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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J. A. Comenius

코메니우스 사상의 철학사적 위치

코메니우스 사상의 철학사적 위치

안 영 혁

코메니우스는 명백히 신학자이다. 그것은 그가 체계의 근거를 하나님에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그러나 중세의 모든 철학이 그런 기반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보면 그는 철학자로 분류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는 중세적인 의미에서는 철학자일 수도 있고, 철학과 신학이 분화되는 근세적 의미에서는 신학자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근세적 의미에서 신학자라고 하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철학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는 세계는 무엇인가 하고 물었으니 존재론 철학자였고, 그것을 자신의 방법론적 틀에 의거해서 논하였으니 또한 인식론 철학자였다. 그가 이렇게 분명히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지는 것이라면 그의 사상을 선명하게 규정짓기 위해서 그의 철학사적 위치를 물어볼 수 있다고 본다.


1.출발점으로서 Rene Descartes와의 비교

클라우스 고스만과 헨닝 슈뢰어가 공동 집필한 [코메니우스의 발자취]에는 코메니우스의 사상을 알아보고자 할 때 왜 데카르트와 비교를 해야하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 핵심은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하는 사람이었고, 반면 코메니우스는 그런 회의를 위험하다고 보고1) 하나님에 모든 것의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보았던 사람이다.

고스만등이 코메니우스는 모던하고 또 포스트모던한 사고와 세계이해를 더 많이 가졌다고 주장하고는 있으나2), 일단 첫 눈에 코메니우스는 중세의 신학자 내지는 철학자로 보인다. 르네 데카르트는 확실히 그 시대를 대변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는 말하자면 신화적 세계관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따라서 신학적 의미의 전제는 철저히 회의했어야 했다. 이것은 데카르트가 아니라 누구라도 견지하려는 근세적 풍조였다. 데카르트가 합리주의를 대변하지만 오늘날 반대의 변에 두는 경험론 철학자들도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어본다는 기초는 다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는 인과론마저도 의심하면서 사람의 지각에 무엇이 남는지를 찾아보려고 노력한 바가 있다.(T.E.Hume)

