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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내 몸처럼 사랑합시다.(눅10:25~37)

Rev. Shin, Hyunchul

Mapo Central p. Ch.

내 몸처럼 사랑합시다

누가복음 10:25~37

Introduction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예배하기 위해 모인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앞뒤좌우에 계신 분들에게 인사하겠습니다. 보고싶었습니다. 만나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사랑의 말은 하면 할수록 더욱 풍성한 기쁨이 넘칩니다. 지난 한 주간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제 미니 홈피에 성도님들이 들어오셔서 사랑합니다. 하면서 글을 남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글을 보지 못한 사람은 기쁨을 모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이처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축복의 말들이 풍성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에 행복을 열매 맺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으려고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온갖 욕망들을 채워갑니다. 그러나 행복은 그런 것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천국 같이 행복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으로 가득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교회에 돈이 많으면 행복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교회에 큰 힘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굽실거리게 되면 행복하겠습니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채워지고, 능력있는 사람들로 붐비게 되면 행복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이 전혀 불필요하다고 외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외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 사랑이 가득하게 될 때에 교회는 행복하게 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사랑하므로 교회 안에 행복한 웃음이 가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Main Subject

1.

본문 2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 10:25)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영생이라는 말을 영원한 행복이라고 하면 이해가 더욱 쉬울 듯싶습니다. 율법을 많이 공부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으며, 또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율법사가 예수님께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되돌려 물으셨습니다. 네가 공부한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그랬더니 율법사가 청산유수와 같이 율법의 말씀을 읊조립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누가복음 10:27)

그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고 한다면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행복을 놓치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맞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정이 행복하게 되는 것도, 한 교회가 행복하게 되는 것도, 한 나라가 행복하게 되는 것도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을 빼놓고, 사랑하지는 않으면서 영원한 행복,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나라의 대통령께서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중대한 발표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 방송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나중에 뉴스를 통해서 듣자 하니 한국사회의 문제를 양극화에서 찾았습니다. 사회가 점차로 양극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이념과 사상의 대립이 극대화되고, 남북의 갈등, 동서의 갈등, 그리고 심지어는 세대간의 갈등으로 청예화된 대립이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으며, 이런 양극화의 문제가 결국 국가 전체를 행복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가 되어야 행복한데, 나라 전체가 온통 분열되어 갈등하고 있으니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의 진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됨이 없이 분열하며, 양극화 된다면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나라 전체에 행복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양극화가 심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양극화란 원래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나뉘어 있다는 것만을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두 계층이 갈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싸우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 안에 동쪽과 서쪽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양극화가 아닙니다. 서로 대치하고 갈등하며, 다투고 있을 때를 양극화라고 합니다. 한 나라에는 부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부자가 더 부자가 되도 뭐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하게 되어도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의 계층을 중심으로 모이고, 그래서 서로를 향해서 힘을 과시하며 대립하게 될 때에 그것을 양극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대통령이 내놓은 양극화 문제의 해결책도 그와 비슷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이 심하기 때문에 부자에게 세금을 많이 받아서 가난한 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며, 전체국민이 행복한 복지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돈을 많이 거둬들이면 사회적 약자가 많은 보호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양극화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미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율법사의 말처럼 영원한 행복은 누군가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는 것으로, 여러 가지 복지정책을 수립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복지정책을 펼치는 것이나, 그것을 위해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됨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서로가 사랑으로 하나되는 공동체, 돈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사랑으로 서로를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동쪽과 서쪽이 마음을 같이 하므로 사랑하며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 마음, 신구 세대간에 증오와 질시를 버리고 관대하게 포용할 수 있는 마음, 이런 마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행복이 싹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와 민족을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사랑하시면 됩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하길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생명을 다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행복이 우리에게 찾아 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누가복음 10:28)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반드시 행복화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금을 많이 걷고 국가의 재정기반을 튼튼히 하고, 국력을 강건하게 해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신인도가 높아져야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이 민족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면 행복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힘써 사랑하면 교회와 가정을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사랑하므로 하나되어 양극화된 시대 속에 참된 행복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본문 29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누가복음 10:29)

예수님께서 율법사를 향해 네 말대로 사랑을 실천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율법사는 즉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율법사의 이 질문은 사랑 그것 좋지요?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있었던 한 사건을 소개하셨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모릅니다. 물건을 빼앗은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을 옷을 벗기고, 심히 때려서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려두고 떠나갔습니다.

