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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사랑의 중보기도

사랑의 중보기도

창세기 18:20~33

Introduction

거룩한 성일 주의 전에 오르신 여러분들에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앞뒤 좌우에 계신 분들과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의 작품 크리스마스 선물에는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부부, 짐과 델라의 사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 부부는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비록 가난해서 가진 것은 없었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만은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절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꼭 필요한 좋은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가난했기에 마음만 있을 뿐, 아무런 선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 짐이 가진 것이라곤 조상적부터 물려받은 오래된 시계 뿐이었습니다. 짐은 그 시계를 팔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사랑하는 아내 델라의 머리핀을 샀습니다. 평소에 긴 머리를 갖고 있는 아내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내 델라도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선물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델라에게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잘라 팔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오래된 시계에 줄이 없었기에 남편을 위해 시계줄을 샀습니다.

짐과 델라는 서로를 기쁘게 할 마음으로 거의 같은 시간 집에 도착했습니다.짐은 머리핀을 들고 아내의 머리에 꽂아 주려고 했으나 아내의 머리는 이미 짧게 깎여 있었습니다.너무나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서 자기의 선물인 머리핀을 내어 놓았습니다. 아내는 그 선물을 받아 들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남편을 향해서 여보, 내 머리카락은 빨리 자라자나요. 다시 머리카락이 자라면 이 머리핀을 꽂을께요.. 그리고는 자기의 선물을 남편에게 내어놓았습니다. 남편의 오래된 시계를 위한 시계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남편에게 그 시계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선물을 했지만, 가장 고귀한 선물을 했습니다.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가장 귀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복음 성가에 그런 찬양이 있습니다. 참 사랑은 가난함도 부요함도 없어요. 괴로움도 즐거움도 주와 함께 나눠요.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장 귀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가장 귀한 것, 독생자를 내어 주신 것처럼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으로 가득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의 고백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런 희생이 없는 사랑은 무가치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기꺼이 나눠주는 참 사랑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짐과 델라의 선물처럼 헛된 희생같아 보여도, 자신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일 모레면 발렌타인 데이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날입니다. 쵸콜릿 장사꾼들의 상술이 판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상술이라고 무시하기보다는 이럴 때에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의미있는 선물을 한 번 해 봄이 어떨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가장 귀한 사랑의 선물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Main Subject

1.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언약을 받고 축복을 찾아 길은 나선 사람이었습니다. 우상의 땅,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무작정 길을 나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길을 나설 때에 그에게는 오직 하나 조카 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함께 겪었습니다. 눈물의 세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아마도 조카 롯을 자기의 상속자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아브라함도 우양이 많아지고, 롯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종들이 우물과 초원에서 서로의 힘을 과시하며 주도권 싸움을 벌였습니다. 서로 심하게 다투게 되었습니다. 어찌 삼촌과 조카가 싸우고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는 남다른 정이 있었고, 사랑의 관계가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롯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가 조금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투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우편을 취하면 나는 좌편을 취할 것이요, 네가 좌편을 취하면 나는 우편을 취한 것이다. 그러니 너는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하라.(창세기13:8~9) 아브라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롯은 가나안 땅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리 둘러 보아도 소돔과 고모라 땅이 더욱 기름져 보였습니다. 그 땅은 항상 나일강의 물이 창일하던 애굽과 같이 기름지고 풍요로웠습니다. 창세기 13:10절에 보면 그 땅은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세기13: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롯은 그 땅을 삼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삼촌에게 양보도 하지 않고 선뜻 소돔과 고모라 땅을 취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괘씸한 노릇입니까?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돌봄 가운데 있던 롯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를 양자로 삼아 상속자가 되게 하려고까지 했던 조카였습니다. 오갈 데 없는 처지에 있던 그를 이와같이 귀하게 여겨주었고, 그가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 주었던 삼촌에게 이같이 대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삼촌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비록 삼촌이라도, 자기에게 많은 은혜를 베푼 은인이었어도 손해를 볼 수는 없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이와 같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라면 도리도 없습니다. 윤리도 없습니다. 법도 없습니다. 배은망덕한 짓도 서슴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는 사랑도 외면하고 저버립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서 잘 했다고 인정하시지도 않습니다.

