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18~24
Entrance Prayer
(19)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20)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21)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22)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시편 102:19~22)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새 봄과 함께 새로운 한 달을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대지에 피어오르는 봄기운처럼 우리의 영혼도 새롭게 하옵시고,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권세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 앞에 예배하기 위해서 원근각처에서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하늘의 안식으로 평강하게 인도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Introduction
지난 주까지만 해도 봄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제는 완연한 봄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시원한 봄바람과 향긋한 봄나물의 내음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 기운을 불어넣는 듯합니다. 우리의 옛 선조들은 봄을 맞으면서 집안을 깨끗이 단장하고 대문에 멋진 글씨로 “입춘대길” “소문만복래”라고 기록해 둡니다. 봄을 맞아 크게 잘 될 것이라는 희망과 항상 웃음으로 만가지의 행복이 집안에 찾아들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봄을 맞으면서 많은 희망을 품었습니다. 2005년 새봄을 맞으면서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도 모든 것에 형통케 되는 축복과 항상 웃음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만가지 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자연은 봄을 맞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아직 봄이 멀리 있는 듯합니다. 여러가지로 힘들고 어려운 모습들이 보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와 진보가 격돌하고 있으며, 서로가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되는가에는 관심이 없이 정략적인 계산들로 싸움질만하고 있습니다. 가히 온 나라가 싸움판이 되었습니다. 지역갈등과 세대갈등이 극을 이루더니 이제는 남녀의 갈등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온통 싸움박질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경제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이 예측할 수 없습니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구경만하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육은 교육대로, 환경은 환경대로 각각의 문제에 휩싸여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대에는 능력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모든 문제를 능히 극복하고 새로운 탈출구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또 문제거리를 바꾸어 기회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회적 흐름에 따라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합니다. 물질을 아끼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능력있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해마다 수많은 물질을 투자합니다. 때로는 해외에 유학을 보내기도 합니다. 모두가 능력있는 사람을 만들고,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 시대에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능력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쓰러지고 상처투성이인 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과 능히 경주하여도 피곤하지 않으며, 독수리처럼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올라 능력있는 사람들로 이 시대에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물론 이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사는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소유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사야 40장을 인용하면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다 사라질 것입니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능력도 잠시 잠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고린도 교회는 방언과 예언 등 은사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능력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미래에 있을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은사를 받아 그것을 미리 보고 예언하는 사람들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받아서 온갖 해괴한 질병들을 고치는 일들도 허다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는 능력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고린도교회와 같이 수많은 은사들로 풍성하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각양 은사와 능력들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는 수많은 은사와 능력으로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렇게 은사도 많고 능력도 많았는데 그 교회는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천국과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구원으로 말미암은 기쁨으로 감격하지 못했습니다. 늘 분쟁하고, 다투었습니다. 서로가 증오의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렸습니다. 자기들에게 능력이 있다고 하고, 지혜가 있다고 하면서 교회는 평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분열과 다툼 뿐이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면서 사도바울은 은사와 능력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를 가졌다고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과 그 구원의 기쁨으로 말미암은 행복을 누리는 참된 하나님의 능력은 은사나 능력이 아닌 다른 것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가장 본질에 그 능력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하는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가지 은사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내거나 질병에서 건지는 놀라운 신유의 은사에서 그런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무슨 신유의 은사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 무슨 구원의 능력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신유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만 보면 그 사람을 맹신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합니다. 그분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된 행복을 얻는 길이 그런 능력에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방언이나 예언이나 기적을 행하는 일이나 신유의 능력은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은사일 뿐입니다.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부수적인 능력일 뿐입니다. 구원과 행복의 참된 능력은 “십자가의 도” 뿐입니다. 우리의 삶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천국의 평안을 얻게 하는 유일한 능력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십자가의 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많은 은사가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그런 것이 참된 능력이 아니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도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참된 행복을 가져다 주고, 구원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능력은 십자가 뿐입니다. 다른것은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신행정수도법을 통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호주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안일함이 찾아오고 웰빙의 복지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혹 일시적으로 우리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능력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땅의 것으로는 어떤 것으로도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구원의 기쁨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도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로 말미암아 허락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에 참된 행복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는 우리의 삶에 놀라운 기적을 주실 것입니다.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로 구원의 기쁨으로 인하여 즐거워 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은 물론이고, 조국 강산에 항상 넘쳐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원문성경에 보니 십자가의 도는 “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루” (@O lovgo" ga;r oJ tou' staurou')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해석해 보면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그 말씀 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만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장식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악세사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의 고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결코 그것이 장식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려한 장식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처절한 눈물과 고통의 상징입니다. 아니 죽음과 같은 고난을 겪어야 했던 그 발자취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주님의 고난을 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 개인적인 이유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에게는 소량의 죄악도 없었습니다. 홀로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의롭고 깨끗하신 분이셨습니다. 전혀 죄와 상관이 없으셨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셔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또한 고난 중에 징벌을 받으셔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찢어지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고통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자체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고통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2.1.
첫째로 예수님의 고통은 자기 백성에게 버림을 당하시는 고통입니다. 요한복음 1:11절 말씀에 “자기 땅에 오매 사람들이 영접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8절에 :이 세대의 관원들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의 땅에 오셨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습니다. 권능으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건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나귀에 옷을 깔고 길에 자신들의 옷을 벗어 놓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특별한 사람을 받고 쓰임을 받았던 12명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3년이라는 긴긴 시간동안 먹고 자고 함께 생활하면서 주님의 교훈을 들었고, 주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입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가룟유다를 중심으로 해서 예수님을 배반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의 배신이요 버림받음이었습니다.
