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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J. A. Comenius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글/페터 빌, 번역/정일웅 교수)

이 글은 독일의 신학자 페터 빌(Peter Biehl)이 코메니우스의 생애와 그의 교육과 신학의 사상을 잘 정리해 준 그의 연구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한국의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코메니우스를 소개하기 위하여 본 코메니우스 연구소 소장이신 정일웅교수가 번역한 것을 소개한다. 코메니우스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Johann Amos Comenius(1592-1670)]




코메니우스는 보헤미아(체코의 한 주, 역자 주) 형제연합교회에 속하였다. 이 교단은 1457년 얀 후스(Jan Hus)로 더불어 시작된 체코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생겼으며 그 당시에 중요한 교회조직이었었다; 이 교단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체코의 또 다른 한 주, 역자 주) 인구의 십분의 일을 포괄하였으며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구조 및 체코 문화에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이 교단은 처음부터 박해를 당하였으며 결국은 흩어졌다. 혹자가 역사를 배타적으로 승리자의 관점에서 고찰하지 않는다면,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은 독자적인 종교개혁의 유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종교교육학에서는 우리는 루터와 칼빈 외에 코메니우스에게서 신학과 교육학의 독자적인 모델을 발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관심을 가진다. 코메니우스는, 우리가 현재 교육학의 실제적이며 포괄적인 체계를 그에게서 힘입고 있기 때문에(H. Scheuerl), 교육학의 역사에서 그를 탁월한 역할자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일차적으로 교육학자이기보다는 신학자로 이해하였다. “나는 신학자로 부름 받지 않은 분야에서 뛰어나기를 노력한다면, 이는 특별한 명예가 되지는 않는다고 확신한다. 내가 항상 청소년들을 위해 써온 것, 그것을 나는 교육학자로서가 아니라 신학자로 썼다”(ODO IV, 28; Molnar 1971, 34쪽에 따라 인용함).
코메니우스는 교사, 목사, 정치적 대변인과 교단의 마지막 감독으로서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것만은 아니다; 그는 신플라톤적-형이상학적 전통들, 신비주의적 경건성과 다가오는 계몽운동의 시대를 결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시대의 격변기에 살았었다. 그의 사상에는 근세적 세계이해가 나타났다. 그는 학문, 정치와 종교의 포괄적인 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하였으며 모델적으로 선취하여 실현시키려고 시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근세적 사고의 특정한 경향들은 반대하였다. 그는 데카르트에 동의하였지만, 그러나 데카르트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투쟁하였다. 그는 방법적 회의, 주관과 객관 사이의 분리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세적 교육관들의 개인성과 자기 실현의 사상은 알지 못하였다. 신앙과 이성은 그에게서 보편적인 세계관에로 결합된다. 가장 강한 모순들을 자신 안에서 합일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바로크 시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구라파에서 근세의 중심 경향을 주도했던 데카르트와 갈릴레이, 홉스와 로크와 같은 사상가들은 코메니우스와는 다른 길들을 갔다. 다음 세기들은 데카르트와 베이콘을 따랐고 코메니우스를 그들이 의미하는 생각으로 읽었다(Mollenhauer 1985, 60쪽을 참조하라). 종교교육학은 그 사상이 근세적인 주관-객관-분리에 앞서고 기독교 종교를 결코 주관성에만 두지 않는 교육학적 신학자를 만난다. 비록 우리가 근세적 사고의 발전을 퇴행시켜서 직접적으로 코메니우스에 결합할 수는 없지만, 그의 사고는 우리 상황에 언제나 비판적인 도전을 제시한다. 우리는 그 사이에 근세의 저 중심 경향에서 나오는 사고의 위험들을 의식하게 되었다.