마침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한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신음하며 살려달라고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잘못하다간 자기도 저 사람과 똑같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못 본 척 피해서 지나고 갔습니다.

잠시 뒤에 제사장 만큼은 못하지만 그래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그 사람에게 희망을 품고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레위인 역시 주위를 살펴보다가 쏜살같이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이제 살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그 때 멀리서 한 사람이 나귀를 타고 오는 것입니다. 이젠 살았다 싶어서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짐승만도 못하게 여기며 침 뱉으며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갑자기 절망이 엄습해 왔습니다. “저 사마리아 사람이 나를 살려주겠는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앙숙으로 지냈고, 서로를 멸시하며 살았는데 저 사람이 내 남은 생명을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왠 일입니까? 그 사마리아 사람이 급히 내려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자기의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주막 주인에게 많은 돈을 주고,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비용이 더 들면 다음에 더 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야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율법사에게 참된 사랑이 무엇이며, 영원한 행복을 얻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인 율법사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 강도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겠느냐? 물으실 때에 사마리아인입니다. 대답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율법사는 왜 하필이면 그 이야기를 하십니까? 유대인들 중에도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이 있지 않습니까? 하면서 따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 중에, 바리새인 중에도 자비를 베푼 사람을 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라고 전부 다 선행을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보다 더 선행을 많이 행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건을 설명하시면서 무언가 가르치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은 신분적으로 높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고귀한 제사장으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으로 살아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고, 율법으로 박사가 되어 있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연설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랑의 멧시지들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실천하지 않는 사랑은 하릴없이 유행가 가사일 뿐입니다. 참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비록 신분적으로는 사마리아인이요, 성전의 제사에 참여할 수도 없는 미천한 신분이라고 해도, 율법으로는 저주 받은 자인 것 같아 보여도 참 사랑을 실천하기만 하면 그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양극화의 담을 넘어 천국의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아 감당하는 목사나 장로님, 권사님들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진 몫도 아닙니다. 신분이 높고 낮음을 떠나서,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힘써 사랑하는 자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극화의 문제로 몸살을 알고 있는 이 시대를 누가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까? 정치인입니까? 경제인입니까? 아니면 사회문제를 제기하면서 온갖 비판을 퍼붓고 있는 시민 단체들입니까?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시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사랑을 실천하기만 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양반은 누구입니까? 그는 세상 것을 많이 배우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양반입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그의 재산과 학식의 정도를 떠나서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양반입니다. 하나님께 존귀한 사람이 되고,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힘써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강도같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웃에게 흉악한 짓을 다하고, 또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자기의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간다고 해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고, 고상한 척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라면 카말레온처럼 변해 간다고 해도 성도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3.

영생, 즉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 몸 사랑하듯 하는 사랑이라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여기에 대하여 사마리아인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을 볼 때에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3.1.

첫째는 가까이 하는 사랑입니다. 유대인들은 다 피하여 갔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피하여 갔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죄인 보듯 했습니다. 더러운 벌레 보듯 했습니다. 그의 안타까운 처지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구경꾼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내 친족이 다치게 되었을 때의 심정으로 갔습니다.

지금 강도 만난 자리는 위기의 현장입니다. 다시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급히 다가갔습니다. 모두가 피하여 떠나도, 더러운 벌레 보듯 하며 도망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갔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누가 자기의 아들이 죽음의 자리에 있는 것을 보면서 가만히 구경만하겠습니까? 누가 자기의 집에 불이 나는데 잘 탄다 하면서 보고만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집안에 큰 일이 생겼다고 하면 먼 곳에 있던 가족들도 급히 달려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주님의 명하심을 따라 서로를 바라보며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어려움과 고통을 나몰라라 하면서 지내면 안됩니다. 성도들과 거리를 두고, 그를 통해서 무슨 피해를 볼까 걱정하는 매정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때로는 내게 손해가 될 것같아도 함께 하며 가까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 사이에 막혀있는 온갖 장벽은 무너지고 교회는 하나되며, 행복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3.2.

