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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J. A. Comenius

코메니우스에게서 보는 기초교육

코메니우스에게서 보는 기초교육

(태아학교와 유아기 학교)

김 경 란


아베라비무스(aberravimus)


요즘 소리 없이 항간에 떠도는 말처럼 50년 동안에 이루어 질 변화가 1년 안에 이루어진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현실은 나날이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는 가속도가 붙어 걷잡을 수가 없다. 20세기 말 사회의 흐름은 갈수록 난폭하여지고, 이 시대를 사는 그 어느 누구든 - 개인이나 가족, 사업체나 기관, 교회나 그 어떤 공동체든지- 이 변화를 피하기가 어렵다. 다시 말하면 변화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 문제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 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의 현장을 살펴보자. 우리가 대하는 어린이 혹은 학생, 그리고 성인들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생활 양식을 가지고 있고, 이제 교회가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것만을 강요한다는 것은 많은 무리수를 가질 수 밖 에 없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교회에서의 가르침 사이에 오는 갈등으로 심한 이원화를 경험할 것이며, 교회를 떠나는 일마저도 있을 수 있다. 교회와 교회 교육은 이제 무엇인가를 결단해야 할 시기에 봉착해 있다. 변화라는 거대한 홍수에 아무런 점검 없이 중국의 장독 문화처럼 수용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전통과 고전적인 문화 양식을 고집할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사회, 경제, 문화, 예술, 정치 등 전반적이고도 총체적인 변화 앞에 ‘교육’ 역시 예외는 아니다. 미국의 교육학자 마이클 애플은 교육의 헤게모니에 대해 이미 말한 바 있다. 그것은 교육이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말이다. 80년대 초반 우리 나라를 뒤 흔들던 ‘열린교육’의 흐름에 많은 일반교육 기관들은 열린교육을 배우며 시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각 학교들은 교실의 막힌 공간을 헐고 그룹을 짜서 모둠(소그룹)을 운영하며,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교육을 실행하려는 움직임으로 부산하였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을 지나 후반을 거치면서 전 세계와 우리 나라 역시 정보화 사회를 맞이하게 되었고, 교육의 흐름은 또 다른 시각으로 열려지게 되었다. 즉, 구성주의 이론이 젊은 이론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것은 정보화 사회, 지식 기반주의가 가지고 온 결과이다. 두뇌는 정보를 처리한다. 두뇌 기반 교수 학습은 인간의 뇌에 대해 알고 좌.우뇌의 교류를 촉진시키는 학습의 전략을 세우고, 구체적인 교육의 방법으로 5M인 마인드 맵(mind map), 기억술(mnemonics), 은유(metaphors),음악(music),움직임(movement)와 SIP로서 감각(sense), 심상(imagery), 적극적인 자세(positive set)를 말하고 있다. 이렇듯, 시대의 흐름을 가장 예민하게 타는 부분이 교육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예로부터 백년지계로 알고 있던 교육이 이제는 가장 유행에 예민한 영역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교육을 담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갈피를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현실이다. 인생의 기초에 해당되는 유아의 교육 또한 마찬가지이다. E. Q야 말로 유아들의 앞날을 보장해줄 교육인양 떠들썩하던 시기가 있었던가 하면, 홀리스틱 교육, 열린교육, 프로젝트 학습, 창의력 학습 등 많은 교육의 방법들에 교육기관과 부모, 교사들은 도전 받았었다. 그 뿐인가 예능 교육, 외국어 교육, 한자 교육이다 하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어 유치원 시절부터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아 사 교육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높기만하다. 교육의 이론 역시 한 두 가지이던가? 페스탈로찌 이론, 마리아 몬테소리 이론, 피아제 이론, 슈타이너이론. 프로벨이론, 비고츠키이론등... 얼마나 많은 교육의 이론들이 무성한지 모른다.

