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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9~23

Introduction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약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셨던 것을 기념하며, 성령의 충만과 은혜를 사모하는 날입니다.

저는 가끔씩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왜 교회에 다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다닙니까? 얼른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목적은 예수 믿고 구원 받기 위해서 라고 할 것입니다. 정말로 정답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구원과는 별로 상관없이 사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전혀 기도생활도 하지 않고, 말씀을 배우거나 묵상하지도 않고, 낮 예배 시간에 한 번 참여해서 설교시간에 졸다가 가는데.. 그러면서도 교회에 오는 목적인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한다고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소를 잡고, 양을 잡고 귀한 물질을 드려가면서까지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율법의 책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황소를 잡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누가 성전문을 닫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셨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참석해서 예배를 드린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님에 분명합니다. 참으로, 진실로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으면 아무리 예배에 참석하고, 멋진 기도문으로 기도해도 구원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형식적인 신자가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늬만 신자가 아닌 명실공히 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자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단 한가지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따라합시다. 성령충만한 삶

사람들은 성령충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또 특별한 은사로 사람들의 병을 고쳔주면 그 사람은 성령에 충만한 줄로 압니다. 기도하는 목소리가 남다르게 크고, 웅장하면 성령에 충만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부목사로 사역할 때입니다. 저는 가정에 심방을 하면서도 마치 수천명이 모인 건물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처럼 우렁차게 설교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목사님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게 기도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참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서글펐습니다. 목소리가 크면 성령충만이고, 목소리가 작으면 귀신 충만입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방언을 하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술에 취한 것처럼 흥분되어 있으면 성령충만한 것이고, 정신이 온전하면 성령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성령충만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가장 정상적으로 살고 싶기에 성령충만을 사모합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험한 세상을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사모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참으로 두려운 곳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믿는 자를 대적하는 세대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며, 복음으로 말미암은 천국을 이루며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대로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악한 세상을 이기며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충만에 대한 오해를 벗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무늬만 신자로 신앙생활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충만을 사모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멋진 신앙생활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부흥은 물론이고, 가정의 행복과 민족의 축복을 이끌어 올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본문을 중심으로 세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첫째는 기적을 보는 것만으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9~20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9)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한복음 20:19~20)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또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가장 위대한 사건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구원의 방편이 되어집니다. 모든 신앙적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단초가 되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에 성경도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에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유명무실한 헛된 종교적 변론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 부활의 날에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능력중의 능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못 자국 난 자신의 몸을 보이셨습니다. 옆구리를 보이시고, 손을 보이셨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모두가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게 될 때에 기쁨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사라지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감격이 사라집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의 성도들이 살아계신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기에, 아니 작은 기도의 소원에도 응답을 얻지 못하기에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기쁨을 상실한 채, 비실 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율법적 멍에를 짊어지고 마지 못해 교회에 오며, 또 예배에 참석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병고침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가난으로 몸서리 치던 사람이 주님의 능력의 손길로 부유케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와 역경 때문에 늘 눈물을 지으며 살아야 하던 성도들이 주님의 기적적인 손길로 행복을 회복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일상적인 일로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 또 성도들의 가정과 삶에 행복한 웃음이 끊어지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친히 기적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저는 이 일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기적을 체험했으면 되었지 굳이 또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성령충만은 잘 모르더라도 기적을 체험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전보다 더 잘 믿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다해서 헌신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신 후에 굳이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적을 체험한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에 수없이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또 벳새다에서 주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그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처럼 예수님을 존중하고, 신봉하는 듯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심지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습니다. 기적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적을 보았습니다.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고, 주님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시는 것 외에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적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리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천국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왔다 갔다 해도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제자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그 역사를 사모함으로 기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귀한 역사를 능력 있게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가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그 두번째 이유는 바로 맡겨진 사명이 크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2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신 후에 그들에게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도들은 주님께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사명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명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 그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명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사명감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사명감이 없이 살아갑니다. 