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에 대한 심포지움입니다.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좀 길어요 ^^;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김원호 지음
목 차
1. 권리포기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십자가와 믿음 음성을 듣고, 따르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2. 말씀앞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반응 사명을 이루기 위한 여호수아의 선택 누가 여호와의 종인가? 영적 권위는 누구에게 주시는가? 나는 어떻게 말씀 앞에서 신을 벗을까?
3.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사회적 안정감을 포기하라 더 큰 축복의 약속을 위해 포기하라 스스로 되갚음하는 것을 포기하라
4. 예수님의 권리 포기(어떻게 여호와의 종이 되는가?) 세상 풍속을 따르는 권리 자존심을 지키는 권리 사랑받고 인정받고 감사받는 권리 자기 영광을 취할 권리 왕국을 만들어 군림하는 권리
5. 제자들의 권리 포기(어떻게 여호와의 종을 대해야 하는가?) 불평불만하는 권리 건의하거나 간섭하는 권리 비판이나 험담하는 권리 소외되었을 때 반발하는 권리 상처받고 떠나는 권리
들어가는 글
우리는 종종 이런 의문이 들거나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왜 나의 삶과 사고방식이, 믿음없는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되지 못할까?’ ‘왜 내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도덕적, 상식적 수준에도 못 미칠까?’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나이들어 안수집사나 장로가 되어도(우리의 경우에는 목자 몇 년차..), 왜 성품이나 인격이 변화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완고해지고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으로 굳어져만 갈까?’ ‘귀가 아프도록 수없이 설교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데도 나는 왜 변화되지 않고 있을까?’ ‘내 가정의 문화가 그리스도의 문화로 변하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런 의문이 든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그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신앙생활의 햇수가 늘어나는 것과 진리대로 사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배워야 한다. 그것은 세속적이고 육신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권리를 포기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 순복하기로 선택하며 나 자신을 투자하는 것이다.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할 수 없다. 권리 포기가 없다면 ‘신앙 따로 삶 따로’가 되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햇수가 길어도 그 사람의 신앙은 성숙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순복했는지,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이루셨는지, 그들의 권리 포기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등의 내용을 나누게 될 것이다.
자 그럼 빠져 볼까요?~~^^
1. 권리 포기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십자가와 믿음
처음부터 너무 무거운 주제로 접근하는 것 같지만, 저자가 십자가와 믿음이라는 소제목으로 권리포기를 설명하고 있다. 위에 요절을 읽어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앞서 모범을 보이신 것이고, 그리스도인이면 다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박힌 죽은 자가 무슨 권리가 있겠는가? 아무런 권리가 없음은 자명하다. 권리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셨으니 오직 그리스도의 권리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오늘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단 한가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어 이것은 답이 뻔한 너무 쉬운 질문인 것 같다. 우리는 소감에도 매번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고백하니 말이다.
어떤 아버지가 ‘저의 고3 아이가 금년에 일류 법대에 들어갈 줄로 믿습니다’라며 ‘믿습니다’를 강조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일까? 이것은 희망사항일 뿐이고, 개인의 욕심이나 소망에 불과한 것이다. ‘믿습니다’라고 기도했다고 그것이 곧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천천히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까요~~^^
★음성을 듣고, 따르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저자는 바로 우리가 생각해 볼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 의 답을 알려 주고 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나와있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절대적인 주권과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통치권을 하나님이 갖고 계심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대에는 이러한 믿음이 많이 약해진 듯 하다. 위에서 언급한 성경말씀이 절대 불변의 유일한 진리임을 생각하고 인정하지만 삶의 현장 속에서는 이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첫 번째 조건이 무엇인가?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은 헬라어로는 레마 즉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도와 묵상이 필수적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앞에서 고3 자녀를 둔 아버지의 기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금년에 네 자녀를 일류 법대에 입학시켜 주겠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첫 시작인 것이다. 이렇게 들려주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그래서 믿음의 두번째 조건 즉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바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조건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말씀하셨더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이다.