코메니우스의 눈으로 바라 본 그 시대의 교육은 정말 흐트러지고, 무 분별해져 있었으며, 혼란의 시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교육 역시 다를 바는 없다. 어쩌면 더 한 무 질서와 혼돈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코메니우스는 길을 잃었다 혹은 어긋났다 라는 것을 중세로부터 어긋났다는 차원보다는 통일성과 단순성 그리고 자유 의지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였다( 판데어 린데,p.125) 인간은 맹목적이고, 무 감각하고 , 미숙하게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불행하게 된 근원인 것이다. 즉, 인간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왔는지(woher),무엇 때문에(wozu)사는지, 어디로 가는지(wohin) 모른다는 것이다. 즉, 교육의 변화와 개선이 구조나 방법론에 있기 보다는 인간이 개선되고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며,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됨으로 인하여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태아와 유아기가 포함되는 기초 교육을 길을 잃어 버린 지금의 시대에 본질적인 질문들로 되돌려 놓음으로서 해결점과 그 대안을 찾고자 한다. 인생에 있어서 기초가 잘 형성되는 것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지,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인생의 토대를 놓는 시기의 교육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를 코메니우스의 기초 교육을 통해 배우고자 한다. 기초의 시기에 해당하는 태아와 유아기 학교를 코메니우스의 글에서 요약해 볼 것이며, 인생의 초기에 잘 교육되어야 함이 과연 무억인가와 참다운 조기 교육의 틀을 그의 관점에서 찾아 봄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와 건강하고 온전한 교육을 받는 토대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초교육이 말하는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처음 시작이 중요하다. 한 그루의 나무도 자라가는 동안 섬세한 돌봄으로 인하여 곧고 튼튼한 나무로 자라가 좋은 열매를 얻게 되고, 그냥 내 팽개쳐졌을 때는 좋은 열매를 얻기는커녕 휘어져 땔감으로 밖에는 쓸 수 없는 나무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있어서 초기 시기인 전 학령기(0-7세)를 그리 중요하게 보지 않고 쉽게 흘러 버리는 경우들이 많다. 단지 먹는 것과 입는 것, 거주하는 것 등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만을 채워 줌으로 부모의 임무가 다 끝났다고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아교육(Chidhood Education)지에서 바인(E.Bain)은 “인간의 생명은 길어지는데 아동기는 왜 짧아지는가?‘’라는 논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의 수명은 그 어느 때 보다 길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세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최고이기를 원하는’어른들 중에도 어린이들을 어른 들 모양으로 서둘러 만들려고 함으로써 아동기를 단축시키려는 경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히, 7세가 되면 사회의 무대로 나갈 수 있는 충분한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떠밀려 나가게 되는데 반해 사실 77세나 87세가 되어도 생활의 일상궤도 내에 그대로 있게 된다.

어른들은 전보다 적어진 작업시간, 작업량 그리고 보다 다양해진 취미나 야외 생활을 즐긴다. 같은 시간에 어린이들은 계속 발전할 것을 요구받는다. 왜냐하면 이를 수행하지 못하면 상급학년으로 진학하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 어린이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며, 장기적으로 볼 때 미래의 심각하고도 끈질긴 경쟁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기초 교육이라는 것을 오히려 지나치게 심각하고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즉, 어릴 때 무엇인가를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 잡혀 있는 듯하다. 기본이라는 이름 아래 학령전기인 0-7세 사이에 지적으로 많은 가르침을 가르쳐 놓아야 어린이들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제 몫을 담당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양 단 간의 현상 속에서 인생의 초기를 맞이한 어린이들의 모습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시기에 적절한 기초 교육이 무엇인지를 알아 보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먼저, 어린이는 하나님의 귀중하고 훌륭한 보석이다는 전제에서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아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는가? 는 아이들의 존재에 대한 귀중함과 기초교육의 중요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말라기에서 아이들은 (2:15절) 하나님의 경건한 씨앗으로 불리 운다. 하나님의 혈통이 그 씨에서 생겨 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인간의 본성에 참여하려고 하셨고 형제와 자매인 아이들로 인해 기뻐하시고 축복하신 것이다.( 막10:16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왜 이 아이들을 높이셨을까? 그들은 우리 다음 세대의 세상의 거주자요 , 토지의 관리인이며, 하나님의 창조물 중 주권자가 되어야 하며, 아이들은 지금 현재적 위치나 미래 적인 장래로 보나 보석임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아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맑고 순수하다. 또한 아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소유물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드러내는 특별한 도구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고스만, p.112)


