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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내게로 돌아오라 (슥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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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10. 30 주일설교

제목 : 내게로 돌아오라

본문 : 스가랴 1:1~6

설교 : 신 현 철 목사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설교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

대한예수교 장로회

마 포 중 앙 교 회


내게로 돌아오라

스가랴 1:1~6

Introduction

1517년 말틴 루터는 당시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비텐베르그 대학교회의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전유럽에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성직자들의 부패와 금권주의, 비성경적인 불신앙 등등의 문제가 불거져 나왔고, 교회는 새로운 개혁을 이루어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루터를 비롯한 수많은 개혁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교회는 혹 지난날 로마교회가 갖고 있던 불신앙적인 모습, 타락한 모습이 있지 않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높습니다. 그런데 개혁이라는 말을 뒤집어 엎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혁이란 본래 뒤집어 엎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혁이 아닌 전복입니다. 그것은 쿠데타입니다. 개혁이란 본질로 되돌아 가는 것,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와 성도들에게 많은 잘못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복음이 능력있게 전해지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하겠다고 하면서 뒤집어 엎어버리면 안됩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도들 중에 교회를 향해서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으로 마치 개혁에 가장 앞장 선 사람인양 자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혁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적 비판일 뿐입니다. 비판은 교회를 망치는 것입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비판은 하나님의 일을 세우지 못합니다. 참된 개혁은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혁입니다. 민주주의의 참된 개혁은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학교의 개혁은 학교를 교도소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의 본질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개혁한다고 비판만 일삼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그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개혁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전복하는 적그리스도 운동의 앞잡이가 되지 말고, 교회를 하나님의 뜻대로 개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본질로 되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개혁적 몸부림을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크신 은총이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유명한 교회의 모토가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개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개혁교회는 한 순간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끊임없이 개혁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개혁이 멈추어지는 순간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물이 고이면 썩게 되는 것처럼, 순환하던 혈액이 한군데 모이게 되면 그곳에 혈관파열 및 기타 염증이 일어나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듯이 교회가 개혁을 멈추는 것은 교회의 종말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개혁하라고 강력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스가랴 1:1~2)

여기에 말씀에 보니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개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질로 돌아가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끊임없이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인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성도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신앙인의 고향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바라보아야 하는 곳은 세상이 아닙니다. 물질도, 명예도 아닙니다. 성도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12: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것이 죄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지 않는 것이 배은망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선택하신 민족이었습니다. 애굽 땅에서 종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공로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강대국 밑에서 굴욕적으로 살아야만 했고, 도무지 그들의 힘으로는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애굽의 민족 말살정책에 희생양이 되어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나일강에 버려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끔찍한 노예생활 중에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돈이 많고, 명예가 높고, 지위가 높아서 그들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떵떵 거리며 살만하기 때문에, 많이 배웠기 때문에, 지위가 높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셔서 구원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이득이나 보기 위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크신 은혜로 구원하시면서 우리를 향한 거룩한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43:21절 말씀에 보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천하디 천한 종살이에서 크신 은혜로 구원하신 것도,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구원하신 목적도 오직 하나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복받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원받은 백성들은 그 마음의 고향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주님께 축복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을 향해야 하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와 보니 폼나는 우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우상들을 섬기면 자기의 수준이 높아질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적인 모습을 나타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눈물과 희생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었더니 하나님을 헌신짝 버리듯 하고 우상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물질을 따라갔습니다. 명예를 따라갔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좋아하며 거기에 미쳐 돌아갑니다. 얼마나 괘씸한 노릇입니까?

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가난한 고시생이 사법시험을 준비합니다. 그를 위해서 사랑하는 한 여인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해서 헌신했습니다. 때로는 옷도 사주고, 먹을 것도 사주고, 몇차례 실패를 맛보게 될 때에 그의 아픔을 위로도 해 주었습니다. 그 여인 덕분에 이 사람은 결국 고시를 패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시에 패스하고 보니 정말 마담뚜들이 달라붙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소개시켜준다고 합니다. 그 집 딸과 결혼만 하면 앞길이 창창하다고 합니다. 좋은 집도, 차도 주겠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예전의 여인에 대한 생각이 바뀝니다. 전에는 고시에 합격하면 자신을 위해서 희생한 그 여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겠노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의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저 여자만 없으면 마담뚜들이 소개하는 그 아름다운 여인들을 아내로 맞고, 명문가의 대단한 집안과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옛 여인이 미워집니다. 급기야는 그 여인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출세와 야망을 위해 명문가의 어떤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

저는 요즘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을 보니 요즘도 여전히 이런 경우가 많이 있다는군요. 우리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론 여기에 대하여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만 인터넷에 글을 남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견은 그 놈 나쁜 놈이네.. 입니다. 그렇습니다. 의리와 사랑을 배신한 그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절대로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을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아 죽게 하시기까지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으시고, 주님을 사랑하라. 주님을 섬기라. 주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꾸 딴 데 한 눈을 팝니다. 물질에 한 눈을 팝니다. 세상에 한 눈을 팝니다. 세상의 쾌락에 한눈을 팝니다. 그것이 죄악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진노의 심판입니다. 망하는 길입니다. 로마서6:23절 말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교회가 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의 물질, 명예, 권세, 쾌락을 바라보고 그것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한눈 팔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의 쾌락에 한 눈 팔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관심을 자꾸만 세상적인 것으로 향해서는 안됩니다. 세상과 세상이 주는 쾌락으로 향하게 될 때에 교회는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루 하루를 되돌아보며 다시금 하나님께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 안에 생명이 꿈틀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처럼 본향을 향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의 삶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있는 고향을 찾아 떠나는 삶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개혁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 1:3)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위에 충만히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범죄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면 축복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향하시며, 넘치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을 향하는 개혁을 감당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 교회를 건강하게 하시고, 성도들의 영혼으로 능력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는 종교개혁 488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멋진 개혁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참된 개혁이고, 이 개혁을 통해서 구원과 축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1.

