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메니우스의 범지혜와 교육
정일웅 교수
[서언]
코메니우스의 범지혜와 그의 범교육학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사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기본적인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범지혜와 범교육학에 대한 개념들이 대두되기 전까지는 대체로 코메니우스는 17세기에 자연주의적이며, 사실주의적인 철학(Realism)에 근거한 교육학자로 알려졌고, 그의 유명한 대교수학(Didactica magna)과 세계도해(Orbis sensualium pictus) 등을 통하여 현대교육학의 이론적 기초를 놓은 교육학의 아버지로 평가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 전제한 이 두 개념들이 제기되면서, 코메니우스는 단순한 일반교육학의 아버지가 아니라, 신학자요, 철학자요, 교육학에 있어서도 엄격하게 말하면 기독교 교육학의 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그의 모든 교육의 원리와 방법은 철저히 성경에 기초하고 있으며, 특히 종교개혁의 개혁신학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 그리고 그의 교육론은 단순한 학교 교육적 차원의 교수방법론이 아니라, 범지혜를 통한 인간교육, 즉 세상의 모두를 모든 것을 통하여 진정한 인간성의 완성으로 인도하려는 범교육이 그의 교육론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모두 밝혀지게 된 역사적 근거는 코메니우스의 불후의 대작이요, 미완성 작품으로 알려진 7권으로 된 “세계개혁을 위한 제안서”가 발견된 후부터이다. 이 책의 내용들은 모두 코메니우스가 라틴어로 작성한 것들인데, 원 제목은 “De rerum humanarum emendatione Catholica consultatio”라는 라틴어이며, 독일어 역을 참고하면, “인간개선을 위한 보편적 담론, 또는 보편적 제언(충고)”으로 이해된다. 코메니우스는 이 책들에서 범지혜(제3권)와 범교육(제4권)을 통한 인간의 변화와 범지혜를 획득한 그들을 통한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적합한 구조로 고쳐지도록 개선을 희구했던 것이다. 그동안 미완성 작품의 원고는 부분적으로 1-2권의 내용이 코메니우스가 작고한 직후에 출판되기도 했지만, 원고의 전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미로에 묻혀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1935년에 취체브스키(D.Tschichevskij)에 의하여 독일의 할레에 있는 한 고아원의 도서관에서 1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라틴어원본을 발견함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1966년에 지금의 체코에서 라틴어 원본이 책으로 묶어 출판되었고, 지금까지 체코어, 독일어, 영어로 번역하여, 그 뜻을 부분적으로 밝히는 중에 있으며, 아직도 그 작업은 계속되고 있기도 하다2).
코메니우스의 교육사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하여 완전한 인간성을 이루도록 철저하게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범지혜를 통한 범교육의 핵심이다. 그는 실제로 17세기 구라파의 여러 지성인들에게서 거론되었던 범지혜에 대한 사상을 범교육의 과제로 제시하고, 실천한 최초의 사람이 된 것이다. 특히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성경에서 찾아내었고, 실제로 그의 교육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기독교적이며, 성경적이라 할 것이다.
