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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사랑한다면 양보하라

사랑한다면 양보하라

창세기 13:1~12

Introduction

모든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젠가 일본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의 아이의 이름을 지었는데, 악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게 되고, 결국 그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혹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거나 악마숭배자같은 경우에는 자식을 악마에게 바치는 일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비록 자기들의 인생은 고달프고 힘들어도 자식이 잘되는 일이라고 마다하지 않고, 희생합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는 조건없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이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기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고린도전서 13:5)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목숨이라도 기어이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뿐인 생명,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기꺼이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다 감수하셨습니다. 음부에 내려가시기 까지 모든 고난을 자청하시고, 결국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로마서 5:3)[1]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남은 모든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앞세우기 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랑은 양보로 통하여 온전케 되고,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면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욕심에 이끌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심지어는 형제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자기의 창고를 채우려고 하는 못된 심보를 가지고서는 사랑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앞에 이익에 눈을 뻘겋게 해서 아귀다툼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이나, 혜택, 혹은 우선적 선취권이 있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먼저 양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악착같이 살아야 잘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싸워서는 절대 충분히 얻지 못하나 양보하면 기대했던 것 이상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성공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살며 싸우고 다투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것으로는 충분한 성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결코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들이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양보는 지금은 손해 보는 것 같고, 어리석은 짓 같아도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를 결실케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행복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사랑으로 풍성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양보하며,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적 특권을 양보하고, 보다 낮은 것, 좋지 못한 것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서로 양보하는 미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온 교회 안에 가득하고, 사랑으로 더욱 풍성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1.1.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밧단아람에서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당시에는 부족사회, 혹은 족장시대였기 때문에 부족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즉시 가나안을 향해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기까지는 참으로 힘든 여정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아내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가뭄을 피하여 애굽으로 갔다가 아내를 빼앗기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으로 인하여 아내를 찾아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소유가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따라왔던 그의 조카 롯도 부자가 되었습니다. 본문 5~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창세기 13:5~6)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길을 나서게 되면 이런 복을 받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따라가고, 자기의 힘과 지혜를 믿고 가면 성공하는 것같아도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스스로 자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면 그 길이 험한 길이고, 많은 환난을 만나게 되어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모든 것에 풍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이 축복의 비밀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인도하심 앞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면 그 앞에서 내 생각을 중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목사가 되다보니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게 됩니다. 간혹 길을 가다가 지도와 이정표를 무시하고 내가 아는 길로 간다고 고집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꼭 헤매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농어촌선교를 위한 선교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아산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장거리를 가거나 익숙하지 않은 길은 지도를 찾아보고 미리 가는 길을 예측해 봅니다. 그리고 약도를 준비해서 출발합니다. 거의 틀림이 없이 찾아갑니다. 그런데 함께 동행하신 목사님이 본인차가 기름이 적게 먹는다는 이유로 그 차에 함께 동승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운전은 항상 운전대 잡은 사람 맘대로 입니다. 제가 곁에서 약도를 따라 길을 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천안에 가셔서는 당신이 아는 길이라고 아무길이나 선택해서 가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전혀 모르는 길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초행길에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갔으니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정표를 보고 길을 다시 돌아서 약도를 따라 가게 되었습니다. 약도를 따라 가니 목적지에 정확하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생각으로 가면 헤맵니다. 길이 곧게 뻗어있다고 해서 형통한 길이 아닙니다. 비록 굽이치며, 비포장도로라도 약도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목적지에 정확하게 이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의 약도입니다. 정확한 지도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힘든 과정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시고 하고, 환난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의 결국은 축복입니다. 성공입니다. 은혜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1.2.