그런 근세적 풍조를 대변하는 데카르트의 입장에서 볼 때 코메니우스는 분명 중세의 신학자였다. 코메니우스의 특이점은 보다 다른 데서 발견된다. 고스만등은 계속하여 코메니우스에게 미래지향적이란 수사를 사용한다.3) 그것은 무엇을 지칭하는가? 그의 개혁가로서의 면모를 말할 것이다(그가 가진 평화주의적 성격도 이 안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데카르트와 다른 면모이다. 데카르트는 바늘 같이 작은 것에 대한 엄밀성을 추구하고 있었고, 코메니우스는 세계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개혁의 의지는 또한 교육사상가로서의 모습에서 나타났으며, 그의 저서와 활동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펼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코메니우스는 미래지향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포스트모던하다는 것은 엄밀하게 증명해야 하는 말이다. 포스트모더니티는 원래 사태의 원심성이라는 근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매우 구심적인 내용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을 그 핵으로 하는 그의 세계이해는 그야말로 포스트모던과는 동떨어진 사상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가 포스트모던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밝히기 위해 그의 개혁 사상에 들어있는 세부적 내용을 살펴보아야 할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데카르트와 코메니우스를 마주 세울 수는 있다. 데카르트는 근세를 대표하는 인식론 철학자였고, 코메니우스는 아직 중세적 신학자였으나 강력한 개혁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를 어디에서 찾는 것이 좋을까? 무엇보다도 역사적 관점이 거기 근접할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처지가 달랐다. 르네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귀족 출신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불안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달랐다. 그는 개신교 진영에 속하였고 그나마 루터파나 칼빈파가 아니라 모라비아 형제단 소속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조인될 때 그는 보헤미아 형제단을 대표하는 감독이었다. 그들의 처지는 유럽 정세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아야 했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는 공적인 교단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2년 후인 1650년에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 가는 어머니, 형제단 교회의 유언]이라는 글을 썼어야 했을 정도이다. 코메니우스는 말하자면 세세한 부분을 끝까지 의심하고 앉아있을 여유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의 개혁이 너무나 절실했다. 그는 아마도 보헤미아나 자신의 처지가 인간들의 잘못된 사고들에 연유한다고 보았을 것이고, 정말 정당한 의미에서의 개혁이 절실해 보였을 것이다. 그는 그런 개혁의 방법으로 교육이 최선이라 보았던 것 같다. 그것은 정치적 종교적 헤게모니를 쥐지 못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영역이었는지 모른다. 그로서는 개혁이 절실했고 그런 만큼 교육이 절실했고, 정치적 개혁이 아닌 교육적 개혁인 만큼 인간을 참인간으로 만드는 전인적 개혁의 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범지 사상이 이렇게 역사적 환원 속으로 다 빨려 들어갈 수는 없지만, 역사적 상황은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원인이 되는 역사적 요인에서 우리는 이미 그 이후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다. 코메니우스가 개혁이라고 할 때는 형제단이 팽개쳐지는 사람들의 악의와 정치적 협잡에 대한 불신을 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그 시대는 코메니우스의 이런 개혁의지를 중세적 신학의 발로로 밀어 부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미래지향적이라 생각하는 데카르트 세계관에 의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계는 실상 그렇게 흘러왔다. 데카르트는 그 이후 20세기 말까지 이르는 계몽주의 시대의 비조가 되었고, 코메니우스의 존재는 그저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코메니우스없이 데카르트를 출발점으로 해서 포스트모던까지 온 현대에 코메니우스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고스만등의 말대로 그가 정말 포스트모던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가 그렇게 훌륭한 학자였는데 애석하다고 가슴을 치자는 것인가? 아니면 그에게서 얻을 어떤 지혜가 있다는 것인가? 현대가 그에게서 얻어야 하는 것도 다분히 실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의 교육학은 분야마다 많은 통찰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일관적으로 자리잡은 개혁에의 의지는 일관된 개혁을 성취해가야 하는 우리에게 견고한 하나의 정신적 지주가 될 것이다.


2.교육학자로서의 코메니우스

그의 교육학을 끄는 핵심적 동력은 범지혜(Pansophie)이다. 판조피는 세계의 전체적인 것과 관련하여 알려는 지식4)을 말하는 것으로, 그 목표는 세상의 모든 사람(omnes)이 세상의 모든 것(omnia)을 철저히(omnino) 알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는 왜 이런 범지를 추구하게 되었을까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럴 수 있는 요인은 둘로 생각된다. 하나는 그가 가진 세계이해이다. 말하자면 그는 세계의 전체적인 상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세계가 그러하므로 그 세계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는 그의 개혁 사상이다. 세계가 그러하다는 것을 왜 알아야 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철저히 앎으로서 세계가 개혁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인간사물의 개선에 대한 일반적 제언]의 구성을 보면 그것을 선명히 알 수 있다. 이 기획은 7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첫째가 전세계적인 각성에 대한 호소(Panergesia)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가 범세계의 개혁(Panorthosia)이고 마지막이 범세계에 대한 경고(Pannuthesia)이다. 세계를 향하여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과 개혁을 목표로 하는 그의 지향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5)

세계의 개혁을 위하여 모든 사람이 세계 즉 모든 것을 철저히 알아야 했으며(범지혜), 이를 이루기 위해 교육이 요구되었다. 범교육학은 범지혜의 틀을 실제로 채워가는 교육실천의 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라는 면에서 범교육학은 전인간 세대의 각 개인을 돌봄에 관련되어 있다. 모든 것이라는 면에서 범교육학은 최고의 이상과, 하찮은 것, 그저 그런 것을 알고 마침내 모든 것을 알게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철저히라는 것은 가시적이거나 허위가 아니라 진리대로 철저히 아는 것을 말한다. 범교육학은 이런 이상을 이루어내려는 실천적 방법의 제시인 것이다. 특히 그는 전인간 세대의 각 개인을 돌보는 것을 범교육학을 통해서 확립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범교육학에서 태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한 철저한 배움을 기획하고 있다.

