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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사랑한다면 믿어주라

사랑한다면 믿어주라

디모데전서 1:12~16

Introduction

거룩한 성일, 주 앞에 예배하러 오신 여러분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앞뒤좌우에 인사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이런 여자를 만나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나머지 그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내가 여자 하나는 제대로 만났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거기에 보니 구구절절이 옳은 말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말 가운데 제 마음을 사로잡는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어주는 여자를 만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그렇다. 남자의 행복은 자기의 아내가 예쁘게 잘 생겼기 때문도 아니고, 아내가 돈을 많이 벌어오기 때문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항상 자기를 믿어주고, 지지하며, 응원해 주는 아내가 있을 때에 비로소 행복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무지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하..이럴 때 아멘을 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남자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믿어주는 남자를 만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처녀, 총각들은 서로 믿어주는 남자와 여자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서로 믿어줌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제 설문조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이 사원 59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어떤 상사와 함께 일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대리 이하 사원 303명 중 102명(33.7%)이 부하를 믿고 (일을) 맡기는 상사를 원했고 업무능력이 뛰어난 상사라고 응답한 사원은 75명(24.7%)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직장인들이 원하는 상사는 업무능력이 탁월한 사람이기보다는 믿어주는 상사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어줄 때에 행복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는 사랑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주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를 믿고, 부모를 믿어주고, 자식을 믿어 주는 것은 물론이고, 함께 신앙생활하는 모든 성도들을 사랑으로 믿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을 이루고, 주님께서 주시는 크신 기쁨으로 충만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도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믿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디모데전서 1:12)

사도 바울은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충성된 자로 인정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일로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가지시고, 우리를 믿어주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을 믿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어주시고, 충성 된 자로 인정하시며, 직분을 맡기기까지 하신 것이 바울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이거나,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일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능력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질병으로 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설교 중에도 그에게 있는 간질 때문에 거품을 물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약하디 약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능력있게 하셨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기억하면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약한 데서 강하여짐이라. 연약한 모습인 그대로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가난하다고 합니다. 연약하다고 합니다. 정말로 무능한 신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충성된 자로 여기셔서 능력을 주시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같이 믿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믿어주신 하나님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믿어주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유혹에 넘어지기도 하고, 시련에 쓰러지기도 하며,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입술에 원망과 불평을 달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시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충성하기는 커녕 불순종하며, 주님의 속을 썩이는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우리를 여전히 믿어주십니다. 그래, 지금은 연약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나 내 마음을 크게 기쁘게 할 것이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향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어머니가 말썽꾸러기 아들을 믿어주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고 또 속으면서도 우리를 믿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만, 주님은 그에게 다시 세번씩이나 사랑을 고백하시면서 믿어주시고,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끊임없는 믿음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끝까지 믿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를 믿어주셨던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가 된 것처럼,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세상에 담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어주셨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주님께서 그를 믿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발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디모데전서 1:13)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훼방자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강포를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왜 믿어야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왜 그에게 직분을 주셔야만 했습니까? 그럴 이유는 정말로 없습니다. 주님께서 꼭 그렇게 하셔야만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흉악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믿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믿어주심에 보답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한다면 우리 주님처럼 믿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속고 또 속았지만 그래도 믿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모든 것에 의심하고 믿지 못한다고 하면, 사랑이 깨어지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참된 행복이 찾아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우리를 믿어주셨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조건 믿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믿어줌이 우리의 교회와 가정, 그리고 우리가 속한 직장과 학교를 천국의 행복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동발달연구소의 현순영 소장은 “아이들은 걱정만 하는 엄마보다 믿어주는 엄마를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너는 왜 그러니, 그래서 되겠니? 하면서 걱정 섞인 말로 나무라기만 하면 아이들은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실수를 해도, 아빠는, 엄마는 너를 믿는다.고 하면서 무작정 믿어주면 아이들은 정말로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존재입니까? 성경은 절대로 인간을 믿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모든 말은 헛될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보증을 서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라고 해도, 부모라고 해도, 남편과 아내라고 해도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믿어야 하는 존재는 성삼위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한다면 믿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믿어줌으로 그들을 세워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믿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어주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2.1.