코메니우스 교육론의 중심적인 주제는 앞서 전제했던 것처럼,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지혜로 철저히 교육하려는 그의 범세계적인 교육에 있다. 그는 이러한 범지혜로 가르치는 교육의 실현을 위하여 그가 썼던 여러 책들을 통하여 밝히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언어의 문(Janua linguarum)과 사물의 문(Janua rerum)이 있으며, 후에 범지혜의 전주(Prodromus der Pansophia)라는 소책자와 빛의 길(Via lucis)이란 책 등에서, 그리고 그의 유명한 대교수학(Didactica magna)도 이러한 맥락에서 쓰여진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범지혜로의 교육은 그의 다른 글들을 통해서도 계속적으로 표현되었고, 제기되었었다. 그리고 1658년에 이르러 사물의 실제를 병행하여 학습하도록 그림을 이용하여 만들었던 ‘세계도해’(Orbis sensualium pictus)는 범교육의 실천을 위한 교재(敎材)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코메니우스는 수많은 책과 글을 통하여 그의 교육적인 지혜의 유산을 많이 남겼다(대교수학전집,Opera didactica omnia: 1657).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범지혜를 통한 범교육은 매우 고전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그리고 오늘날도 현대교육과 그 교육의 실제를 되돌아보게 할 뿐만 아니라, 교육의 근본원리와 방법에 있어서 많은 도전과 교육적 지혜를 제시해 준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교육적이며 신학적인 사상을 살펴보는 것은 학문적 연구의 새로운 가치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들은 오늘날도 현대 기독교 교육과 실천신학(實踐神學)이 자기 학문의 역사성(歷史性)을 밝히는 일에 필요할 뿐 아니라, 기독교 교육의 새로운 학문적 이론의 원리(原理)와 방법(方法)을 추구하는 일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육철학(敎育哲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전제에서 필자는 그의 범지혜와 범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새롭게 밝히고, 한국의 교육계와 신학계에 알릴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범지혜란 무엇을 의미하며, 코메니우스는 그것을 통하여 무엇을 원하며, 왜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등에 대하여 그 교육적이며, 실천적인 그리고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성격과 의의들을 밝혀 보게 될 것이다. 물론 필자의 이 글은 코메니우스 연구의 대가인 독일의 클라우스 샬러 교수의 책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의 교육학”에 많이 의존하였음을 밝힌다.
1. 범 지혜의 의미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범지혜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래 희랍어 판(παν)과 조포스(σοπωσ)란 말의 합성어로 라틴어에서 그대로 번역하여 사용한 말이다. 첫째는 판(Pan)이란 접두어와 다른 하나는 조피아(sophia)란 말이다. 판은 우리말에 “모든”, 또는 범(汎)이란 접두어에 해당하는 말이며, 조포스란 “지혜”(知慧)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말에서 “모든 지혜”, 또는 “범 지혜”로 번역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이 말을 “우주의 지혜” 또는 “범세계적인 지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3).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존재하는 우주 만물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며, 그것들의 목적(目的)과 유용성(有用性)은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려져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한 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야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되돌리기 위하여 요구되는 ‘모든 것의 하나’(uni-versum)요, 우주인 세계의 전체에 관계된 지혜(Sapientia)를 뜻하는 것이다4).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세상의 일반적인 지혜와 구별하여, 우주전체를 아는 것보다 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인식하려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대상)사이에 간격을 좁히고, 인간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지혜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5). 샬러교수는 역시 그러한 상태에 이름은 알려고 하는 주체와 인식하려는 객체(대상)사이에 대립이 아니라, 일치, 또는 조화를 이루는 하나됨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범지혜는 사물의 올바른 질서적인 관계를 밝혀주고 비추어주는 지적인 이해의 빛이라고 일러준다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시 판(Pan)의 의미에 대한 것인데, 화란의 신학자 판데어 린데는 코메니우스의 판(Pan)을 해석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삶의 과정 전체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7). 샬러 교수는 그의 연구서에서 역시 코메니우스가 이해한 판의 의미를 네 가지로 해석해 주고 있다.
