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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나의 자랑, 주의 십자가 (2) - 갈6:1~18

나의 자랑, 주의 십자가(2)

갈라디아서 6:11~18

Entrance Prayer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5~26, 28)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간 불현듯 밀려오는 절망과 탄식 가운데서 고통할 때에 주님께서 찾아오시며 한없는 위로와 은혜로 함께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은혜받을 자격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무가치할 뿐인데 사랑하시고, 도우시며, 오늘도 거룩한 성일을 허락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와 경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예배하는 우리의 심령에, 삶에 축복하여 주옵소서. 악한 마귀는 조금도 틈타지 못하고, 성령과 능력을 베푸셔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 아멘 -

Introduction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이 좋은 날씨에 들로, 산으로 나가고 싶은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신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곁에 계신 분들에게 인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참 잘 나오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예배하는 여러분들에게 큰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기쁨과 쾌락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사모하는 것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세간들 들끓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무원 자녀와 연예인의 국적포기가 그것입니다. 청와대의 어떤 수석비서관은 아들이 미국국적을 취득하고 한국국적을 포기하게 한 일로 결국은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전직 장관 다섯명의 자녀들이 국적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유명연예인이 국적포기한 것이 문제가 되어 다시 한국으로 귀하하고 군대생활을 하겠다고 선언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들은 자기의 아들들이 미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을 때 무척이나 좋아했을 것입니다. 큰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그 특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아들들의 가장 큰 십자가인 군대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흔히 말하는 빽을 이용해서 자녀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 것이 자랑거리였습니다. 자기가 사회적으로 이런 실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고, 면제 받을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영주권을 얻고 시민권을 얻어 한국의 국적을 포기할 수 있게 되면 그는 하늘의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인 것처럼 대단한 자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것은 수치입니다. 오히려 아들이 해병대를 지원해서 가거나 특수부대를 마치고 제대하게 되면 그것이 가문의 영광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어떻게든 자녀들을 군대보내지 않으려던 사람들도 이제는 군대에 보내려고 합니다. 이제는 자녀들이 당당하게 군복무를 마치고 온 것이 자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당시에 방위병으로 근무했었는데 현역으로 가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 하면서 자기의 아들들은 모두 현역으로 군복무케 했노라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재밌는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제의 자랑거리가 오늘의 수치가 되고, 어제의 부끄러움이 오늘의 영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에는 자녀를 군대에 보내지 않고, 미국의 시민권을 얻게 하는 것이 영광이고 자랑거리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수치가 됩니다. 예전에는 힘없고 빽 없어서 자녀들에게 고생스런 군생활을 하게 했던 것이 수치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영광이 되며,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세상 것으로 자랑을 삼습니다. 돈 많은 것으로 자랑을 삼습니다. 권세가 높고, 건강하고, 잘생긴 것으로, 또는 학식이 풍성한 것으로 자랑을 삼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자랑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일의 자랑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헛된 자랑입니다. 마치 자기 아들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삼던 사람들의 헛된 자랑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육체로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으로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정욕을 따라 자랑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를 자랑거리고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을 자랑 거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Main Subject

1.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오게 됨에 따라 사도들에게서 받은 신앙의 변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감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축복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이 들어와서 율법적 할례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에 이끌려 신앙이 변질되고, 또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육체를 자랑했습니다. 할례 받는 몸을 자랑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자랑했습니다. 교회의 직분과 은사들을 가지고 자랑했습니다. 이처럼 갈라디아 교회가 변질된 신앙을 갖게 되자 바울 사도는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너희가 다른 복음을 잘도 받아드리는구나 그러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가 유대인이든지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간증합니다. “나도 자랑거리가 있다.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어느 누구보다도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순수한 유대혈통이요, 베냐민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고, 많은 학문을 했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대단한 지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으로 자랑을 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자기의 은사나 능력이나 영적 권세를 가지고도 자랑을 삼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것으로 자랑을 삼아서는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의 부귀나 영화로 자랑을 삼아서는 안됩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로 자랑을 삼아서도 안됩니다. 학문이나 실력을 가지고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놀라운 사실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자랑할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으신 일이라든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이라든가 문둥병자를 낫게 하시고, 또 중풍병자를 일으키시며 소경을 고치시는 이 놀라운 일들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할 법한 일들입니다. 자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를 자랑했을까요? 십자가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당시에 십자가는 그리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1) 그것은 치욕입니다. 저주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무 아래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입니다. 멸망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왕으로 섬기고, 메시야로 섬기시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이 뭐 그리 자랑할만한 일입니까? 그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끄러운 일을 바울은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그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2) 십자가는 하나님이 저주일뿐만 아니라 극도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었습니다. 비명을 지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슬피울며 이를 갈아야 하는 지옥의 고통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아픔의 자리였기 때문에 십자가는 예수님의 육체는 물론이요, 정신과 영혼까지 황폐하게 하는 고통의 절정이었습니다.

(3)그리고 십자가는 배신과 조롱의 자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두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를 향해서 호산나 찬양하던 사람들의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입으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침을 뱉었습니다. 그 모든 조롱을 다 당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강도들에게서도 조롱을 받아야 했습니다. 십자가는 조롱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이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십자가만이 나의 참된 자랑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은 육체의 할례를 받은 것으로 폼을 잡고는 무슨 최신 유행이나 따르는 것처럼 거만을 떨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십자가만이 성도의 참된 자랑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참된 자랑거리는 십자가입니다. 죽어도 자랑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의 그 십자가입니다. 저주의 십자가, 고통의 십자가 조롱의 십자가 그 십자가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어집니까?