고3 자녀를 둔 아버지가 일류법대에 들어가게 해주시겠다고 하나님이 분명 말씀하셨는데 수능시험에 그 수준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왔을 때 우리는 말씀하신 하나님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입학원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권리 포기이다. 이 결정은 내 의견, 내 주장, 내 욕심, 내 계획, 내 야망대로 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순종했기 때문인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을 때는, 열심히 ‘믿습니다’하면서 했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으니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위험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9장 1~8절 말씀을 보자. 한 중풍병자에게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아가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갔다. 그들은 대단한 믿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믿음이 있음에도 중풍병자를 고쳐주지는 못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한다는 믿음의 전제 조건을 만족시킨 것이다. 그가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가? 바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순종했을 때 나음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다거나 같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던 우리는 들은 대로 순종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이 설령 우리를 죽이는 것 같아도 순종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또 그 음성에 순종하면 우리는 자유로움과 평안을 누리며 살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이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면 계획했던 일들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도 잊지 마시길…
2. 말씀앞에서 신을 벗으라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룻4:7)
룻기 4장 말씀을 보면 신을 벗는 것은 권리포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는 것으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전통이다. 하나님이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면, 이는 “네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시는 내용은 두군데 나온다. 바로 모세와 여호수아 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반응
우리가 선 곳은 다 어느 곳이나 다 거룩한 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다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면 권리포기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던 어느날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도 않고 불에 타지도 않는 것이다. 모세가 이상하여 가까이 가서 그것을 보려고 하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을 도망쳐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40년 동안 한 번도 하나님을 찾지 않은 듯하다. 그가 하나님을 알았지만, 한 번도 찾지 않고 황량한 광야에서 양만 쳤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내용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하는데 모세 자신이 가서 하라는 것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사명 앞에 모세가 단번에 순종했는가? 그는 자신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신은 벗었지만, 마음은 신을 벗지 않았다.. 그의 첫 반응은 ‘못 가겠습니다’ 였다. 두 번째 반응도 ‘못 가겠습니다’였다. 모세의 이 버릇없는 반응에 하나님은 다시 물으신다. 그래도 모세는 거절했다. 하나님은 다시 조근 조근히 모세를 설득했다. 하나님은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것과 모세의 손이 문둥병이 든 것, 또 물이 피로 변하는 기적을 보여 주시면서까지 모세를 설득했다. 하지만 모세는 가고 싶지 않았다. 계속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적을 본 후 약간 모세의 태도가 달라졌다. 전에 없던 ‘주’라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머리로만 ‘주’였던 것 같다. 하나님이 ‘주’이면 자신은 ‘종’인데 종이 주인이 하라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거의 죽으려고 환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또 다섯 번째 설득을 하신다. 이때 모세는 ‘나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일을 감당할 위인이 못됩니다.’ 라고 변명을 했다. 하나님은 또 조근 조근히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물으시며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말을 가르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이제 변명거리도 없자 ‘아 다른 사람 보내세요’ 라고 엄청난 권리 행사를 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갈거냐 안 갈거냐” 다그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일곱 번째로 모세를 설득하셨다. 모세가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그것 바로 애굽으로 돌아가면 살인자 신분으로 도망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으니 안심하라’며 순종하라고 설득하셨다. 모세는 이제 순종하고 애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은 여덟 번째로 나타나셨다. 이때는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모세가 아들을 할례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덟 번째 가서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완전히 굴복하게 되었다. 이쯤 되어 생각해보니 하나님은 사람을 잘못 고르신 듯하다. 이렇게 끈질긴 모세를 찍으시다니.. 그런데 나 자신을 봐야 한다. 우리는 말씀공부도 꼬박꼬박하고 양식도 매일 듣고 먹는다. 소감도 쓴다. 설교말씀도 듣는다. 내가 계산해 보니 나는 대1학년부터 말씀공부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360번 정도 말씀공부를 하고 설교말씀을 들은 것 같다. 그리고 양식도 마니 먹었겠지!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 모세 정도 되니 여덟 번 듣고 순종했지 나는 모세발꿈치도 안 되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이렇게 권리를 행사하고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상황과 여건, 자신의 능력과 환경을 보며 잔꾀를 보면 순종 할 수 없다. 무조건 따르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이를 신실히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사명을 이루기 위한 여호수아의 선택
이제 여호수아에 관한 내용을 생각해 보겠다. 여호수아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내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는 음성을 들을 때는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 전쟁을 앞둔 시점이었다. 여호수아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여리고성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하고 완전한 성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보살피는 20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수준인지 잘 알고 있었다. 군사훈련을 받아 본적 없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한 그들을 데리고 어떻게 철옹성을 무너 뜨릴수 있겠는가? 이럴 때 신을 벗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치밀한 작전 계획이나 탁월한 전투 지휘 능력이 아니고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온전히 따르는 것을 원하셨다.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어도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서있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리고성은 무너졌다. 어떻게 했는가? 정말 이상한 방법으로 무너졌다. 일주일 동안 성을 도는데 6일 동안은 한번씩만 돌고, 마지막 날은 일곱 바퀴를 돌고 소리치라는 것이었다. 이런 황당한 작전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했다. 그 결과는 정말 완벽한 하나님의 승리였다.