1. 코메니우스의 생애와 저작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1592년 5월 28일 니브니체(Nivnice: 북 보라비아)에서 태어났다;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아버지의 출생지이며 그의 이름이 따와진 콤나(Komna; Komensky, 라틴어 형태로는 Comenius)가 있었다. 그는 소년 시절을 그의 부모가 살았던 우헤르스키 브로드(Uhersky Brod: Ungarisch Brod)에서 보냈다. 11세 때 그는 고아가 되어 스트라쯔니체(Straznice)의 한 친척 아주머니 집에서 생활했다; 거기서 그는 보헤미아 형제단의 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를 통하여 그는 배움에 눈뜨게 되었고, 가능한 한 많이 배우는 자로서 코메니우스는 더 배우고 싶은 갈망이 생겼다. 남부 모라비아 지방에서는 전쟁, 페스트와 기근이 흉흉했기 때문에, 그는 1608년에 비로소 프레로프(Prerov: Prerau)에 있는 형제단의 라틴어 학교에 보내졌다. 삼 년 후에, 벌써 그는 그의 공부를 외국에서 계속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헤르보른Herborn)에서(1611-1613), 그 후에는 하이델베르크(1613/14)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의 학창 시절을 그는 슬프게만 회상하였다; 그의 소년 시절은 “스콜라적 허풍들”로 더렵혀졌었다(DM XI, 13, 6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심히 배웠음에 틀림없다: 그는 성직자 신분에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의 학교 지도자인 형제단 선배 라넥키(Lanecky: Lanecius)의 추천과 주지사 제로틴(Zerotin)의 후원으로 헤어보른으로 갔다. 헤어보른에서의 새로운 칼빈주의 사상을 기초한 대학에서의 연구는 그에게 지속적인 인상들을 남겼다. 그는 그의 동료들보다 나이가 좀 많았으며 매우 양심적으로 연구하였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한 피셔-피스카토아(J. Fischer-Piscator) 외에도 젊은 철학교수 알스테트(J. H. Alstedt)가 그가 “좋아하는 선생”이었다. 이 두 선생들의 신학은 천년왕국설에 강하게 각인이 되었었다. 피스카토아는 그에게 교육학에서의 새로운 노력들을 알려주었었다(W. Ratke). 알스테트에게서 코메니우스는 박식-백과사전적 노력의 인상을 받았다. 벌써 헤어보른에서 코메니우스는 체코 백과사전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 저작 "우주적 일의 극"(Theatrum universitatis rerum;1616-1618)은 기본 관심사에 있어서만 그의 선생의 전제들에 일치하였다; ”전지(Allweisheit)"는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활동적 인간에게다 두었다(Hofmann 1985, 29쪽을 참조하라). 코메니우스는 암스테르담, 마르부르크와 기센으로 여행하였다. 헤어보른에서 그의 첫 번째 철학공부가 시작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코메니우스에게 이레니우스적 이데아들을 자극시킨 페레우스(D. Pereus)가 그의 선생이 되었다. “평화는 신앙과 지식이 철학 안에서 서로 하나로 삼투되었을 때 비로소 획득되어질 수 있다는 통찰은 하이델베르크에서의 대학시절의 결과이다”(Roehrs 1985, 36쪽). 평화를 실현시키는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그의 신학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친필 편지를 받았으며 1614년, 돈이 거의 떨어졌기 때문에, 걸어서 프라하를 거쳐서 모라비이로 되돌아왔다. 우선 그는 프레로브(Prerov)에 있는 그의 옛 학교에 교사가 되었으며, 라트케(Ratke)의 교수법에 따라 수업하려고 계획하였다. 1616년에 그는 성직에 임명되었으며 1618년 모라비아-슐레지엔 지역의 도시 풀넥(Fulnek)에서 처음으로 교회에 시무하였다; 동시에 그는 형제단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의 초기의 다섯 개의“하늘에 보내는 서신들”(1616/17)에서 코메니우스는 사회적인 문제에 몰두한다. 합스부르크에 대항하는 보헤미아의 봉기가 일어난 동안 그는 보헤미아 입장들과 “겨울 왕"(프리드리히 5세)의 편에서 같이 활동했다. 프라하 근방의 백산(Weisser Berg) 전투(1620년 11월 8일)와 후에 그는 스페인 군대를 피하여 여러 곳을 옮겨다니면서 숨어야 했었다. 그의 부인과 그의 어린 두 자녀들은 페스트 때문에 죽었다. 그는 깊은 내적 위기 가운데서 작은 위안의 글들 외에도 체코의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저서들을 저술하였다: 이성과 신앙 사이의 대화인 ”슬퍼하는 자들“(1623ff.), 철학적 명상집인 세상의 중심(Centrum securitatis,1633)과 무엇보다도 먼저 서사시적인 작품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천국(Labyrinth der Welt und Paradies des Herzens,1623)은 그의 더 후기의 교육학적 및 범지학적 저서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사상들은 니콜라스 쿠자와 야콥 뵈메를 연상케 한다. 하나님은 만물의 중심, 존재의 원 근원이다. 인간이 이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그만큼 더 불안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심에로의 회귀가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다. 세상의 미로(Labyrinth der Welt ..)는 위로서로서 널리 확산되었다; 이 저서는 체코 문학의 보석이다. 이러한 높은 가치평가는 체코 망명자들의 어느 시구에서 분명해진다: ”우리는 아무 것도 취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크랄릿츠 성경과 세상의 미로만 빼고“(Lochmann 1982, 14쪽). 우리는 이 문화 비판적인 저서를 근대적 현존재 분석들의 선이론적인 증빙으로 읽을 수 있다.
세계 여행, 미로를 통한 여행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의 투쟁으로 상승되는 외화의 연극 이다. 삶의 다 형태적인 상황들을 대하게 되는 순례자는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도상에 있다. 그의 동행들, 비유적인 인물들인 많이 아는 체 하는 자(Fuerwitz Allerwei)와 몽상(Wahnhuld)은 그가 접하는 진리를 기만으로, 단순한 허위로 왜곡시키려고 시도한다(플라톤의 동굴에 갇힌 자들을 참조하라). 두 동행인들은 보완적으로 작용한다: 한 사람은 사태 앞에서 끊임없이 회피하도록 강요하고 또 다른 한 사람 몽상은 모든 것을 뭉텅하고 무해하게 만든다. 인간은 기만과 습관으로부터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순례자가 혼돈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심연을 인식하는 순간 동행들은 도망가야 한다. 찾는 사람은 향할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이럼으로써 구원의 가능성들이 그 자신의 내면에서 열린다(“Paradies des Herzens"). 그는 선생을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그 선생은 그의 양심 안에 있어서-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해석된다- 그에게 새로운 안경을 준다. 그러나 이번의 이 안경은 사물들의 본질을, 우주의 숨겨진 질서를 인식하는 안경이다(Patocka 1971, 12-14쪽을 참조하라).