첫째는 조상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 말씀에 보면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세상을 향하다가 망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역사를 빼앗겼습니다. 심지어는 성전마저도 빼앗겼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조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옛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절 말씀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와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악독과 비방과 자랑과 교만과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로마서 1:29~30 참조)

세상을 살려면 적당히 거짓말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그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곧은 척하고, 옳은 척해봐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고생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교회도 적당히 세상적인 것을 교회 안에 가져옵니다. 세상적인 쾌락을 가져옵니다. 세상 유행을 가져옵니다. 이렇게 라도 해야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교회 안에는 교회가 아닌 요소가 너무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열심히 이 세상을 본받으며 살아갑니다. 열심히 조상을 본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로 하여금 망하게 하는 길입니다. 교회는 진리 가운데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본받아 가서는 안됩니다. 조상을 본받아 가서는 안됩니다. 영적으로 망한 것으로 보고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거기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그것으로 돈이 많이 생긴다고 해서 성령의 뜻이 아닌 것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세상 흉내를 내면서 가면 안됩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교회는 죽어도 교회이어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조금은 고집불통으로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원리대로 하고싶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부흥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지금당장은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같고, 사람들에게 고지식한 교회로 인식되고, 멋대가리 없는 목사라고 여겨져도 그것이 사는 길이라면 고지식하게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본받는 것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잔기술로 교회를 부흥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를 부흥케 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 싸우나 시설을 마련한답니다. 좋은 편의시설을 마련한답니다. 교회 안에 좋은 시설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부흥을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문제입니다. 교회부흥은 그것은 교회다움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것으로 부흥을 이루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런 것으로 부흥을 이루면, 교회는 혼합주의가 됩니다. 조상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인생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것입니다. 흥하는 것같지만 망합니다. 사는 것같지만 죽습니다. 결국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무서운 심판을 선언하신 주님의 음성이 동일하게 임하여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로 조상을 본받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옛사람의 습성을 따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대를 본받아 세상적인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망하는 길입니다. 죽는 길입니다. 독약입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의 원리입니다. 세상을 본받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2.

둘째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을 다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4절 중간에 보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 1: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노인들을 존경하는 제 일 원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노인의 말씀을 항상 처음 듣는 것처럼 잘 들어드리는 것입니다. 노인이 되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그럽니다. 그게 노인입니다. 내가 노인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방법도 똑같습니다. 내가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하고.. 그러면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것입니다. 이것이 노인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인이 했던 말 또하고 또한다고 해서 듣기 싫다고 외면하면, 그리고 경청하지 않으면 그것은 노인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을 무시하는 일이 되어집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혹 제가 우리 교역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님이 했던 말씀 또 하네.. 하면서 시큰둥하고 있고, 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저 친구 싹수가 없네..!! 존경하는 사람의 말은 경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시하는 사람의 말은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이렇게 살아라.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께 기대를 품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겹다고 합니다. 좋은 말도 한 두 번이지 이제 귀에 딱쟁이 앉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제 그만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귀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그들은 망하고 만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합니까? 중세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놓고 교회짓는 일에만 급급했습니다. 백성들의 돈을 어떻게든 짜내어서 교회를 화려하게 지으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죽든 살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만 화려하게 지어놓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면죄부를 팝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 이 사람들이 똑똑해지니까 안된다고 하면서 성직자 외에는 성경을 읽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교회답지 못하고 우상의 종교처럼 변질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신앙생활은 말씀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사랑하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개혁을 이루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이룰 것입니까? 세상의 윤리를 척도로 삼아서 개혁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민족주의나 각종 이데올로기로 교회의 참된 개혁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에 교회의 개혁은 이루어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킨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그 말씀이 순종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불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순교하는 각오로 순종하게 될 때에 참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명하는 곳에 목숨을 걸고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멈춰서리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참된 교회의 개혁자, 신앙의 개혁자들이 되어 생명과 축복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대한민국은 범사회적인 개혁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정치 경제의 질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이라는 이름은 내걸고 있지만 참된 개혁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무조건 현실을 들러엎기만 하면 개혁인 줄 압니다. 그것은 개혁이 아닙니다. 전복입니다. 오히려 반역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개혁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어느 시대보다 더욱 강력합니다. 교회의 부패와 약점을 고발함이 참으로 매섭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개혁입니까? 어떤 목사님의 말씀이 제 귀에 쟁쟁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그 말이 얼마나 멋진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분명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비판하며 전복하려는 시도를 엄중히 꾸짖고 있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교회는 개혁의 대상입니다.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개혁은 단순한 전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쿠데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참된 개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 바라보다가 오염된 것이 있으면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다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참된 개혁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488주년을 맞이하여 참된 개혁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조상의 어리석은 신앙을 본받지 말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말씀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이 명하는 것이라면 어디든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을 따라 아골 골짝 빈들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앞에서 참된 개혁을 이루는 교회가 되며, 승리와 축복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은혜 베푸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