“첫째, 판은 전체라는 의미와 함께 구성된 본질의 의미를 강화하며, 질서적 관계에서 생각된 과정의 끝마침과 완성을 가리킨다는 것이며, 둘째, 판은 모든 인간적인 앎과 행동에 기초하여 존재하는 것은 관련 없는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는 전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말이며, 셋째, 판은 모든 인간적인 앎과 행위는 모든 사물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그의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 것이며, 넷째, 판은 교육적인 관계에서 범교육의 길이 자유로이 무엇을 창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 가운데서 읽어내며, 발견해 내도록 함을 암시해 주는 최종적인 방법론의 개념”8)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샬러의 해석을 다시 종합해 보면 판은 존재하는 것들의 전체를 총칭하는 말이며, 전체의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질서적 관계에서 과정의 끝과 완성을 말해 준 것이다. 그리고 판은 다시 존재하는 모든 것(전체)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뜻하면서, 인간의 앎을 통하여 지향해야 할 목적과 목표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판은 범교육에 있어서 모든 것을 알게 하고, 발견하게 하는 교육 방법론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교육방법에 있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전체를 통찰하는 통전적인 시각(Integrationseinsicht)을 제공하는 방법론으로 여겨진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이러한 판의 개념과 지혜와의 관련성을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찾았는데, 특히 롬11장 36절의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한 말씀에서 모든 만물의 존재목적이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모든 존재들의 가치와 의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범 지혜이며, 그러한 모든 만물이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인간에게 인식되며, 또한 그 존재의 목적대로 창조주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을 전제하여, 그 목적 성취에 필요한 지혜를 , 모든 지혜, 또는 범지혜라고 불렀고, 그 지혜를 찾도록 돕는 것을 범교육이라고 명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범지혜는 모든 존재하는 것을 단순히 아는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디서 와서, 왜 존재하며,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것인지를 바르게 인지하고, 그 목적대로 사용하게 되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범지혜(汎知慧)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지혜(知慧)란 말과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서, 코메니우스는 역시 하나님의 빛 밖에 서있는 사람에 의해서 나온 사물에 대한 철학은 무지, 또는 왜곡된 지식이라고 불렀다9). 그것은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무관한 지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이 다시 온전해 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 즉 지혜의 근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을 다시 알아 가는 지혜(知慧)가 요구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범지혜요,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유일한 지혜로서 범지혜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10). 그리고 그는 범지혜가 무엇과 관계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역시 신명기 29:28절을 인용하여 밝혀 주고 있다11).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 역시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비밀한 성격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서 행하여야 할 책임적인 것임을 동시에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계시와 범지혜와의 관계
코메니우스는 범지혜의 대상을 하나님의 계시(啓示)와의 관계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범지혜에 속한 계시의 원천적 내용을 세 가지로 명명하게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세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가시적인 사물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는 이성적 활동을 통한 인간의 정신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공동적인 진리를 나타내신 인간의 정신, 또는 마음을 가리킨다. 셋째는 성경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원천적인 하나님의 것에서 얻어진 앎이 진실한 앎이요, 올바른 지혜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계시와의 관계에서 이해된 범지혜는 사물세계의 총체성 안에서 인간과 관계하게 된다.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세계는 한번 계시된 사물과 본질의 불변적인 요소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활동분야인 것이다12). 여기서 하나님의 우주 만물 속에 살아 역사 하시는 계시의 역사성이 전제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와 연관된 범지혜는 이교도(異敎徒)의 지혜(일반적인 지혜)와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서 코메니우스는 역시 성경의 계시와 아무런 관계없이 존재하는 지혜는 불완전하며,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나, 포르피리우스에 의해서는 그 어떤 인간도 참된 진리에 이르지 못함을 지적한다13). 그 이유는 신적인 계시들 없이 인간은 그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중세기의 스콜라 철학도 이에 속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철학도 인식의 원리로서 성경을 취해야 하며, 그것을 외면하는 것에서 완전한 진리에 대한 앎이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평가한다14). 