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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주님,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2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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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21:15~18

Entrance Prayer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1~2)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백성들을 돌보시고, 인도시며, 거룩한 성일 허락하셔서 주님 앞에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신령과 진정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성령으로 도우시고, 악한 마귀는 틈타지 못하게 하옵소서. 예배하는 모든 심령들 위에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신령한 축복을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게 하시고,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 아멘 -

Introduction

대한민국의 무뚝뚝한 남자의 대명사는 아마도 경상도 남자일 것입니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상도 남자는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세 마디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는? 밥도!, 자자” 이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하면 하늘이 두 쪽 나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아내나 애인이 나 사랑해? 하고 물으면 그래 사랑한다. 이러면 되는데,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이런 답니다. 이것은 비단 경상도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닐 듯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야 주변에 사람들이 있건 없건 사랑한다고 하고, 또 스킨십도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닭살스럽다고 하면서 회피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마음으로만 간직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고백할 때에 더 큰 위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게 될 때에 더 큰 사랑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말을 합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의 인격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도 많이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아직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한다고 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가 마치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내어 사랑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사랑합니다.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습 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말은 사랑합니다 인데 눈은 불편합니다.이면 안됩니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좋습니다. 남편들이여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고백하게 되면 내일 아침 반찬이 달라집니다. 아내들이여, 이처럼 남편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게 되면 우리의 남편들이 세상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승리하는 남편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고백을 듣고 자란 자녀들은 비굴하지 않고, 용기있는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술에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가득하므로 우리의 가정마다 행복이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만리장성을 쌓고, 피라밋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해서 사랑을 고백하게 될 때에 그 순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랑고백에는 무뚝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경상도 사람처럼 사랑고백을 민망한 이야기하는 것 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게 될 때 주님의 능력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의 삶을 향해 더욱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사랑합니다.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힘찬 사랑의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Main Subject

오늘 본문은 주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을 격려하시며, 다시금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저주하며 부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오셔서 그에게 묻습니다.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의 지난 날의 잘못을 꾸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책망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영적 실패자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확신도 필요합니다. 주님을 만나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영적인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도 있고, 소망도 있고, 주님을 만났던 은혜의 체험이 있다고 해도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그는 결코 영적인 성공자가 되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에도 으뜸이었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도 으뜸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뛰어났습니다. 주님의 인정하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제자였습니다. 무기력한 신앙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마땅히 부활의 복된 소식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왜 베드로는 이런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영적 실패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도록 했습니다. 또한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못 믿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을 때에 주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부활을 믿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가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은 자 가운데사 다시 살아나신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의 놀라운 사실을 접한 후에 어디로 갔습니까? 요한복음 21:1절에 보면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그들은 복음의 증인이 되지 못하고, 디베랴 바다로 갔습니다. 여기에는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만져보았던 도마도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지금 디베랴 바다에 있습니다. 디베랴 바다의 원래 이름은 갈릴리 바다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디베랴 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원래 디베랴는 갈릴리 바다 서부 해안에 있는 도시입니다. 헤롯 안디바가 이 도시를 건서하고 수도로 삼으면서 당시의 로마 황제 디베료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입니다. 한 도시에 황제의 이름을 넣는다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디베랴는 바로 이방의 신전이 있고, 세상과 긴밀하게 연결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만족을 구하는 이름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의 서부지역을 디베랴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주님의 제자들이 여기에서 고기를 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징하는 것,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경험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 주님의 명령과 사명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요를 구하며, 세상의 만족만을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지만 그들은 헌신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좌절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세상 속에 뒤섞여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했다면, 주님의 능력을 보았다면 마땅히 주님의 나라를 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 일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저 디베랴 바다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온 천하를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고, 주님의 명령하심을 따라 부활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되지 못하고, 디베랴 바다, 세상의 것을 취하는 것에만 골몰하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주님을 떠났던 죄책감, 자괴감.. 등등의 패배의식이 주님을 향해 사랑합니다 고백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세상을 추구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보시면서 여러 가지로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정의를 세우고, 이단을 쫓아내고, 또한 튼튼한 교회적 조직과 질서를 갖추고 있었지만 그들이 첫사랑을 잃게 되었을 때에 주님은 그들에게서 촛대를 옮기시겠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고, 엄청난 성과를 거두어도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헛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삶의 목적과 가치관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했고,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데도 요 모양 요 꼴일 때가 있습니다. 영적 성장은 고사하고 신앙에 권태를 느끼게 되고, 세상에 더욱 깊이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를 알고, 간증이 있는 것만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가슴 뜨거운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주님, 사랑합니다.하면서 고백이 울려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랑의 고백이 침묵 되어지고, 소멸되어진다면 우리는 무기력한 신앙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자가 진가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이룰 수 있는 헌신자가 되지 못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습니다. 디베랴 바다로 나아갔던 제자들처럼 세상 속에 허덕이는 존재, 그 가운데서 철저하게 실패하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1.1.