롯의 선택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은 롯의 선택이 치명적인 멸망의 선택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이 망하게 되었고, 그 땅과 함께 롯도 망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롯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배은망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먼저 양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이롭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롯의 유익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먼저 주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하는 것은 망하는 선택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지혜로운 선택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선택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므로 먼저 양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때로는 미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소알 들녁과 요단 온 들을 롯에게 양보할 때에 그것은 너무나 미련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롯을 사랑했습니다. 그와 다투기 보다는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을 양보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롯에게 양보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3:14~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을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세기 13:14~17) 아브라함은 롯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므로 좋은 것을 양보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서 축복을 약속하시고, 더 좋은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므로 양복하는 것은 결코 미련한 짓이 아닙니다. 망하는 것같아도 반드시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패하는 것같아도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런 사랑의 사람과 늘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므로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양보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여 떠난 후에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있기는 했지만 아브라함은 여전히 황량하기 그지 없는 가나안의 산지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우물을 파지 않으면 물을 구할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힘든 땅에 거하게 되었을 때에 마땅히 분노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롯의 배은망덕에 대하여 괘씸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엘람왕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네 나라가 동맹군을 이루어 소돔과 고모라를 공격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 때에 소돔 성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의 재물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소한 일입니까? 아브라함의 속을 썩이다가 배은망덕하게도 기름지고 좋은 땅을 먼저 취하여 간 못된 놈, 롯을 생각하면 고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일을 고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가슴 아파했습니다.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자기의 작은 병력을 동원하여 조카 롯을 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롯을 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집에 있던 군사는 고작 318명이었습니다. 이 작은 수로 어떻게 네 개의 나라가 연합한 군대를 공격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무모한 전쟁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조카 롯을 구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배신했을지라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은혜로 갚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선으로 악을 갚는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은 복수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려고 합니다. 내게 악을 행했고, 내게 배은망덕한 일을 했으니 나도 그렇게 갚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마음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게 비록 악을 행했을지라도 나는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나는 관대하게 용서하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큰 손해를 끼친 원수를 위해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며, 생명을 걸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입니다. 아브라함은 괘씸하기 그지 없는 조카 롯이었지만 그를 향해 분노와 복수의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사랑했습니다.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롯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괴롭게 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끊임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지옥의 형벌에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갚아야 합니다. 원수의 배은망덕을 보면서도 기꺼이 내 생명을 던져가며,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천국이 될 것입니다. 행복으로 가득한 웃음꽃이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수고와 헌신으로 롯은 모든 재산을 되찾고 다시 소돔 땅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하고 있는 소돔 땅이 어떠했습니까? 본문 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세기 18:20)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관영했다는 것입니다. 그 죄악이 심히 중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땅을 멸하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롯이 소돔 땅과 함께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저주를 받아 망하게 될 때에 함께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악으로 망하는 것들과 친구하며 거기에 거하여 살게 되면 망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고백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망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곳에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미련하게도 망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그 땅에 그의 자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이처럼 미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악의 길을 끊지 못하고, 죄짓는 자리에 동참하게 될 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세상의 간교한 교훈을 따라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잠시는 소돔과 고모라의 풍요처럼 풍요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축복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죄인의 자리는 망하는 자리입니다. 악인의 자리는 결코 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소돔과 고모라는 피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떠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소돔과 고모라에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래 잘 되었다. 지난 번에는 정에 이끌려서 내가 군대를 보내고 살려주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망하게 하시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서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본문 2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세기 18:22)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는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섰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중보기도자로 자청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에게 배은망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롯의 위기를 보면서 중보기도자로 나섰습니다. 힘써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죽기를 각오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큰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귀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중보기도하는 만큼 귀중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이런 생명을 걸고 중보기도하는 사랑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다가 중단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허울좋은 형식의 기도자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중보기도하는 이런 헌신자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가장 귀한 사람이 중보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는 서로를 위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중보기도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혹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아브라함처럼 스스로 중보기도자를 자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중보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우리 곁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한 중보기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함으로 사랑을 이루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사랑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원수에게도, 또는 우리 앞에 배은망덕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기꺼이 용기를 내어 죽기를 각오하고 구원의 손길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적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우리에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서로 중보기도함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만큼 귀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서로를 위해서 마음을 다하여 중보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끊임없이 중보기도하시는 것처럼,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함으로 서로를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의 중보기도가 이룰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 중보기도하므로 행복한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