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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힘써 저 안식에 들어가라(히4:4~11)


2005년 7월 31일 설교을 들으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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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저 안식에 들어가라

히브리서 4:4~11

Entrance Prayer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편 121:1~2,7~8)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무더운 날씨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오늘도 거룩한 성일을 주시므로 축복을 약속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날에 주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답답함을 해결하시며,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평강과 안식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배하고자 합니다. 악한 마귀는 틈타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주의 이름만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 아멘 -

Introduction

네델란드의 문화사회학자 호이징거(1872~1945)는 인간은 유희적 존재라는 뜻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명명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류의 문화는 인간의 유희적, 놀이적 특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유희, 또는 놀이는 절대로 뗄 수 없으며, 일상의 분주함에서 탈출하여 건강한 놀이로 여가를 즐기게 될 때에, 사회적 재생산의 능력이 생겨나게 되고, 이런 쉼의 과정은 인간의 인간됨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참으로 옳은 듯싶습니다. 인간은 일만하고 살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적절한 쉼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유희와 여유의 계절을 맞고 있습니다. TV에서는 연일 멋진 피서지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맑은 물이 있고, 도시의 모든 스트레스를 한번에 날려봄직한 멋진 장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휴가철을 맞아 동해바다로 떠나기도 하고, 서해로 가기도 합니다. 산으로 가고 계곡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여유를 즐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유희와 쉼은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유희를 추구하지만 최고의 기쁨은 바로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쉼과 여유를 찾아 산으로 들로 나아가기에 앞서 참된 안식이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거룩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본문은 참된 안식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히브리서4:4)

참된 안식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주어지는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크게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1.

첫째는 창조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에 보니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동안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와 만물을 창조했다고 해서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겨우 6일 동안 만든 것이니 그것은 별볼일 없는 졸작이라고 생각해서는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6일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일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구슬 땀을 흘리면서 일하셨습니다.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죽도록 일했습니다. 그리고 쉬셨습니다. 여기에 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풍성하도록 은혜를 허락하셨으므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쉼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평안과 풍요의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인류에게 안식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의 결과가 사람들에게 여유를 가져다 주고, 풍요를 가져다 주고,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 쉼이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현대카드 CF광고에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카피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라면 그는 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놀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세상적으로 맞는 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은 우리의 힘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수고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솜씨, 하나님의 일하심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8절 말씀에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가나안의 안식의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위대한 사람의 수고와 헌신으로도 안식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식은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식은 오직 우리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일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창조세계를 섭리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힘으로 지키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일하심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참된 안식을 준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안식을 소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두번째로 우리에게 안식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일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모압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금 십계명의 말씀을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5: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명기 5:1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안식은 그의 구원하시는 수고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아무런 수고도 없이 구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만큼은 정말로 신중하게 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아픈 가슴을 안고 감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슴 아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그의 백성들에게 조롱을 당하며 처참하게 죽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그 아픔으로 우리를 위해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인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고하셨습니다. 팔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편 팔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안식은 공짜가 아닙니다. 싸구려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싸구려로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참된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영원한 쉼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의 수고와 아픔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안식은 예수님의 핏값 만큼이나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을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1.3.

세째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도의 견인입니다. 에베소서 4: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4:30)

성령은 오늘도 일하십니다. 저 영원한 천국이 완성되고,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성령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인치시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십니다. 말세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습니다.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마귀의 이런 계략을 물리치시고, 그 가운데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신학자들은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고 공격해도 우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죄악에 넘어지게 될 때에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힘쓰고 수고하십니다.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살피시면서 지키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순절 날에 사도들과 120명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님을 사모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성령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은사 충만하게 되고, 능력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구원과 안식과 평안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인류에게 주어지는 참된 안식은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수고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과 눈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히브리서 4: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히브리서4: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 그리고 성도의 견인이라는 수고를 통해서 인류에게 안식을 제공하시는데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화합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 따로, 나 따로” 였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내가 별개로 살아가니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서 제공하시던 안식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만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에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그곳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을 통해 얻어진 안식의 동산에서 마음껏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고, 말씀 따로, 나 따로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명령이고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좋은대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식의 동산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 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안식이었습니다. 축복의 동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망령된 짓을 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 따로, 생활 따로 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나안 땅을 빼앗기고 다시금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을 화합해야만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믿는 자가 되어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구원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안식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참된 쉼도, 유희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믿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참된 안식과 쉼을 마음껏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3.1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개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까? 물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비난해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입으로 고백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순종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결코 믿음은 참된 믿음으로 인정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8) 말과 혀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야고보서는 증언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17, 26) 참된 믿음은 말로만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이라는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브리서4:6)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본문에서는 믿음과 순종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결국 순종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는 믿음의 고백은 헛것일 뿐입니다. 교회의 역사가 그토록 순종을 강조해온 것은 그것이 믿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해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교회의 일도 해야 하고, 순종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에 근거하지 않는 어떤 것도 교회를 유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순종하는 것이 짜증날 수도 있습니다. 귀찮을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순종이 교회생활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순종하는 않고 똑똑한 사람 100명보다 어리석지만 순종하는 사람 한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러합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이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서 세계적인 석박사만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학벌도 시원치 않고, 인물도 그저 그렇고, 돈도 많지 않은 보통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유지되고 보존되고 부흥하는데 석 박사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요, 똑똑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한 사람이 더 필요하고 중요함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내 생각대로 사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앞에 묵묵히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고,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히 존귀하게 되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참된 안식을 얻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있습니다. 내 생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고백하시므로 주님이 준비하신 참된 안식과 평안이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3.2.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면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졸고만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태복음 26:41) 마음 먹을 대로 잘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기도하고 싶고, 순종하고 싶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몸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로마서 7:18~2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18~25)

사도 바울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사도입니다. 역사상 그와같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은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된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쉽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 즐겁게 웃으면서 걸어갈 수 있는 산책길이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눈물의 골짜기라고 합니다. 고통의 길이라고 합니다. 여전히 죄된 유혹에 쓰러지고 넘어지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일 뿐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망의 몸에 매여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조차도 그러했다면 더욱 죄악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따라합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순종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도우시면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만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11절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4:11)

여기에 보니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안식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을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힘쓰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성경에서 스푸다조(spoudavzw)라고 하는데 이 말의 본래 서두르다 집중하다 열중하다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해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 잠시도 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추진력을 가지고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불순종하려는 생각이 사라지게 되고, 순종의 사람이 되어 안식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저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한 순간도 주님의 재림, 파루시아를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면 인사할 때에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는 고백으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약속하신 소망의 나라, 안식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 안식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안식을 얻기 위해서 쉬지 않고 섬겼습니다. 사랑했습니다.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순종의 사람이 되어 저 영원한 안식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을 얻기 위해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을 취하는 일에 우선권을 두고 달려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휴가철을 맞아 이곳 저곳에서 안식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예수 없이는 아무리 아름다운 곳, 좋은 별장에 가서 쉬어본들 참된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가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견인하심이 참된 안식의 근원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약속된 믿음을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만 있으면 비록 우리의 육신은 병들었더라도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분이 낮다고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학벌과 지연에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힘써 순종하게 되면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마포중앙교회와 성도님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허락하시는 안식이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로 힘써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로 소원하는

온 교회와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