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강단에서의 행위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예전적인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그의 백성을 향한 특별한 사랑의 현현, 혹은 하나님의 복된 말씀의 나타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설교에는 크게 세가지 형태가 있다고 하겠다. 그 첫째는 복음적 설교이고, 둘째는 율법적 설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복적 설교가 그것이다. 복음적 설교란 말 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설교이다. 율법적 설교는 율법을 전하는 설교라고 할 수 있고, 기복적 설교는 참된 복에 대한 오해 가운데, 복을 전하는 설교이다. 성경이 설교자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은 그 설교가 때로는 율법적일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복음적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설교의 본질은 복음이고, 설교는 반드시 복음적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이 아닌 복음을 철저하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설교자에게, 복음의 증인들에게 복음을 나타내라고 했지, 율법을 나타내라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복음적인가 율법적인가 기복적인가를 늘 살펴야 한다. 그리고 복음적 설교가 되게 해야 한다.
복음적 설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공교회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 설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진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양 은사를 질서대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설교는 반드시 그 자격자, 은사자, 직분자를 통해서 행해져야 한다. 즉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자, 예언의 은사, 설교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복음적 설교자의 자격은 기본적으로는 교회를 통한 안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본질적인 자격이 있다. “참된 복이 무엇인지(복음)를 깨달아 아는 증인”이어야 한다. 증인이 아닌 설교자는 참된 설교자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그냥 전달의 매개체일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설교자는 증인이어야 한다. 참된 복이 무엇인지 아는 자, 체험한 자이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복음적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칼빈의 가르침에 의하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입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의 매개체이면 된다는 것일 수 있다. 자신이 그 말씀을 믿든지, 안 믿든지, 그 말씀에 대한 경험이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기만 하면 그것이 바른 설교라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는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향하는 바, 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이어야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은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한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복음이 아닌 율법을 전하거나, 기복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율법적 설교는 때로 선지자적 설교라는 이름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것과도 다르다. 율법적 설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정죄하는 설교라고 봄이 옳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정죄가 목적이 되어 있다면 그 설교는 율법적인 것이다. 흔히 목사들의 “까는 설교”를 대표적인 율법적 설교이다. 그것은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 채,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면서 그것을 고쳐주겠노라고 하는 바리새인적 설교와 다르지 않다. 기복적 설교는 복을 구하게 하지만, 복을 선포하지만, 그 복이 왜곡된 경우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율법적 설교와 맥을 같이 한다. 무당은 공포를 조성하고, 무당에게 의존하게 한다. 자기가 주는 부적, 혹은 자신을 통한 굿을 권장하고, 그것이 액운을 면하는 길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율법적 설교와 기복적 설교(미신적 설교)으 특징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설교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이런 그릇된 설교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설교의 방법이 잘못되면 성경을 통해서 설교하지만 이런 엄청난 왜곡을 가져올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적 설교에는 방법이 중요하다.
복음적 설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은 “복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민수기 6장에서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복을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런 제사장적 행위를 축복이라고 한다. 그렇다. 복음적 설교는 바로 축복하는 것, 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을 둘씩 짝 지워 보내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안을 빌라”고 하셨다. 이것은 복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복을 선포하는 행위가 자칫 잘못하면 기복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복을 선포할 때에, 진짜 복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지, 가짜 복을 선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전체로 “하나님이 복”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내가 복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믿으라, 나를 의지하라, 내게 구하라, 나를 경외하라, 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참된 복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진짜 복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복음적 설교는 “너희에게 하나님이 복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이고,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희는 참된 복을 받는 자라”고 선언해 주시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복음적 설교는 그 참된 복이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얻음으로 복을 누리는 은혜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가령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할 때, 이것은 말 그대로 복음적 선포이다. 복음적 설교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청중이 “아멘”으로 응답하며, 자유와 구원과 위로를 얻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게 하는 것이다.
