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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주의 고난을 생각하라

주의 고난을 생각하라

로마서 5:6~8

Introduction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특별히 고난의 십자가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에 길가에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주님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라고 여겼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만 하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조금 달랐습니다. 정복자로 세상을 완전히 뒤엎으려고 했다면 말을 타고, 군대로 무장을 하고 들어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개선장군으로 들어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정복자의 말을 선택하시기 보다는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택했습니다. 한번도 사람을 태워보지도 않고, 짐도 실어보지 않았으니 어설픈 나귀입니다. 성경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정복자가 아닌 겸손과 평화의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함으로 평화를 이루시고, 전쟁이 가득한 온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지만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선택한 것은 정복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이었습니다. 십자가였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참된 하늘의 평안은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메시야의 시대는 고난이 없이는 결코 맛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에는 많은 장점들이 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조직화되었습니다. 많은 가치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훨씬 아름다운 건물에 세련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다 좋은데... 은혜가 떨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설도 좋고, 사람들도 신사적이고, 각종 활동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는 정말로 황무지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며, 헌신하는 이런 참된 부흥을 보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교회를 보시면서 참된 부흥으로 갈증을 느끼십니다. 부흥의 때를 보고 싶어서 안달을 하십니다. 그런데 부흥이 왜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까? 왜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고난을 알지 못하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경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은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토록 기다리시는 부흥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감동하며,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헌신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지 영적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참된 부흥을 위해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로 풍성케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주님의 고난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에서 아무리 중직을 감당하고 있어도, 또 헌금을 많이 하게 되고, 여러 가지로 봉사를 하게 되어도 은혜없이 살아갈 뿐입니다. 영적인 황무지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깨달아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 아픔과 고뇌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고난은 어떤 것입니까?

1.1.

첫째는 자기 백성에게 배신을 당하신 고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의 고통을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피맺힌 절규로 기도하시는 주님을 보면서도 어느 누구도 함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곤히 잠자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절규와 비명과 나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함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던 베드로도 요한도 야고보도 모두 졸았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졸고 있는 제자들도 괘씸한 노릇인데, 지금까지 신뢰함으로 모든 재산을 다 맡겨두었던 제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돈궤를 모두 횡령한 것도 모자라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의 군병을 거느리고 와서 예수님을 잡아가게 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는 제사장의 뜰에서 어린 여종의 물음 앞에 주님을 부인합니다. 주님께서 빤히 보고 있는데 그 앞에서 저주하며 주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그뿐입니까?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던 사람들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미친 듯이 주님을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도, 주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칭송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성전의 제사장도 모두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생명까지 주려고 있던 그들이 주님의 목전에서 철저하게 부인하며 배신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철저하게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배신했습니다. 사랑과 은혜와 기적을 다 외면하고 비겁한 목숨을 구걸하므로 주님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던 것입니다.

1.2.

둘째로 주님의 고난은 뼈마디가 녹는 십자가의 무자비한 고통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끌려 로마의 법정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무시무시한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최고의 형벌에 해당하는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습니다. 밤새 심문을 당한 것도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잔인한 채찍질로 온 몸을 피투성이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병사들의 조롱이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로 관을 만들어 꾹 눌러 씌웁니다. 손끝에 조그만 가시 하나만 들어가도 아프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 우리들인데 주님의 이마에 굵은 가시관이 꾹 눌러 씌워집니다. 이마에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어느 누구도 그 가시관을 벗겨주지 않습니다. 가시관을 쓰신 그대로 또 매를 맞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길은 참으로 비참한 길입니다. 자기가 매달려야 하는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져야 합니다. 이미 오랜 매로 시달렸고, 굶주렸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몸을 가늘 힘 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쌀 한 가마에 해당하는 무게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험하디 험한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야만 했습니다. 몰인정한 로마의 군병들은 걸음이 더디다고 하며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채찍에 맞아 이리 넘어지고 저리 쓰러집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을 부축하여 일으키지 않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거친 욕설과 함께 무자비한 채찍질을 해댑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그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오를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이 이것을 알고, 구레네 시몬에게 대신 지고 가게 합니다. 주님의 골고다의 길은 스스로 도무지 걸을 수 없는 인간 한계의 고통이었습니다.

골고다의 정상에 올랐을 때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굵은 대못이었습니다. 무자비한 못질로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의 몸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게 됩니다. 비참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 인간으로는 차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극치, 바로 그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차마 눈을 뜨고 볼수 없는 처참한 고통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와같은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1.3.

세째로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고통은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실 때에 주님의 마음은 참으로 견딜 수 없었음에 분명합니다. 늘 함께 하시던 아버지께서 주님에게서 얼굴을 돌리십니다. 외면하십니다. 주님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불러도 하나님은 대답도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늘을 향해서 아무리 외쳐도 하나님은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견딜 수 있는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비방하고 조롱해도 참을 수 있는데, 사랑하는 제자들이 다 떠나고, 심지어는 눈앞에서 배신하며 저주하는 것도 참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우리 주님께 가장 큰 아픔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모진 형벌보다 더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고통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고통을 우리의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그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것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크게 밀려옵니다. 주님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은혜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왜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옵니까? 예수 믿는 우리에게 왜 아픔이 찾아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십일조도 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생명을 걸고 순종하는데, 온갖 착한 일을 다 하는데 왜 무시무시한 고난이 찾아옵니까? 친구가 떠나가고,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한 질병이 찾아오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 고통이 찾아옵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의 고난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 주님의 고난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몸으로 체험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고난을 체험하게 하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2.

