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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사라진 부활의 기쁨

사라진 부활의 기쁨

요한복음 12:20~26

Introduction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함께 크게 외쳐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생명과 기쁨으로 충만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치집 같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불교에서는 찬불가라고 해서 노래를 부르긴 하지만 기독교는 기쁨으로 찬송이 넘쳐나는 종교입니다. 초상집에 가서도 노래 부르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기쁨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성공하고 출세하면 기뻐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업이 안되어도, 가난하게 되어도, 때로는 건강을 잃게 되어도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참된 기쁨의 본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가 없이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잔치집의 행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류는 기쁨을 빼앗긴 존재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기쁨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많은 물질을 가져도, 건강을 가져 보아도 결코 참된 기쁨으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코메디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어도 허탈한 웃음을 웃을 수는 있지만 참된 웃음을 웃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쁨을 빼앗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기쁨을 잃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죄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이 항상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모든 것을 다 가져도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을 뿐인 사람이라면 그는 참된 행복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억지 웃음을 웃어봤자 그는 행복을 잃고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멸하시고, 또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기쁨을 상실한 이 땅에 참된 기쁨이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사라지고, 자유와 평강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승리와 기쁨을 아는 사람은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웃을 수 있고,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될 때에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진 매를 맞고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왠만한 사람 같으면 억울함과 분노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의 입에서는 찬송이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옥에 갇힌 모든 사람들이 듣고 감동할 정도로 바울과 실라의 찬양과 감사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 수 있었습니까? 바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참된 행복이 되어주신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지 지금 아픈 것은 아픈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니 지금 감옥에 갇힌 것은 그리 억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사의 제목이었습니다. 찬송의 제목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뻐하며 웃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가난하다고 힘들어 합니다. 가난 때문에, 질병 때문에 괴롭다고 합니다. 행복하게 웃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환경을 뛰어넘어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인생에 실패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국환이라는 가수의 노래처럼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 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걸쳤잖소.. 빈손으로 왔지만 그래도 옷 한 벌을 걸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결코 실패가 없기 때문에 웃고,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웃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힘들다고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고, 그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천국의 행복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Main Subject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성도들은 마땅히 기뻐해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인하여 매일매일의 삶이 기뻐야 합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비록 가난하고, 병들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기뻐하며 살아갑니까? 주님의 부활로 때문에 가슴이 벅차오도록 행복합니까? 참으로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기쁨이 없이 살아갑니다. 인상을 쓰고 살아갑니다. 인상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아예 얼굴에 골짜기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서도 항상 우울한 모습으로, 짜증섞인 모습으로, 인생에 아무런 기쁨이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오면서도 그 얼굴에 기쁨이 없이 온갖 시름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왜 그 기쁨을 잊고 살아갑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셨고, 또 부활의 소망을 우리게 주고 계시는데도 세상의 이런 저런 작을 일들 때문에 마음을 상하고 상처입고, 좌절합니까? 부활의 기쁨이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로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이 사라진 것은 우리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안에 기쁨이 사라진 것은 바로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결코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깨닫고, 그 기쁨의 자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온전히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그 열매를 맛볼 수 있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자기 부정입니다. 내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모든 의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죄된 정욕이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철저하게 죽어야만 비로소 부활의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가 살아있고, 여전히 욕심이 살아있고, 여전히 옛 사람의 본성이 우리를 주장하고서는 결코 부활의 기쁨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부활절을 맞이하면서도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는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을 기뻐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놀랄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무슨 이유 때문인진 잘 알지 못하지만 부활의 기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보니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사라진 것은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처럼 우리의 옛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자기부정의 사람, 욕심을 죽이고, 자존심을 죽이고,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므로 철저하게 옛 사람의 본성을 죽이면 부활의 기쁨을 크게, 그리고 감격적으로 누릴 수 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부활의 기쁨을 잃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존심과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기쁨이 없습니다. 늘 불만입니다. 원망입니다. 죄 된 욕망이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만나와 메추라기의 공급이 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이 있음에도 원망하는 자로, 불평하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부정하고, 내 모든 욕망을 철저하게 십자가에 못박으면 모든 것이 은혜요, 감사일 뿐인데, 그래서 기뻐할 수 있게 되는데... 욕망이 살아 역사하기 때문에 부활의 큰 기쁨 조차도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 살아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내 말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아무런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서도 행복하지 못하고, 건강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자아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 자신은 온전히 제물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악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죽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의 본성이 살아서 역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자아가 꿈틀거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의 부활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의 기쁨이 사라진 두번째 이유는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에 기쁨이 사라지고, 절망과 좌절이 오게 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도 기쁨을 잃어버리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 동시에 사람에게 참된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은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찾아 심문하려는 대제사장과 로마의 군병들을 두려워 하여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라다녔는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절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슬퍼했습니다. 