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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행복의 조건(요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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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0. 주일설교

성경 : 요한복음 4:5~14

제목 : 행복의 조건

설교 : 신 현 철 목사

설교를 들으시려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마 포 중 앙 교 회


행복의 조건

요한복음 4:5~14

Introduction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염려와 걱정이 많은 세상 속에서도 우리 주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은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초청을 받아 참여해 주신 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과 기쁨이 충만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공통된 소망이 무엇입니까? 빈부나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소망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행복을 구하고, 존귀한 사람도 행복을 구합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행복을 원치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행한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꼽았습니다. 첫째는 먹고 입고 살기에 조금 부족한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넉넉한 재산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풍요로움이 행복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의 재산이 있으면 되고, 그것보다 조금 부족한 정도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대부분 행복의 첫째 조건을 갖추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먹고 살기에 조금 부족할 정도의 재산은 거의 다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엔 약간 부족한 외모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잘생겼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큼 잘 생겼다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조금은 부족한 외모를 갖고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절반 밖에 인정 받지 못하는 명예가 있으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보다 조금은 덜 인정을 받고 있더라도 행복할 수 있으며, 명예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넷째는 남과 겨루었을 때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을 가졌으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통 수준의 힘을 가졌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힘과 체력이 남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섯째는 연설을 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 정도만이라도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말솜씨가 있으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행복은 모든 것이 풍족하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가운데서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가난한 날에 더 쉽게 행복을 찾을 수 있고, 힘들 때에 더 큰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는다고 하면서 더 많은 풍요를 추구하고, 더 많은 권력을 얻으려 합니다. 남들보다 더 뛰어나야만 한다고 아우성입니다. 정작 행복의 길은 거기에 있지 않음에도 행복을 위해서 잘못된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더 가졌으냐 그렇지 못하냐가 행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감사할 수 있을 때 그는 비로소 행복한 사람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한해를 돌이켜 보며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망거리를 찾으려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제목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망을 찾게 될 때 불행이 몰려오지만 감사의 제목을 찾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행복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함으로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사마리아에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행복에 목말라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그는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결혼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생각이 그다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험으로 알 수 있듯이 한 여자의 일생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좋은 남편을 만나면 행복한 생애를 보낼 수 있지만 못된 남편, 고약한 버릇을 가진 남편을 만나면 일생토록 고생입니다.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야 합니다. 여자만 그렇습니까?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아내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처럼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아마도 인생의 최대의 축복 가운데 하나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첫번째 남자와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그 사람과는 생애를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당하는 일이었지만 그 남자와 사느니 차라리 세상 사람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남자를 찾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두 번째, 세 번째... 무려 다섯 명의 남자와 결혼을 해 보았지만 그 여인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남자와 만나 살림을 살고 있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구차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각에 결혼은 행복의 보증수표같은 것이었지만 그의 모든 꿈과 행복에의 갈망은 부도수표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결혼을 왜 합니까?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갖고 결혼했습니다. 저 사람과 함께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했습니다. 여기 결혼하신 분 가운데 저 사람과 결혼하면 지지리 궁상으로 평생 불행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결혼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결혼식 주례를 해 보면 모두가 행복한 웃음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룬 가정에는 영원한 행복이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행복을 소망하던 그 결혼이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눈물의 씨앗이 됩니다. 한숨의 고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남편이 아내가, 우리의 자녀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하루 이틀 살면서 전에 보이지 않던 부족함이 보입니다. 모자람이 보입니다. 실망은 커져 갑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2.