반면 율법적 설교는 요한복음 3:16절을 이렇게 설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어도 너희가 안 믿으면 소용없어, 그런 것으로 영생은 없고, 멸망을 받을 뿐이야. 그러니까 믿어야 되, 열심으로 헌신해야 되” 라는 형태로 설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설교는 정죄적이다. 꾸짖기만 한다. 너희가 잘못 되었으니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런 설교가 더 선지자적인 것같고, 옳고 의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율법은 죽이는 것이다. 기능이 그렇다. 설교를 통해서 복음적 생명력이 솟아올라야 하는데, 이런 설교는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디프레스 된다. 소망이 없어진다. 기분이 나빠진다. 바울 사도가 경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에 대하여 옳은 것이지만, 그것의 제 기능을 살리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율법주의적인 폐단, 올무에 걸려들고 만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꾸짖고는 크게 후회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낙심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염려에 빠지게 할 뿐이라면 그것은 바른 설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는 분노로 해서는 안되고, 깊은 애정으로 해야 한다. 사랑으로 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권면과 책망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근심하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즉 권면과 책망에 깊은 사랑이 있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하는 그런 설교가 아닌, 분노에 의한 정죄 혹은 책망이라면 그것은 아무리 성경을 제대로 강해한 것이라고 해도 율법적 설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성경을 잘 풀어낸 것처럼 보여도 그 설교에 사랑, 기쁨, 소망, 감사, 감격이 없고, 죄책감만 남는다면 그것은 복음적 설교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율법적 설교인 것이다.
율법적 설교와는 달리 끊임없이 복을 선포하는 설교가 있다. 복을 약속하고, 설교를 들으면 기쁨이 생기고, 희망이 생기도록 하는 설교가 있다. 적극적인 삶의 방식으로, 또는 가득한 웃음으로 세상을 희망적으로 보게 하는 그런 설교가 있다. 그러나 그 설교가 궁극적으로 참된 복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풍요, 물질의 넉넉함, 세상에서의 성공과 같은 것만을 추구하게 할 뿐이라면, 그저 세상에서 그럴 듯하고, 폼 나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혹은 불운과 액운을 떼어는 방편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복적 설교이다. 이것은 성경을 풀어 설교를 하는 것이어도 이교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미신적, 무당적 설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복”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현혹한다. 마치 마약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환희에 사로잡히게 되고, 표면적으로는 교회도 크게 부흥한다. 그래서 그 설교가 행해지는 곳에 복음이 있는 줄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적 설교를 통해서 얻게 되는 참된 복, 하나님을 복으로 알고, 그 하나님을 소유함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행복, 은혜의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율법적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극심한 염려 속에 빠지게 하거나 무기력함과 낙담에 빠지게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율법적 설교를 선지자적 설교이고, 참된 설교로 착각을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도들을 교회의 제도 속에 얽어 맨다. 목사의 종이 되게 한다. 항상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한다. 평생 교회를 다니면서 야단만 맞고 살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매번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야단만 맞는데, 누가 그 설교를 들을 것이며, 그 설교를 통해서 누가 용기를 낼 수 있으며, 참된 헌신, 마음에서 우러나는 헌신을 결단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침체될 수 밖에 없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강해설교라는 미명하에 율법적 설교를 하고 있다. 그래서 강해설교가 이루어지는 교회의 강단에 능력이 없고, 소망이 없고, 기쁨이 없는 것이다. 복음을 강해했는데, 그럴 까닭이 없건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복음이 아닌 율법을 설교했다는 반증이다. 더욱 위험한 것은 그렇게 설교하는 설교자 자신은 자신의 설교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설교는 정말 옳고, 자신의 설교가 가장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에 충실한 것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소멸되는 것이다.
율법적 설교와는 달리 기복적 설교는 엄청난 영향력이 있다. 율법적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증오하는 것은 기복적 설교이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바르게 전한다고 생각하고, 기복적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켰다고 본다. 그런 주장이나 생각을 정확하다. 그러나 기복적 설교는 복음적 설교를 가장 잘 흉내 낸 사탄적 행위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교회가 표면적으로는 큰 부흥을 이루게 되지만, 그러나 그 내면은 깊이 병들고 썩어 들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파멸로 이끌어가시게 되어 있다. 반면에 복음적 설교는 교회를 살게 하고, 부흥케 한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부흥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적 설교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가져온다. 복음적 설교는 성도들의 삶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한다. 고난 중에서도 큰 소망을 품을 수 있게 하며, 인내하며 감사하고, 찬송하게 한다. 이 땅을 살아가지만, 천국의 행복을 소유하며 살게 한다. 이런 설교는 교회를 부흥케 하며, 성도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한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감동하고, 기뻐하며, 감사하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충만하심, 성령의 충만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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