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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주님의 마음(빌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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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1. 주일설교

성경 : 빌립보서 2:5~11

제목 : 주님의 마음

설교 : 신 현 철 목 사

설교를 들으시려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마 포 중 앙 교 회


주님의 마음

빌립보서 2:5~11

Introduction

추운 날씨 가운데서도 주님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예배하기 위해 오신 여러분들에게 우리 주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 소원하는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아마도 마음먹기에 달린 듯합니다. 그것은 결코 주변의 환경이나 여건 때문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행복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의 마음이 곤비하다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길에 깊은 산속 어느 무덤 앞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피곤해서 정신없이 자다가 갈증이 심하여 머리맡을 더듬거려 물을 찾아 그것을 마시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그곳은 자기 방이 아니라 어느 무덤이었으며, 어젯밤에 마신 물은 숭늉이 아닌 해골에 고여있던 썩은 물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원효는 갑자기 메스껍고 토할 것 같으며 경련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때, 원효는 무릎을 쳤습니다.〈그렇다! 모든 것은 자기 마음에 달려 있구나…〉

그렇습니다. 불교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도, 기쁨과 슬픔도 환경이나 여건 때문이 아니고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그렇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소중합니다.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삶을 축복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가짐은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늘 행복한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팔복을 말씀하면서 세상의 여건과 형편이 좋은 것을 행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핍박을 받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굶주린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얻을 수 있기만 하면 그는 절대로 환경에 굴복 당하지 않고, 세상에 넘어지지 않고 늘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모든 환경과 형편을 뛰어넘는 행복을 소유할 수 있는 축복 된 마음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축복을 얻을 수 있는 마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본문 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하늘과 땅을 통틀어 가장 행복하신 분, 가장 은혜로우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도 곤히 주무실 만큼 평안하셨습니다. 행복하셨습니다. 어떠한 자리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항상 그 마음에 평정을 유지하셨습니다. 늘 행복을 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복 받는 마음가짐을 간직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을 원하는 사람, 축복을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마음을 버리고서는 결코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 사로잡혀 있게 되면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어떤 모습입니까? 예레미야 17:9절 말씀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부패했습니다. 거짓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 세상으로 좇아 온 마음은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한일서 2:16)일 뿐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고 온갖 음란과 쾌락이 가득한 죄악이 있을 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런 도시였습니다. 그들 안에는 주님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좇아온 더러운 마음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거룩한 인생이 아닌 짐승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멸망입니다.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바라보시면서 그 땅을 탄식하셨습니다. 그곳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땅에 있는 온갖 음란함과 더러움을 한꺼번에 불태워 버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불과 유황을 내려 완전히 태워버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갖는 자에게는 행복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갖게 되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축복 때문에 평화를 노래할 수 있습니다. 감사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늘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좇아 온 마음을 품거나, 부패한 인생의 마음, 짐승의 마음을 간직하고서는 결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으로 고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과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가짐을 우리의 마음가짐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락하시는 크신 축복과 행복을 늘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의 마음가짐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6~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6~8)

성경은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고, 축복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환경을 바라보고, 환경 탓, 여건 탓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주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될 때에 어떤 환경과 형편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품어야 하는 주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2.1.

첫째는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본문에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과 권세와 능력에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조금도 부족하지 않고 모자라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도 하나님께 대하여 모자람이 없으신 주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가짐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장기나 바둑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훈수를 두고 있을 때는 고수가 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저보다 바둑이나 장기를 훨씬 더 잘 두는 사람이 경기하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 답답증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저걸 왜 못 보느냐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내가 직접 하면 잘하지 못하지만 훈수들 때는 전문가 수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기에 임하는 사람은 마음을 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경꾼은 마음을 비울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관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보이게 됩니다. 마음을 비우면 성공하게 됩니다. 자기를 비우면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비우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행복이 저 만치 도망가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에 자기를 비운다는 말씀은 헬라어에 케노오(kenovw)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은 무효케 한다. 완전히 소멸케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이 있고, 영광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부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도 자기의 것으로 취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한 순간도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주장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부인하신 분이셨습니다. 여기에 바로 행복의 원리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고, 내 자아가 역사하면 나는 행복을 잃고 맙니다. 축복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완전히 케노오(kenovw)하게 되면 그 때 하나님은 내게 알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참된 행복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를 철저하게 포기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 될 때에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역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모든 물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아무 것도 경작하여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뭄이 너무나 심했기에 왕이 직접 나서서 물 근원을 찾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니 백성의 상황이라는 것은 말로 할 수 없이 곤고했습니다. 그런데 두로 땅 사렙다에 한 과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근근히 생명은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집에 남은 것이라고는 조금의 밀가루와 기름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이것으로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이제는 죽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밖에 나아가 빵을 굽기 위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선지자 엘리야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그 음식을 내게 먼저 가지고 오라.. 이게 말이 됩니까? 아니 이게 선지자입니까? 무슨 선지자가 마지막으로 먹고 죽으려고 굽는 그 빵 조각을 자기에게 내어놓으라고 한다는 말입니까? 왠만한 사람같으면 엘리야를 바라보면서 이놈 이거 삯군 목자 아니냐? 사이비 선지자 아니냐?며 소리를 질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인은 엘리야의 말을 듣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부인했습니다. 나도 사람이다 어쩌면 그럴 수 있느냐며 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의 가정에 축복해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17: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열왕기상 17:14)

열왕기상 17:16절을 또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열왕기상 17:16)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 다함이 없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의 가정에 근심과 시름이 물러가고 행복의 웃음이 가득하게 하신 것입니다. 염려는 사라지고 감사의 제목으로 풍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소멸케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 앞에 행복을 주십니다. 천국을 주십니다. 기쁨을 주십니다. 동등함을 주장하고, 권세를 주장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고라가 동등함을 주장하고 권세주장하고 불평하다가 땅이 그 입을 벌려 삼켰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소멸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2.

