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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나의 자랑, 주의 십자가(3) -갈6:1~18

나의 자랑, 주의 십자가(3)

갈라디아서 6:11~18

Entrance Prayer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2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3 저가 이스라엘 집에 향하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시편 98:1~3)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간을 은혜 가운데 인도하시고, 거룩한 날을 허락하셔서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축복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이날을 정하시고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오늘도 주 앞에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축복하시며, 근심과 염려을 제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평강만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 아멘 -

Introduction

어떤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목사로 사는 것은 다 좋은데 새벽기도만 없으면 살겠다. 새벽기도가 힘들긴 힘든 모양입니다. 일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이라고 결심했던 목사님 조차도 새벽기도만 없으면 목회는 할만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어떤 놈이 새벽기도를 만들어가지고... 하면서 아침마다 욕을 한답니다. 그 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밤의 문화가 발달된 시대일수록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셨던 모범을 따라 새벽에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새벽에 기도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한 날의 역사를 아름답게 인도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힘써 새벽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주 월요일 새벽은 전 교인이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모두 참여해 주시기를 바라고, 하루 뿐 아니라 한 주간을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벽기도는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새벽기도 못지않게 부담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입니다. 교회에서 전도는 하라고 하는데 잘 할 수는 없고, 또 전도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늘 괴롭습니다. 특히 직분자가 되어서 전도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성격상 대인기피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도는 죽기보다 힘든 일입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에게 전도하라는 말씀은 고역입니다. 너무나 힘든 과제입니다. 저도 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분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지만 성경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보배를 가졌으니 자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십자가와 그 축복을 소유했으니 가만히 숨겨두지 말고 자랑하라.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명령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최고의 명령임을 기억하고, 전도하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이곳에 세우신 것은 그저 매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서 예배만 드리라고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이 곳에 세우신 것은 이 지역을 주의 복음으로 구원하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천국을 소유하게 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곳에 하나님의 축복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지만, 부담스럽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Main Subject

1.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십자가가 악세사리요, 장신구가 될 수 있었지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을 당시만 해도 십자가는 로마의 가장 처참한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처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생각만 해도 끔찍하게 였는데 바울이 그것을 자랑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울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는 자기 아들에게 죄를 전가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심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를 자랑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평생을 일그러진 얼굴로 숨어 살다시피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과 딸, 남매가 있었는데 심한 화상으로 자식들을 돌 볼 수가 없어 고아원에 맡겨 놓고 시골의 외딴집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한편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 자식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라며 나타난 사람은 화상을 입어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손가락은 붙거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낳아준 아버지란 말이야?” 자식들은 충격을 받았고, 차라리 고아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더 좋았다며 아버지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자식들은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며 혼자 외딴집에서 지냈습니다.

몇 년 뒤, 자식들은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왕래가 없었고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살았던 자식들인지라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별다른 슬픔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을 낳아준 아버지의 죽음까지 외면할 수 없어서 시골의 외딴집으로 갔습니다. 외딴집에서는 아버지의 차가운 주검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을 노인 한 분이 문상을 와서 아버지께서는 평소에 버릇처럼 화장은 싫다며 뒷산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은 아버지를 산에 묻으면 명절이나 때마다 찾아와야 하는 번거롭고 귀찮아서 화장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화장하고 돌아온 자식들은 다시 아버지의 짐을 정리해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평소 덮었던 이불이랑 옷가지들을 비롯해 아버지의 흔적이 배어 있는 물건들을 몽땅 끌어내 불을 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책들을 끌어내 불 속에 집어넣다가 “비망록”이라고 쓰인 빛바랜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불길이 일기장에 막 붙는 순간 왠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얼른 꺼내 불을 껐습니다. 그리곤 연기가 나는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일기장을 읽다가 그만 눈물을 떨구며 통곡했습니다.

일기장 속에는 아버지께서 보기 흉한 얼굴을 가지게 된 사연이 쓰여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자신 들이었습니다. 일기장은 죽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쓰는 편지로 끝이 났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여보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 놈인지조차 모르겠구려. 그날 당신을 업고 나오지 못한 날 용서 하구려. 울부짓는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당신만을 업고 나올 수가 없었다오. 이제 당신 곁으로 가려고 하니 너무 날 나무라지 말아주오. 덕분에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다오, 비록 아버지로서 해준 것이 없지만 말이오......... “보고싶은 내 아들 딸에게.....” 평생 너희들에게 아버지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이렇게 짐만 되는 삶을 살다가 가는구나....... 염치 불구하고 한 가지 부탁이 있구나 내가 죽거들랑 절대로 화장은 하지 말아다오. 난 불이 싫단다. 평생 밤마다 불에 타는 악몽에 시달리며 30년 넘게 살았단다. 그러니 제발.........! 뒤늦게 자식들은 후회하며 통곡하였지만 아버진, 이미 화장되어 연기로 사라진 뒤였습니다

평생 부끄러운 것으로만 알았던 아버지의 얼굴은 자식을 향한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자식들은 그 아버지의 사랑을 도무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끄러워 했기 때문에 피눈물나는 후회를 해야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십자가를 부끄러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 하나님이 이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노라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랑하지 못하다가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회한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기쁨으로 전하고 증거하고 자랑하시므로 바울 사도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리라”(디모데후서 4:7) 고백했던 것과 같이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축복의 면류관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도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일생일대의 과업으로 삼았습니다. 주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일을 위해서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믿음의 후배들을 향해서 십자가를 자랑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오직 십자가를 자랑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입니까?

