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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십자가의 도(3) -마태복음 27:41~50

십자가의 도 (3)

부제 :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없었던 이유

마태복음 27:41~50

Entrance Prayer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시편 22:19~21)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영원한 심판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종노릇하던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친히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도 주 앞에 예배하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찾아오시고, 다시금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구원의 큰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Introduction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땐 조금 기분이 상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뭡니까? 아버지도 사랑하는데 꼭 고귀한 사랑을 이야기하면 어머니 이야기만 합니다. 조금 불만이긴 하지만 사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사랑이 더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라는데는 이견을 달 수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그 고귀한 어머니의 사랑마저도 퇴색해버린 것만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고아원이 생긴 것은 전쟁후의 일입니다. 전쟁으로 통해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자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아원은 줄어들어야만 합니다. 아니면 없어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고아원들이 있고, 지금도 어린 아이들이 부모의 손에 의해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혹은 가정 불화로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이 부모의 사랑이라지만 그 사랑에도 한계가 있고, 그 사랑마저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MBC에서 하는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의 사연을 담아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자리입니다. 어느날 그 프로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 아들이 어릴적 자기를 버리고 떠나버린 어머니는 만나고 싶다고 찾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아버지는 술 때문에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했습니다. 그리고 술만먹으면 어머니를 때렸습니다. 자식들을 괴롭혔습니다. 견디다 못해 어머니는 어린 아이들을 고모에게 부탁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모의 보살핌이 지극했지만 아이들에게는 채울 수 없는 서러움이 있었습니다. 간혹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아이들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그들의 보호와 울타리가 되었던 고모마저 시집을 갔습니다. 아버지는 술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은 천애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빠없이, 엄마없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찾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수없이 많은 이 땅의 어머니들이 환경을 핑계하고, 또 남편의 무능함과 부당함을 핑계하면서 자식들을 내버리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는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다가와도 내 사랑하는 자식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는 엉뚱한 다짐을 해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라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우리를 향해서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시편 27:10절 말씀에서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고 말씀하고 있고, 로마서 8:38~39절 말씀에서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처럼 불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에는 결코 포기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Main Subject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5: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도 바람도 복종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실 때만큼은 너무나 무능하고 초라해 보이기 까지 했습니다.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십자가에서 내려올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럴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마태복음 27장은 예수님께서 잡히신 후에 대제사장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신 후에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는 과정을 소상하게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재판관으로서의 정의를 저버리고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었지만 골고다의 길을 지나 사람들의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는 흉악한 강도가 함께 매달렸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치욕스런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멋지고 근사한 죽음으로 폼나게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흉악한 강도의 괴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치욕스런 현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지만 가장 흉악한 강도로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치욕스런 죽음의 현장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27:40절입니다.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태복음 27:40~42)

주님께서는 침묵으로 십자가를 지고 있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괴로움 중에도 침묵하시면서 그 십자가를 참고 있었습니다.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의 함성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만히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신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굳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매달려 고생을 하면서 힘들어 하셔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능력이 무한하신 그분이 굳이 왜 십자가를 지고 힘들어 하셔야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능력이 없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고, 또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 고난과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결코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그 고난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자신도 그 십자가에서 내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의 눈가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얼굴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얼굴입니다. 죄로 인하여 지옥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며, 절규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시면서 두 눈을 질끈 감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시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비웃고 조롱했지만, 대제사장도, 서기관도 주님을 조롱하고 비웃었지만,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를 지고 있는 강도들마저도 주님을 보면서 욕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든 멸시와 천대 가운데서도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을 불태우셨습니다. 당장이라도 그 십자가 위에서 뛰어내려가고 싶으셨지만 주님께서 거기에서 내려오시면 우리가 당해야 할 영원한 지옥형벌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참으셨습니다. 하늘을 향해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면서도 그 십자가에서 결코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말했습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지 말고 자신이나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도 우리 주님께서는 속으로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신현철 목사 때문에 내려가서는 안돼.. 내가 아무개 장로를 위해서 절대로 내려갈 수 없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마음에 합당치 못한 우리,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난과 치욕의 십자가였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롱했지만, 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지만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참으신 그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2.

지난 번에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어느 집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집사님의 사랑하는 가족이 하나님께 구원함을 받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집사님은 참으로 곤란한 표정이었습니다. 가족들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참으로 소망하는 바이지만,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빠진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질문은 그렇게 해 놓고도 집사님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구원을 포기하고 가족들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출애굽기 32:32절 말씀..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9:3절 말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모세도 바울도 그의 민족과 사랑하는 친지들을 위해서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되는 것도 기꺼이 감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 기도를 못합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덜렁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우리는 지옥에 보내시고, 우리의 형제와 이웃은 구원해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적잖은 우리의 이기심이 있습니다. 바울과 모세가 자기의 생명을 걸고 형제와 이웃, 그리고 민족을 구원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결코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모세를 버리지 않으시고, 바울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었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이런 엄청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미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친히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포기하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 축복의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은혜를 입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 16:24, 마가34, 누가 9:23) 여기에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앞에 당한 십자가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끄러움을 참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을 위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이 일을 위해서 결코 그 십자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적 사명과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의 제도와 시스템만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지 정작 우리 주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맡겨주신 사람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기까지라도 그 십자가를 견디며 인내하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들고 끝까지 십자가를 견디지 않습니다. 조금만 힘들면 포기합니다. 좌절합니다. 절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들이 있는데 그 사명을 뒤로 던져버리고 도망쳐 버립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만을 따라갑니다. 남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에 힘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은총과는 상관없는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함과는 전혀 남남인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그곳에 매달아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면서까지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그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사람을 살리며, 구원하며,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을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아현동 지역의 이웃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역의 사랑하는 우리 민족들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기꺼이 사명감당의 십자가 위에 매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좌절이 오고, 때로는 사람들이 조롱하기도 하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괴감이 우리를 몰아간다고 해도 결코 십자가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남은 구원하는 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그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인내와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가운데 있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의 택하신 백성이 되었습니다.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십자가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제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온천하와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며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천국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며, 그들에게 생명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이일을 위해서 우리 스스로 이제는 사명의 십자가 위에 매달려야 합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어떤 시련과 조롱이 와도 그 십자가에서 결코 내려오지 말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신에 채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명령을 전하므로 예수 사랑을 가지고 온천하에 다니며 그 사랑을 전하므로 생명의 복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멀리 온천하가 힘들다면 지금 우리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아현동 일대를 복음화시키고, 주님을 알지 못해 지옥의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의 복된 소식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생명을 이 사명의 십자가 위에 매달고 끝까지 내려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마태복음 24:13)과 영생(마태복음 16:25)과 생명의 면류관(계시록 2:10)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온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주님 맡기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충성하기로 소원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