그러기에, 기초 교육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아이는 아직 성장하지도 않은 세상에 방금 나온 인간이며, 인격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기에 전체와 연결된 인격의 형성이 필요하다. 아이가 원시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세심하고도 부단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처음에 박힌 인상은 매우 단단하게 고착되어 나중에 생긴 인상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의 초기에 교육을 받지 않은 것과 교육을 받는 것은 인간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코메니우스는 인간이 교육을 받지 않았을 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물에 대해 텅 빈 정신을 가지고 있고, 기술적인 것이라고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무딘 손을 가졌고, 악한 일 만을 일삼으며, 하나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일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참되게 교육된 인간은 어둠 속에서 온 세상을 밝혀 주는 정신의 소유자가 되며,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다. 그러한 사람은 통찰력을 가지고 자신의 한계 속에서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 들이고, 유한한 피조물로서 가능한 말과 행동으로 전체를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교육의 토대는 유아기에 심겨지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기초 교육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고, 씨앗 속에는 전 생애에 해당되는 식물이 있다고 말한다. 즉, 씨앗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 식물의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시기는 인생의 첫 시기이다. 그 다음의 연령기는 그 열매에 달려 있는 것이다. 첫 번째의 토대가 지식의 싹을 잘 준비하고 ,사려 깊게 아이의 정신적 능력에 심겨 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일에 대한 확실한 절약을 의미한다. 또한 유아의 시기는 인생의 봄이다. 따라서 정신의 보화를 잘 준비하는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즉, 초기에 관심을 잘 기울여서 훌륭한 삶을 위한 씨를 인생의 초기에 뿌려야 하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기초시기에 대한 중요성을 잘 이해할 수 있었는가?또한 그가 말하는 기초 교육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내려졌는가? 더불어 우리는 오늘날 인생의 초기에 해당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우리에게 보내는 코메니우스의 엄한 경고를 들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초기 교육에 등한했을 때의 오류이다. 즉, 초기 교육의 오류는 전 생애를 따라 다니기에 ,여기에서 무엇인가가 결핍되면, 해악이 상 존 하게 되므로, 시작부터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방향을 잘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 교육:태아와 유아기학교




인생의 씨를 뿌리는 시기에 해당되는 기초 교육의 시기는 크게 태아시기와 유아기의 시기로 나뉘어 진다.



태아학교(Schola geniturae)/출생 전의 존재를 위한 학교


인간이 태내에 생명을 잉태함으로부터 교육은 시작되어야 한다. 태아 학교는 태내에 있는 생명을 주의 깊게 돌보기 위한 부모 교육이다.


태아학교의 목적은 부모가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 땅이 아닌 하늘을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을 철저히 교육시키는 데 있다. 출생 이전의 존재를 위한 학교가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정확한 지도 이념이 제시되어야 한다. 일단 태내의 아이는 절대 일그러지거나 변질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부모는 3가지를 명심하여야 하는데; 가시적인 세상은 하나님의 씨를 확산하고, 그의 선택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인류의 인간에게 하나님의 씨를 찾는 일을 위탁하신 그 사실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하며,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이 잘 열매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태아학교의 커리큘럼으로는 부모의 능력과 역할을 가르친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의 방식(노동과 절제)에 능력이 있어야하며, 산모는 건강과 도덕에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용할 수 있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순산한 후에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 드려야 하고, 모유로 아이를 키워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아이는 존경할 만한 예우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 되고, 그리고 건강한 육체, 건강한 정신, 건전한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되며, 또한 주님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경건한 부모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유아기 학교(Schola infantiae)/ 출생부터 6세 까지의 아이들에 대한 인격 형성의 시기


유아시절은 인생의 봄에 해당된다. 이때 정신의 보화를 잘 준비해야 한다. 훌륭한 삶을 위한 씨앗도 유아기 시절에 뿌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초기 교육의 오류는 전 생애 동안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들은 인격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인격 형성의 교육이 필요하다. 이것은 전체와 연결된 인격의 형성을 의미한다. 올바른 습관에서 터득되는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많은 것을 결정하게 하는 데 합리적인 방식으로 지혜의 참된 법칙에 따라 이미 첫 인상을 갖게 되고, 덕의 이데아에 따라 처음의 습관을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훌륭한 인상과 습관을 잃어버림으로 다른 손실 즉, 헛되고 파괴의 근원이 되는 개념, 상상 , 행동, 등에 의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유아기 학교에서 가르칠 내용은 인간은 초기에 자신의 현세와 내세에 있어 참된 유익을 끼치는 방법으로 철저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즉; 아이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과 내적인 친밀감을 갖고, 결코 해롭지 않으면서 친밀감만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들과 교제하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이 세상 사람들과 올바르게 교제하며 관계를 형성해 가도록 하며, 하나님께로 아이들을 인도해야 하고, 천국의 삶을 영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 독특한 내적인 배려를 하여야 하고, 이러한 배려를 낳게 하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간구하여야 만 한다.


