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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가장 존귀한 사람 (딤후 2:15~21)

가장 존귀한 사람

디모데후서 2:15~21

Entrance Prayer

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64:3~5)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거룩한 성일 허락하셔서 주 앞으로 부르시고 예배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죄악된 우리의 모습으로는 도무지 주 앞에 설 수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용서하시고, 우리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으시며, 축복의 자리, 기쁨의 자리로 초청하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하게 하시옵소서. 정성을 다하게 하시옵소서. 주님과 함께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예배가 되게 하시옵소서. 악한 마귀는 조금도 틈타지 못하고, 오직 성령께서 주관하시며, 하늘의 평화가 충만히 임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Introduction

최근에 많은 신앙인에게 관심을 끌었던 책이 있습니다. 브루스 윌킨슨이라는 분이 쓴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감동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어린이 야베스의 기도가 책으로 다시금 출판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이 야베스라는 사람은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역대상에 여러 사람의 인명을 기록하는 중에 한 구절 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역대상 4:9~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9~10)

사람들의 입에 야베스의 기도가 회자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기도하므로 그 형제보다 존귀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야베스($Be[]y")라는 말은 고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는 많은 괴로움 중에 출생했을 것입니다. 해산이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야베스가 태어날 당시에 삶이 너무나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이 땅에 야베스를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한 없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야베스라고 했습니다. 야베스는 대단한 가문도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여러 형제들 가운데서 미천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멸시를 받는 모습으로 자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의 인생을 역전시킵니다. 그리고 어느 형제들보다 가장 존귀한 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역전을 좋아합니다. 축구경기를 할 때에 그냥 승리는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대역전극을 벌일 때에 흥분이 됩니다. 긴장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승리를 거머쥐게 되면 환호하고 난리가 납니다. 역전은 그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볼 때도 사람들은 은근히 덩치가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뒤집어 놓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흔치 않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박수와 갈채를 보냅니다. 이것이 대개의 사람들의 속성입니다.

야베스는 별볼일 없는 가문에서 수많은 좌절과 고통을 경험해야 했지만 그 가운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직 승부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할 때에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극히 존귀한 자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인생의 대역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많은 신앙인들이 야베스에게 관심을 갖고 환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동시에 야베스의 축복을 함께 누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가 야베스가 될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지금의 생활이 힘들고 고난이 가득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대역전극을 벌일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절망인 그 순간에도, 인생의 막장 저 깊숙한 어두움 속에서 신음하는 일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야베스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대역전을 펼치며 존귀한 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베스가 기도했던 기도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야베스처럼 그 형제보다 더욱 존귀케 되는 인생의 대역전을 이룰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사람들은 인생을 대역전시키고, 존귀한 자가 되기 위해서 로또복권에 희망을 걸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로또 복권이 우리의 인생을 대역전시키지는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소개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천덕꾸러기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고, 보석같이 귀하게 여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0~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게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2:20~21)

