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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작은예수로 태어나라 (마1:18~25)


2005. 12. 25 성탄설교

성경 : 마태복음 1:18~25

제목 : 작은 예수로 태어나라

설교 : 신 현 철 목사

설교를 들으시려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대한예수교 장로회  마 포 중 앙 교 회

작은 예수로 태어나라

마태복음 1:18~25

Introduction

구주께서 탄생하신 성탄을 맞아 여러분의 가정과 생업에 탄생하신 주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며칠전에 TV 뉴스에서 웃지 못할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가짜 산타들 때문에 골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백화점에서는 고가의 상품을 구매한 사람에 한해서 산타가 아이를 품에 안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하므로 성탄을 상업주의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산타들이 술을 먹고는 난동을 부려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성탄을 이야기하면 산타클로스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클로스가 아닙니다. 절대로 산타클로스가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은 산타클로스가 태어난 날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가 성탄의 새로운 주제로 등장하게 된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새로운 교훈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산타클로스는 4세기경 소아시아 지방 리키아의 파타라시에서 출생한 세인트(성) 니콜라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는 자선심이 지극히 많았던 사람이었으며 후에 미라의 대주교가 되어, 남몰래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자선행위에서 유래,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숭배하는데,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상투스 니콜라우스라고 합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산 니콜라우스라고 불렀고,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은 산테 클라스라고 불러, 자선을 베푸는 자의 전형으로 삼았습니다. 이 발음이 그대로 미국어화했고, 19세기 크리스마스가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하는 상상의 인물이 되어, 어린이들이 더 정답게 부르다가 ''산타클로스''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성탄절이면 등장하는 산타클로스, 그는 성탄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급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왭니까? 그가 성탄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세상의 모든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물론 상업주의 농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성 니콜라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성탄절에 자신을 제2의 예수로, 작은 예수로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성탄의 의미가 점차 퇴색해 가며, 상업주의와 퇴폐주의로 오염되는 것을 볼 때에 가슴 아프기 그지 없습니다. 참된 성탄의 주인공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잊혀져 가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참된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높이고 찬양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절 아침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이 참된 성탄절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에게 산타클로스라고 존경을 받으며 그들의 마음에 깊은 사랑을 전하고 있는 성 니콜라스와 같이 우리 자신을 작은 예수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번 성탄절에는 2000년전에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기리면서, 우리 자신을 작은예수로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전에 욕심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있던 우리 자신을 버리고, 혹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영광도, 아름다운 이름도 다 내려놓고, 탄생하신 아기 예수와 같이 이 땅에 작은 예수로 태어나기를 결심하며 실천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성탄절은 4세기 경에 성 니콜라스가 작은 예수로 세상을 살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이 작은 예수로 태어나야 하는 날입니다. 세상의 쾌락을 따라 즐기고, 방탕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같이 이 땅에 작은 예수로 태어나는 중대한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

본문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복음 1:18)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설명하면서 “성령으로 잉태 되었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나심을 인간의 육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유전적 어떤 조작에 의한 것도 아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고, 또 출생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성군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남달랐습니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증언합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중에 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 중에 출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중에 출생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성령의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중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작은 예수로 태어나야 하는 것인데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결코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작은 예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밤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를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 에너지를 공급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밥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혜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밥 힘으로 살아갑니다. 밥을 적게 먹으면 힘이 없고, 기운이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밥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떡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떡으로, 밥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어도 삽니다. 그것을 잃게 되어도 살아갑니다. 성령으로 살아갑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을 맞이하여서 우리는 작은 예수로 다시금 태어나야 합니다. 밥 힘으로 사는 우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사람, 성령의 인도하심 앞에 복종하는 삶을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출생하시므로 죄악과 거리를 멀리하고, 성령께서 명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헌신했던 것처럼, 우리의 일생이 이와 같이 성령으로 다시금 출생하는 작은 예수가 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본문 2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마태복음 1:21)

예수님은 출생하실 때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일생을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괴롭히며 억압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압제합니다. 고통 받는 자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철저한 고립입니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남의 형편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돌아보시는 분이셨습니다. 자기 백성의 아픔을 보살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것을 보시면서 함께 고통하며, 괴로워 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친히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은 구원자로서의 희생과 헌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이런 일을 위해서 태어나고 싶어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고난도 희생도 두려워 하지 않고, 스스로 구원자가 되기로 자청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작은 예수로 태어나야 합니다. 나만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천국을 얻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민족을 구원하는 자로 다시금 태어나야 합니다. 세계와 열방을 구원하는 자로 자신을 헌신하며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를 위한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온 세계와 열방을 위하는 사람으로 우리의 그릇을 크게 하며, 작은 예수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탄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영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생각으로 버리고, 작은 예수가 되어 가족과 이웃, 민족을 구원하는 일에 앞장 설 수 있는 온 교회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본문 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약속 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약속에 보니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예수님은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축복에서 소외되어 있던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형통케 하시는 복을 얻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직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인간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런 낮고 천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들과 사귐을 가지려고 합니다. 때로는 뇌물을 주면서 까지라도 세상의 권세 있고, 힘 있는 사람, 재력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에 자기에게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이롭기 때문입니다. 손해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힘과 권세가 있는 사람과 가까이 하기를 원하셨다면 예수님은 헤롯 왕궁에서 태어나셔야 했을 것입니다. 아니 로마의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낮고 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하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작은 예수로 태어나야 합니다. 세상의 힘있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그들과 사귀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우리의 모습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보잘 것 없는 인류와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눈물을 함께 흘리며, 그들의 아픈 가슴을 공유하며 어루만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리의 가족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웃과 함께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탄을 맞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성탄절을 맞이하면서도 여전히 연약한 인류와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 높고 높은 보좌 위에 앉아 있으려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성탄을 맞는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작은 예수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낮고 천한 인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이 땅에 소외당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연약한 사람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함께 하는 저와 여러분, 온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우리는 성탄의 문화가 병 들어감을 보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번 산타클로스는 작은 예수의 모습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며, 어린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되었는데, 이 땅의 성도들은 작은 예수의 모습을 잃어버리므로 산타클로스의 아름다운 정신마저도 더러운 상업주의와 퇴폐주의로 병들게 했습니다. 이제 교회와 성도들이 앞장서서 성탄의 아름다운 문화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작은 예수로 태어나기를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욕심에 이끌린 사람으로 여전히 세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과 같은 태어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가족과 이웃, 더 나아가 민족과 열방을 구원하는 구원자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통하여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더욱 찬란한 빛을 드러내고,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가 선포되는 귀한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