유아기학교는 6학급으로 구분이 된다.


1.입문반/신생아반: 신생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새 신자로 바쳐져야 한다.


2. 젖먹이반: 신생아는 방치하면 죽을 수밖에 없기에 젖으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자녀를 모유로 키워야 하고, 유모는 지혜로워야 한다.


3.옹알이와 첫 걸음을 시작하는 반: 사물을 지시함으로 말을 가르쳐야 한다. 아는 것과 동시에 말할 수 있도록 하며,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고, 육체와 정서가 동시에 활동하도록 도우며, 추위와 긴장감에 익숙하도록 교육 시켜야 한다.

놀이는 진지한 활동의 전 단계이다. 따라서 습관적으로 어떠한 일을 꾸준히 함으로서 자신의 시간과 타고난 능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고, 충동이 아닌 모든 일에 목적의식이 분명하도록 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놀이로 이끈다. 이 모든 것은 시간과 사물에 적합해야 하고, 간단. 명료해야 하며, 쉽고. 확실하게 간직하도록 가르쳐져야 한다.


4.지각 사용의 반: 세계에 대해 젖먹이에 불과하므로 좋고 나쁜 것을 내부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은 감각의 문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사물에 대한 통찰력은 섬세한 사물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기에 사물의 근본 특징을 인식하도록 훈련해야하고, 점점 더 풍성한 차이점을 인식하도록 돕는다.


언어는 더듬다가 종알거림으로 발전한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짐으로서 이루어지도록 가르치며, 사물 자체를 가리키며 이름을 불러준다. 자신의 감각으로 사물을 주목 한다면 전 생애에 있어서 장점이 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이를 통하여 확실한 진리에 만 동의하게 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의 판단에 근거하는데 익숙해진다.


감각교육의 중요성은 활동적인 인간을 양성하도록 해 주고,사물을 지성으로 올바르게 파악하도록 배우게 하며, 해로운 사물은 피하게 하며, 이때 대상이 뚜렷하게 인지 될 수록 감각은 그것에 맞춰 발동한다.


5.도덕성과 경건성의 반: 만약 아이들이 말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무엇인가를 갈망하고,업신 여기거나, 무서워하기 시작하면 도덕성을 형성할 시기이다. 도덕성을 가르치는 3가지의 수단은 모범, 가르침 그리고 훈육이다. 이때 이루어지는 가르침은 개방적이고, 명확하게 ,분명한 단어로 가능한 한 치밀하게 간단히 이해되도록 가르쳐야한다. 훈육은 경건성을 지니도록 하는 것으로, 아이들이 사는 집은 천국이 되도록 하고,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나와야 하며,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기도의 태도를 가르치며, 종교의 근본적인 토대인 믿음, 소망, 사랑을 가르친다. 이때 우리는 아이에게 기도하는 일을 가르칠 수 있다.


6.처음으로 시작하는 공동적이며,실제적인 학교로서의 어머니 품의 학교(4-6세)반: 반 개방적인 학교로서, 교육에 대한 정보를 제공. 교환하는 학급이다. 하젠뮬러(Hasenmuller)는 학교 가기 전 사전 교육으로 말하는 법, 계산법을 가르치되 교육의 쓴 뿌리가 없도록 달콤하게 놀이와 활동을 통해 가르치라고 말하였다.


잘못된 가정 교육은 학교와 교회, 사회를 곤경과 어려움에 처하게 한다. 올바른 교육의 토대는 배움을 이해하는데 있고, 이를 통해 동물로부터 인간을 ,비 교육자로부터 교육자를, 어리석음으로부터 현명함을 구별시키며, 미래적인 삶의 현세적인 삶을 영위하며, 멸망에서 행복으로의 삶으로 인도한다.


조기교육에 대한 통찰력



인간은 나무와 같다. 줄기가 삐뚤어진 채로 완전히 자라면 고칠 수가 없다. 사람이 지혜와 덕과 경건의 교육을 받지 못하면 이성적이고, 현명하고, 덕이 있고, 경건한 존재가 될 수가 없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소년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훈육의 결핍은 전 생애동안 따라 다니며,한 인간의 인생을 절망과 무식과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잠재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무거운 짓눌림으로 누른다. 첫 번째 주어진 기회를 놓치면 인생이 순조롭지 못하다. 또한 다시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그 효과성 역시 기대하기가 어렵다. 다라서 기초시기에 주어지는 주기 교육의 통찰력을 제공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 때 받아들여 진 것이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남기 때문에 제대로 온전하게 그리고 건강한 교육을 받는 것이 그 무엇 보다도 중요하다.




