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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사랑한다면 인내하라

 

사랑한다면 인내하라

히브리서 12:1~3

Introduction

우리는 사랑의 홍수 시대를 살아갑니다. TV 드라마의 주제도 사랑입니다. 유행가 가사의 주제도 사랑입니다. 여기 저기에서 사랑에 관한 무수한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가히 사랑의 홍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홍수가 나면 물이 귀하다는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드라마, 노래, 영화 심지어는 인터넷을 통해서까지도 사랑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참 사랑을 찾기를 어렵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삭막해져 갑니다. 왜곡된 사랑으로 인하여 순수한 사랑의 바다가 흙탕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는가?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 소리 뿐일세” 정말로 사랑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사랑이 없기 때문에 탄식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주님의 예언대로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진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 시대가 꼭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랑의 말들 속에 참된 사랑은 사라지고, 쾌락적 육욕의 왜곡된 사랑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속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의 본질적인 사명은 무엇입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만족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명령을 따라 힘써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온 세상을 향해 주님의 크신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막과 같이 황량한 이 세상이 옥토가 되고,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천국과 같은 곳이 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사랑이 식어지고, 사람의 영혼까지도 팔아버리는 무시무시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세는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세에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으며,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변질되어버리고, 사랑으로 인한 행복의 열매를 거두기 보다는 상처와 아픔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랑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참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여기에 보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에 믿음도 알게 되고, 사랑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사랑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친히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분이십니다. 사랑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완성된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사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려고 한다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 왕은 성군입니다.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시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할 정도로 그는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 후에 잠시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 사명을 잊고 왕궁에서 노닐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안 보이고, 목욕하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했을지 모릅니다. 그 여인을 사모함으로 여인과 더불어 동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불륜을 사랑으로 착각을 합니다. 잘못된 사랑에 빠져 허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모델로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을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 되시고, 우리의 사랑의 뿌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갑니까? 혹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노아의 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거기에 빠져 심히 타락하게 되었던 것처럼, S라인의 섹시한 육욕적 아름다움을 바라보거나, 터프한 남성적 매력을 바라보며, 그것을 향한 쾌락적 사랑을 구하며 살지 않습니까? 혹 우리의 사랑이 그런 왜곡된 시각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제는 우리의 눈을 교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참 사랑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참된 사랑을 배워 그것을 바르게 실천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참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델은 무엇입니까? 본문 2절 중간에 보니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다가 지쳐 떨어지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마치 주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신 것처럼, 참고 견디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본문에 참는다라는 말은 헬라어의 휘포메노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아래서 버티다라는 뜻입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중간에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짊어진 채로 끝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사투를 벌리면서까지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에는 이런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가변적인 사랑은 진짜가 아닙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값싼 싸구려 사랑일 뿐입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서약을 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결혼을 해 보신지가 오래 되서 잘 모르시는 분, 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모르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개의 모든 결혼식 서약에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겠는가?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가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에나 언제든지 부부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사랑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즉 부부간의 참된 사랑은 참고 인내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IMF 시절에 이혼하는 가정들이 많아졌습니다. 살림살이가 어려워지게 되면서 가정이 파탄 난 것이었습니다. 부부가 헤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어린 아이들까지 보육시설로 버려지는 일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 무렵 우연히 TV를 시청하는 중에 보육시설에 버려진 아이들이 부모를 그리워 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한참 동안 보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 아들 녀석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아들녀석에게 아들아, 아빤 아무리 힘들어도 널 버리지 않을꺼다.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면 힘들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끝까지 견딥니다. 끝까지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갑니다. 비록 그 짐이 너무 무겁고,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짐을 지고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가슴 아픈 절규의 외침을 외치시며, 이를 꽉 깨물고 온 몸이 고통으로 몸서리치는 중에도 우리를 사랑하기에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십자가를 참아야 합니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도망치지도 말아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 짊어져야 하는 그 십자가를 끝까지 내려놓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정에 주어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치매 부모님을 모시는 일이 어려운 일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 순간 사랑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불구의 자녀가 있어서 괴롭고 힘듭니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견뎌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십자가를 참으신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끝까지 십자가를 참아야 합니다. 