1624년 코메니우스는 감독(Bischof)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그후 곧 교단의 과업을 받고 신앙의 자유를 위한 피난처를 준비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났다; 동시에 그는 제로틴(Zerotin)의 두 영주들의 밀사였었다(폴란드, 베를린, 작센, 덴막으로의 여행). 1627년 그는 아직 몇 달을 보헤미아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서 그는 리사(Lissa: Leszno)로 망명을 가라는 레츠칭카(Leszczynka)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었다. 거기는 오래 전부터 폴란드 및 독일의 형제단 교회가 있었다. 겨울 추위 때 그는 1628년 2월 1일 거대한 산의 고개에서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마지막 성직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고향을 등졌다. 리사에서(1628-1641) 그는 우선은 김나지움의 교사(Kantor)였으며 1632년부터는 교단의 중진으로 서기직을 맡게 되었다; 1636년에 그는 학교를 이끌어 가는 교장으로 임명된다.
리사에서는 백과사전적 논문들 외에도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교육학적 저작들이 나왔다: 그의 어머니학교의 소식(Informatorium der Mutterschul, 체코어로는 1628년에. 독일어로는 1633년에 출간됨), 이 저서는 초보화 교육의 새로운 구상이다. 빈번하게 출판된 라틴어 문법서와 전문서인 열려진 언어의 문(Janua linguarum reserata, 1629-1631)과 그의 ”대 교수학“의 체코판, ”보헤미아의 교수법,1628-1632); 좀 늦은 라틴어판은 암스테르담에서 교수학 전집(Opera didactica omnia)로 출판되었다(1657). 관건이 되고 있는 것은 신학적 및 인간학적으로 포괄적으로 정초 된 교육기획 (Bildungskonzept) 및 교육구상이다; 신분도 성별도 성경에 대한 접근을 결정할 수 없다. 리사는 망명자들의 이주 후로 확장되어 형제단의 공동체의 삶의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코메니우스는 그 공동체의 삶 안에서 곧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와 프리드리히 왕의 죽음(1632) 후에 고향에로의 귀환이 멀어졌을 때, 그는 직접적인 교회와 학교의 재건을 위한 개혁의 제안들로부터 그의 일생의 주제, 즉 “범지학”(Allweisheit)과, 지혜의 신학의 기획에, 사물들의 가장 내면의 본질을 파악하는 전체 지식의 프로그램에 더 강하게 관심을 돌렸다. 그는 1634년에 그의 범지혜의 전주(Praeludia der Phansophie)에서 기획적으로 우연적인 지식의 분열로부터 심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근본적인 지혜에로 이르는 사물들의 전체 조망에의 길을 스케치하였다(Lochman 1982, 19쪽을 참조하라). 그의 명성은 특히 그의 ”언어의 문들“을 통하여 커졌다. 그는 네들란드, 프랑스, 독일, 스웨덴과 영국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그는 학교제도를 개혁해야 했다. 영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친구들(예를 들어 John Dury, Samuel Hartlieb)이 1639년 코메니우스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옥스포드에서 범지혜의 전주(Praelude)를 출판하였으며, 런던에서 그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코메니우스를 초청하였다. 코메니우스는 범지학의 전주(Prodromus Pansophiae)의 첫 판을 무효화하고, 그 책을 보완할 기회를 얻으려 하였다. 그에게는 범지학의 실현을 위한 전제들이 호의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는 탐구여행을 결심하였다. 단찌히(Danzig)에서 폭풍우 속에 출발하여 그는 1641년 9월 21일 런던에서 그의 친구들에 의해 명예롭게 환영을 받았다. 영국의 국회는 그에게 범학문적 연구를 위한 빛의 길을 주도하는 것과 학교제도의 개혁을 맡길 것을 숙고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이를 위한 계획들을 그의 문화 정치적인 저서 빛의 길(Via lucis)에서 하나하나 서술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존 윌리암스(John Williams)와 존 핌(John Pym)과 함께는 개인적인 접촉을 하기에 이르렀다. 코메니우스는 다시 그의 “범지학”을 위한 사회적 토대를 얻었으며, 범지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평화가 이루어진 시대에 관련하여서 인간적 일들의 개선을 위한 정치적인 프로그램이 되었다(Schaller 1978, 17, 18쪽을 참조하라). 영국에서 크롬웰의 승리로 끝난 시민전쟁이 시작된 지 칠 일째인 1642년 6월 21일 코메니우스는 런던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이 계획들의 구성적인 실현을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개선사역의 정치적-실천적인 의도를 다시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 정치적인, 하나님의 평화의 의지의 관철을 위한 노력은 책임감을 유지한다. 런던에서는 백과사전으로부터 범지학에로의 전향이 최종적으로 이행되었다. 그는 이제 프랑스나 북아메리카(하버드 대학)에서 범지학 연구소들을 설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단의 희망을 따라 스웨덴에서 철강산업을 주도한 루이스 데 기어(Louis de Geer)가 스페인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아들였다. 여기에서 그는 그의 교회를 위해서 가장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고통스런 여행 중에 그는 시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를 높이 평가한 데까르트(Rene Descartes)와 함께 네 시간을 토론할 수 있었다(화란의 라이덴에서). 그는 스톡홀름에서 자신의 책에 따라 라틴어를 배웠던 스웨덴의 크리스틴 여왕으로부터 영접을 받았다. 그녀의 재상 옥센티에르나(A. Oxenstierna)는 그를 스웨덴의 학교개혁을 위해 필요한 교과서들을 편찬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기어(Geer)는 사적인 재정적인 보조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재상도 웁살라 대학의 총장에게서도 그의 범지학에 대한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엘빙에서 스웨덴 교과서들을 편찬하기 위하여 거기로 이주하였으며(1642-1648), 범지학은 밤에만 계속 작업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침내 다시 한 번 그의 대가족과 함께 넓은 집에 살게 되었다; 그는 리사로부터 라틴어 언어학과 문법에 대한 네 권의 책을 완성시키는데 있어서 그를 원조하는 도움을 받았다. 그의 교회의 희망에 따라 그는 1645년 폴란드 왕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토른(Thorn)에서의 종파들 간의 평화회담(Colloquium caritativ-
