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ible & Church/Shema Isreal

사랑한다면 온유하라

사랑한다면 온유하라

에베소서 4:1~3

Introduction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없이는 교회가 교회다울 수 없고, 성도가 성도다울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교회는 그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성도는 그 은사와 능력을 통해서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멋지게 생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 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 등등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의 의지력을 동원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 이성의 차원을 넘어서 전인격적인 열심으로 사랑을 이루어야 하며, 심지어는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사랑하라는 사명을 주시면서 사랑하는 자의 삶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사랑에는 온유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기록하면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함이 없이는 결코 사랑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말을 조금 쉽게 설명하면 사랑은 반드시 친절함이 뒤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는 기독교도, 불교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친절이라는 종교다. 저는 이 글에 100%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이 아닌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가장 좋은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절이 가장 위대한 종교라는 말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친절이 없는 기독교에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친절이 없고 사랑이 없다면 그 교회가 기력을 상실하고, 몰락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친절함이 없는 교회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죄악입니다. 교회는 친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친절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친절함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 친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섬김이 있는 곳, 호텔이나, 음식점 같은 곳에서도 친절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섬김이 있는 곳에는 친절이 우선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섬김으로 가득해야 하는 교회는 얼마나 더 친절해야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친절함, 온유함을 배워서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의 친절함을 보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성도는 사랑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온유할 수 있고, 친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1.

첫째로 온유함이란 자신을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민수기 1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수기 12:3)

하나님은 성경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모세는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함이 뛰어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온유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나브(wn:[;)라고 하는데, 이 말은 몸을 낮추는 겸손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권능을 행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홍해를 능력 가운데 건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하나님의 권능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어느 누구도 감히 모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 무렵에 모세가 새로 아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얻은 아내는 히브리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구스의 여인이었습니다. 구스라고 하면 에디오피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가 에디오피아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었는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그것도 백성의 영적 지도자가 구스 땅의 이방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모세를 향해 직접적인 공격을 퍼붓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의 형 아론과 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모세가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의 이런 무서운 비난이 쏟아지게 되었을 때에 모세는 분명히 큰 소리를 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도자로 세우셨는데 감히 도전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을 낮추었습니다. 자세를 낮추었습니다. 겸손히 그들의 비난을 듣고 있었습니다. 모세에게 권력이 없었습니까? 그에게 힘이 없었고, 능력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의 힘이나 권능을 주장하기 보다는 몸을 낮추었습니다. 모세에겐 이런 온유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숙한 사랑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세를 낮추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기꺼이 몸을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남자 여자를 떠나, 많이 배우고 적게 배웠음을 떠나.. 서로가 기꺼이 몸을 낮추게 될 때에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꼴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이 곧은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목이 곧은 것은 사랑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목이 곧아서는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이 곧은 교만의 모습으로 사랑을 이루려고 하면, 상처와 아픔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사랑은 자세를 낮추는 온유함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약하고 힘이 없기 때문에 자세를 낮추는 것은 비굴일 수 있습니다. 굴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힘이 있었습니다.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자세를 낮추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가리켜 지면에서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교만해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목을 뻣뻣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자세를 낮추어야 합니다. 몸을 굽힐 수 있어야 합니다. 비굴함으로 굽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이득을 보기 위해서 굽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몸을 굽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고 칭찬하십니다.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어느 곳에서든지 사랑을 이루어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에 승리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입니까? 교만한 모습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목이 뻣뻣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몸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세를 낮추어야 합니다. 먼저 인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지위가 낮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서로가 몸을 낮추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둘째로 온유함이란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 한 마디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에베소서 4:2)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온유함이란 친절한 배려를 뜻하는 말입니다. 난폭하거나 거친 것이 아닙니다. 무례한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마음,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바로 온유함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부드러운 말입니다. 난폭한 것이 예의 없는 행동은 결코 아름다운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무뚝뚝함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의 부드러운 말을 연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비판하는 말을 즐겨 합니다. 서로를 욕하는 말을 쉽게 합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사랑의 사람은 서로를 향해서 무례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온유함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담긴 따듯한 말,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는 그런 부드러운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온유한 말 한 마디를 통해서 원수들도 기꺼이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그런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에 군막사의 시설이 좋지 않았습니다. 중화기 중대에 근무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대의 세면장을 옆에 있는 수색대 아이들과 함께 사용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우리 중대에 속한 것이고, 사용은 수색대 아이들과 함께 합니다. 그러니 청소며, 정리하는 일은 모두 우리 중대의 몫이고, 수색대 아이들을 사용만 합니다. 우리 부대에 있는 아이들이 별로 달가울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색대 애들이 오면 실랑이를 붙습니다. 싸움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수색대에 신병이 왔습니다. 세면장에 씻기 위해서 들어왔는데 우리 중대의 한 병사가 보고하고 들어오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수색대 아이들도 곤조가 있는터라 보고할 까닭이 없지요. 또 고참들에게 이미 교육을 받고 온 터라 경례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 싸움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수색대의 신병이 얼마나 덩치가 좋고 힘이 좋은지 누구 하나 그 친구를 힘으로 제압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성이 오가고 서로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을 때에 제가 중간에 개입했습니다. 그리고 수색대 신병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더니 납득을 합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친구와 저는 아주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유격훈련을 받으러 갔을 때에도 그 친구가 제게 아주 편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하)