이것들은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 본성적인 인식의 원리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계시는 역시 성경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물론 범지혜는 추구하는 방법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지주의의 철학적인 앎과 원리적으로는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리의 앎이요, 지혜이기 때문에, 그 방법에 있어서는 형의상학적(metaphysisch)인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범지혜의 추구야말로 기독교 철학이며, 일반철학과 구별하여 기독교 철학이야말로 초형이상학(Hyper- Metaphysik)으로 명명하기도 하였다15).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모든 인간들은 범지혜의 주체(主體)라고 한다. 여기 주체란 말은 그 지혜를 실제로 알아가고, 획득한 지혜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할 책임자들이란 면에서 인간이 범지혜의 주체(Subjekt)자요, 그 지혜를 책임지는 자로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범지혜의 주체요 사용의 책임자들인 모든 사람을 가리켜 옴네스(Omnes)로 부르며,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알아야 할 객체(Objekt), 즉 대상(對象)으로서 옴니아(Omnia), 즉 ‘모든 것’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범지혜를 배우고 가르치며, 알게 하는 방법을 코메니우스는 라틴어로 옴니노(Omnino)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모든 방법’이란 말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뜻으로서 모든 방법의 총체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옴니노(Omnino)란 말은 오히려 배워야 할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근원적으로 완전하게 아는 것으로 교수방법의 책임성을 강조한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물의 근원적인 관계와 목적과 의의(義意)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살핀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계시와 관계된 범지혜로의 가르침을 위한 범교육의 철학적인 명제를 세 가지 헬라말로 표현하게 되는데, 그것이 판테스(παντεσ), 판타(παντα), 판토스(παντωσ)이며, 라틴어로는 옴네스(Omnes), 옴니아(Omnia), 옴니노(Omnino)로 불려진다. 이점에 대하여는 다시 뒷부분에서 상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3. 범지혜의 앎을 추구하는 코메니우스의 방법론
1) 비교연결법
코메니우스는 범지혜를 알게 하는 방법론으로 어떤 것을 제시하는가?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독특한 방법을 제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비교연결법(Synkritische Methode)이란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데카르트가 인식론적으로 사용했던 인간의 이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분석적인 방법과 베이컨이 창안하여 교육적으로 적용했던 분석하고 종합하는 귀납적 방법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분석적인 방법(Analytische Methode)과 종합적인 방법(Synthetische Methode)의 연결 가운데서 하나의 비교를 통하여 상호 연결된 관계를 밝혀 내는 작업 가운데 찾게되는 방법이었다.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와 베이컨이 제시하는 분석적이며, 종합적인 방법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방법만으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돕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 이유는 자연과 사물의 앎에 제시된 데까르트와 베이컨의 방법은 인간의 이성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한 방법이며, 하나님과 함께 알아 가는 방법(Conscientia)이 아니라는데 문제제기의 원인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물론 코메니우스는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에서 보여주는 분석적이며, 종합적인 성격을 수용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비교연결법과 연결시켜 실제적인 범지혜를 추구하는 방법론으로 실제화 하려는 것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여기서 배움이란 단지 사물 자체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와 그 존재의 목적인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목적대로 사용되도록 함에 대한 ‘목적 실천적인 지혜’를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비교 연결법은 이미 그의 범 지혜의 세 가지 신적인 계시적 내용과 관련 속에서 추구하게 하는 통전적이며, 종합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새롭게 제시된 독특한 앎의 방법이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에 대하여 그 시대적으로 여러 가지 평가가 있었으며, 특히 샬러 교수는 코메니우스의 범지혜를 얻게 하는 방법론을 연역과 귀납의 절정이며, 종합과 분석의 절정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16).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방법론을 이미 그의 유명한 ‘대교수학’이란 책에서 상세히 적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자연의 학습은 모든 것을 분석한 후에 종합하여 판단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코메니우스의 비교 연결법은 자연은 원리에 따라 모든 존재영역에 예외 없이 효력을 갖는 질서가 지워져 있다는 것이며, 그 안에서 방법의 필요성이 증명된다는 것이다17). 그리고 비슷한 것들은 항상 같은 생각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비슷한 것들의 비교를 통하여 이성의 유사성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원래의 출발과 근원을 인지하면서, 존재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들이 판단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의 방법을 그는 비교연결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교 연결식 방법론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으며, 그의 ‘범 세계적인 빛의 길’(Panaugia)이란 글에서 분석과 종합과 비교연결법의 세 가지 방법론에 대하여 거울과 망원경과 현미경의 비교를 통하여 다시 한번 자세히 밝혀 주고 있다고 하겠다18). 범 교육학은 어떻게 인간이 비교 연결법에 의하여 모든 지혜(세 가지 책: 자연, 정신, 성경)를 조화 있게 가르치고 배우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학습방법을 보여준 것이라 할 것이다.