범교육학에서 보듯 그는 평생교육의 이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그 마음에 품고 있었다. 즉 학교는 전 삶의 세계 안에 결합되어 있는6)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그의 교육은 궁극적으로 삶의 자질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지가 단순한 전공적 지식이 아니라, 삶의 자질을 얻는 빛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빛을 가지고 전 삶을 알고 살아내는 것이 범교육학의 지향이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이 교육학자로서의 코메니우스의 사상적 면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신학자로서의 코메니우스

코메니우스가 신학자라는 것은 그가 ‘교육이란 무조건 중요한 거야’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코메니우스의 근본적인 중요성은 역시 그가 신학자였다는 데 있다. 고스만등은 그런 코메니우스의 면모를 예민하게 파악하여 두었다. 그는 코메니우스가 그 시대 백과사전을 비판하였던 것을 매우 중요한 실마리로 보고 있다.7) 어떤 경우에도 ‘모두’라는 면을 중시한 코메니우스는 일면 백과사전식 학문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계통없이 늘어놓는 것은 코메니우스가 목표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하되 백과전서파 같은 것이 될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식의 요점들은 어쨌든 달리 정돈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돈된 나무 더미가 아니라 살아있는 숲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하여 철저히 안다는 범지의 사상은 그런 계통성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즉 창조 전체의 충족과 깊이를 생각하는 지혜여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교육이라는 실천의 자리로 나가기 전에 가져야 하는 우주론 형이상학 혹은 존재론이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창조세계였고 그래서 이것을 궁구하는 그의 연구는 신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신학적 계통을 잡고 볼 때 세계는 하나의 배움의 장으로서 자연의 책, 정신의 책, 성경책을 제공하는 셈이다. 자연의 책이란 외부 세계로서 우리는 감성을 통해서 이를 지각해 들인다8). 정신의 책이란 우리 인간의 이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오성의 규정을 통해서 명확해 지는 것이다9).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를 신앙으로 읽는다10).


4.코메니우스의 인식론

그의 신학의 단초를 말하면서 이미 그의 인식론에 대해서는 말한 셈이다. 그는 세계의 책을 자연의 책, 정신의 책, 성경책이라고 함으로써, 그것을 인식해 들일 인식기관을 이미 지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바로 감성과 오성과 신앙이다. 인간의 인식 능력에 대하여는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에는 이성만을 인식 기관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중세로 들어오면서 신앙이 또 하나의 인식 방법론으로 부상하였다.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말은 단지 하나의 과장법이 아니었고, 중세 인식론의 골간이었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이 중 신앙은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신념 체계이지 인식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인식 이론을 잘 담고 있는 것이 칸트의 인식이론이다. 그는 사람의 인식 능력을 감성과 오성과 변증적 이성으로 보았다. 감성은 모든 사물을 수용해 들이는 기관이고, 오성은 수용해 들인 대상을 규정하는 기관이다. 변증적 이성은 감성적으로 수용해 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마치 감성적 대상이 있는 듯이 구성해서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중세로 말하면 신앙이라는 인식 원리이다.

이런 것을 감안할 때 그의 인식론은 역시 중세적이다. 그가 신앙이라는 인식의 원리를 당시의 어떤 사람보다 견고히 지켰던 것은 신앙적으로는 모범적이지만, 철학적으로는 신화적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한 그 무엇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철학을 함에 있어서 신학적 전제를 흔들림 없이 받아낸 것은 오늘날도 후학들의 귀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보이는 그의 인식론에서는 시대를 앞질러 가는 인식론의 발전 같은 것은 없다.