여기의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릇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 금 그릇이 있고, 은 그릇도 있습니다. 목기, 토기 등등의 수많은 그릇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양한 직분자와 은사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집에서 귀중하게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귀하게 쓰임 받는 것이 있고, 또 천하게 쓰임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직분이 좋은 사람입니까? 은사가 많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많이 배운 사람,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까? 세상적으로 좋은 직장을 갖고, 있으며, 또한 물질이 많은 사람입니까? 물론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아무리 대단한 지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은사를 소유하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는 사람은 결코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받으면, 그리고 신기한 은사를 가지면 그는 존귀한 사람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금 그릇이 되고 은 그릇이 되면 귀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은 귀중합니다. 목사의 직분도 귀중합니다. 장로의 직분도 귀중합니다. 안수집사나 권사의 직분도 귀중합니다. 이런 직분은 금 그릇이나 은 그릇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직분을 아름답게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귀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갖고,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갖고, 예언하는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하나님 앞에서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귀한 직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도무지 합당치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금 그릇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성경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정통보수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종교와 정치적 영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어떤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금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계획을 이루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촌 동네의 무지랭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죄인과 세리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을 이루셨고,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왭니까? 바리새인이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금 그릇이었습니다. 은 그릇이었습니다. 아무리 금 그릇, 은 그릇이어도 주님께서 사용할 수 없는 그릇이라면 귀한 그릇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금 그릇, 은 그릇이었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도무지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히려 “화 있을진저” 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반면에 질그릇 나무그릇일 뿐인 갈릴리 촌 동네 사람들, 세리요 죄인들.. 그들은 주님의 손에 사용되므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을 이루고, 주님의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이름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선배 목사님과 동료 목사님들이 저를 향해서 권면합니다. 신목사, 장로 많이 세우지 마라. 장로 많이 세우면 목회가 힘들어진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장로님들을 많이 세우면 목회가 더 수월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함께 협력할 사람이 많아져야 교회가 더 빨리, 더 아름답게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장로를 많이 세우지 말고, 안수집사를 많이 세우지 말고, 권사를 많이 세우지 말라고 합니까? 장로라는 귀한 직분, 안수집사, 권사라는 귀한 직분을 받았는데 도무지 우리 주님께서 쓰실 수 없는 그런 직분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절대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방해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어떤 직분을 갖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직분은 귀중한 것입니다. 금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은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 자체로 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가치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금 그릇, 은 그릇이 그 자체로 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눈으로 보면 금 그릇이라도, 은 그릇이라도 주님께서 도무지 쓸 수 없는 애물단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의 애물단지가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금 그릇 은 그릇이 되는 것보다도 주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에 언제든지 멋지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든지 주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에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 언제든지 주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에 기꺼이 사용될 수 있는 가장 존귀한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 주님 앞에서 가장 귀한 그릇은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에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장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2.1.

첫째는 깨끗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을 쓰십니다. 더럽고 음흉한 사람을 절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2:21)

우리 주님의 손에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깨끗해야 합니다. 더러운 모습, 죄악 된 모습으로는 도무지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죄악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너무나 귀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예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만큼 존귀한 이름, 귀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그도 죄인이었습니다. 끔찍한 살인자였습니다. 간음한 자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불신앙으로 인구조사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늘 하나님께 회개하므로 자신을 정결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악을 지적하게 될 때에 그는 눈물로 침상을 적셨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라. 그는 죄악을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했습니다. 회개하므로 항상 자신을 정결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깨끗한 그릇으로 살기를 힘썼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다윗을 평가하십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사도행전 13:2) 따라 합시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사용하셔서 가장 존귀한 이름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가장 귀한 그릇이 되었던 것입니다.

죄악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귀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중직을 수행하며 감당하게 되어도, 때로는 우리의 기술과 실력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멋지게 섬기는 것 같아도 죄악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 귀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죄악을 모릅니다. 우리의 추악함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하나님도 우리의 죄악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양, 외적인 아름다움, 금 그릇인 것을 보고 우리를 존경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는 분이 아니요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중심에 죄악이 있는지를 살피십니다. 우리의 중심에 욕심으로 오염된 헌신이 있는지를 살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끗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존귀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악은 저절로 깨끗하게 씻깁니까? 우리가 고백만하고 있으면 울기만 하고 있으면 우리의 죄악이 없어집니까? 아무리 울어도, 우리의 가슴을 찢어도 우리의 눈물만으로는 결코 죄악을 씻을 수 없습니다.. 찬송가 343장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아무리 울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한다고 죄악을 씻을 수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아니고서는 어떤 후회도 눈물도, 선행도 우리를 결코 깨끗케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그분의 십자가 앞에 나아와서 울어야 합니다. 죄악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결케 된 사람이 하늘과 땅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는 실력있는 사람이 존귀한 것입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어디나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은 금 그릇을 찾습니다. 은 그릇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금그릇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은그릇을 찾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깨끗한 그릇을 찾으십니다.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통회하는 마음을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털끝만한 죄악도 주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눈물로 침상을 띄우기까지 회개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정결케 해 달라고 간구했던 것처럼 주 예수 앞에서 진실한 회개로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 주님께서 지극히 존귀하게 여기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2.