2.

2.1.

첫째는 십자가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케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여기의 말씀에 보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과 내가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를 잡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더 이상은 나와 상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세상에 종살이했습니다. 세상이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권세 앞에 꼼짝도 못하고, 하나님의 멸망과 진노를 받아 저 지옥에 가는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우리가 당해야 하는 지옥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옥의 배반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의 권세가 더 이상 우리를 억누르지 못하고 우리를 그 가운데서 자유케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십자가를 유일한 자랑으로 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은총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자기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 능력이 주님의 그 십자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있다면 휴가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특별히 무슨 일을 잘한 병사에게 포상휴가를 줍니다. 왜냐하면 군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바로 그 휴가이기 때문입니다. 휴가를 받아 부대의 위병소를 벗어나게 되면 벌써 공기가 다른 것 같습니다. 상쾌합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온 몸에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활력이 솟아납니다. 그 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위병소를 지나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발걸음은 거의 날아가는 수준입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가 가져다 주는 기쁨입니다. 억눌려 있던 자리에서 자유을 얻게 되면 그것은 엄청난 행복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아담 이래로 죄와 사망의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는 군대 내무반의 긴장감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죄와 사망의 공포 가운데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죽어야 했습니다. 모두가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지옥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인들의 죄값을 지시고 아들을 죽게 하셨습니다. 아들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죄인인 인류를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은혜를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것도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케 할 수 없습니다. 학문으로도 지식으로도 철학으로도 물질로도 아무것으로도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떠나 하나님의 축복에로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내게 자랑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에 가졌던 학문,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던 것이 자기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케 할 수 없으나 십자가의 은혜가 자유케 했다는 것입니다. 전에 가졌던 로마인의 신분이, 바리새인의 율법이 자유를 줄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유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세상에 매여 살던 우리를 하나님의 축복에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사랑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저주가 사라졌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사라졌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곁에 가까이 오게 되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둘째는 십자가만이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갈라디아서 6:15)

사도 바울은 할례를 받는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방인들 중에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지만 아무리 그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킨다고 해도 유대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인처럼 성전 안에 들어가서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이었습니다. 성전에 이방인을 위해 마련한 곳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할례를 받으나 할례를 받지 않으나 이방인이긴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새롭게 마련하신 저 천국에 들어가서 하늘에 있는 성전에 마음껏 들어가서 예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새 사람으로 지음을 받아야 하고, 중생해야 하고, 거듭나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저 천국에 들어가서 마음껏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새 사람으로 지음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우리를 구속하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이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천국의 시민이 되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이것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만큼 소중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살다가 지옥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떵떵거리며 살던 것이 자랑거리가 되어서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길 수 있습니까?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꿔 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능력이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천국을 생각하고, 천국에서 축복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귀한 신분을 얻게 되는 것이 오직 십자가 뿐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세상 것은 자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지신 그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만이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과 권세를 갖게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

세째로 십자가만이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만이 참된 평강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갈라디아서 6:17)

이 말씀은 단순한 인사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은 볼 수 없는 것이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 규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복음을 행하는 자에게만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고, 평강을 준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상관없는 자에게는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1:9절 마지막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의 복음을 행하는 것외에 다른 것을 복음이라고 여기며 따라가게 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행하기만 하면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강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평강, 천국의 기쁨은 다른 것으로 통해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에게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절 말씀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과 다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평안은 세상에서 잠시 누리게 되는 기쁨이나 평안 따위가 아닙니다. 개그콘서트 보고, 웃찾사 보면서 웃게 되는 그런 허탈한 웃음이 아닙니다. 천상의 웃음을 웃게 됩니다. 하늘의 기쁨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아무런 고난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있지만 고난을 뛰어넘는 감격적인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기쁨이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삶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평안한 얼굴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천국의 미소를 머금고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의 모습을 천사와 같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사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됩니다. 날마다 천국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돈은 없고, 건강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업은 불황이고, 직장은 안정적이지 못해도 늘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만이 줄 수 있는 평강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고난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힘들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이나 맞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24) 때로는 사자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강도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대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수없이 감옥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그는 아무도 웃지 못할 바로 그 때에 웃을 수 있고, 모두가 통곡하며 탄식할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행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절망의 순간이 많이 찾아오지만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하늘의 행복으로 마음껏 기뻐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천국과 같이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늘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에는 주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웃음꽃이 만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으로 이런 웃음과 기쁨과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이런 것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는 볼품없는 악세사리일 수 있습니다. 그저 교회의 종탑에서 붉은 빛을 비추는 흉물스런 장식품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고 비웃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십자가도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비웃고 세상의 화려함을 자랑합니다. 물질과 재능과 지식을 자랑합니다. 권세를 자랑하고 성공과 출세를 자랑합니다. 지금은 그 자랑이 진정한 자랑거리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날 주님 앞에서 그 자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치스러운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예전에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이 무슨 특권과 능력을 대변해주는 것같아 자랑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수치가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마감할 때에 세상의 자랑은 헛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자랑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뿐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만으로 자랑을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단절시켜줍니다.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하나님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케 해줍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그 십자가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신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이 땅에 속한 사람에서 천국에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천국의 평강을 줍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행복과 기쁨을 줍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여러분의 자랑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며 감사하고, 이 복음을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온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새 사람이 되게 하시며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기억하고

그 은혜만을 자랑하기로 결심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