5.그의 사상적 위치 잡아보기

그의 인식론에서 그의 사상적 위치를 규정해보기 위해 들어가기 전에 할 수 있다면 해야 할 일은 그의 범교육학의 실제 체계를 간략히 구성해보는 일일 것이다. 그는 교육학자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 가지고 있는 의미를 종합하여 이 범교육학의 틀을 짜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그가 신학적으로 교육학적으로 가질 수 있는 종합적인 내용이 나타날 것이다. 또 한 가지 할 만한 일은 그의 개혁가로서의 자취를 밟아가 보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의 저서들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그의 생생한 소망 같은 것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세부를 연구할 수 있는 다음 단계로 미루고, 이제까지의 내용에서 나타난 코메니우스의 경향을 가지고 그의 철학사적 위치를 잡아보기로 하자.


①중세적 경향과 관념론적 요소

앞서 자주 말한 대로 코메니우스는 기본이 중세적 신학자요 철학자이다. 그가 중세적이라는 것은 이른바 학문의 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놓지 않고 계속 학문 전개의 핵심적 요소로 가지고 있으려고 했다는 뜻이다. 인식론적으로 말해서 그는 중세적 인식의 원리인 신앙이라는 요소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데카르트와의 대조라는 면에 있어서도 그는 역시 중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철저히 의심하고 이성적으로 의심할 바 없는 세계를 세워보는 것이 데카르트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처음부터 이를 미더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창조주 하나님이 세우신 아름다운 세계라는 전제하에서 그의 학문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의 실천성이라거나 평화주의라거나 하는 것은 매우 발전적인 방향이지만 이것 때문에 그의 중세성이 중세성이 아닌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코메니우스가 완전히 뒤떨어진 중세인은 아니었다. 그의 인식론은 물론 중세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 틀 자체가 계몽주의 전체를 관통하는 관념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인식기능으로 감성과 오성을 생각했던 것이 특히 그렇다. 중세만 하여도 인식 기능으로서 이성과 신앙이라는 요소를 내세웠지 이성을 감성과 오성으로 명백히 나누어 접근하지는 않았다. 감성과 오성의 분화라는 것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칸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것이 바로 여기 맺혀져 있다. 즉 진리를 취함에 있어서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 자체를 중심적 위치에 놓는 것이다. 감성은 여전히 외부 사물을 수용해 들이지만 오성은 그 수용해 들인 대상을 적극적으로 구성해서 가진다는 것이 인식론상의 근대성으로서 아주 중요하다. 코메니우스에게는 그런 단초가 보인다. 그는 세계 자체를 볼 때 자연의 세계와 분리해서 인간 정신을 정신의 책이라고 불렀고, 그와 관련된 인식 기능으로서 오성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성경책을 하나님의 뜻을 읽는 배움의 대상으로 분명히 기술한 것도 얼마간의 근대성을 보인다. 그것은 단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아니었고,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세계관이었다. 정확히 일치시킬 수는 없으나 후일 칸트는 바로 이런 원리를 변증적 이성이라는 인식의 한 기능으로 규정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이런 용어를 용납할 수 없었겠지만 단지 철학적 조류라는 면에서는 그렇게 어림잡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②그의 ‘Pan'이 보여주는 경향

모든 것을 철저히 궁구한다는 사상이 코메니우스 외에는 아무에게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집대성으로서의 체계를 구성하려는 철학을 한 사람들이 있다. 중세를 대표하는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며, 근세를 대표하는 사람은 헤겔이다. 그런 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주의자였다. 그는 이성으로 자연 세계를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까지도 깨달을 수 있다고 본 사람이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의 모든 것과 하나님에까지 도달하는 체계를 형성시키려 하였다.