2.2.
둘째로 주님의 고통은 육체는 물론이요 정신과 영혼까지 갈갈이 찢기는 고통이었습니다. 해마다 사순절 기간이 되면 코르시카의 사틴 마을에서는 유명한 십자가 행렬을 합니다. 이 행사는 중세기부터 이 마을에서 계속되어 온 전통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31파운드의 쇠사슬을 끌면서 1마일 반을 맨발로 행진을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굴에 붉은 마스크를 씁니다. 행진할 거리의 절반도 못 가서 십자가를 진 사람의 발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는 가는 도중 세 번이나 쓰러졌는데 그것은 십자가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비록 1마일 반이지만 그 고생은 형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그야말로 땀과 피를 쏟으며 이 어려운 역할을 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코르시카의 십자가 행렬을 위하여 십자가를 자진하여 지겠다는 예약자는 이미 40년 분이 등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가장 좋은 참회의 방법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는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십자가를 우리 몸으로 지고, 우리의 손목에 대못을 박는다고 해도 주님의 고통을 동일하게 느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단순히 몸으로만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앞에서 처참할 정도로 나약해지셨습니다. 그의 영혼마저도 찢어질 대로 찢어졌던 것입니다. 감히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으스러지는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그에게 어떤 아름다운 모습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고운 부분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고통을 당하셨던 것이었습니다.
2.3.
세째로 주님의 고통은 자기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고통이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고난 중에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언제든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하나님의 얼굴은 예전과 같지않았습니다. 차디찬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죄와 사망을 향한 무서운 심판자로 서신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함께 하셨던 자신의 하나님이셨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하나님이 안면을 바꾸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면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시고 무서운 저주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힘들어도 다 견딜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하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비웃은들 어떻습니까? 그리고 육체의 고통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고 믿어왔던 아버지 하나님이 지금 그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속에 절규하며 외쳤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기자는 주님의 이런 심정을 말씀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떠나지 마옵소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시면서 처절하게 절규합니다. 하나님,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나를 버려도, 세상의 모든 고통이 내게 엄습해 와도 하나님만은 나를 떠나지 말아주세요. 내 곁에서 내게 힘을 주세요..”주님은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외면당하셨습니다. 주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3.
우리 예수님께서 이런 고통을 겪으시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 입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따라 합시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죄없이 이처럼 처참한 고통과 배신을 당해야 했다면 예수님은 당연히 복수심에 불타는 얼굴을 하고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 가운데서도 절규하시면서도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용서한다.” 말씀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하는 모든 고통을 대신 담당하시면서도 한 마디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힘든 일을 하게 될 때에 짜증을 냅니다. 거의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더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는 분노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 큰 손해 끼친 것도 아닌데 조금 기분 상하는 일들 때문에 원수지간이 되어서 인사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격려하며, 고마워하고, 그 십자가 지시는 길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드리려고 해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더욱 괴롭게 했습니다. 왠만한 사람같으면 짜증을 내어야 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너도 나를 위해서 할 만큼 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을 감당하시면서 우리를 향해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사랑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그 피로 우리의 죄악을 씻어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절규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시면서도 우리를 향해서는 내가 너희를 용서한다.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바로 이런 사랑과 용서의 말씀이었습니다. 친히 고난을 당하시지만 우리를 향해서 원망과 복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사랑으로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그 옷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하면서 못된 조롱과 침뱉음으로 예수님을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 주님은 끊임없이 용서하셨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두 명의 강도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용서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때 한 강도는 주님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시는 축복의 말씀을 듣게 되어졌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배신 당하고, 하나님께 버림받고 영혼과 정신과 육체까지도 완전히 으스러지는 고통이었지만 주님은 그 고통 중에도 우리를 향해서 사랑과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말씀으로 우리를 축복하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 가운데 임했고,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 가운데 임했습니다. 우리의 사악하고 강퍅한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전에 알지 못하던 행복이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감격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과 용서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사라지고 구원으로 말미암은 감격을 얻게 되었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수 있는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모든 다툼과 분쟁은 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은 영원한 구원적 화해를 이끌어내고, 인류 최대의 문제를 종식시킨 최대의 능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말씀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분열과 다툼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리가 우리 가운데 있게 되면 우리 안에 새로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인생이 알 수 없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 같은 남편을 위해서 십자가의 말씀을 해 보십시오.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다 주는 시어머니, 며느리에게 십자가의 말씀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적이 나타납니다. 구원이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의 삶에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주님처럼 친히 그들의 고난과 아픔을 담당하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람마다 능력있는 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저도 목사로서 능력있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속일 수 없습니다. 엊그제 심방을 하는 중에 “신유”의 은사를 베푸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고 헌신하는 일들이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면 좋을텐데”하고 부러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자주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능력을 주셔서 죽을 병에 걸린 사람들이 치유함을 얻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가난이 물러가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으로 선포하면 온갖 문제가 사라지는 역사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능력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고난 중에서 우리를 향해서 사랑한다. 용서한다고 선포하신 그 말씀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담당하시면서 피를 흘리시면서 끊임없이 사랑을 선포하시는 그 말씀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게 되고, 그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아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되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고난 중에 우리를 향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 은혜를 기억합시다. 그리고 은혜의 말씀 앞에 우리를 온전히 드리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고난을 대신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난 중에 주님의 사랑을 기꺼이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 온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향해 사랑을 선언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주어진 십자가와 함께 능력있는 사람이 되기로 소원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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