남편에게서 만족함을 얻을 수 없었던 이 사람,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우물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에서 만족을 얻으려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야곱의 우물을 찾을 것은 단순히 하나의 사실적인 묘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의 야곱의 우물은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며, 야곱이 얻었던 그 풍요와 축복을 얻게 되는 것으로 만족을 삼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인은 세상의 풍요를 취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명예가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하고 갈망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세상의 물질과 풍요와 명예를 찾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친구도 없습니다. 가족도, 형제도 없습니다. 오직 그것만 얻으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풍요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부호 록펠러(J.D.Rockefeller)는 말하기를 "가장 가난한 사람은 돈 밖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물질에 대하여 욕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영혼은 더욱 가난해지고, 더욱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될 때에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은 때로 우리에게 많은 유익함을 줍니다. 성경에서도 말씀합니다. 돈은 범사에 유용하니라. 그렇습니다. 많은 부분에 유익합니다. 이 물질이 없어서 눈물을 짓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같이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없다고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또 물질이 많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전 미국 대통령 벤자민 플랭크린(B.Franklin)은 말하기를 "돈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돈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 올 줄 알지만 아무런 행복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돈은 많이 벌수록 더 큰 돈을 벌려고 합니다. 돈은 공허를 메우기 보다는 차라리 또 하나의 공허를 낳을 뿐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에 대한, 명예에 대한,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될 때에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어딜 찾았습니까? 야곱의 우물입니다. 야곱의 풍요와 부귀를 소망했습니다. 그에게는 야곱이 가장 큰 자였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우상은 야곱이었습니다. 어떻게든지 성공하고 출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마리아 여인은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끊임없이 야곱의 우물물을 마셔도 목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끊임없는 갈증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야곱의 우물을 마시고, 성공을 향해서 집중했지만 오히려 소금물을 들이킨 것처럼 행복에 대한 목마름은 더해만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돈과 물질과 명예와 권력 따위는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행복을 원하신다면 성공을 향한 욕심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심을 뿌리채 뽑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3.

사마리아 여인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 좋은 사람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행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의 우물,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의 부귀와 영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을 추구해 보았지만 거기에서도 그는 행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이 일 저 일 다 해보고 행복이 없으면 뭐 하는 줄 아십니까?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갑니다. 종교에 귀의합니다. 이 여인도 그랬습니다. 여인은 행복을 얻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종교에 귀의했습니다. 그런데 보니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에 귀의하고도 헷갈리는 것입니다. 어디서 예배를 하는 것이 옳은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리 예배를 해 봐도 마음에 만족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종교에 귀의합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도 있고, 유교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종교생활을 합니다. 성경책을 사 들고 교회에 열심히 다닙니다. 헌금도 합니다. 불교에 심취해서 열심히 불경을 외웁니다. 시주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종교에 귀의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의 마음에 흡족한 은혜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공허했습니다. 텅빈 가슴이었습니다. 언제나 행복에 목말라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게 행복이 있느냐? 본문의 말씀은 내게 물을 좀 달라 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은 네게 행복이 있느냐?는 주님의 물음을 대신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인에게 행복이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난 행복하지 않습니다. 난 당신에게 물을 줄 수가 없습니다. 난 항상 목말라 있습니다. 난 행복에 굶주려 있습니다. 하면서 여인은 주님께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3~1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3~14)

예수님은 행복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로 와서 행복을 마음껏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 같이 않고, 영원토록 풍성하게 흘러내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참 행복은 예수님께 나아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출석한다고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종교에 귀의해서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참된 행복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가 없어질 때

나 홀로 앉아서 탄식치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 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게 된다고 행복해 지는 것 또한 아닙니다. 종교에 귀의해서 착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한다고 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실 때에, 우리가 그 행복의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될 때에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추수감사주일예배를 드립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욕심으로 찌들어있는 사람은 도무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에 감사가 풍성하고, 그 감사로 말미암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좋은 사람 만나서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우리 안에 감사와 행복이 넘쳐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애가 야곱의 성공과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성공을 얻었다고 해서도 감사와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의 관행을 따르며, 그것에 심취한다고 해서 감사와 행복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참된 감사와 행복이 있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은 증언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는 그 십자가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며, 그의 은혜를 받는 길 밖에는 행복의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행복의 주인으로 고백하시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셔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누리고, 영원히 행복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꼭 예수님 믿으시고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