2) 비교 연결법과 빛의 조명관계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범지혜를 추구하는 방법로써 ‘비교 연결법’(Synkritische Methode)은 단순한 인간의 이성적 활동만을 통하여 모든 지혜의 앎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빛의 조명에 대한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반영해야 하는 거울의 역할을 전제하고 있다. 코메니우스의 인간이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히 형상론과 관련하여 거울로서의 존재와 역할을 강조한다. 인간은 거울로서 사물을 반영하도록 해야하며, 반영되어야 할 사물은 거울 안에서 사물에 관하여 광채를 들어내야 할 빛 가운데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시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시며, 그 분이 비추는 빛 가운데서 가르치며, 배워지는 앎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다(Wissen)는 것은 머리로 짜낸 이성의 독자적인 방법의 도움으로써의 앎이 아니라, 앎은 하나님의 빛의 중재 가운데서 이루어 질 때 실제적인 앎, 올바른 앎이 가능해 진다고 보았다19). 여기서 모든 사물과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빛의 비추어주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 빛 가운데서 가르침과 배움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움을 하나님과 함께 배우는 의미로 ‘콘 스키엔티아’(conscientia) 란 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의 빛의 도움을 위하여 세계 개혁을 위한 제언서의 두 번째 책 “범세계적인 빛의 길”(Panaugia)의 마지막에서 코메니우스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 “오 빛의 아버지시여, ......홀로 모든 만물 위에 확산된 어두움을 몰아 낼 수 있는 당신의 빛을 우리에게 불붙게 하소서! 그 빛에서 우리의 모든 연기에 휩싸인 등불들과 인간적인 허구들의 희미한 불꽃들이 물러가게 해야 합니다”. 물론 코메니우스가 이 기도에서 간구 하는 빛과 빛의 불붙임은 성령의 도우심이요,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의 진리에 대한 조명을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앎에 있어서 빛의 조명관계를 그의 범세계적인 빛의 길(Panaugia) 외에도 1641-42년 영국에서 출판한 “빛의 길”(Via lucis)에서 빛의 불꽃에 관하여, 그리고 지혜의 추구에 있어서 빛의 조명관계에 대하여 상세히 다루고 있다20).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빛이 이 세상과 우리의 사물을 보존하는 근원이라면, 세상과 우리를 위하여 빛의 길이 막히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리고 앎을 추구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21). 그러므로 앎은 하나님의 빛 앞에서 우리의 자의로 닫혀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준다. 도리어 빛의 통로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은 제거되어야 하며, 그 장애 되는 것들은 역시 사물의 다양함과 인간들의 여러 가지 일들과 서로 다른 언어들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한다22).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막혀진 통로를 열어 줌의 필요를 강조하면서, 그의 “세계개혁의 제안”(Consultatio Catholica)을 위한 7권의 책 가운데서 범지혜론(Pansophia)과 범교육론(Pampaedia), 그리고 범 언어론(Panglottia)과 범질서론(Panorthosia) 등을 통하여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결과적으로 지금 범지혜를 추구하는 방법은 오직 모든 만물과 인간들이 빛 가운데 머물게 해야 하며, 창조주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의 뿌리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은 진리와 선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될 것임을 말한다23). 그 때문에 오성(悟性)의 조명을 위해 하나님은 세 가지의 빛의 원천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의 작업장인 창조세계와 우리들의 오성을 결정하고, 해석하는 마음과 양심인 인간의 정신, 그리고 끊임없이 오류를 경고하고, 우리를 되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한 범 지혜의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코메니우스는 강조하는 것이다24).