2.1.

본문 14절 말씀 중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세상이 내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인 사람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는 사람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아현동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직장에, 우리의 삶의 자리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에 들어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복음의 내용으로 자랑합니다. 때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수많은 은혜와 간증들을 가지고 자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와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세상 곳곳에 십자가를 세워라.

가끔씩 서울의 야경을 보게 됩니다. 빨간 십자가가 얼마나 많이 보이는지 모릅니다. 성도들이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세상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교회 종탑 위에 세워져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결코 그 종탑 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와 성도들은 십자가를 절대로 종탑 아래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세상으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교회 종탑 아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자랑하고 소개도 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 종탑을 벗어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혀 이야기 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직 공부해라 좋은 대학가야지 하면서 세상이야기만 합니다. 아들에게 십자가의 사랑과 그 고귀한 희생의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친구들끼리 만나면 부동산가격이 어떻게 되고, 주식동향이 어떻게 되고, 국가경제가 어떻게 되느냐는 등의 이야기로 열을 올리기는 하지만 십자가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그 사랑의 피가 아직도 뜨거운 흔적으로 남아있는 그 십자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종탑 아래로 가져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들고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그 십자가를 세워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가는 우리의 동포들에게, 형제들에게 그 십자가의 사랑과 축복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심장에 십자가를 세워야 합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 이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이 내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세상에 십자가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십자가의 사랑과 축복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우리의 가족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워놓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귀한 교회,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로 인정받고 축복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본문 14절 마지막에 보니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다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4절 마지막입니다.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 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담긴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이기적이고, 정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품에 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373장에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 전하세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서 예수 믿으라고 목청터져라 외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세운 그 십자가 위에 우리 자신을 메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위에 우리를 매달고, 주님의 그 사랑을 실천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이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게 될 때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자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랑되고 전파되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교회 종탑에 걸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십자가를 걸어두었습니다. 자동차 안에 십자가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전혀 없습니다. 그의 양심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들의 직장에서의 업무를 수행함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적당히 타협합니다. 부정을 저지릅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보다 더 거짓되고 약삭빠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는 십자가는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위선입니다. 가증합니다. 약삭빠름입니다. 절대로 손해보지 않는 냉혈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는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그의 모든 생명을 걸고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그의 자랑은 단순히 입술만의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도의 자랑은 그의 삶으로 실천하는 자랑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적 희생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며, 그들 앞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작은 예수가 되어 섬김과 희생의 십자가,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온 천하에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

본문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라디아서 6:17)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졌던 흔적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 것 때문에 얻게 된 영광의 상처가,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만큼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밤낮 쉬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총을 이야기했습니다. 증거했습니다. 십자가의 영광이 높이 드러나는 일을 위해서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썼습니다. 기회를 찾아 그 십자가의 은총을 간구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생명을 걸고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이 우리의 몸에 남도록 자랑해야 합니다.

제 친구 목사님이 교회에 직분자를 세워야 하는데 고민이 되었답니다. 그분의 생각에 교회의 직분자가 되려면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분명하게 표가 나는 헌신과 섬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앞에 공포했답니다. 직분자가 되려는 사람은 하나님과 모든 성도들 앞에 두드러지게 기억될 헌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직분자는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예수의 흔적이 그 몸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홀로 반성해 보았습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는가? 십자가를 자랑하는 일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 때문에 남아있는 영광의 상처가 있는가?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흔적을 보이고 있지 못하구나 생각하니 막막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수의 흔적이 남기까지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그 흔적이 자기의 몸에 남기까지, 자기의 몸에 십자가의 못자국이 생긱기까지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수많은 고난 중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증거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도하자고 하면 도망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기회를 만들어서 십자가를 세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유일한 자랑은 주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돈과 명예, 건강과 권력입니까? 그런 것 따위로 우리의 자랑을 삼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금고에 돈의 흔적이 남은 것으로 자랑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몸에, 우리의 가정에 세상의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져 있음을 자랑으로 삼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십자가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희생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피눈물나는 섬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영원한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세상 속에 그 십자가를 세움으로 자랑했듯이, 주님의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갔듯이, 그곳에서 십자가 자랑하다가 예수의 흔적, 십자가의 영광의 상처가 그의 몸에 남기까지 수고했듯이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종탑 위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족들의 마음에, 아현동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이 나라 조국 대한민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지역사회에, 이 나라 이 민족 가운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늘 영광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예수의 흔적이 남기까지

세상 속에 들어가 십자가를 세우고,

힘써 자랑하기로 소원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