둘째는 낮은 곳에 관심을 기울이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자기를 낮추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낮은 데에 있었습니다. 높고 높은 하나님의 보좌나 그곳에서 영광을 얻는 것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굳이 인류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낮은 데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로마서 12:16)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축복하는 사람은 낮은 데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고, 높은 사람들에게 아부나 하고 아첨이나 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교만함으로 낮은 데 있는 사람들을 학대하며 멸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신원하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낮은 자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스스로 마음을 낮은 곳에 두어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을 보시면서 우리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광패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보복하며 응징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낮은 데 마음을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낮은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힘있는 사람 좋아하고, 돈 있는 사람 존경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만 인정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관심은, 성도들의 마음은 고난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고 있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자들과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의 자리, 탄식의 자리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전도서 7:4절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전도서 7:4)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증언합니다. 결혼식이나 잔치 자리에 가는 것보다 초상난 곳에,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찾아갈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낮은 자리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낮은 곳에 마음을 두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과 온정을 베풀 수 있는 그런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말이 되었습니다. 성탄시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불우이웃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추위에 안타까워 하며 오갈 데가 없어서 괴로워 하는 사람들이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복지정책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미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와 성도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그들이 있는 낮은 자리에 우리의 마음을 쓰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심정을 백만분의 일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낮은 곳에 마음을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낮은 곳에 마음을 두시고 낮고 천한 마굿간에 태어나신 주님을 기억하시면서 그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3.

세째로 주님의 마음은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여기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형벌 가운데 가장 처참하고 잔혹한 형벌입니다. 그래서 가장 악랄한 죄인들만이 이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저주의 십자가까지도 참으시면서 순종하셨습니다. 죽어도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멋진 재물의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보다 순종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에 가장 큰 문제는 창의성과 독립성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또 아이들의 기를 살려준다는 점에서 순종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순종을 가르치게 되면 아이들이 기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소심한 아이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 보시면 어디 어른을 존경함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저는 늘 교회 안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거의 밖으로 나가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교회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간혹이지만 이런 저런 일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을 지나게도 됩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민망한 일들을 많이 봅니다. 누구 보는지 보지 않는지 상관도 하지 않고 젊은 남녀가 길 한 가운데서 서로 끌어안고 뽀뽀를 하고 난리입니다. 누군가 지나다가 쳐다보기라도 하면 왜 쳐다보느냐?고 하면서 싸울 기세로 덤벼듭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른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창의성이나 독립성이 우리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얻는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면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십니다.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말렉을 공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벗어나서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될 때에 그들의 길을 가로막고 심히 고통스럽게 했던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그들은 철철지 원수입니다. 하나님께 철철지 원수는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교회를 막아서다가 하나님의 철천지 원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내 철천지 원수인 아말렉을 네가 쳐서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멸하라는 말씀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죽이고, 성은 불사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아말렉을 공격했습니다. 공격하다가 보니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왕을 사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우양을 바라보면서 그 기름진 것을 보니 탐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뒷전이었습니다. 아말렉을 공격한 것까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는데 진멸하라는 말씀은 망각했습니다.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왕을 살리고, 많은 우양을 살렸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사울의 이런 행동을 보시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셔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도다.”(삼상 15:22) “네가 내 말을 순종치 않았으니 네 왕위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삼상 15:23, 28)고 했습니다. 사울은 겸손한 사람일 때에 왕위를 받았지만 순종하지 않았을 때에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하기를 바라십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덧입고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순종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들에 대하여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하는 일이 죽음과 같은 고통이 되어진다면 죽도록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죽도록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시고, 우리를 지극히 높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할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행복합니다. 인생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랍니다. 무슨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행복할 수도 있고, 또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느냐에 따라 오늘의 생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애에 까지 행, 불행이 결정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마음가짐으로는 안됩니다. 세상으로 좇아 난 죄악 된 욕망과 쾌락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자기를 철저하게 소멸하셨습니다. 자기의 자아와 자존심, 모든 것을 송두리째 버리셨습니다. 조금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자기를 비웠습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비웠습니다. 자기의 권리도, 자기의 명예도,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도무지 자기를 이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위해서 온전히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행복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높은데 있지 않았습니다. 낮은데 있었습니다. 낮고 천한 곳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모두가 높은데 마음을 둡니다. 힘있는 사람들에게 아부라도 하고, 아첨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낮은 곳에 두어야 합니다.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두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처럼 낮고 천한 곳에 소외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높은 데만 관심을 갖고, 교회 종탑을 높이만 세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마음을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낮은 곳에 관심을 주셨지만 마귀는 높은 곳에 관심을 두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와 성도들은 낮은 곳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철저한 순종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사명을 위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뒤로 물러남은 침륜에 빠질 뿐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와 축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처럼 자기를 비웠고, 낮은데 마음을 두었고,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높여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존귀케 해주시는 귀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