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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단4:34~37)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다니엘 4:34~37

Introduction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을 맞이하여 각 가정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앞뒤좌우에 계신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 해도 건강하시고, 승리하세요. 또 인사 해 볼까요? 새해엔 부자 되세요..

A.

설날은 참 좋은 날입니다. 이 날이 좋은 이유를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세뱃돈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설날이 좋은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사랑하지만, 삶의 자리에 매여있다 보니 만나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격조(隔阻)했던 부모형제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증언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133:1~3)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쁨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최근 설문조사에 의하면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거짓말' 1위는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 며칠 더 계시다 가세요'(362명)라고 합니다. 시어머님이 빨리 가시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며느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시댁 식구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왜 아파트 이름이 어려운지 아십니까? 시어머님이 못 찾아오시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우스개 소리긴 하지만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족들이 모이면 힘듭니다. 설거지도 많이 해야지. 끊임없는 일거리들이 있습니다. 허리를 펼 짬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축복이 그곳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설에는 모든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사랑의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 주님께서 헐몬의 이슬이 내리는 것처럼 축복해주시는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B.

설날이 좋은 두 번째 이유는 덕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욕설입니다. 세계 어디에도 욕설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무시무시한 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설날만 되면 그 모든 욕들은 사라집니다. 서로를 향해서 축복하는 덕담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 덕담은 마치 예언적 축복으로 선포되는 듯합니다. 성경에서 예언적 과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일인데 마치 과거에 이루어진 것처럼 확신속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직 성공하지 않았는데 당신 성공했구려! 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 자녀가 없는데 당신의 자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구먼! 하면서 과거형으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덕담이 그런 측면을 띄고 있습니다. 총각에게 장가 갔다면서.. 하고 덕담을 합니다. 올해는 꼭 장가가라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 말에는 예언적 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설날이 좋은 것은 이런 예언적 축복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덕담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설날에는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덕담으로 교회 안에 예언적 축복이 가득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향해서, 우리의 가족과 친지를 향해서 풍성한 축복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축복은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축복하는 것만큼 한 해는 풍성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 축복하시고, 뜻 깊은 덕담으로 우리의 교회와 가정을 행복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Main Subject

1.

설날은 참 좋은 날입니다. 그러나 설날에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 3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 4:34)

본문은 유대 나라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초강대국의 왕은 느부갓네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세계 속의 가장 강대한 나라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큰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또한 자기의 능력을 믿으며, 그것에 의지했습니다. 결국 그는 짐승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어야만 했고, 밤이슬로 몸을 적셔야만 했습니다. 그의 찬란한 영광은 한 순간에 다 사라졌습니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을 우러러 보게 될 때에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짐승과 같은 비천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의 교만에 눈이 멀어있을 때에는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그 앞에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금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에게 총명을 주셨습니다. 존귀한 지위와 권세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렇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때에 참된 인생의 승리와 성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존귀한 지위와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해야 합니다.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설날은 참 좋은 날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귀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봄이 없거나 혹은 하나님을 왜곡되게 잘못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마치 느부갓네살이 큰 신상을 만들어 그것을 바라보며 그릇 되이 하나님을 섬겼던 것처럼 조상숭배에 빠져있고, 이 날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결국 모든 좋은 것을 다 잃게 됩니다. 그리고 처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명절이 되면 조상의 산소를 찾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좋은 날이 되어 한 가족이 모이게 되었으니 조상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선대 조상들의 묘소를 방문하면서 그분들에 대한 귀중한 기억들을 회상하며, 조상을 귀히 여기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교회 다니는 것과 조상의 묘소를 찾아 제사하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고, 제사는 귀중한 민족의 전통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씀에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조상에게 절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는 것입니다.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 것이 당연하다면 조상들께도 절하며 예를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게 될 때에 기독교인들의 마음에는 무거운 짐이 남습니다. 할 말을 잊곤 합니다. 교회에서 절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조상숭배의 당위성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마음은 이해를 합니다. 참으로 존경하는 부모님의 묘소에서 절 한 번 올리고픈 마음이야 백 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탄의 속임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묘소 안에 부모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금까지 조상숭배를 우상숭배와 동일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사진에도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격적 교제가 있는 존재에만 복종과 존경의 의미가 담긴 절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은 철저하게 인격성과 관계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적 실체가 없는 곳에 절하는 것은 명백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명절을 당하게 되면 사탄의 교묘한 속임수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어리석은 자리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그릇된 신인식을 가져왔습니다.