um)에 참여했다. 이 평화회담은 - 코메니우스가 1646년 그의 두 번째 스웨덴 여행에서 확정했듯이 - 모순들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개신교들과는 단 한 번도 의사소통이 없었다. 코메니우스는 당파들 사이에서 그의 복잡한 위상과 그의 협력자들과의 논쟁 하에서 시련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스웨덴 후원자들은 그가 교과서들을 편찬하는 일에 있어서 뒤쳐져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 작업과 그의 본질적인 일생의 과업 사이의 긴장은 이제 강하게 대두되었다. 하르트립은 범지학의 실현과 관련하여 질질 끈다고 그를 비난한다. 자신이 그것을 밤낮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코메니우스는 1647년 그의 세계개혁론(Consultatio)의 첫째 부분인 범각성론(Pangersia)과 그 전체의 스케치를 보냈다. 세계개혁론(Consultatio)의 정확한 제목은 인간사물의 개선을 위한 보편적인 제언(De rerum humanarum emendatione consultatio catholica)이다. 이 저서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인간적 일들의 개선에 관한 심의”이다. Consultatio의 중심 테제는 “마리아의 아들이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는 인류의 개선자”라는 것이다(CC, I, 1088쪽). 에멘다티오(Emendatio)는 보편적인 개선과 갱신을 의미한다. 코메니우스는 모든 인간에게 정치, 학문과 종교를 개혁할 것을 호소한다. 그의 저작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 저서에서 그는 죽을 때까지 되풀이하여 새롭게 기획하고 확대하면서 작업했다. 이 책은 “범교육학”을 중심으로 하여 일곱 부분들을 포괄하고 있다. 의도된 것은 “범지학” 뿐만이 아니라, 또한 범개혁론(Panorthosia), 지식의 최고의 단계로서의 적용, 곧 모든 영역들에서의 인간적인 관계들의 개선이었다. 보헤미아의 형제단 교회는 두 사람의 장로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코메니우스를 1648년 그들의 첫 번째 대표(Praeses)와 교단의 재판관으로 초빙하였다. 코메니우스를 원조한 폴란드 왕이 갑자기 죽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 그의 부인은 병들어 리사로 갈 것을 재촉했다 - 아주 서둘러 엘빙을 떠났다. 감독으로 직위를 받은 후 그의 부인이 죽고 그에게 어린 두 자녀들과 장성한 두 딸을 남겼다. 스웨덴 군대들이 프라하를 노략할 수 있기 전에 전쟁은 끝났다. 베스트팔렌 평화회담에서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가에게 세습지로 약속되었다. 교단은 스웨덴의 상응하는 약속들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교회로 인정받지 못했다. 수상 페르디난드 3세는 보헤미아에서 신교 신앙고백의 금지를 고수하였다. 실망과 비탄에 젖어 코메니우스는 스웨덴 재상에게 편지를 썼다. 헛수고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그는 “죽어 가는 어머니, 형제단의 유언”(1650)을 편찬하였다. 그는 그의 교회가 죽어 가는 것을 보았으며 그 지체들이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들을 받도록 배려하였다. 신학자들에게 그는 다른 교회들로 갈 것을 권고하였다(Lochman 1982, 26쪽을 참조하라). 그 자신은 이러한 운명의 타격 후에 중병이 들었다. 1650년 4월 그는 헝가리 사로스 파탁(Saros Patak)로 오라는 영주의 과부의 초청을 따랐다. 지벤뷰르겐에서는 신교로 개종한 라콕지(Rakoczi)가의 보호 아래 형제단들이 피난처를 찾았다. 여행 중에 그는 은밀하게 고향을 방문했으며 슬로바키아에서의 형제단 교회들의 활동을 재조직하였다. 헝가리에서(1650-1654) 그는 그의 범지학적 표상들을 학교 모델로 실현시킬 가능성을 획득했다. 그는 1650년-이제 세 번째 결혼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Saros Patak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고등한 학교를 맡아 그 학교를 위해 특히 출판소를 차렸다. 그는 이것으로써 “싸움”을 놀이와 즐거움으로 변모시키는 큰 성공을 가졌다. 연극표상들에서는 학습내용들이 대화적 형태로 유희적으로 매개되었다. 그는 여덟 개의 교수법적 연극, 놀이학교(Schola ludus, 1653/54)을 썼다. 헝가리에서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저서 세계도해(Orbis sensulium pictus, 1653/54)가 탄생되었다.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세계의 통일적인 질서는 상응하는 글들을 단 180개의 상징들로 단계적으로 매개되었다. 계획된 일곱 학급의 범지학적 학교(Schola pansophia, 1650/51) 가운데서 세 학급의 라틴어 학교만이 실현되어질 수 있었다. 문학적 작품은 교육학적 양태의 것만은 아니다; 그는 두 권의 사회정치적인 저서들을 편찬했다: 민족의 행복(Gentis felicitas, 1659)과 다윗에게 향한 나단 선지자의 밀언(Sermo secretus Nathanis ad Davidem I, II). 1651년 코메니우스는 젊은 영주 지기스문트(Sigismund)를 “겨울 왕”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에게는 다시 -드라빅(M. Drabik)의 예언들을 통해 원조를 받아- 정치적인 희망들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영주는 벌써 1652년에 사망했다. 코메니우스는 그릇된 제안들을 하였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1654년 리사로 다시 소환되었다. 그는 학교를 젊은 교사들에게 넘겨주었다. 리사에서(1654-1656) 그는 부분적으로는 벌써 세계의 개혁을 위한 제언(Consultatio)를 완성시켜 나갔다. 그는 스웨덴의 구스타프(Karl X Gustav)에게 폴란드로 와서 전 영토를 점령할 것을 요청한 팜플렛을 편찬하였다. 스웬덴인들은 리사를 그냥 두었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이 앞으로 밀고 나왔을 때, 그들은 리사를 불태웠다. 그의 책들과 수고들은 불에 탔으며, Consultatio에 대한 많은 원고들도 불에 탔다. “1656년 4월의 리사의 파괴”를 코메니우스는 “역사적 신실”로 그려냈다(Abdruck bei Riemer 1970, 66-75쪽을 참조하라). 아직 폐쇄된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형제교회의 나머지는 온 셰계에 흩어졌다. 슐레지엔에서의 몇 번 헤멘 후 가족을 숨기고서 그는 자신의 예전의 과업 주문자인 루이스 데 기어(Louis de Geer)의 아들의 손님으로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는 그 도시의 시의회로부터 명예롭게 영접을 받았으며 거기에서 그의 삶의 나머지를 보냈다(1656-1670). 라우렌티우스 데 기어(Laurentius de Geer)는 그에게 집을 한 채 주었으며 마침내 창작의 자유를 가능케 해주었다. 암스테르담 시는 그의 교수학전집(Opera didactica omnia, 1657)의 출판을 맡았다. 교단의 체코 교회, 폴란드와 독일 교회들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출판사에서 중요한 예배식적 저서들, 자신의 영적인 노래들 중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암스테르담의 찬송(Amsterdamer Kanzional), 대교리문답서와 형제단의 신앙고백을 출판하였다(1662). 그는 자신이 모금한 원조금들을 흩어진 교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많은 대학들에서 공부하고 있는 신학자들을 도왔다. 그가 결코 잊지 못하였던 Fulnek 근방의 그 자신의 예전의 교회를 위해 그는 1661년 간략한 질문과 대답으로 된 기독교 카톨릭종교(Die uralte christliche catolische Religion, In kurtze Frag und Antwort vervasset)를 편찬하였다. “그는 종파적인 논쟁문제들을 건드리지 않고 이 비밀스러운 형제단의 그 어떠한 교회적인 조직에 대한 연계를 전제하지 않고서 참된 기독교의 원리들을 논구한다“(Blekkastad 1969, 611쪽). 비밀스럽게 확산된 문답교시는 이 교단이 100년 이상의 핍박을 견디어내게 하는데 일조 하였다. 1666년 Geer의 사망 후에 출판사는 팔려져야 했었다. 1667년의 영국과 네들란드 사이의 평화회담들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브레다(Breda)에서 대사들에게 평화의 천사(Angelus pacis)란 서신으로써 유럽과 전체 기독교에 대한 책임을 엄명했다. 1668년 그는 왕립학술원(Royal Society)에 대한 선물로써 빛의 길(Via lucis)를 런던에서 출판하였다. 동년에 그는 “겨울 왕”의 아들에게 그의 일생의 저작 꼭필요한 한가지(Unum neccessarium)를 헌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애의 결산을 눅 10: 42절에 비추어 내리고 있다.