4. 범지혜의 앎에 이르는 세 단계 방법
1) 앎의 세 단계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앎(Wissen)은 세 가지 단계를 거쳐 목표에 이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이론(theoria)과 실천(praxis), 그리고 사용(chresis)이란 단계와의 관계들에서이다. 이러한 단계의 분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론의 이분법적인 이해, 즉 이론(theoria)과 실천(praxis)의 일반적 이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론(Theoria)은 순수한 이성적 활동을 통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상태와 존재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론적 파악이다. 실천(Praxis)이란 의미와 가치를 삶의 정황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관계에서의 앎을 우리는 학문의 지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면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올바른 앎에 이르는 세 단계의 방법은 과연 어떤 것인가?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이론(theoria)이란 ‘사물’ 자체에 관하여 아는 것으로, 존재의 실재에 대한 그 상태와 성질을 아는 것을 말한다(quod, quid). 특히 첫 단계에서의 앎이란 사물의 출처와 그 역사적 배경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높은 인식의 바탕이며, 표면적인 사물에 대한 정확한 앎을 말한다. 그리고 그 사물의 존재 근거와 이유에 대하여 아는 것은 실천(praxis)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per qiud). 이것은 모든 앎의 핵심이며, 도달하는 중심이며, 앎의 절정에 대한 것이다. 즉 모든 사물의 목적에 대하여 알게되는 근거를 가진 깊이가 되는 것이다. 첫 번째 것이 사물을 알게 되는 지식의 단계라면(notitia), 그것에 비하여 두 번째 단계는 사물세계의 구조 내에서 얻게 되는 통찰을 뜻하는데, 그것은 사물의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을 발견하게 됨을 말한다(intellctus). 세 번째 단계는 그 사물의 목적에 관한 것으로 코메니우스는 이 단계를 크레시스(chresis), 즉 사용이라고 불렀다(ad qiud adhibendum). 이 단계는 앎의 절정의 단계로 즉 사물의 존재 목적을 알고, 그 목적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usus, fruito)25).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앎의 세 단계 과정에서 역시 목표하는 것은 세 번째 단계인 모든 앎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올바른 ‘사용’에 관한 것이다. 여기 코메니우스가 생각하고 있는 앎의 ‘사용(使用)’은 인간의 자의적인 것에 의한 사용(使用)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정하신 바와, 그분의 뜻에 따라 적합하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샬러 교수의 해석대로 하나님 안에서 사물세계의 유래(由來)와 미래 안에 있는 통찰(通察)에 결부된 원래 목적된 대로의 이용(利用)을 말하는 것이다26).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역시 모든 앎의 사용은 결코 인간의 소원의 만족을 위한 소모와 향유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의 모든 것이 하나의 구원을 초래하는 일에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27).
그렇다면 이론과 실천이란 이분법적인 관계에서 앎을 추구하는, 즉 일반적인 지식의 추구와 코메니우스의 삼 단계적인 앎의 방법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분법적 관계에서의 앎의 추구는 그 자체가 이성적인 노력에만 의존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얻어진 지식의 가치를 창조주의 의도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도와 욕심에 따라 사용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의 범지혜의 추구는 그 자체가 홀로 이성적 차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그의 도움으로 함께 앎이 시작되는 것이며, 삼 단계의 앎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하나님의 의향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인식하기 때문에, 실수 없이 자유로운 기쁨의 선택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질(통찰력)과 능력(분별력)을 얻게 되는 것이 범지혜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세 단계의 앎이야말로 참된 앎이며, 그것이 범지혜(Pansophia)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범지혜는 하나님의 책이라는 자연, 정신, 성경의 배움을 통하여 앎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앎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연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혜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범지혜는 다시금 삶의 실제적 관계(자연과 이웃과 하나님)에서 완전한 인간성(인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해야 하는데, 그 인간성의 기본적인 모습이 바로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지성(知性)으로,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덕성(德性)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경건성(敬虔性), 또는 신앙(信仰)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범지혜의 실제적인 본질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지금 자연과학자들이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에 대한 연구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마지막 단계의 사용의 목적에 대한 앎을 통하여, 그들의 연구와 결과들이 창조의 목적에 적합하게 사용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28). 그러나 자연과학자들의 연구는 이미 하나님과 관련 없이 독자적인 이성적 활동에만 의지하여 인간이 바라는 의도와 욕심으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벌써 그 연구는 자연과의 관게에서 지성적으로 문제가 되며, 이웃과의 관계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안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1668년 암스텔담에서 출판한 “빛의 길”(Via lucis)을 통하여, 영국의 왕립학술원(Royal Society)에 모인 베이컨의 제자들인 자연과학자들에게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이며, 그들이 그 과제 수행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이런 관점에서 경종을 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왕립학술원’(Royal Society)에 모인 영국의 과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의 글을 함께 실었고, 그들에게 충고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중요한 것은 데까르트의 인간 중심적인 이성적 사고에만 전적으로 의존된 자연의 탐구에서 파생될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지적하였던 것이다. 