★누가 여호와의 종인가?
모세와 여호수아는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단 한번의 실수를 하였다. 모세는 백성들이 물을 달라고 불평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하나님이 하라는 방법으로 물을 주지 않고 무척 화를 내며 물을 주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들에게 속아서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묻지 않고 그들과 화친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셨다. 단 한번 신을 벗지 않았지만, 그들의 평생 모습은 말씀 앞에서 신을 벗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인정하신다.
★영적 권위는 누구에게 주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영적 권위를 주실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영적 권위는 절대적인가? 민수기 16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을 지어 모세를 대적하는 모습이 볼 수 있다. 이때 모세가 취한 행동이 무엇인가? 바로 엎드리는 일이었다. 자신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 확실하지만 백성들이 반기를 든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은 바로 머리와 몸 전체를 완전히 땅에 딱 붙이는 자세였다. 이런 자세를 취한 자에게 하나님은 영적 권위와 권세를 부여하신다.
★나는 어떻게 말씀 앞에서 신을 벗을까?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질문은 ‘나는 몇 번째에 가서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신을 벗을 수 있을까?이다.
자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마음을 드리면서 기도해보자 ^^
3.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22:16-17)
권리포기라고 하면 다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포기한다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임을 성경의 인물들과 우리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안정감을 포기하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 75세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삶의 터전을 떠나라는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나 요한 마태도 모두 예수님의 부르심을 영접할 때 함께 동반했던 것이 바로 이전의 삶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는 사회적 안정감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성공이 보장되고 안락한 집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에 보장자산이라는 보험상품이 있듯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이런 것들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지만 실망하지는 말자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나라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지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그는 동서남북 중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떠났다.
★더 큰 축복의 약속을 위해 포기하라
다시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겠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살았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의 증거로 옥동자 이삭을 주셨다. 그는 이삭을 자신의 목숨과 삶보다 더 사랑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114세쯤 이삭이 14세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 내용은 이삭을 데리고모리아 산으로 가서 거기서 번제로 이삭을 드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매번 이렇게 상식 이외의 음성으로 권리를 포기하라고 하시는 듯 하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람을 재물로 드리는 것을 지금 아브라함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그것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리아 산으로 떠났다.사랑하는 이삭의 손을 잡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지금 순종하고 있지만, 가슴이 아파 눈물을 참았을까? 아닐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이삭을 주라고 하셔도 그는 권리를 포기했다. 번제에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들었을 때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때 아브라함을 막으셨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어본 사람이 몇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중한 것, 놓을 수 없는 것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창세기 22:15-18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스스로 되갚음 하는 것을 포기하라
이제 다윗의 경우를 알아보겠다. 다윗이 포기한 것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복수하는 권리였다. 그는 끊임없이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어도 그를 해하지 않았다. 그도 피곤하게 도망자의 삶을 살고 싶었겠는가..아니였을 것이다. 그도 사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야 도망자의 삶이 끝나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 같다. 바로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을 해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복수할 기회가 몇번 있었지만 그는 매번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울을 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울이 죽었을 때 애통해하며 노래까지 지었다. 자신을 핍박하고 해하려는 사람을 저주하지 않을 수 는 있지만 그를 기억하고 적의 슬픔을 추도하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그는 복수하는 권리를 하나님 앞에 포기한 것이다.