그는 세 가지 신비적 상징들, 미로, 시지프스와 탄탈로스를 삶의 상징들로 해석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실례로써 우리를 삶의 모든 미로들로부터 이끌어내어 필요한 것을 부수적인 것으로부터 구별하도록 도와주는 실마리를 주셨다. 구별의 이러한 기술이 범지학의 기술이다. 이 저서는 그가 자신의 인생의 미로들을 서술하는 감동적인 10장으로 끝난다. 그는 정신 집중된 냉 정함 가운데서 필요한 것에만 헌신하고자 한다. “나는 나의 하나님께 그가 나를 내 전체 삶을 통하여 동경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린다. ... 내가 나의 행위를 조망하면, 그것은 일 에 바쁜 마르다의 일이었으며 ... 혹은 방황과 안정의 끊임없는 변동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이 것은 나의 확고한 계획이다- 마리아와 함께 주의 발아래 앉아 기뻐하는 마음으로 부르짖는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 28)”(10, 2, 140 이하 쪽)1)


자신의 마르다-저서를 그는 네 가지 측면으로 나누었다: 교육학적 측면, 평화 정치적인 측면, 범지학적 측면과 예언적 측면. 그는 그의 세기의 하나님의 “계시들”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러나 그는 니느웨의 요나의 실례와 하나님이 그의 뜻들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에 연관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코터(Kotter)와 포니아토브스카(Poniatowska)와 드라빅(Drabik)의 환상들을 다시 한 번 어두움에서의 빛(Lux e tenebris)란 제하에 출판하였다(1665); 이 환상들은 터어키 전쟁(1663/64) 때 새로운 현실성을 얻었다. 이 저서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강렬한 비판을 일으켰다. 자신의 비판가들에 대하여 그는 계시의 역사(Historia revelationum,1659)에서 자신을 변호하였다. 1659년에 그는 독일에 대한 마지막 나팔(Die letzte Posaune ueber Deutschland)란 팜플렛을 가지고서 터어키 방어와 제국 내에서의 교란된 관계들에 관하여 상의하여야 할 레겐스부르크 국회로 향했다.


신비적 상징들로써 관철된 어느 설교에서 그는 제국 내의 관계들을 예레미아 시대의 이스라엘에 서의 관계들과 비교한다. 독일은 하나님의 징벌들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터어 키가 이 제국을 침공할 수 있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의 실수들을 통하여 불의들은 더 증가하였 다. 기독교의 해방과 합일, 내부에서의 국가의 강화가 터어키 방어를 위한 전제이다(Blekastad 1969, 617쪽을 참조하라).


암스테르담에서도 그는 그의 주저 세계의 개혁안(Consultatio) 작업을 하였다; 이 거대한 작업의 첫 번째 부분만이 출판될 수 있었다. 그것은 단편으로 남았다. 그는 임종하는 침상에서 그의 아들에게 이 저서를 출판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 책의 출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저서는 취췌브스키(D. Tschizeskij)가 1935년 할레(Halle)에서 사본을 발견할 때까지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추종자들과 첨예한 신학적 및 철학적인 논쟁들을 벌이도록 도전을 받았다.
엘리아의 경고의 외침들(Clamores Eliae, 1665-1670; 1974년에야 비로소 출판됨)는 최후의 인생기로부터 나온 달필의 기록들이다; 이 기록들은 인간의 실제적인 관계들을 다시 산출하거나 개선하기 위하여 코메니우스가 세계의, 유럽과 개별적인 민족들의 장래에 대하여 어떻게 숙고했는지에 대해 해명해준다. 경고의 외침은 평화의 천사(Angelus pacis)처럼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것에 대한 포고이어야 한다. “엘리아”에서는 사상에서의 한 가지 전환이 인식된다: 그는 인간적 관계들의 개선을 더 이상 일차적으로 범지학으로부터, 특수하게는 교육학에서 기대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을 교육학보다 우선시켰다(Schaller 1978, 37쪽을 참조하라). 언급된 사회 정치적 저서들에서 이러한 전환이 벌써 예고되었다(상동서 38 이하들 쪽을 참조하라). 코메니우스는 학문, 정치와 종교에 있어서의 희망 없는 관계들에 직면하여 왜곡과 타락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들을 자기 주위에 모으는 엘리아와 같은 사람이 와야 한다는 천년설적인 확신의 소유자였다. 드라빅의 예언들을 근거로 하여 그는-기록들이 보여주듯이- 그 자신이 마 17: 11을 성취하는 “세 번째 엘리아”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고심하였다. 그는 1632년 이후로 개혁을 위한 상설기구(Perpetuum Mobile)의 작업을 한다(상동서 52 이하 쪽을 참조하라); 범지학의 적확성이 강력하게 증명되어야 했었다: 인간은 자체적으로는 죽은 물질을 그치지 않는 운동으로 바꿀 수 있다.



울름(Ulm)으로 소집되어야 할 세계 종교회의에 그는 이 기계를 선물코자 했으며 - 갈멜산에서 “모세의 지팡이”를 표식으로 든 세 번째 엘리아 - “강력한 경고의 외침을 제시하고자 했다(Michel 1978, 162 이하 쪽을 참조하라). 그는 범지학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첫 번째로 행위들, 새로운 실천이 등장해야 했다! 행위가 관건이 되는 곳에서는 세 가지 ”도구들“이 필요하다: 상설기구(Perpetuum Mobile), 옛 계시들과 새 계시들(성경과 Lux e tenebris)와 범지학.
코메니우스는 그의 일생 동안 우선은 고향의 모든 인간적 관계들의 갱신과 개선, 그리고 난 뒤에는 전 세계의 모든 인간적 관계들의 갱신과 개선이란 목표를 추구하였다; 이 목표에 이르는 길들은 변화된다: 첫 번째는 교정된 신플라톤적 철학의 길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행위에로 고무하는 종말론의 길이다(Schaller 1978, 57쪽).
1670년 10월 코메니우스는 두 번째의 졸도하는 발작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작업해 나갔다. 1670년 11월 15일 네들란드 정통주의의 지도적인 대변인인 마레시우스(Maresius)에 대항한 변증서를 작업하던 중 그에게 갑자기 죽음이 닥쳤다. 일 주일 후 그는 암스테르담 근방의 나르덴(Naarden)의 프랑스 개혁 교회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2. 신학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그의 일생의 저작이라고 하기에 마땅한 교육학의 역사에서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신학의 역사에서는 그는 나타나지 않는데, 문답교리의 역사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코메니우스는 독창적인 조직신학자가 아니며, 그의 신학은 오히려 전적으로 실천적인 면에 향해졌다. 그렇다. 그의 교육학은 “전적으로 실천신학과 다르지 않다”(Schaller 1967, 162쪽). 샬러(K. Schaller)는 1970년에도 그의 연구 보고서(1970, 101쪽)에서 사람들이 현대적 코메니우스 연구에서 쓸데없이 신학적인 요점을 찾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 이래로 사정은 변하였다(Schaller 1985, 61-124쪽을 참조하라).