울기면 하면 주님께 쓰임받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찬송가 141장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없어 이몸 바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둘째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 늘 준비하고 있는 사람,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해주시옵소서 하면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21절 마지막에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절 말씀에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디모데후서 2:15)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자신을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드리기를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뺀질뺀질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힘든 일은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고 쉬운 일만 하고, 얼굴 나는 일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 앉아서 큰소리나 치고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는데 핑계를 대고 있어서도 안됩니다.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우리를 주님 앞에 드리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일할 사람! 하고 부르시면 저요. 저요 하면서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우리교회에서 황해노회 서시찰 주일학교 연합회가 주최하는 교사강습회가 있었습니다. 담당하시는 목사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우리 권사님들, 집사님들께서 몸을 아끼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서 제공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몸살이 날 정도였지만 불평한마디 없이 기쁨으로 감당해주셨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남자 집사님 두분, 박창규 집사님, 함홍식 집사님 두 분이 교회 앞에서 주차 안내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차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차를 가지고 오시는 분들은 보통 낭패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어디에 차를 댈 수 있는지 안내를 해줍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직접 운전을 해서 주차를 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연세가 70이십니다. 금주 토요일에 칠순감사예배를 하시는 집사님께서 직접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고 행사를 담당하시는 목사님께서 마포중앙교회에서 너무나 잘 섬겨주셔서 고맙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굴을 볼 때마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내년에도 마포중앙교회에서 또 해야겠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저도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의 집사님들은 뺀질거리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와서 주차안내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분들 스스로가 오셔서 안내해주신 것입니다. 교인들 칭찬을 하니 목사 어깨가 으쓱 올라갑니다. 여러분, 목사 어깨가 자주 올라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쓰임을 받는 존귀한 그릇은 어떤 사람입니까? 뺀질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쁨을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필요로 하시면 언제든지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물질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 기꺼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이 필요하고, 또 우리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주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가장 귀중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기꺼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흔쾌히 우리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지극히 존귀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그릇이냐 금 그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드려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직분이 장로냐 권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드려진 직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은사가 대단한 것이냐 시원치 않은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드려진 은사 되어야 합니다. 어린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간신히 어린아이 하나의 점심 식사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의 손에 드려졌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5000명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어린 아이가 하나님께 깨끗한 손으로 자신의 귀한 것을 드렸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귀한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기적을 이루십니다.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 어린아이의 헌신이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끊임없이 칭찬거리가 되었습니다. 영광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막대기를 실패자의 막대기였습니다. 애굽의 모든 것을 잃고 그저 광야를 유리하며 천하디 천한 양 떼를 치는 실패자의 막대기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게 되고,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무능한 실패의 막대기는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는 능력의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는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드려져서 쓰임을 받게 될 때에 기적과 능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존귀한 이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그가 주님께 드려졌습니다. 배와 고기를 다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물고기 잡는데도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는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장 존귀한 이름으로 기록되는 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드려지면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보잘 것 없습니까? 직장도 시원치 않고, 은사도 능력도 볼품없습니까? 교회에서의 직분도 그저 그렇고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스스로 천한 그릇이라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외모를 가지고, 우리의 직분이나 은사를 가지고, 우리의 가문이나 학벌을 가지고 우리가 귀하다 천하다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언제든지 쓰시고자 할 때에 기쁨으로 쓰실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직분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은사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우리는 가장 귀중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교회, 존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은 가진 것 없어도, 세상에서는 천하디 천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주님 앞에서 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존귀한 이름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앞에 존귀한 사람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았다고 우리 주님께서는 그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기쁨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멋진 교회의 건물과 수많은 성도수를 자랑하는 교회는 존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고귀한 직분을 맡아 감당하는 사람이 존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 그는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꼭 그런 것이 아닙니다. 초대형 메가처치라도,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거룩한 성직을 갖고 있다고 해도, 주님께서 쓰기에 합당치 못한 그릇과 같은 교회와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귀한 그릇이 못됩니다. 그들은 주님의 교회에 애물단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골칫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하고, 언제든지 주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힘써 드리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존귀한 교회, 가장 귀중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주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이 되기로 작정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