4. 예수님의 권리 포기(어떻게 여호와의 종이 되는가?)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6:14-15)
★세상 풍속을 따르는 권리
예수님이 포기하신 첫번째 권리는 세상 풍속을 따르는 권리이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등장하는 많은 성화를 보면 쉽게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제자들과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은 유독 흰옷을 입으시고 잘생긴 외모를 가지셨다. 그리고 영화나 영상에서도 예수님은 잘생기게 나왔다.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알 수 없지만 이사야 서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가늠해볼수 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1-3)
세상 풍속은 얼굴도 잘생긴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외모를 취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외모는 세상 풍속대로 생기지 않았다. 우리가 길을 걷거나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의 외모 때문에 속으로 판단하고, 비호감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다 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외모가 못생기거나 옷을 볼품없이 입으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지하철역에 있는 노숙자의 손을 따뜻하게 잡을 수 있는가? 성경은 말한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우리의 기준으로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한 것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본적지는 나사렛이며 주소지는 가버나움이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정작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다. 방 한칸 마련했다고 누구 하나 비난하지 않으셨을 것을 예수님은 떠돌이처럼 사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 연한 순 같은 몸으로 걸어 다니시며 사역을 하셨다. 그리고 돈도 가지고 다니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기분 안좋게 말하면 거지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돈 한푼 없고 외모도 별로인 예수님은 당시 대단한 스타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전혀 상대도 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자와 교제하셨다.
★자존심을 지키는 권리
예수님의 본적지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적 사항을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니 놀라며 수군거렸다. ‘목수의 아들이고 일자 무식인 사람에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가?’ 사람 앞에서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 놓았다. 또 설교를 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향해 유대인들은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다 귀신 들린 자다 우리 말이 옳지?’라고 공격하였다. 예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 도다’ 예수님이 최고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바로 십자가 형을 지실 때였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마26:67-68) 인내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모욕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이 취하신 행동은 잠잠히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존심을 지키는 권리를 포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감사받는 권리
우리는 오병이어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리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배불리 먹고 나서 예수님이 한 마디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54-55)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갔다. 그리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게 되었다. 공짜로 밥을 얻어먹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진짜로 하고 싶은 설교를 하셨는데 아무도 남지 않고 떠나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지금까지 병자들을 고쳐주고 먹여주고, 가르쳐준 은혜를 잊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예수님은 사랑받고 인정받고 감사받을 충분한 권리가 있으셨지만 이것마저도 포기하셨다.
★자기 영광을 취할 권리
예수님의 모든 사역속에는 자기의 영광을 취할 권리를 포기하셨음을 알 수 있다.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15:31) 병은 예수님이 고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예수님은 영광을 취할 권리를 포기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칭찬하고 경배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하며 영광을 돌리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이다.
★왕국을 만들어 군림하는 권리
예수님이 오천명을 먹이시고 난 후에 일어난 한 사건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6:15) 예수님은 철저히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셨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받으실 때 자신이 유대인의 왕인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이고 실제로 이 땅에서 예수님은 왕국을 만들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철저히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며 사셨다. 이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사람들은 바로 12사도였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안 계시면 제자들은 삶의 모든 현장에서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본을 따라 살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사도적 제자의 삶을 살았다.
5. 제자들의 권리 포기(어떻게 여호와의 종을 대해애 하는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마16:22-23)
제자들은 불평 불만하는 권리, 건의하거나 간섭하는 권리, 비판이나 험담하는 권리, 소외되었을 때 반발하는 권리, 상처받고 떠나는 권리들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예수님을 섬겼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을 벗은 영적 지도자이기 대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모세에게 또 하나님에게 불평불만하고 건의하고 간섭하고 비판하고 험담하는 것과 4복음서에 나온 제자들의 모습과는 정말 비교가 된다. 솔직히 4복음서는 예수님께 집중해서 쓴 것도 있지만, 12사도들은 이러한 권리들을 자제한 것만은 분명하다. 날마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고 오천명 식사 서빙할 때도 그들은 영적지도자인 예수님 밑에서 충실히 섬겼다.
빛은 그림자가 있어야 더 돋보이는 것 처럼
- 나의 생각 -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줄줄이 맞는 말만 늘어놓는데, 입다물고 그대로 해야지.. 그런데 그게 정말 힘들다 ^^; 믿음으로 산다는 것!권리를 포기한다는 것! 신앙생활 머리로 하지 말고 마음과 발로 하자 ^^
-생각해보기-
1. 꼭 권리 포기를 해야 하는가?
2.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죽였는가? -이건 좀 과격한 표현이지만 이것처럼 확실하고 의미 전달 잘되는 표현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품위있게 말하면 권리포기이지만, 저는 또 가슴을 치게 됩니다. 내가 너무나도 살아있음에...
3. 나는 예수님이 포기하신 권리중에서 어느 정도를 포기하며 살고 있는가?
4. 나는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대할 때 어느 정도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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