아브라함과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길을 나선 후에 소유가 풍요롭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소유는 많아지고, 땅은 너무 비좁았습니다. 급기야는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다투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많은 초장과 물을 갖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다툴 수 없었기에 그를 불러서 이야기했습니다. 본문 8~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세기 13:8~9)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불러서 이제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졌기 때문에 좁은 땅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넓은 땅을 향해서 헤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땅을 선택하는 우선적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양보합니다. 아버지와 같은 삼촌이 이처럼 먼저 양보하면 조카 롯은 당연히 아닙니다. 삼촌, 삼촌이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십시오. 그 다음에 내가 그 남은 것 가운데서 선택하겠습니다. 해야 예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땅과 같이 기름지고 풍요로운 곳이고, 한쪽은 광야같은 허허벌판입니다. 그런데 롯의 마음에도 아브라함이 저기 좋은 땅, 기름진 곳을 선택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걱정이 앞섰던 터라, 우선적 선택권이 넘어오자 마자 그는 아브라함에게 양보할 겨를도 없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롯의 태도를 보고 호로자식,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했습니다. 그 표현이 맞는 듯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아버지같은 삼촌입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영적 아버지이기도 했고, 후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모든 것은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롯은 아브라함을 배신한 것입니다. 눈 앞의 이익 때문에 삼촌도 뭐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롯을 이와같이 비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남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장에 우리의 일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이 싸웁니다. 무엇 때문에 싸웁니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유산을 갖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다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각자 주장하는 이유에 근거해서 더 많은 유산을 받아야 한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재벌기업의 총수 가문에서 돈 때문에 형제가 법정공방을 벌이며, 서로를 폄훼하며 싸움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엄청난 집안망신을 하고 말았습니다만 대개의 사람들은 이와 같이 눈 앞에 이익을 위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롯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양보없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들에게는 양보를 강요하면서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양보없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되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운전을 하려고 핸들을 잡으면 절대로 양보없는 그런 운전자는 아닙니까? 작은 일에 결코 손해보지 않겠노라고 눈을 뻘겋게 해 가지고 으르렁 거리는 늑대의 모습은 아닙니까? 롯이 양보없었음을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양보하는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남들에게 양보를 말하는 것은 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양보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그것이 이익과 관련되어 있으면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속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양보의 미덕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위대한 신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이런 양보의 미덕이 있었고, 양보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한 남자가 갑자기 설사가 나서 부근 공중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화장실 문 앞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워낙에 급했기에 체면을 불구하고, 줄이 가장 짧은 곳으로 가서 맨 앞줄에 있는 사람에게 아주 정중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제가 아주 급한데 양보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런데 맨 앞줄에 있던 서 있는 그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얼굴은 핏기가 돌았으나, 사우나를 하듯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마침 그 사람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야..너는....마..마...마...말이라도...제대로...하..하...쟎아!" ^*^

저는 이 글을 읽고는 한참이나 웃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상황에서 양보를 하라고 한다면 모두가 역정을 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상황이라도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보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상황이 급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롯과는 달리 아브라함은 스스로 우선적 선택권을 포기했습니다. 그것을 조카 롯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조카 롯에게 우선적 선택권을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롯을 향해서 정당하게 우선적 선택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땅의 아름다운 곳을 둘러보고 자신이 먼저 그것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롯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친 아들처럼 아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면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가피한 일에도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욕심에 이끌려 아귀다툼을 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양보로 사랑을 나타내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독하게 살고, 악착같이 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 지독하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결심한 사람일수록 사사로운 언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타당성이 적은 일은 응당 양보하고 자신에게 정당한 일이라도 조금은 양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훌륭한 사람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래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사랑함으로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 몸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난 3월 2일 오후 6시 경에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선장과 기관장, 두 명이 탄 목포 선적 41t급 예인선인 대성6호가 닻을 내리고 있던 중 파도에 밀리면서 배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침몰하면서 원형의 고무 보트가 자동으로 물 위에 펴졌고, 기관장 정씨는 이 위에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선장 임재성(59.부산시 영도구)씨는 선박 안에 갇힌 채 물속에 잠겼다가 뒤늦게 탈출하면서 기진맥진한 바람에 고무 보트에 타지 못한 채,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10여 분 뒤 인근을 지나던 목포 선적 9.8t급 어선인 107 분도호(선장 이석원.48.목포시)가 고무 보트 위의 정씨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을 구조하기 위해 접근하는 분도호의 선원들에게 정씨는 "나는 괜찮으니 물에 빠진 선장을 먼저 구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분도호는 인근 해역을 수색하다 정씨에게서 200여m 떨어진 곳의 바닷물 속에 구명조끼조차 없이 허우적거리고 있던 임씨를 찾아내 배로 끌어올렸습니다. 그 사이 10여 분이 지났고, 분도호가 다시 기관장 정씨를 구조하는 데 나섰으나 파도가 높게 일어 고무 보트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 구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씨가 목포해경에 신고한 시각은 오후 7시3분. 긴급 출동한 목포해경 경비정 5척이 오후 8시15분 사고 해역에 도착, 수색에 나섰습니다. 약 4시간 후인 밤 12시쯤 고무보트를 발견했으나 정씨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목포로 옮기는 도중 저체온증으로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선장 임씨를 위해 스스로 구조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양보했던 정씨는 임씨와 친척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임씨의 증언에 의하면 "사고가 난 날 아침 진도 팽목항에서 정씨를 처음 만나 함께 배를 탔는데, 위급한 상황에서 나를 위해 살신성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날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했습니다.