고난이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까? 그것은 주님의 고난에 엄청난 축복과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2.1.

첫째는 주님은 아무런 죄가 없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대속적 희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5:6)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처참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주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는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4:15절 말씀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처참한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시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된 것은 주님께 무슨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오고 오는 모든 세대 가운데서 죄없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죄 없으신 오직 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의인이 왜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야 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감당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매 순간마다 우리의 생각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마다 죄악 된 것들 뿐입니다.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대부분이 죄악 된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할 수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과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우리 인류의 모습을 고발하면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들, 도무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우리들을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하는 온갖 저주를 자신의 온 몸으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주님의 고난을 알아야 합니까? 바로 그 고난은 단순히 2000년 전에 예수라는 한 청년만의 아픔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당해야 하는 고통인데, 우리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된 실존은 그토록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가 그 심판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속하신 주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다시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으로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둘째로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고백을 의미합니다. 본문 8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죄 됨과 저주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아픔을 기꺼이 참아가며,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그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함으로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된 존재입니다.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들입니다. 지옥구덩이에 부지깽이로나 쓰여야 할 우리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있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 받아야 하는 가치가 있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일 뿐입니다. 주님께 아무런 사랑 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랑의 손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친히 고통을 인내하시면서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떠나갔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다시금 찾아오셔서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무가치한 우리에게 여전히 주님을 배신하며, 주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슴 아픈 짝사랑을 고백하는 주님의 흐느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도,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라면 기꺼이 생명을 던지십니다. 어떤 고통도 친히 감당하십니다. 십자가가 아무리 힘들고 무섭더라도 우리를 위하는 일이라면 그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확신 속에 항상 담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실 주님의 사랑을 인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당당히 걸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3.

세째로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사명에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24절 말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24)

사도 바울은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안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어떠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알고 보니 주님의 고난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주님께서 남겨두신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 외에 성도들이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남겨두신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주님처럼 배신을 당하고, 육신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며, 순교의 희생이 요구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살아가게도 되지만 그 모든 일을 견뎌가면서 감당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일은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남기신 고난을 그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이라고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초대교회에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전하며, 말씀대로 사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어떠합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게으릅니다. 말씀대로 사는 일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곳에서 말씀을 붙들고 최선을 다함으로 순교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글에서 이런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제 성도들이 순교해야 하는 자리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믿음의 사람으로 직장에서 순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때에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순교적 헌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생이 공부할 때에 대충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비전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교적 정신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잠시의 쾌락을 뒤로 물려 두어야 합니다. 재밌는 일도 삼가야 합니다. 육신이 지칠 대로 지치게도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고난을 인내합니다. 견딥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도구가 되기 위해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죽기를 각오한 헌신의 사람이 되어집니다.

저는 오늘날의 성도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죽을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죽을 자리가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목사의 죽을 자리는 설교하는 강단입니다. 목회하는 현장입니다. 그곳에서 죽기를 다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순교적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죽을 자리는 어디입니까?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직장입니다. 학교입니다. 가정입니다. 그곳에서 순교적 정신으로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남겨두신 고난의 몫을 친히 담당해야 합니다. 그 고난을 무겁다고 힘들다고 회피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담겨두신 고난이 있습니다.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해야 합니다. 힘써 전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에게는 7무원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무차별, 무시로, 무수히, 무릎으로, 무엇보다도, 무안당해도 전도한다는 것입니다.(이병욱 외, 내가 준비하는 미래, 규장, p.48) 저는 이 글을 읽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바울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사입니다. 그런데 체면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이것이 생명을 걸고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좋은 아파트 사고, 좋은 집사는 것에 생명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는 생명을 걸면 안됩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은 바로 복음 전파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생명을 걸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는 데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친히 고난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은혜로 풍성한 사람이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저는 교회에 은혜가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은혜가 풍성하게 됩니까? 많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만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어야만 은혜가 있게 되고, 평강이 찾아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시대, 종려주일의 기쁨은 어떻게 완성됩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을 때에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풍성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끔찍하고 처참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토록 무시무시한 고난을 당하신 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적 고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고난 받아야 하고,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주님께서, 아무런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고난을 받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고난을 담당하신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뿐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세상의 어느 누구도 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그것을 보여주는 창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고백인 것입니다. 부모는 버리고, 형제는 떠나도 결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확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 안에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이 넘쳐 납니다. 감격이 있게 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온갖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한 순간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비참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지만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런 처참한 고통을 당하시며,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모를 때와 똑같이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내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지워주시는 십자가를 힘써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헌신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생명을 바쳐 순교함으로 교회를 섬기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세상 속에 맡은 바 모든 사람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다시금 더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고, 우리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미암은 구원과 평강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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