, 아픔에서 건져 주세요” 하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한없이 온유하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잘못이 깨달아졌으면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내려 놓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온유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렀더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해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용서와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본문 8~9절 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민수기 21:8~9)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장대 위에 불뱀을 만들어 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보는 자는 살리라”고 했습니다. 따라 합시다. “보는 자는 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불뱀의 무서운 독으로 모두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대 위에 불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매달리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대한민국의 사람이든 누구든지 그 장대 위에 매달리신 불뱀을 보기만 하면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주홍같을지라도, 진홍같을 지라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심판의 두려움을 바라보고 우리를 위해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므로 하나님께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대 위에 매달린 불뱀을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므로 인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십자가 앞에 자신들의 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않고서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6)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매단 불뱀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은 두려움으로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뱀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참혹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가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죄악의 무서움을 깨닫고 회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 뱀을 본 사람은 누구든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말씀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하시며 절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우리의 처참한 실존을 보게 해줍니다.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알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시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처참한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신명기 구약을 인용하며 “나무 아래 있는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갈라디아서 3:13)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며 하나님의 저주를 온 인류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깨닫고 철저하게 주님께 회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블로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터넷 홈페이지와 비슷한 것인데 거기 초기 화면에 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의 영상에 비아 돌로롯사(Via Dolorosa)라는 찬양곡이 나오는 뮤직비디오를 올려두었습니다. 저희 막내가 그 영상을 보면서 아주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아빠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때려!” 아이의 얼굴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너무 어린 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해찬이가 하나님 말씀 안 듣고, 고집 부리고.. 욕심 부리고..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해찬이의 죄악을 미워 하셔서 저기 무서운 십자가에 해찬이를 매달아야 하는데..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어.. 내가 해찬이가 지은 모든 죄을 대신 감당할 것이니까 해찬이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주세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매맞는 것은 해찬이가 매맞아야 하는 걸 대신 맞으시는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더 심각해졌습니다. 그러더니 “난 예수님 말씀 잘 들을꺼야.” 그러는 것입니다. 그 어린 마음에도 뭔가를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간혹 성도들 가운데 죄짓는 것을 두렵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적당히 거짓말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작은 원망과 불평도 십자가의 무서운 저주를 받아야 하는 죄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죄짓는 것을 우습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작은 욕심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뱀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절규해야 하는 고통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지난날의 우리의 작은 죄라도 주님께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위에 처참하게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해야 하는 모든 하나님의 저주를 한 몸에 짊어지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향해서 선언하셨습니다. “보는 자는 살리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통해 죄악으로 말미암은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축복을 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어떤 말도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말씀만이 우리의 삶에 참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을 통하여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그 십자가를 보면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그가 누구든지 하나님은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친히 감당하시며,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라는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날의 죄악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고 충성하시므로 “나를 본 자는 살리라”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말씀으로 새 생명을 얻고 구원의 큰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온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죄와 죄에 대한 형벌의 두려움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므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구원을 함께 누리기로 소망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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