목회하는 것을 하나의 돈벌이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이미 디모데를 향해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디모데전서 6:5)고 주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명감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라고 한다면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일을 맡겼음을 분명히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책임감을 갖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참으로 중대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일, 내가 그 일을 너희에게 맡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명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 맡기신 일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일입니다.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기에, 천사들에게도 맡길 수 없기에 친히 아들에게 맡기셨던 일입니다. 크고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이라고 합니다. 천사들도 그 일에 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별볼일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을 걸고 감당하시던 일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조차도 생명을 걸어야만 이루실 수 있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옳은 대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들고 어디든지 가야 하는 일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이요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일입니다. 악의 구렁텅이에서 작은 예수로 빛과 향기를 드러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귀한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능력 있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은 예수로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온 천하에 드러내며, 우리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놀랍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조차도 생명을 걸고 감당하셨던 그런 일입니다. 생명을 걸지 않고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참으로 크고 두려운 일입니다. 간혹 교회 안에 맡겨진 직분을 우습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가볍게 여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의 돈벌이는 귀하게 여기면서 주님께서 맡기신 복음적 명령은 소홀히 여기며,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일은 우리 주님조차도 생명을 걸고 감당하셨던 일입니다. 친히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올인하셨던 그런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것을 걸고 감당하시던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자기의 모든 귀한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며, 영혼구원하는 일,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위해서 생명을 바쳤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물론 무수한 신앙의 선배들이 생명을 걸고 올인했던 그런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맡겨진 사명을 귀한 것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많이 공부하면 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공부를 잘한 사람들만 예수를 믿게 하고,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의 면모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대단한 실력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단한 율법사도 없었습니다. 명문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께서 맡기신 일은 인간적인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학문이나 지식이나 권세나 기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에 감당할 수 있습니다. 순교적 헌신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별볼일 없는 잡일로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순교적 능력이 있지 않으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왜 혼란해 집니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를 섬기겠다고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고서는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허무는 자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파괴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회와 성도 섬기는 일을 위해서, 인류 구원의 일을 위해서 성령충만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째는 성령을 받아야 축복의 열쇠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22~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2)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2~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시던 구원 사역을 담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던져 감당하셨던 그 일을, 생명으로, 눈물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숨을 내 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령을 주려고 하면 숨을 내쉬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부흥강사 목사님들이 그런 실수를 자주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은 그렇게 해야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 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가 뉘 죄를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놀라운 권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고, 또한 그대로 있게 하는 권세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하나님의 권세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발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네 사람이 자기들의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주님 앞에 그를 데리고 가서 고침을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붕을 뜯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줄을 달아 중풍병자 친구를 내렸습니다. 주님께서 고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주님은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사죄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참람하다. 저가 감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은 하고 있다.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죄의 선포는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하나님이시기에 사죄의 선포를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권세로 살아갈 수 있게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성령충만을 받으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은사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런 은사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그보다 더 놀라운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의 근원되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 축복의 근원이 되어집니다. 하늘 창고를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고에 귀한 것을 마음대로 꺼내어 나누어 줄 수 있는 놀라운 권세를 얻게 됩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민족이 복을 받는 것도, 우리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게 되는 것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아야 권능 있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성령충만한 그 사람을 통해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충만함으로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용서의 권세는 물론이거니와 귀신을 쫓아내고, 가난을 쫓아내고, 질병을 몰아낼 수 있는 권세가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창고에서 가장 귀한 것을 마음껏 가져다가 온 천하의 모든 생명들에게 복이 되게 할 수 있는 천국의 열쇠가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을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약 2000년 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10일이 지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주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에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놀랍게 이루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충만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교회를 부흥케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귀신의 권세를 몰아내었는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그 능력이 결코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전능합니다. 그런데 왜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성령충만한 사람, 성령충만한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을 성령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힘써 기도하던 제자들처럼 기도하기를 쉬지 않고, 주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성령충만함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체험한 사람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사명을 다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능력 가운데 사명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는 귀한 축복이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삶에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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