가정의 조기 교육



태어나서 처음 6년 동안은 부모와 함께 신앙과 예절과 덕 그리고 언어의 학문과 예술을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인간과 하나님께 유익을 주어야 하는 자는 경건과 관습 그리고 좋고 자유로운 실재 속에서 훈련되어야 한다. 부모는 어떤 방법으로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먼저는 우리(부모,교육자)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그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그를 찾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흔적을 깨닫고 난 후 언제나 열매, 사랑과 순종으로 주 하나님을 경외할 때,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하나되며 그 안에서 평화와 기쁨, 위로를 느낄 때,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참된 구원을 가르칠 수 있다.


아이가 6살 때 부터 참된 구원을 가르칠 수 있다. 그는(하나님) 모든 곳에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시며, 우리가 보는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그에게서 오며, 그는 우리와 모든 것을 만드셨고, 보존하시며,돌보시며,다시리시고,질서를 공급하시고, 경건한 자와 순종하는 자가 더욱 번영하게 하신다고 이해하도록 6살 이내에 그 이유들을 제시해 주고 구원을 가르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의 부모는 가정에서 처음 태어나 6살 때까지 그 아이가 일생을 살아 갈 기초를 놓아 주는 조기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코메니우스에게서 얻는 조기 교육의 통찰을 다음과 같다.


신앙의 조기교육- 가정은 작은 교회이다. 아침과 저녁에 모두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말씀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데리고 나온다. 또한 종교에 대해 가르칠 때, 모든 상황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관해 말해야 하고, 하나님이 천둥, 우박, 번개를 보내셨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급기야는 장래에 이루어 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해야 하고, 아이들을 격려하여 기도하게 해야한다. 기도할 때 손을 모으고 눈을 하늘로 향해 들고, 둘러보지 말며 단정히 서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도록 배워야 한다. 신앙의 토대인 믿음과 소망, 사랑을 가르칠 때, 믿음은 하나님을 믿어라. 소망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모든 선한 것을 기대하라. 사랑은 하나님의 말을 듣고 사랑하라 이다.


예술의 종교교육-특별히 코메니우스는 음악의 조기 교육을 말한다. 아이에게 있어서 음악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태아에서 출생가지 울음소리는 천국의 소리요. 어른들이 금지할 수 없는 최초의 음악이다. 울음소리는 건강에 유익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우는 것 외에는 다른 신체적인 운동이 없음으로 가슴을 다해 욺으로서 다른 내부의 사지도 건강하게 된다.


2세 때 아이는 외부의 음악, 노래소리, 바이얼린 소리, 곤충소리, 사람의 목소리, 시계 종소리, 다른 악기의 소리가 쾌적하게 느껴진다.

3세 때 아이들의 음악이 듣는 모든 것에 있다. 어른이 식사 때 기도하는 것과 찬양 부르는 것 등이며, 이 때부터 악기를 실제로 다룰 수 있도록 한다.

4세 때는 노래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이들이 피리, 팀파니, 바이얼린을 알게 하고 소리내게 한다.



언어의 조기교육- 조상들 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더 많이 언어를 배워야 한다. 조상들은 한 가지의 언어인 모국어로 철학을 하였으나, 우리는 다양한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코메니우스는 말한다. 특별히 그는 선교적 차원에서 외국어의 교육과 사용을 말하고 있다. 언어를 가르칠 때, 대상을 지목하여 사물로 명명해 주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며 복합어나 축소 형태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병행에 유념해야 한다.



예절의 조기 교육-훌륭한 규율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이 하늘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라면, 땅에서도 배워야 한다. 덕과 관습 그리고 올바른 태도를 배워야 한다.



조기 교육의 방법



어른들이 아이들의 머리에 단편적인 지식을 넣어 준 결과 어른과 같이 점잖게 행동하는 어린이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학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아이에게 글 읽기를 가르치는 방법>을 쓴 도만(G. Doman) 박사는 “인류의 역사상 어떤 성인도 18개월에서 4세 까지의 유아가 가지고 있는 호기심의 절반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타고난 잠재 능력이 다르다. 또한 학습에 있어서 그 나이에 해당되는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특히, 어리면 어릴수록 학습의 방법은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왜냐하면 무엇을 배웠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배웠는가?가 이후 일생을 살아가면서 주어질 평생 교육의 기회에서 즐거움과 기쁨으로 배울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짝짓기- 사물을 명명해 주고 비교.연관의 방법으로 가르쳐 보자. 어린이들로서는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경험과 성숙에 따라 판단력도 발달한다. 그러기에 유아 학습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사실들을 관련시켜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할때 어린이들이 세상을 살아 가는데 필요한 그 무엇과 어른들이 넣어 주려고 하는 사실들의 의미를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다.