2.1 하나님 이해


코메니우스는 사고의 기본 전제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출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세계는 조화로운 전체로 간주되어질 수 있는 근본 신뢰로부터 출발한다. “사물들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지속적인 조화”(Prodromus 99, 135쪽)는 인간에게 인식 가능한 것은 특정한 근본 구조들(창조에서의 원형상들)에 환원되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가능케 한다. 범지학적 존재론에는 세 “책들” 혹은 “무대들”(세계, 정신, 성경)을 가진 인식론이 상응한다. 눈에 띄게 빈번하게 사용되는 삼등분은 기독교적 신앙의 전체가 표현되는 삼위일체의 상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코메니우스는 “몇몇 그의 동시대인들, 무엇보다도 먼저 소시아너(Sozianer) 써클의 몇몇 동시대인들의 신학적-유일신적 경향들을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해서 정렬적인 삼위일체적 사상가인 것만은 아니다. 평화주의자 코메니우스는 이 점에서 비타협적으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논쟁자들에게 맞선다” (Lochman 1982, 37쪽).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 구속과 성화에서 행하신다. 성화는 학문, 정치와 종교의 세 가지 영역들에서 이행된다. 이러한 윤리적 첨예화는 하나님의 주요 속성들, 지혜, 섭리와 거룩성에 상응한다(Vorlaender 1968, 165쪽을 참조하라). 모든 사물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함”에의 충동을 코메니우스는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에 각인 시켰고 그의 말씀 가운데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뜻에서 보고 있다. 순종하라는 외침은 그러나 임박해 있는 세계종말을 통하여, 약속된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그 최종적인 시급성을 획득한다. 창조와 말세는 서로 상응한다. 현실은 하나님께 대한 삼중의 연관을 통하여 구성되어지기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도처에서 현실 가운데서의 삼위일체의 흔적들을 찾는다(vestigia trinitatis). "우리는 전체 피조물 가운데서 신성의 흔적들을 주목함으로써 하나님을 찾는다“(DM 24, 3, 158쪽). 그는 이러한 흔적들을 도처에서 발견한다.



“우리의 방법에서는 우리에게 독특한 것, 바로 사물들의 관습적인 구분들은 삼등분으로 나타난 다는 놀라운 것이 접해진다. 나는 내가 이것을 미신으로부터 인위적으로 찾은 것이 아니라, 모든 특별하고 매우 중요한 사물들에서 사물들의 첫 번째 속성들(일자, 참된 것과 선한 것)로부터 내 관여 없이 있어왔다고, 나는 한 동안 사태의 신기함에 당면하여 아주 아연실색 깜짝 놀랐다고 설명한다. 나는 동일한 것을, 실례들을 통하여 고무되어, 다른 방법으로 시도했을 때, 나는 도처 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았다. ... 그렇다면 이러한 기독교적, 삼위의 신비들을 서술하는 범지 학은 영원한 삼위일체 여호와에, 유일하게 강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선하시고 영원히 경배를 받으 셔야 하는 하나님께 봉헌된다 한다”(Prodromus 107, 145쪽).


“vestigia trinitatis"의 표상은 소위 말하는 자연신학의 관계에 속한다. 이러한 자연신학을 코메니우스는 벌써 일곱 개의 자연적 교리들을 제시한 그의 스승 알스테트(Alstedt)에게서 알게 되었다(Vorlaender 1968, 164쪽). 자연신학은 그의 세기에는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는 검토되어야 한다. 자연신학은 그에게 있어서 ”계시신학“에 대하여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범지학에서 ”보조기능“을 가지는데, 그것도 우주적인 창조신앙과 모든 사물들의 개혁을 위한 노력의 표현으로서 그렇다(Molnar 1965, 62쪽을 참조하라). 알스테트에게 있어서 계시신학과 자연신학의 이중성에는 자연의 책(하나님의 작품들)과 성경의 책(하나님의 말씀)의 이중성이 상응한다. 코메니우스는 여기에서도 그의 삼위 일체적 단초의 의미에서 세 개의 책론(Weber 1966, 14 이하 쪽을 참조하라)에로 확대한다. 세계, 정신과 성경은 그에게 있어서 ”책들“로 명명된다. 그것들 사이에는 평행성이 지배한다; 이것들은 상호적으로 확증한다. 우위는 성경이 갖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생생한 계시를 통하여 우리의 약함과 맹목성을 도우신다(Schaller 1967, 115쪽을 참조하라). 세 가지 책들은 경건성(DM 24, 4, 158쪽을 참조하라) 및 인식의 원천들이다. 세 가지 책들에 상응하여 인간은 진리를 위한 세 가지 ”입사문들“, 전체를 파악하기 위한 세 가지 눈들, 즉 감각, 이성, 믿음(Pamp. X, 19, 321쪽)을 갖는다. 성경이 하나님의 책들 중 가장 표준적인 책이듯이, 신앙은 가장 중요한 인식의 수단이다(Schaller 1967, 127 이하 쪽을 참조하라). 세 가지 ”눈들“ 혹은 세 가지 ”도구들“을 통하여(Pamp. III, 38, 79쪽을 참조하라) 전체와의 접촉이 실현된다; 이 접촉은 이론, 실천과 사용(chresis), 즉 사물들의 사용에서 완성된다. 신앙, 즉 바꾸어 말하자면 경건성은 (덕성처럼) 지식 위에 위치한다. ”자연적인 신인식“은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독립되지 않는다.