욕지거리나 폭언이 우리의 삶에 승리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드러운 말, 온유한 말이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가장 위대한 웅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온유한 말 한 마디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담은 부드러운 말이 결국 우리의 삶을 승리와 축복으로 이끌어 줍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25:15절 말씀에서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5절 말씀에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말은 거친 욕설이 아닙니다. 사랑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부드러운 말입니다. 위대한 웅변은 논리 정연한 분명한 주장이 아닙니다. 따뜻한 마음의 부드러운 말입니다. 그런 말이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이 부드러워도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그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부가 되고 맙니다.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목소리가 부드럽다고, 또 듣기에 좋은 말을 한다고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잠언 26:23절 말씀에 보면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잠언 26: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부드러운 말을 하게 된다고 해도, 그 마음에 악하다면 참된 온유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말, 따뜻한 마음이 담긴 부드러운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친 욕설을 사라져야 합니다. 포악한 언어나, 무례한 말들은 사라져야 합니다.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들이 있게 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가정이라고,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말 한마디 때문에 회복하기 힘든 파국을 맞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고,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담아 부드럽고 배려하는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세째로 온유함이란 부드러운 미소입니다. 구약성경에 욥기가 있습니다. 위대한 신앙인 욥의 고난과 일생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을 돌이켜 보며 고백합니다. 욥기 29:23~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3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 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24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함소하여 동정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 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었느니라 (욥기 29:23~24)

가난한 사람들이 욥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욥의 손길을 바랬습니다. 욥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는 모습이 가뭄의 비를 기다리는 것같았다고 합니다. 그 때에 욥은 그들에게 함소하여 동정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함소했다는 말은 영어성경에서 Smile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소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자기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로 그들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부드러운 미소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얼굴에 여덟 팔자를 그려 가지고 보는 사람마다 인상을 쓰고 쳐다봐서는 안됩니다.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아서도 안됩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성도들의 얼굴에 있어야 합니다.

앤디 앤드루스라는 분은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라는 책에서 내 미소는 나의 명함이다. 나의 미소는 강력한 유대관계를 맺고, 서먹한 얼음을 깨뜨리고, 폭풍우를 잠재우는 힘을 갖고 있다. 나는 늘 제일 먼저 미소 짓는 사람이 되겠다. 오늘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을 선택하겠다. [1] 그렇습니다. 미소는 세계 공통의 언어입니다. 아름다운 미소를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기쁨을 줍니다. 행복을 줍니다. 미소를 보는 사람만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소 짓는 자신에게는 더욱 큰 행복과 기쁨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얼굴에는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든 고난이 있어도, 고통이 있어도 미소 지으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었습니다. 환난이 있었습니다. 온갖 핍박이 그들에게 있었고, 가난과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성도들을 향해서 반드시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웃음짓는 사람, 미소 짓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의 사명이고, 그토록 미소 짓는 자가 될 때에 온유함을 이루고, 참 사랑을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웃으며 삽시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미소 지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과 성도들, 이웃들을 보면서 불편한 인상 그리며 살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소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어도 내가 미소로 반응하면 그곳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긴 얼굴, 화난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온유함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채 사랑을 이루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전쟁터와 같습니다. 살벌한 세상입니다.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서 으르렁 거리고 살아갑니다. 이 무서운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 사람보다 더 강하게, 더 고집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더 지독하게 살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세상보다 더 지독하게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이 무서워서 상종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복음이 막히게 되고, 십자가가 멸시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온 세상에 사랑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온유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몸을 낮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만하여 높아지는 사람, 거드럼 피우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온유함은 자세를 낮추는 것입니다. 힘이 없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세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세를 낮추는 것입니다.

또한 따뜻한 마음과 부드러운 미소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들을 대할 때에 무례한 언어로, 폭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말로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밝은 미소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온유함을 이루고, 우리는 참 사람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한다면 온유 합시다. 절대로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맙시다. 무뚝뚝하지도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드러운 미소와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과 격려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 온유한 자에게 허락하시는 땅을 기업으로 얻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승리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 온 교회와 성도들의 생업에 충만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앤디 앤드루스 /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中

'Bible & Church > Shema Isreal'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땅히 감사할 이유  (0) 2006.07.07
사랑한다면 양보하라  (0) 2006.06.28
사랑한다면 인내하라  (0) 2006.06.13
성령을 받으라  (0) 2006.06.08
Mercy in Wrath  (0) 200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