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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미스바로 모이라 (1) - 사무엘상 7:5~12


미스바로 모이라

사무엘상 7:5~12


(2)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편 103:2~5)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간, 황사바람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주의 손으로 지키시고 인도하신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날씨 주시고, 주 앞에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령과 은혜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악한 마귀는 조금도 역사하지 못하고, 오직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물방울 하나는 참 보잘 것없습니다. 그것은 유약해보이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큰 바위가 갈라지는 것은 그 작은 물방울 때문입니다. 태풍이 불고, 폭우가 내려도 끄떡도 하지 않던 큰 바위가 작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가운데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곳에 홈이 파입니다. 그리고 결코 무너질 것같지 않던 바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큰 바위를 갈라지게 하듯이 우리의 작은 눈물 한 방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놀라운 능력을 이루어냅니다.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눈물의 기도가 동반하는 사람은 비록 삶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난도 슬픔도 찾아오지만 그 모든 가운데서 결국은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을 강퍅해진 자녀의 마음을 녹입니다. 그 자녀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위해서, 또한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눈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흥을 이루는데도 눈물이 필요합니다. 눈물이 없이는 결코 부흥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흥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거창한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서 흘리는 작은 눈물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고, 하나님의 성전문 지방이 갈라지고, 그곳으로부터 축복의 샘물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눈물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로 교회의 부흥을 이루며, 우리의 가정을 살리고, 민족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본문은 이스라엘 최대의 부흥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부흥이라는 말과 운동이라는 말은 원래 어울리는 말이 아니지만 흔히들 그렇게 사용하고 있기에 그렇게 표현해 봅니다. 엘리 제사장 이후에 이스라엘은 심각할 정도로 몰락했습니다. 그 시대는 영적인 암흑기 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성경적인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이 무엇입니까? 여러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때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적이 일어나게 될 때에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교회와 주의 백성들이 놀라운 영적 승리를 얻게 될 때에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을 이상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놀랍게 부흥할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안에 충만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두려워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기적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집니다. 교회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어디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무슨 능력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습니까? 그것도 거의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무능력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실재로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단지 사람들의 생각 속에 가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능히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문제와 걱정이 가득합니까?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부흥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가 그랬습니다. 이상은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게다가 백성을 지도하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은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함부로 대했습니다. 성전에서 여인들을 추행하므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독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이러하니 백성들도 그것을 본받아서 마치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블레셋을 보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사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게 되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블레셋의 포로가 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법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잘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에 있어야 하는 법궤가 타지에 방치되어 있고, 또 블레셋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블레셋의 노예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강점 아래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적으로도 심히 연약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들이 잘하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지식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던 목사님, 너무나 재정적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돈많은 교인들을 의지하게 되더랍니다. 이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돈많은 교인들을 바라보게 되고, 실력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절이 찾아왔습니다.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심히 곤고한 때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사람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능력과 기적으로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험한 광야의 길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반석에서 샘이 나게 하신 하나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아낙자손을 굴복시키시며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 7: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사무엘상 7:2)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때에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여기에 부흥의 단초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부흥은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얻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정치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몰락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소생불가능 판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부흥을 위한 씨앗을 발아케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부흥을 원한다면 교회의 화려한 건물을 사모해서는 안됩니다. 돈 많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이 교회에 자리잡는 것을 사모해서도 안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부흥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사모한다는 말은 우리말 사전의 의미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말 사전에 사모한다는 말은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리워 하는 것, 또는 우러러 받들고 마음 속으로 깊이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사모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애틋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뜻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죄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무조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여기에서 사모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문성경에서 나하(hh;n)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신음하다, 울부짖다, 애곡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에서 애가라는 말의 어근이 되는 말입니다.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해서 애통했다고 할 때에 애통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당한 고난 때문에, 그들의 신앙이 짓밟히는 현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울며 애통했습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와 부흥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울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는 결코 부흥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부흥을 꿈꿉니다. 부흥을 위해서 코믹한 설교가 유행입니다. 저는 그런 설교를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설교를 통해서 복음이 능력있게 증거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강단이 코메디 극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지하게 선포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강단으로부터 임하여 오는 말씀 때문에 낄낄거리고 웃기보다는 심각하게 눈물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통곡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질병입니까? 성공하지 못하는 일입니까? 출세하지 못하는 일이며, 과학과 지식이 부족함이 인류의 문제입니까? 도덕적 정신적으로 공항을 맞이했음이 인류의 문제입니까? 위대한 사상가가 없어서 문제입니까? 물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죄가 인류를 파멸로 몰아갑니다. 사망으로 몰아갑니다. 죄가 인류의 행복을빼앗아가며 참된 웃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영원한 기쁨을 잃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통곡해야 합니다. 죄를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없고, 부흥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으므로 우리 안에 있는 죄악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울어야 합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닙니다. 집이 없기 때문에 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죄악 때문에 눈물을 짓고 울어야 합니다. 탄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개의 성도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건물을 화려하게 짓고, 또 여러 가지 좋은 편의시설을 갖추어서 성도들이 많아지기만 하면 그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부흥의 한 단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없이, 여호와를 사모하므로 애통하고 탄식함이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성도들이 눈물없는 부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고 부흥을 기대합니다. 교회가 대형화되기를 기대합니다. 교회의 재정이 풍성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사람이 1억을 헌금하고, 10억을 헌금하면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런 겉모양을 가지고 성도들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듭니다. 참된 부흥이 아닌 것으로 부흥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그런 것에 집착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참된 부흥을 이루는 것을 방해합니다.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울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그의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스스로 죄인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했습니다. 그의 서신서를 보면 시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같은 나라고 합니다.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고백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그가 더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더욱 성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며 희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의 것을 조금도 취하지 않고, 전 생애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드렸습니다. 그런 바울이 일생을 마감하게 될 때에 성도들 앞에 고백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선의 가식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 볼수록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울고, 그 죄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울고.. 하나님 앞에 눈물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해서 부흥을 이루어 주시고, 축복의 시대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사모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다시금 부흥을 허락하시기를 바랬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기적을 허락하시고, 놀라운 부흥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는 죄 때문에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면 심각합니다. 하나님을 잊고 살아간다는 증거입니다. 울어야 합니다. 죄를 깨닫고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다시금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교회는 진정한 부흥을 이룰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그 때에 사무엘 선지자는 그들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5~6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사무엘상 7:5~6)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찾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미스바로 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스바는 통곡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회개를 위한 자리였습니다. 눈물의 기도를 위한 자리였습니다. 금식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탄식하는 자리였습니다. 사무엘은 온 백성들이 그리로 모여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때에 모든 백성들이 미스바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탄식했습니다. 그들의 눈물은 단순히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어서 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고난 중에 있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죄악된 심령을 갖고 있는 자신들의 죄를 바라보면서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흥은 바로 죄를 바라보면서 우는 마음에 찾아옵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며 가슴을 찢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눈물이 없이는 결코 부흥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 죽인 죄를 항상 짊어지고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를 못박은 자가 로마의 군병들이 아니라 자신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채찍질하고 침뱉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이와같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게 했고, 저주했고, 고통스럽게 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그것 때문에 괴로워 우는 것입니다. 탄식하는 것입니다.