저는 기관장 정씨가 예수를 믿는 분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씨의 모습에서는 그리스도의 참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위한 기회를 먼저 양보하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1954년 9월 26일 밤, 태풍 15호 '마리'가 일본의 홋카이도 남단 가까이 밀고 올라왔습니다. 당시에 총 4,337톤의 아오모리-하코다테 연락선 도야마루(승객, 승무원 등 1,314명 승선)가 이 태풍을 만나 홋카이도 하코다테 항에서 전복되었습니다. 159명은 구조되었지만 나머지 1155명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그 때에 미국의 선교사 두 명이 그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행히도 구명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폭풍 속에 보니 일본인 청년 남녀는 구명구를 구하지 못하고, 폭풍 속에서 바다 속에 들어갔다 올라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선교사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그리고 구명구를 붙들고 그들에게로 수영을 해 갑니다. 자기들의 생명을 건질 유일한 희망인 구명구를 두 명의 일본청년에게 건네 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는 미국의 선교사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니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렇지 못하군요. 우리가 주는 이 구명조끼를 입고 생명을 건지시고, 부디 예수를 믿고 저 영원한 천국에서 만납시다. 하면서 구명조끼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풍랑 속의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생명적 양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적당히 내가 필요한 만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을 양보하기 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같이 사랑하며, 기꺼이 그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것처럼, 도야마루에 타고 있던 선교사들이 자기의 생명을 위한 유일한 구명조끼를 낯선 일본 청년들에게 양보한 것처럼, 신안 앞바다의 60대 기관장이 생전 처음 본 선장을 위해 구조의 기회를 양보한 것처럼 그런 양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양보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혹 우리의 양보가 이기적인 이기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참사랑의 원리를 따라 생명을 다한 양보의 미덕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좌석버스의 자리를 양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볼일이 급한 사람에게 화장실을 먼저 양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을 양보해야 합니다. 엄청난 물질적 손해를 감수하는 양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양보의 크기가 곧 우리의 사랑의 크기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힘써 양보함으로 주님의 참사랑을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아브라함은 기꺼이 자기의 우선적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양보하기 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어두워 사랑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참 사랑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성경은 그 결과는 참으로 엄청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양보하는 길을 선택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눈길이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은 조카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기꺼이 거친 광야로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을 눈여겨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3:14~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세기 13:14~15)

하나님의 관심은 사랑으로 양보하는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삼촌의 은혜를 잊고, 양보 없는 자로 사랑의 배신자가 되어 떠났던 롯에게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양보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는 모든 것을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양보는 어리석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소돔과 고모라의 풍요로움보다 더 크고 귀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얻은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보하면 망하는 것 같지만 흥합니다. 지는 것 같지만 이깁니다. 실패하는 것 같지만 진정한 성공을 거둡니다.

채근담에서는 "좁은 지름길에서는 한 걸음 멈추어 남을 가게 하고 맛 좋은 음식이 있을 때에는 삼분을 감해서 남에게 양보하며 맛보게 하라. 이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소학(小學)에서는 "평생토록 길을 양보해도 백 보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평생토록 밭두렁을 양보해도 한 마지기를 잃지 않는다"고 하면서 양보는 일시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으나 두고두고 기쁨과 유익을 가져다 준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함으로 양보하는 자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셨습니다. 그가 떠나는 길이 비록 광야의 험준한 길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에게 온갖 축복을 다 약속하셨습니다.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은 양보하기를 거부하고 욕심에 이끌려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살았을 때에 그의 앞에는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에게서 사라졌습니다. 소돔땅의 타락함 속에서 그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돌라오멜의 군대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가기도 했습니다. 결국 망하는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며 탄식해야 했고, 사랑하는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결국 실패한 자로 산중 깊숙한 곳에 숨어살면서 두 딸과 동침하여 모압과 암몬을 낳게 되었습니다.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롯을 할아버지로 불었을까요? 아니면 아버지라고 불렀을까요? 저는 정말로 그것이 알고 싶다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함으로 양보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양보하는 것, 그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생명과 같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양보하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양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양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향해서 축복하시고, 그의 앞길에 형통함을 약속하시고, 또 하나님이 친히 그의 영원한 기업이 되셨던 것과 같은 크신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약육강식의 처참한 전쟁이 있는 곳입니다. 비록 총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지만, 살기 위해서 동료를 견제하고 짓밟아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양보는 어리석은 것이요, 겸양은 미련한 것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사랑이 사라진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힘써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할 것입니까? 사랑한다면 자기의 이익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기꺼이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친히 좋은 땅을 조카에게 양보한 것처럼, 요나단이 그의 왕위를 친구 다윗에게 양보한 것처럼, 침몰한 도야마루에 타고 있던 두 명의 선교사처럼 사랑을 위해서 생명같이 귀한 모든 것을 기꺼이 양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닌 기꺼이 양보하는 미덕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보실 때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그 사랑의 실천으로 인하여 주님께서 동행하시고, 영원토록 축복하시는 귀한 역사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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