여인들 중에는 주님의 무덤을 찾아와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슬픔으로 자신의 고향 엠마오로 향해서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왜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했습니까? 주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는데 그것을 기뻐하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수차에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거니 생각했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고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에도 그들은 슬퍼함으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주님의 부활을 기대 중에 바라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유대의 장로들은 예수님의 예언을 기억하여, 군병들을 보내어 무덤을 지켰지만 정작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했습니다. 좌절했습니다. 낙심했습니다. 슬퍼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주님의 분명한 선언을 여러 이유를 들어서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반드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땅을 사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환난과 시험을 당하게 되어도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의 영광된 몸을 입게 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믿지 못하고, 작은 고난에 좌절하고, 포기하고 염려합니다. 세상의 작은 일에 낙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왜요? 우리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절망인 것 같아도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절대로 절망이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격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믿게 되면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약속된 부활의 소망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감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의 변화도, 변함도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활의 소망을 기대하시면서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부활의 기쁨이 사라진 세번째 이유는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한복음 12:26)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까? 나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십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헌신적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쳐 헌신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부활의 기쁨을 회복케 하시며,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욱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세상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일을 위해서, 사명을 위해서 헌신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은 헌신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크게 헌신하면 하나님은 내게 큰 기쁨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 헌신이 작으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기쁨 또한 작은 것이 되어집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물론 잠시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적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피하여 갈릴리로 가고 말았습니다. 사명을 포기하고 다시 어부가 되어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는데도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랬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도 기쁨 보다는 죄책감으로 인한 고통이 더욱 컸습니다. 나 같은 배신자가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헌신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금 그들을 헌신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허락하시고, 은사를 주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큰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 갇히게 되어도 기뻐합니다. 매를 맞아도 기뻐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뻐합니다.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당하는 모든 고난에 대하여 감사하며 오히려 기뻐합니다. 이런 기쁨이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돈 주고 산 것입니까?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헌신하기로 시작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내가 헌신하면 반드시 큰 기쁨이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말씀을 위해서 작은 헌신을 했는데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이 우리를 주장했던 그런 역사가 있지를 않습니까? 저는 그런 경험을 참으로 많이 합니다.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서 게으르지 않고 헌신했더니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많이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헌신하면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헌신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기쁨은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헌신하는 사람이 힘은 더 들텐데 헌신하는 사람은 기뻐하고,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힘이 전혀 들지 않는데 원망과 불평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누리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바를 따라 헌신해야 합니다. 몸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놀라운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의 기쁨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생명의 면류관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헌신과 함께 주어지는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헌신에서 나왔습니다. 생명을 다하여 헌신하게 될 때에 그의 마음에는 한없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헌신하지 않고서는 기쁘지 않다. 행복할 수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허락해 주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부활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 위해서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참된 헌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신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안에 부활의 기쁨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대하여 헌신하지 않고,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으로 기꺼이 헌신하지 않게 되니, 부활의 기쁨은 사라지고, 세상의 염려와 원망, 불평들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을 맞아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의 사람이 되기를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 다해 헌신함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부활절의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저 부활절 헌금을 주님께 드리는 것으로 교인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지나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은 그런 의무감으로 지내는 절기가 아닙니다.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회복하고, 그 기쁨 속에 천국 같은 가정, 천국 같은 교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왜 부활의 기쁨이 사라졌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지 않고, 우리의 자존심이 죽지 않고, 우리의 욕심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죽으면 부활의 기쁨을 누릴 것인데 여전히 우리 자신이 살아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해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감사와 기쁨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열매는 맺는 것처럼 우리의 자존심과 자아가 죽으면, 우리 안에 부활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된 본성을 철저하게 죽이고, 옛사람의 자아를 죽이고, 주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직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약속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세상의 교훈을 의지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부활의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했으니 우리의 삶에 영원한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현재의 모든 고난에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헌신으로 통해서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소홀히 생각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며, 우리의 생명까지라도 기꺼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부활의 기쁨으로 넘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거룩한 부활주일에 부활의 기쁨이 우리 안에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없는 형식적인 부활절이 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 참된 기쁨,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철저하게 죽이고,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결단하고, 순교적 헌신으로 나가감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으로 기뻐하며,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는 행복으로 천국을 이루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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