2.2 인간학


인간은 누구인가? 코메니우스는 이 질문을 장소설정을 통하여 답변한다. 인간은 전체 피조물에서 중심적인 장소에 있다. 그는 피조물의 중심이나, 그러나 근대적 주관성의 철학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기능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인간은 코메니우스에 의해 거울로 이해된다(Schaller 1967, 132 이하 쪽, 138 이하 쪽을 참조하라). “인간은 밝은 이성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작품들의 중심에 서있다. 이 인간의 이성은 거울의 공-거실에 걸려 있어서 주위의 모든 사물들의 현상을 붙잡는 ...-에 비교된다”(DM V, 4, 47쪽). 거울이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설치되어 있어야 하고 빛이 그 위에 비취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도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봉토로 주어져 있다. 그는 세계 전체를 하나님께 반영할 때 그의 과제를 올바르게 이행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창 1: 26)으로서 그는 하나님을 세계에 대하여 반영하고 세계의 모사로서(“소우주”) 전체 세계의 재반사(Rueckwurf)이다.
이 사고과정은 분명하게 신플라톤주의를 통하여 각인 되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천과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 끊임없이 흘러 넘친다. 코메니우스는 이 러한 발출(Emanation)을 “빛의 길”로 구체화한다. 빛의 흐름은 그러나 신플라톤 도식의 한 측면 에 불과하다; 흘러나옴이 흩날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빛은 다시 그 원천으로 귀환해야 한다. 귀환함의 이러한 기능은 코메니우스의 구상에서는 인간이 수행한다. 인간은 모든 존재자를 일자 에게 다시 인도한다. 모든 것의 근원인 일자에로의 이러한 귀환함을 통하여 비로소 모든 것은 그것의 사태성과 존립을 가진다. 그러한 한에서 인간은 우주의 보증인이다. 빛의 비유에서 인간 의 정신은 거울로 이해되었다(Schaller 1963, 10쪽을 참조하라; “출발(Proodos)"와 "Epistrophe"의 도식에 대한 스케치들, 상동서, 22 이하 쪽을 참조하라; 더 상세하게는 동저자, 1967, 24 이하들 쪽).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는- 이 점에서 그는 루터가 아니라, 형제단의 전통을 따른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자유의지에 있다. 인간이 이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그는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가장 뚜렷하게 일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고 하나님 자신을 그 안에서 볼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으로도 불린다. ... 모사가 원 형상에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그만큼 더 이 모사는 명예롭다”(Pamp. III, 14, 57쪽). 거울비교로부터 하나님 형상성은 인간의 소질이나 속성이 아니라, 관계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하나님의 형상은 언젠가 하나님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은혜이며, 그 다음에는 과제이다. 인간의 인간성은 하나님의 전체 질서 가운데서의 그의 올바른 입지로부터 측정된다. “인간은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을 완성시키시는 매체이다”(Schaller 1967, 135쪽).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적 위치를 가진다; 그는 창조의 완성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대표이며 그의 동력자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야 하는, 인간에게 부여된 규정이다(Vorlaender 1968, 170쪽을 참조하라; Lochman[1982, 40쪽]은 하나님 형상 사상의 이러한 형태에서 코메니우스의 신학적 독창성을 보고 있다).
인간의 타락은 수미일관 하게 올바른 입지를 버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죄는 “다른 곳에-있음”에 있다.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의 빛 안에 있지 않으면, 거울은 공허하다. 인간은 그의 과제를 이행하기에는 “”부적격하게“ 된다. 그는 미로에 갇힌 것처럼 맹목적이다. 그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시작하며, 우리 자신을 통하여 전진하고 우리의 노력을 우리 자신에게 향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로 시작하고 우리의 힘과 우리의 빛을 신뢰한다. 우리는 우리의 장점과 우리의 자랑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다시 우 리 자신에게 되돌아오며 피조물의 허무성을 통하여 곧 거기서부터 도망가고 우리 자신도 쓸모 없는 무로 될 때까지 열광한다. 이것은 가장 지혜로운 자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그들의 불행 으로 빗나가는 모든 육신의 깊은 슬픔의 길이다”(Prodromus 33, 65쪽).


인간의 자기 자랑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롬 3: 27) 인간의 이러한 왜곡은 자기 자신의 규정과 사물들의 규정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Pamp. II, 9, 27쪽을 참조하라). 인간은 그의 일상적인 자기 이해 가운데서 인간 “incurvatus in seipsum"(루터)으로 묘사된다; 샬러(1967, 147쪽)는 근세적인 주관성 형이상학에 대한 가장 분명한 차이를 여기에서 보고 있다. 인간이 그의 타락을 통하여 그의 규정을 버렸다면, 창조는 미완성인 체 머물러야 한다. 창조가 완성되어야 하려면, 인간이 다시 올바른 자리로 되돌려져야 한다. 이러한 교정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는 인류를 고치는 분이시다. 그에게 향함에 인간의 치유가, 자신의 규정에로의 회귀의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그는, 그에 대하여 말해지는, 가장 이성적인 존재, 만물의 주인, 자기 자신의 왕과 그의 창조자
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그가 그의 본성의 타락을 통하여 빗나간 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Pamp.II, 29, 47쪽). 인간이 그리스도와 비슷한 자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는 모든 우리 자신의 의지는 전적으로 타락되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도하에서는 멸망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고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Pamp. IV, 14, 111쪽).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게 된 하나님께로의 향함을 코메니우스는 ”신앙(경건)“이라 부른다(아래의 4.1을 보라).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되돌려졌다면, 그는 그의 과제를 올바르게 이행하고 세계를 개선할 수밖에 없다.


2.3 기독론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산출한다. 그는 “우리 안에서 더럽혀진 하나님의 형상을 재생산하기 위하여”(DM 2, 9, 30쪽)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았으며,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구성되기로 결정된 모든 자들의 “원 형상”이시다(롬 8: 29). 원 형상으로서 그리스도는 동시에 모범이시며 선생이시다. 그의 현세적 노정 동안 그는 그의 지혜의 많은 실례들을 주셔서, 우리는 소년이 어떠한 연구들에 가장 많이 몰두하여야 하는 지 인식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사들의 올바른 사용이 보존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단계적인 상승의 길을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다”(Pamp. VII, 16, 179쪽). 그러나 그리스도는 세 가지 직분을 가지신다. 그는 교사 혹은 선지자이시며, 제사장과 왕이시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교사가 되시며, 자기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기 위하여 제사장이 되시고 모든 피조물을,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통치하기 위하여 왕이 되신다. 그 자신에 상응하여 그는 그의 교회를 이러한 삼중의 직분에로 부르신다(CC, I, 671-678쪽을 참조하라, DM 10, 16, 61쪽을 참조하라). 이럼으로써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성령을 통하여 학문, 종교와 정치에서의 개혁들을 관철할 수 있도록 하신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개혁들을 일으키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되풀이하여 강조한다(CC, II, 399 이하들쪽: Emendationem Rerum Universalem opus fore Christi, omnia unde exciderunt restituentis ...를 참조하라). 혹자는 죄의 심연은 종교개혁자들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복음의 경험으로부터 표현되지 않는다고 반론을 펼 수 있다.