베드로와 제자들이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잃어가고 있을 때 그들에게 찾아온 실패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3절에 보니 “저희가 물고기를 잡으러 갔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사랑의 고백을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아도 세상 속에서 이처럼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 없습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되어집니다. 하는 일마다 실패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자요 무능한 인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세상적으로 많은 공부를 하고 재능이 있어도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밤새 고기를 잡아보았습니다. 그들의 경험을 동원했습니다. 지식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주님 품을 떠나 세상으로 가면, 디베랴 바다로 가면 철저하게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죄책감 때문에, 때로는 자괴감(自愧之心) 때문에 주님을 떠나고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러니 성공할 턱이 없습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패배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어디에서도 성공할 수 없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사랑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실패가 있습니까? 난제가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 보면 주님, 사랑합니다.하는 고백을 상실함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세상에 푹 빠져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은 철저한 실패만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맛보았던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추억만으로 가지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옛날만을 상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지금, 우리의 입술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없으면 실패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그 가운데 오셔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실패한 그 자리에서 성공하고, 다시금 일어나 하나님의 축복으로 충만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1.2.

그뿐입니까? 요한복음 21:4절 말씀에서는 “예수신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가까이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이 잃어버린 사랑의 고백을 다시금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돕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도무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주님을 향해 주님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무엇을 원하시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런 영적 무지함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을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그의 환란 때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편 18:1~3)

그렇습니다. 주님을 향해 사랑을 고백할 때에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능력이 되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며,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사랑을 고백하게 될 때에 힘되신 주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사랑고백에 인색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을 보았어도, 주님의 못 자국 난 손을 만져보았어도 주님을 향한 사랑고백이 사라지게 되면 영적 실패자가 됩니다. 가까이 오신 주님마저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둘째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이유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있게 될 때에만 위대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므로 무기력해지고, 영적 무지에 휩싸이게 되었을 때에 주님은 그들의 믿음과 신앙이 회복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금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있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지만, 그는 결코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큰 소리를 쳤습니까?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큰 소리를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한편으로 기쁨을 금할 길이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서운 죄책감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자괴감에 빠지게 했습니다. 나는 감히 주님 앞에 설 수 없다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잃고 영적 실패자로, 영적 무지의 사람으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이런 베드로를 가만히 두시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면서 물으시고, 베드로의 마음 속에 다시금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하게 만드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베드로는 지난 날의 과오를 생각하면서 부끄럽지만 주님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너는 순교하기 까지 내 복음을 온천하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누가 이루어갑니까? 돈 많은 사람이 이루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돈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간다고 하면 하나님은 이건희 회장 같은 사람, 세계 굴지의 재벌들을 부르셔서 주님의 제자를 삼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돈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실력 있는 사람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계적인 석학들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셨을 것입니다. 힘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간다고 하면 하나님은 헤롯과 같은 왕을 로마의 황제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맡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갈릴리 촌 동네의 어부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맡기셨습니다. 왭니까? 하나님의 일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권세로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힘으로 능으로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으로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권세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식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에 잃어버린 그 사랑을 회복시키시고 다시금 주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깁니다. 때로는 목사로, 장로로, 제직으로 교사로 봉사하면서 섬깁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온 천하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됩니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더 큰 자괴감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죄책감의 종이 되었습니다. 더욱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잃어버린 사랑의 고백이 다시금 생겨나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의 양을 먹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또 교회의 이런 저런 직분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선교지에 나가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이 없으면 안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고백이 부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고, 예수 사랑으로 섬기고 봉사해야 하는데, 우리의 입술에, 우리의 삶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없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하면서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게 되었을 때에 주님은 그에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헌신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순교하기 까지 주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이 사랑의 고백이 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날 과오 때문에 양심에 걸리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주님을 향해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했더니 용기가 생겨난 것입니다. 능력이 생겨난 것입니다. 순교적 헌신의 사람으로 그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기 까지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이 아닙니다. 권세가 아닙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이 필요하겠지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사라졌습니다. 첫 사랑을 잃었던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처럼 건조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서로의 이익을 따라 이합집산하며 교회는 생명력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세상의 한 조직체와 똑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내지도 못합니다. 기적을 이루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표적을 보여주지도 못합니다. 교회 안에 여전히 성경도 있고, 설교도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던 것처럼 믿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습니다. 영적인 실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어두워져서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영적 현주소입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현 주소를 찾아오셔서 다시금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향한 잃어버린 고백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고백을 회복 할 때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을 감당할 수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잃어버린 사랑고백을 회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향해서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이 물으심 앞에 베드로와 같이 주님께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을 향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고백하므로 주님의 위대한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 무기력함을 벗어나고, 영적 무지에서 탈출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적 헌신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주님의 위대한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주님 사랑합니다. 고백하므로

영적 무기력과 무지에서 벗어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로 소원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