견뎌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찬란하게 빛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인내가 또 다른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길이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3)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참아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실 때에 인생은 어떤 존재입니까? 끊임없이 실수하고, 또 범죄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오늘은 열매를 맺을까 기다리시고, 또 내일은 장성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 기다리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열매가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여전히 젖먹이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서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끊임없이 하나님은 거역하고, 말씀을 거역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기다리셨습니다. 참으셨습니다. 인내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모습이 보다 성숙하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한 사람이 포도밭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나 열매를 구했습니다. 3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화가 나서 말합니다. 찍어 버려야겠다. 괜히 땅만 버린다. 이 말을 들은 과원지기가 주인께 말합니다. “주인이여 한 해만 더 기다려 주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도 주리니 그 다음에도 열매가 없으면 그 때 찍어 버리소서” (누가복음 13:6~9 참조)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찾을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당장 임해야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것을 기다리십니다. 참아 기다리십니다.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희망을 품고 또 기다려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기다리십니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기다리시고, 참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약속시간에 늦어도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바로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사랑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아내와 함께 외출을 하려고 하면 아내를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자들은 할 일이 많답니다. 화장도 해야 하고, 준비물도 챙겨야 하고 할 것이 많답니다. 늦는다고 큰 소리만 치고 있으면 안됩니다.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아서 화가 납니까? 그래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아직 부족하고 연약해도, 아직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도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사랑이 온전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옛날 송나라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심은 곡식에 싹이 잘 자라지 않는 것을 보고 민망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곡식에 조금 돋아있는 싹을 위로 뽑아 올렸습니다. 온종일을 그렇게 하고 난 후에 피곤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집안 사람들에게 온 종일을 곡식이 자라는 것을 도왔더니 피곤하다.고 하며 자기의 한 일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사람의 생각대로 곡식이 더 잘 빨리 자랐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아들이 달려가서 보니 곡식의 싹은 모두 말라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급하게 서두르면 안됩니다.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고, 싹수없어 보여도 참아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려면 기다려야 합니다. 빨리 보고싶다고 냅다 꺼내 버리면 안됩니다.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인내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의 사랑은 온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참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분노합니다. 내 생각에 비추어 부족하다고 해서 비난하고 나무랍니다. 희망을 꺾어버리고, 다시금 일어설 용기마저 빼앗아버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목사의 목회를 기다려 주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교인들의 성숙을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목사와 교인사이에 큰 갈등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서로 기다려 주지 못하기 때문에 화목한 사랑의 나눔보다는 서로를 향한 비난과 갈등의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쉽게 분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노대신에 기다려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급하게 모든 것을 이루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못 기다린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여전히 주님을 거스리며, 주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시면서도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계시는데, 우리가 쉽게 포기하고, 쉽게 분노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처럼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다림으로 우리의 사랑을 온전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다 포기해도, 심지어는 우리의 부모도, 가족도 다 우리를 버려도 주님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참아 인내하셨습니다. 인내를 통하여 사랑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십자가와 같은 모진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힘들다고, 어렵다고, 고통스럽다고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면 주님처럼 인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과 가족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엔 혹 실패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란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셨듯이 우리 역시 포기하지 않고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대단한 일인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듯 싶은데, 주님은 또 다시 기다리셨습니다. 참으시므로 기다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사랑하시면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셨건만 우리가 여전히 주님을 거역하며,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죄악을 반복하여 저지르며,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에도, 영적 성장을 이루기는 커녕 여전히 젖먹이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성숙함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함을 기다리셨습니다. 범죄 할 때마다 즉시 벼락을 내리셨다면 이 땅에 한 사람도 살지 못할 것인데, 주님은 아직까지도 참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처럼 기다리시고, 참으신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주님처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성급하게 판단하고, 성급하게 분노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가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한다면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인내함으로 사랑을 온전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인내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셨듯이, 인내하심으로 죄인들을 끝까지 기다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하는 교회를 향해서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품고 지금은 고통스럽더라도 십자가를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대하는 것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여전히 부족함을 보이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에, 또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성급하게 분노하지 말고, 인내함으로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으로 풍성한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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