믿어준다는 것은 첫째로 현재의 모습에 낙심하지 않고 소망 중에 인내함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말썽을 부렸습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상속해 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가지고 멀리 타국으로 갔습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사치하고, 향락하다가 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흉년이 들고 먹을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서 일꾼으로 써 달라고 해야겠다. 탕자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그를 영접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오는 아들이지만 그 아들을 인내하면서 소망 중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의 사람들은 너무나 성급합니다. 지금 아이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당장에 좋은 성적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들을 재촉합니다. 괴롭힙니다. 학원이다, 과외다 시키면서 아이들을 잡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실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인내함으로 용기를 주면서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남편에게 무능하다고 합니다. 당장에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남편의 마음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기다려 줄 줄 아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려워도 반드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면서 기다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런데 몇 해가 지나도 부흥하지를 않습니다. 교회를 새로 지었으면 교회가 빨리 부흥해야 할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왜 부흥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목사님이 실력이 있으니 없느니 합니다. 장로님들이 좋으니 나쁘니 합니다. 교인들이 수준이 높으니 낮으니 합니다. 그러면서 서로를 향해서 질책합니다. 서로를 향해서 원망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공동체,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에 부흥하지 않아도 서로를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부흥의 꿈과 비전을 품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실직해도, 자녀들이 대학에 떨어지고, 취직을 못하고 있어도 믿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곳에 사랑이 꽃피게 되고, 사랑의 열매인 행복의 달콤한 맛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2.

둘째로 믿어준다는 것은 무시하지 않고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믿어주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결코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부의 부부싸움 가운데 대부분은 서로의 집안을 무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보면서 처갓집 식구들을 무시하고, 아내가 시댁 식구들을 무시하면 그 가정에는 결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그들의 약점까지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 차든지 덥든지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토하여 내치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무섭게 나무라시며 책망을 하셨는데 그 교회를 향해서 주님께서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마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수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문밖에서 두드리셨습니다. 우리의 의사를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분명히 문을 열 것을 믿기에 내가 문밖에서 두드린다는 것입니다. 믿기에 두드리는 것입니다. 믿기에 인격적 가치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히 여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사람을 무시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가 봅니다. 돈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일들이 생기고, 힘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일들이 일어나는가 봅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는 그런 일이 없는 것같아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간혹 여러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말들을 듣곤 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회에 가려면 돈을 많이 벌어놓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교회에 가 보니까 돈 있는 사람이 대접을 받고 돈 없는 사람은 무시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믿어주는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서로를 믿어주고, 신뢰하고,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기에 때로는 구차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존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함으로 믿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을만한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무조건 믿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유없이 사랑함으로 믿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의 가족들이,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우들이 믿음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때로는 실망스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고 하더라도 믿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급하게 실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혹 실수가 있다고 해도, 소망 중에 인내함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는 형제와 가족과 교우들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귀하게 여기고, 존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함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주는 것은 때로는 인내함으로 기다려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실수만 연발하고 있을 때에도 무시하지 않고 존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믿어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3.1

첫째는 우리가 믿어줄 때에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 성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보니 현명한 엄마론이라는 글에 보니 아이는 엄마가 믿어주는 만큼 성장한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믿어주면 그만큼 아이는 자랍니다. 엄마가 아이를 믿지 못하면 아이는 결코 자라지 못합니다. 성숙한 인격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믿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해서 믿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믿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친히 맡기시기까지 우리를 믿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주시는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자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믿어주시고, 우리를 믿어주신 것처럼 믿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인격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주는 만큼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믿어주면 우리 교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집니다. 우리가 믿어주는 만큼 우리 교회는 성숙한 교회가 되어지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믿지 못하면, 서로 신뢰하지 아니하면 우리 안에 근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문제가 생겨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3.2.