1907년 한국교회로서는 꼭 기억해야만 하는 해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한국교회는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해서 전국적인 신앙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회복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평양에 주일날 장사하는 사람이 없어질 정도로 되어지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한 사람의 눈물어린 회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907년 1월 13일 주일 밤 집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당시에 예배를 인도하던 이길함(Graham Lee) 목사는 무엇인가 막힌 듯했습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집회로부터 멀어졌는가 하고 회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눈물로 뉘우치며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교회의 장로이자 전도사인 길선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집회에 은혜를 내리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집회에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것입니다. 약 일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을 하면서 내게 부탁했습니다. 길 장로, 내가 세상을 뜨거든 내 유산을 돌보아 주시고, 내 아내가 세상을 너무나 모르니 당신만 믿겠소. 나는 잘 돌보아 줄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약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뒤에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면서 미화 백 달러 상당의 돈을 사취하였습니다.

이와같이 길 선주 장로는 설교가 끝난 뒤에 열린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자기의 죄악을 큰 소리로 고백했습니다. 그의 눈에서는 회개의 눈물이 흘러 넘쳤습니다. 자기를 신뢰한 친구와 미망인을 속인 죄를 자백하며 날이 밝는 대로 사취한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주겠노라고 배상의 약속을 하면서 쉬지 않고 자기의 죄를 공중 앞에서 자복했습니다.

길선주 장로의 고백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러 날 동안 견고하게 은혜를 가로막고, 부흥을 가로막고 있던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안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애끓는 회개가 예배당을 휩쓸었습니다. 울부짖는 통곡소리와 함께 엄청난 통성기도와 함성이 회중 가운데 가득했습니다. (김남준, 한국교회, 영적기상도를 본다, p.105~110참조)

한 사람이 회개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눈물로 탄식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부흥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도무지 부흥할 것같지 않은 교회는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부흥은 모든 교회가 가능합니다. 우리 마포중앙교회도 부흥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냉랭한 심령을 가지고서는 결코 부흥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강퍅한 마음으로는 결코 부흥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눈물을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작게 봐서는 안됩니다. 그 한 가지 한 가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처참하게 죽이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을 찢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회개할 일이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 지난 날 서로 다투며 싸웠던 것을 회개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고 살았던 우리의 영적인 모습을 회개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 길선주 목사와 같이 의롭지 못하고, 남모르게 속이고 감춘 죄악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회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부흥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블레셋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눈물로는 결코 물러가지 않습니다. 가슴을 찢어야 합니다.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통곡했던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울어야 합니다.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합니다. 온 교회 안에 지난 날의 죄악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강수가 될 때에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로 모였습니다. 금식하며 통곡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지난 날의 죄악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블레셋 족속들이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을 그 땅에서 완전히 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주님의 능력을 힘입고 부흥을 이루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회개하는 이스라엘 앞에 블레셋은 한길로 쳐들어왔다가 천길로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미스바에서 눈물로 회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부터 벧갈까지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므로 승리와 축복을 이루게 되는 것. 이것이 부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므로 이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고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에 에벤에셀의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감격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눈물의 자리, 탄식의 자리가 부흥과 승리의 자리로 바뀌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악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마음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울어야 합니다. 탄식해야 합니다. 애곡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 회개의 눈물이 없이는 결코 부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눈물이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는 눈물로 회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은 물론이요, 어린아이까지 회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회개에 나는 열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 교회에 참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금식하며 밤을 새워 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국교회를 승리의 교회, 부흥하는 교회로 바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죄를 깨닫고 눈물로 통곡하는 부흥의 역군들이 되기로 소망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Rev. Shin, Hyunchul

살아계신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