헤겔은 아퀴나스식으로 할 수는 없었다. 합리론과 경험론 그리고 칸트를 거치면서 이미 근대적 인식론의 방향이 매우 선명하던 때에 그는 철학을 하였다. 그는 아마도 데카르트식의 엄밀함이 도무지 넓은 세계를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변증법적 논리학을 방법론으로 갖는 세계의 틀을 짜는 철학을 하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그가 가진 변증법적 체계란 결국은 모든 것을 흡인해 들이는 체계를 말한다. 한 시대의 정신이 있는데, 그것에 마주 서는 것이 나타나면 그냥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두 정신을 넘어서는 단계로 고양시켜 올리는 것이다. 이것을 지양(Aufhebung)이라 하는데 이 지양된 단계에는 이미 서로 달랐던 두 정신이 혼융되어 들어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지양의 지속을 이른바 세계정신의 발로라고 보았다. 말하자면 세계정신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코메니우스에게서 포스트모더니티를 추구한다면 어디보다 여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코메니우스의 범이라는 사상은 가히 민중적이라 할 만하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철저히 깨닫는 것. 헤겔은 그렇지 않았다. 시대정신이 앞서 나가면 무지렁이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따라가야 하고 세계정신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여야 했다. 그런 모순성을 지적한 것이 도스도엡스키의 ‘죄와 벌’이라고들 말하지 않는가? 코메니우스는 체계성 혹은 전체성이라는 틀 안에서만 자신의 학문을 전개하였으나, 그가 만약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티를 만났다면 그의 학문은 상당히 다른 방향을 가지고 인간해방적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수 있다. 그의 평화주의나 개혁론은 그런 단초들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가 올바른 언어 이해와 세계 이해를 위해 세계 도해를 저술한 것은 참으로 기념비적이다. 이것이 시청각 교육의 귀감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배후에는 모든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해방이라는 그의 사상이 분명 들어있는 것이다.


③그가 베이컨과 한 경향이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코메니우스가 베이컨을 그리 벽안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무엇이든 왕성한 관심으로 알아내려고 노력하였던 모습은 코메니우스의 찬양을 받을 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베이컨의 동조자였다고 하는 말은 전혀 궤를 벗어난 말이다. 이미 계속 확인하는대로 그는 그저 모든 것을 알자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어떤 분명한 체계를 따라 인식하자는 것이었다. 고스만등이 지적한대로 코메니우스는 백과전서식 학문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코메니우스가 궁극적으로 얻고자 한 것도 많은 것에 대한 모든 지식이 아니라 모든 것이 들어있는 체계를 깨달음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과학적 의미의 실험정신 같은 것은 아니었다. 세계의 개혁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철저히 아는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차라리 고스만등의 지적대로 사회 정치적인 면을 가진 학자였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11) 그리고 종말론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천년 왕국으로 이끌 진리의 빛을 주고자 한 것이 그의 학문의 궁극적 이유였다. 그를 베이컨과 동렬에 놓는 것은 그를 단지 교육학자로 단편적으로 본 것에서 빚어지는 실수라고 해야할 것이다. 고스만등은 그의 사회 정치적인 면과 종말론적인 면을 종합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모든 사물을 올바른 위치에다 세우는 일에 있어서,…… 또한 종말론적으로 민감한 정치에로 나아가는 교육적이면서도 관조적으로 책임지는 정치신학에로 연결시키려고 감행한다.’12)


④결어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그는 형이상학적으로는 아퀴나스와 헤겔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인식론적으로는 중세에서 근대에로 넘어가는 자리에 있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포스트모더니티를 가졌다면 그것은 그의 인간학에서이다. 이 모든 것은 그의 ‘Pan'이라는 정신 안에 녹아 있다. 그것이 이렇게 여러 가지 면모를 보이는 것이라면 그의 ’Pan'의 철학은 그 자신만의 독보적인 철학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어떤 조류를 논하기 앞서 그가 고백이 뚜렷한 신앙인이었음을 우리는 또렷이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