둘째로 우리가 서로 믿어주어야 하는 이유는 믿어줄 때에 참된 헌신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는 헌신이 부족합니다. 헌신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성도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믿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어주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어느 누구도 생명을 다한 헌신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고,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서 생명을 던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에 참된 헌신이 있고, 참된 봉사와 섬김이 있기 위해서는 서로를 온전히 믿어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날 민족운동가인 김구 선생님께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 뭔가 일을 해보겠노라고 하긴 했지만 일본말과 한국말을 섞어서 쓰고 있었습니다. 생긴 모양도, 풍체도 일본사람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젊은이를 수상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그를 데려오라고 하고, 정중하게 만났습니다. 젊은이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한 탓에 가난과 병에 시달렸으며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쓰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 젊은이의 사람됨을 한 눈에 알아보고 당시로는 큰돈인 천원을 선뜻 내주었습니다. 이 젊은 이가 훗날 일본에서 히로히토 왕을 저격하고 형무소에서 순국한 이봉창 열사입니다. 그는 후일에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평생 나를 신임해준 분은 김구 선생님 뿐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믿어 주시는데 어찌 목숨인들 아끼겠습니까? 나는 나라 사랑하는 법을 선생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김구 선생이 이봉창이라는 젊은이를 믿어주었을 때에 그는 김구선생과 그분의 가르침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되기만 하면 우리 안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교회의 부흥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헌신자들이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여러가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사랑으로 믿어주면 목사가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사랑으로 믿어주면 성도들이 또한 목숨을 걸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헌신하는 일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사랑으로 믿어주는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이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게 됩니다. 아내가, 자녀들이 가정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3.3.

우리가 왜 서로를 믿어주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믿어줄 때에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능력이 나타나게 된 것은 바울에게 특별한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믿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을 그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대에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아주대학교의 이민규 교수가 쓴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꿈의 해석》에서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은 "너는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어머니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기 일쑤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그의 할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넌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어. 할머니는 너를 믿는다."

위대한 일을 해낸 사람,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그 곁에는 언제나 그를 믿어준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가 자녀를 믿어주고,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믿어주면 거기에서부터 성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일은 그를 믿어준 사람이 있기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위대한 성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나를 믿어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가 성도들을 믿어주기 시작하면 바로 거기에서 부터 위대한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공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이 있는 곳에는 실패와 좌절이 있을 뿐이지만 믿어주는 사랑이 있는 곳에는 성공과 축복이 가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사랑함으로 믿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편이, 자녀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믿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목사의 목회가 성공적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어주어야 합니다. 잘하니 못하니 하면서 판단만 하고 있으면 결코 성공적인 목회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주면 성공적인 목회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사랑함으로 믿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일을 맡기는 것이 불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어주어야 합니다. 믿어주어야 진정한 성공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진짜로 큰 힘을 나타낼 수 있기 위해서는 믿음이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서로를 믿어주는 사랑이 될 때에 그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함으로 믿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불신풍조가 만연합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믿어주지 않는 세상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믿지 못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믿지 못합니다. 서로를 향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서 의심하는 것은 변질된 사랑입니다. 마치 변질된 음식은 먹을 수 없고, 악취가 나는 것처럼 사랑도 변질되면 악취가 나고,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의심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결코 의심하지 않습니다. 속고 또 속아도 믿어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시고, 배신을 당하시면서까지도 우리를 구원하시며, 천사도 흠모할만한 직분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형제를 믿어주어야 합니다. 믿음직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어도 믿어주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믿어줍시다. 믿어주므로 사랑을 이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의심을 저 깊은 바다에 던져 넣으시고, 주님이 우리를 믿어주신 것처럼 힘써 믿어주어서,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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