또한 베이컨이 제창한 귀납적 방법의 사용에 대한 문제성도 함께 지적하기도 했던 것이다29). 특히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은 자연의 연구를 위해서는 적합한 방법이지만, 그러나 그 방법을 통하여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방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올바른 앎에 이르는 세 단계의 방법론은 후에 코메니우스의 7권으로 된 ‘세계개혁을 위한 제안서’ 중 제 6권, 범개혁론(Panorthosia)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게 된다30). 특히 코메니우스는 이 책에서 이론(theoria)과, 실천(praxis), 그리고 올바른 사용(chresis)에 대한 의의와 가치를 상세히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법지혜를 추구하는 방법론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그것들이 인간의 활동의 무대인 교육(학교), 정치(국가/사회), 그리고 종교(교회)의 영역에서, 그리고 개인과 가정과 학교와 정치적인 일들의 관계에서 “올바른 사용”(chresis)이 어떻게 실현되도록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실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앎의 세 단계 방법론은 현대교육의 방법론으로 다시 재고되어야 할 뿐 아니라, 교회의 신앙교육에 있어서도, 그리고 평신도들의 성경공부에 있어서도 새롭게 적용해야 할 교육방법론적인 착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시각은 오늘 우리가 실감하고 있는 이론(Theorie)과 실천(Praxis)의 부조화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 인간의 착오는 하나님의 뜻한바와 목적한 바를 바르게 파악하지 못한데 연유하고 있으며, 설사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사용해야 하는 절정의 단계에서 모두 자신의 이해관계와 욕심을 우선하여 사용하는 것이 사건의 문제가 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2) 앎과 하나님과의 관계성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코메니우스의 범지혜는 바로 모든 것을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되돌리게 하는데 필요한 앎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참된 앎의 내용들에는 항상 하나님의 가시적인 모습이 함께 하는 것을 코메니우스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그 유래에 있어서 흔적을 자체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각자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그의 “꼭 필요한 한가지”(Unum necessarium)란 책에서 강조하였다. 31). 이러한 하나님의 자연 속에 나타나는 흔적과 지금 범지혜의 추구로서 앎은 서로 연관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 연관 속에서 범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그 깨달음의 목적대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메니우스에 의한 참된 앎이란 범지혜의 획득이며, ‘하나님과 함께 인식하는 것’(conscientia)이다. 그리고 참된 범지혜적인 앎이란 모든 지혜의 핵심이라고 한다. 그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범지혜의 배움에 함께 한 그리스도는 사물과 배움의 과정에 빛을 밝혀 사물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며,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범지혜는 올바른 사용, 즉 크레시스(Chresis)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까르트의 가르침인 진리를 찾음에 있어서는 인간의 이성이 홀로 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빛이라 할 수 있는 이성의 빛이 작용할 수 있는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빛이 함께 하지 않음으로, 사(私)적인 앎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 창조주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코메니우스가 범지혜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무엇을 원하며, 의미했던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범지혜는 그 개념에서부터 포괄적이며,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일깨워 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과 관련 속에서 인식하게 하는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범지혜적 관계에서 모든 사물, 즉 하나님의 것을 이해하도록 하지 못할 때, 인간에게는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며, 완전한 인간성을 견지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게 하는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범지혜에 이르는 방법론에서 코메니우스는 독특한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비교연결법에 대한 것과 범지혜적인 앎에 이르는 세 단계의 과정에 대한 이해이다. 이러한 방법은 그의 이론적인 설명으로 보아 독특한 것이며, 오늘날 우리의 교수방법론 개발에 새로이 주목하고, 연구되며, 검증. 발전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귀납과 연역적 방법의 상이한 성격을 하나의 통합된 인식방법론으로 인지하게 하는 독특성은 크게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앎의 세 단계 과정에 대한 것도, 이론과 실천이란 이원적 관계로 보는 현대 학문의 이론적 체계에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앎의 방법은 역시 인간의 이성, 독자적인 차원의 인식이 아니라(데까르트와 베이컨의 이성사용), 하나님과 함께 알아야 한다(conscientia)는 인식방법은 현대과학적 방법론이 깊이 주목해야 할 원리라고 생각되며, 동시에 기독교 교육의 방법론으로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범지혜와 교육에 대한 착상들은 지극히 창의적이며, 도전적이며, 감동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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