둘째는 불쌍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은 철천지 원수지간입니다. 이유는 앗수르의 침공 이후에 사마리아인은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을 겪은 후에 혼혈인이 많아지게 된 것처럼 앗수르의 침공 이후에 앗수르의 정책에 따라 사마리아에는 혼혈족이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 같은 문명사회, 인권이 중시되는 시대에도 혼혈인들에 대한 멸시와 차별은 엄청납니다. 그런데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유대인들의 눈에 사마리아 혼혈인들은 더럽기 그지없는 존재였습니다. 추악한 존재였습니다. 부정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민족의 자긍심을 송두리째 앗아간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아무런 거래도 하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면 재수없다고 침을 뱉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엄청난 장벽이 있었습니다. 도무지 화해할 수 없는 앙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사마리아인은 그토록 자기를 멸시하던 유대인을 보았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꼼짝도 못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유대인을 보았습니다. 더구나 자기들의 동족인 유대인에게 강도를 당했고,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조차 버림을 받은 존재였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강도 만난 이 사람을, 그것도 사마리아인의 원수인 이 사람을 사마리아인이 왜 도와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마도 사마리아인의 뇌리에는 유대인들로부터 받았던 온갖 수모와 조롱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서 그냥 버리고 가! 조금 전에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갔잖아? 그런 고매한 사람들도 그냥 갔는데 네 까짓 게 뭐라고 그를 돕겠다는 것이냐?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를 만나 처참하게 된 유대인을 보면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 고 놈 잘 됐다. 고소하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자기들을 늘 조롱하며, 멸시하는 유대인이었지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음의 위기에서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은 것을 보면서 측은히 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수를 바라보며 복수심을 불태우기 보다는 원수의 고통을 보면서 함께 가슴 아파하며,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바로 내 몸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비록 원수이지만, 비록 내게 많은 손해를 끼친 사람이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될 때에 우리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하나됨으로 주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3.3.

세째는 돌보아 주는 사랑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 신속하게 응급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짐승에 실어서 마을 어귀에 있는 여관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여행자들이 묵어 가는 곳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유대인을 지극 정성으로 돌아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돌본다는 말은 섬겨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기꺼이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그 손해를 감수하면서 까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를 보살폈습니다. 섬겨주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그럴 만한 까닭이 없었습니다. 굳이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자기의 희생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마다하지 않고 그 일을 했습니다. 더 많은 돈이 든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는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차 한 대를 사는데 1억을 넘게 쓰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분들이 돈을 써 줘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가 돌아가지요. 그렇지만 자기를 위해서 흥청망청하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수백만원을 하룻밤의 쾌락의 비용으로 쓰곤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웃을 위해서, 고통 당하는 형제를 위해서는 한푼도 아까워 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를 위해서 안 쓰고 아꼈던 것은 남을 위해서 기꺼이 기쁨으로 쓰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두 데나리온이 얼마나 큰 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이틀 품삯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작은 돈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의 형편에서는 엄청나게 큰 돈일 수 있습니다. 그 돈이 사업 밑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랑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내 배만 부르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희생하며, 도울 수 있는 그런 사랑의 사람들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4.

네째는 끝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끔찍할 정도로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아무래도 강도 만난 사람의 건강이 좋아졌는지, 아니면 급히 가야 할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주막의 주인에게 신신당부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잘 돌보아 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부대비용이 들면 그것은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선행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도중하차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기분 좋을 때는 사랑하다가 기분 나쁘면 그만두는 그런 사랑을 해서는 안됩니다. 내게 이로울 때는 사랑하다가 내게 불리하면 포기하는 그런 거짓 사랑을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환경과 형편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양극화 시대의 엄청난 문제를 안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세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양극화의 갈등과 분열이 심심치 않게 불어옵니다. 그럴 때마다 교회는 비틀거리며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이 양극화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며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오직 하나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돈으로 양극화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학식으로, 온갖 복지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앞장 서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로만 사랑 사랑 이야기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몸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간 것처럼 소외된 이웃들에게 가까이 가야 합니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바로 그곳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어떤희생을 치루더라도 그것을 감수하면서 기꺼이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써 사랑합시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힘써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행복을 소유하며 누리는 온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