놀이-활동을 통한 교육은 영.유아들에게는 너무나 적절한 교육의 방법이다. 유아들이 동기 부여되고, 재미있을 때 학습의 성취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자유로운 탐험과 자기 주도적인 놀이 경험을 통한 배움은 유아들의 학습에 아주 용이한 방법이다.



종합하기- 대개 사람들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생활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지식이나 정보가 낱낱이 흩어져 버리는데에 있다. 다라서 인생의 초기부터 유아들이 하나를 알면 그 아는 것이 전체와 연관될 수 있게 하고, 전체 안에서 의미를 파악하며, 단편적인 것들이 모여 종합되게 하는 교육의 벙법들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경험학습-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 가지의 책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정신,성경 그리고 자연이다. 유아들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많은 경험을 함으로 하나님의 솜씨를 알고,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또한 한번 각인된 경험은 인간의 일생을 좌우하는 밑 그림이 되기도 한다.


분석하기-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는 작업이다. 이것은 모든 지식의 실제적인 출발이며, 토대가 된다.




범세계적인 길( via universalitatis)


이 세상은 너무나 복잡 다난하고, 혼돈과 혼란 속에 있어서 유아들이 무엇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혹 채 배우기도 이전에 유아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또 너무나 큰 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기가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우리들 인간 각자에게 주신 선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잠재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잠재되어 있어서 눈으로 식별하기가 쉽지 않고, 그 때문에 잘 발견되지 않아 묻혀두기가 십상이다. 어이다는 것은 참 행복하고 복된시기이다. 유아들은 그 행복감을 충분히 누리고 맛 볼 권리가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그 아름다운 유아시기가 혹독하고 참혹하기도(?) 시기가 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어른들이 그들에게 이런 저런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고 얹어 준 보따리가 자꾸만 커지면서부터 였다. 정작 가르쳐져야 할 기초 교육은 아예 뒷 전으로 밀려나 있고, 학원 가방만이 부풀어 올라 가는 듯하다.


지적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이 혹은 어른의 모양으로 빨리 탈바꿈해 간다는 것이 참된 교육인가? 참된 가르침이 이루어졌다고 승인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길을 잃은 사람들과도 같다. 개인과 단체 ,그리고 전 세계가 어쩌면 방황하고 부패해 있으며, 무 감각한 상태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때에 코메니우스의 교육은 빛을 발한다. 그는 가르친다는 것을 인도한다는 의미로 파악한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됨으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교육(Educatio)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지 못할 때 거할 수밖에 없는 어두움에서 사람을 이끌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러한 인도를 모든사람을 (Alle Menschen)을 모든 것(Alle Dinge) 즉, 하나님께 되 돌아가는 통일성과 총체성으로 철저하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것은 무 질서하거나 피상적이지 않으며, 확실하고 견고하다.


학문은 인간을 학식 있게 만들고, 관습은 인간을 예의 바르게 만들며, 경건성 자체는 인간을 경건하게 만들기에 인간이 학문, 도덕, 경건성에 있어서 올바른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모든 것을 위한 토대가 인생의 초창기에 성실하게 놓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통일, 단순함 그리고 자유를 향한 길을 우리 인생들에게 제시해 주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이며, 그 안에서 모든 일의 연계성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모든 일의 부패는 그 뿌리에서 치료되어야 하는데, 모든 부패한 부분들이 근본적으로 새롭게 될 때 비로소 회복에 대한 희망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초기 교육은 이 세상의 모든 부패와 악의 근원을 예방하는 예방의 교육이자 회복의 교육이라 말 할 수 있다.


<참고도서>

1. Klaus Schaller,정 일웅 역, 범 교육학,여수룬,1999.

2.Jan Marius van der Linde,정 일웅역, 미래를 가진 하나님의 세계,여수룬,1999.

3.Klaus GroBmann/Henning schroer, 정 일웅역,코메니우스의 발자취,여수룬,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