지난 주간에 교역자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그 기간 중에 낙산사를 구경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낙산사를 가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입장료를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굳이 우상을 섬기는 불교유적지를 둘러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지난 봄에 낙산사가 불이 난 후에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회가 아니면 그런 큰 절을 구경하는 것이 쉽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대단했습니다. 엄청나게 컸습니다. 절이 큰 것은 물론이고, 대웅전이며, 각양 불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들이 대단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꼭대기에 올라갔더니 큰 불상이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그곳에 엎드려 참배를 합니다. 그 큰 불상의 위세에 눌려 누구든지 절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 절에는 큰 불상을 만들고, 또 금으로 치장한 번쩍거리는 불상을 세워놓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압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장엄함과 화려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고, 굴복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큰 것을 보면, 대단한 것을 보면 그것에 무릎을 꿇으려 합니다. 마을 어귀에 큰 나무가 있어도 거기에 무릎을 꿇고 손을 빌어가면서 공을 드립니다. 산중 깊숙한 곳에 큰 바위가 있습니다. 그곳까지 찾아와서 촛불을 피우고, 공을 드립니다. 자기를 압도하는 큰 것에 하나님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큰 불상 앞에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보고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기에 절하는 것이 무엇이지? 우리 아이들이 목사 아들답게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큰 불상을 만들어 놓고는 거기에 하나님이 있는 줄로 잘못 알고 있어서 저렇게 절을 하는 거다. 하나님을 알면 저렇게 돌을 깎아 놓고 절을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가장 큰 존재가 무엇입니까? 큰 나무나 돌이 큰 존재가 아닙니다. 높이 쌓아올린 불상이 큰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는 사람입니다. 사람만큼 큰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람의 영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주보다 더 큰 존재가 땅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돌덩어리, 금덩어리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인간을 존귀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속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절대로 우상숭배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조상숭배로 미화된 사탄의 속임수에 빠져 하나님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2.1.

설날과 같은 명절에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우러러 본다는 말씀은 첫째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모든 실패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금 지극히 존귀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존귀하게 해 주십니다. 그 사람을 인정해 주십니다.

아벨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둘째 아들이요, 허무한 존재라는 보잘 것 없는 이름을 갖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찮은 직업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인류 역사에 가장 존귀한 순교자로 기록된 것은 바로 그가 예배하는 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십니다. 그에게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인생 길에서 힘들어 방황하며 고통하고 있을 때에도,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경험하며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도우시며, 모든 환란과 위기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설이라는 명절을 맞이하면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모입니다. 사랑을 나눕니다. 좋은 덕담을 주고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날에 모든 가족들이 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가족들 중에 주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제사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이 가문을 향하여 공급될 것입니다. 혹 문제가 얽혀 있었다고 해도, 그 모든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날을 맞아 가족들이 모였을 때에 윷놀이 하면서, 고스톱 하면서, 유쾌하게 즐기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됩니다. 물론 가족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를 개발해야 하고, 그런 놀이를 통해서 가족의 유대감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명절은 절대로 축복된 명절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명절을 허락하시고, 우리의 일생을 지켜주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참된 승리는 다른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하게 될 때에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배를 귀한 것으로 여기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설을 당하여 우리에게 허락된 좋은 날들을 그저 세상적 쾌락으로 소진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벨과 같이 아름다운 예배를, 온 가족이 함께 드리므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축복하시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둘째로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스스로 겸손한 자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3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다니엘 4:37)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예배하고서 고백하기를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마땅히 겸손해야 하며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에게 어느날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의 질문을 받는 프란시스는 그들을 향해서 입을 열었습니다. 겸손이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교만한 자는 멸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겸손한 섬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군림하며 주장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겸손히 섬기며,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명절 맞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명절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가 밀려온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일들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을 갖고 겸손히 섬기는 사람으로 자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곤하고 힘든 일이 많겠지만 일년에 한 두 차례 맞는 이 명절에 기쁨으로 섬기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든 일이 많은 줄 압니다. 그러나 이번 설날에 모든 가족들을 기쁨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고집과 자아를 꺾어 놓으면 가정에 큰 소리가 날 턱이 없습니다. 명절만 되면 온 가족이 모여서 싸우는 집들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가정이 그런 곳이라면 이제는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므로 기꺼이 겸손하게 섬기는 자가 되어지면 됩니다. 내가 섬기는 자가 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을 지극히 존귀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존귀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실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오늘은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날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힘써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불화를 만들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겸손히 섬기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차한 일, 번거로운 일 다른 가족들에게 미루지 마시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기꺼이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꺼이 가족들을 위해서 낮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입술은 귀한 덕담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향해서 축복하는 말이요, 믿음과 신뢰의 말이요, 격려의 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움과 증오로 토해놓는 저주의 말들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영혼도 좀먹는 무시무시한 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며, 축복이 가득한 덕담으로 가족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명절이 더욱 아름답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 모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찬양하는 모임,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조상숭배의 옛 전통에 매여있는 가족들을 주님께로 초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마음에 복음을 전하며, 다음에는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명절이 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명실공히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한 설날이 되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Wait a min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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