코메니우스는 우리가 끊임없이 타락에 대하여 논하고 “회복(restitutio)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 다면, 우리가 자꾸만 옛 아담이 우리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과시하고 참으로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실 수 있으신 것을 검사하지 않는다는 것”(DM 5,23, 44쪽) 이는 감사치 않음의 표시라고 여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얕잡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상동서 5, 24쪽), 은혜의 우월성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도래를 위한 예비의 의미에서 관계들의 개선을 옹호하고자 한다. 은혜는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최대한의 효력범위를 갖는다. 그는 은혜의 죄와 심판보다 “얼마나 더”(롬 5: 17) 강함과 부활과 그리스도의 최종적 승리의 그의 십자가보다 얼마나 더 강함을 강조한다(Nipkow 1986, 22쪽을 참조하라). 기독론이 그의 신학의 중심부분으로서 그때마다 구체적으로 첨예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의 신학의 실천적인 면에로의 방향과 관련이 있다: 아주 심원하게 개인적으로 각인된 그리스도를 믿는 경건성으로서의 위로서들에서는 그를 경건주의의 선구자로 만들고, 교육학적 저서들에서는 모범과 지혜의 교사로, 정치적인 저서들에서는 그 통치가 벌써 시작되고 또 도래하는 왕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왕권의 모티브로써 코메니우스는 의식적으로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에 결합한다(Lochman 1982, 44쪽을 참조하라).



2.4 희망의 신학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은 그가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범개혁론(Panorthosia)에서 서술하는 인간적인 일들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선의 프로그램을 위한 힘들을 풀어놓는다. 제 2장에서 그는 세계 종말 앞에서의 이러한 개선에의 희망은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정초한다(CC, II, 368 이하들 쪽: Emendationis Rerum Universalis ante Mundi finem esse spem indubiam). 이러한 확신을 그는 한편으로는 창조론을 통하여 근거를 세운다. 모든 인간에게는 지식의 더 나은 빛에 대한 동경이 심겨져 있다; 이 동경은 충족되지 않는다면 미치게 될 것이다(CC, II, 369 이하 쪽을 참조하라). 이 확신에 대한 두 번째 근거는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승리에 놓여있다; 이 확신은 세상에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2). 왜냐하면 이 확신은 사탄에가 아니라, 창조주께 속하기 때문이다(CC, II, 374쪽을 참조하라). 코메니우스는 이 승리가 가까이 왔다는 기대 가운데 살고 있다; 이 확신은 환상들과 예언들을 통하여 지지된다. ”세상의 저녁은 시작되었다. 성찬의 시간이 왔다. ... 이제 개선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새로운 아담이 세상에서 타락된 것들의 개선을 시작하시는 제 칠 천년, 교회의 안식일, 큰 은혜의 세계의 해가 시작된다“(CC, II, 663쪽; Hofm. 404쪽). 코메니우스는 방금 시작된(그는 1655년을 꼽고 있다) 혹은 가까운 장래에 시작될 천 년 동안의 세계 과정을 말하고 있다. 희망은 이렇게 강하게 천년설적으로 채색되었다(Schroeer 1985). 그는 평화의 왕국으로서 벌써 세상의 종말 전에 도래하는 천년왕국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공상적이고 환상적인 천년왕국설로부터는 경계선을 긋는다; ”참된“ 천년왕국 설은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는 기독교적 소망의 핵심에 속하는데, 이는 이 희망이 이를 통하여 혀세적 역사를 더불어 포괄하기 때문이다(Lochman 1982, 45이하 쪽을 참조하라). 그도 물론 특정한 역사적 힘들을 가진 사탄과의 투쟁을 확인한다; 그는 합스부르크에 대한 승리를 종말론적인 카이로스와 동일시하고 이렇게 하여 ”종말론적인 유보“를 포기한다(Smolik 1983, 194쪽을 참조하라).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사이를 구분한다- 역사적 발전들의 결과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모든 사물들의 실제적인,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지평으로 머문다(Molnar 1971, 36이하 쪽을 참조하라).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에 대한 희망의 “부가가치”는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인 사변들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기대되는 통치에 대한 수렴관계에 있는 포괄적인 개혁들의 구체적인 유토피아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두 영역들 안에서의 사고”(본회퍼)를 허용하지 않고 세계에 독자 법칙적이며 독립적으로 머무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코메니우스는 “두-왕국-이론”을 모른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사회의 변형을 향한 활동, 봉사, 희생과 결코 끝나지 않는 일을 요구한다”(Hromadka 1959, 47쪽). 변형은 그리스도의 사역일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의 공조를 요구하는데, 그러나 이 공조는 지금의 사물들의 상태 하에서 더 이상 어려워지지 않게 될 것이다”(CC, II, 399쪽: “Requirere tamen cooperationem nostram, sed eam non adeo jam, hoc rerum statu, difficilem"). 그리스도의 왕권의 예비에 있어서의 이러한 ”신인 협력“은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결코 인간의 칭의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성화)에 있어서의 공조에 관련된다. 종말론은 코메니우스로 하여금 그 개인의 고난, 자기 민족과 자신의 교회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통일성을 고수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Smolik 1983, 194쪽을 참조하라). 인간적 실존의 역사성의 발견을 코메니우스는 그의 역사적 연구들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사이에서 전체 역사에 걸쳐있는 종말론에서 힘입고 있다(Molnar 1971, 38쪽을 참조하라).3)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개혁들은 “부분 목표들”에 한정되었기 때문에(CC, II, 361 이하 쪽을 참조하라; Hofm. 342쪽) 미완으로 머물렀다; 참되고 완전한 종교개혁은 이 땅에 빛을, 이 땅에 평화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고려한다(CC, II, 365쪽을 참조하라; Hofm. 344쪽).
교회들의 지금까지의 (위클맆, 후스, 루터, 칼빈 등등을 통하여 자극된) 모든 종교개혁들은 눈 먼 자의 치유의 첫 번째 행위(마 8: 19-23)를 연상케 할 것이다; 이제 복음서에서의, 눈 먼 자에게 완전한 시각이 다시 주어진(마 8: 24 이하) 그리스도의 두 번째 행위에 상응하는 완전하고 보편적인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이러한 종교개혁은 완전한 종교개혁에 가장 근접하게 될 것이고 전 세계에 빛,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다("toti Mundo ministrans lucem, pacem, salutem": CC, II, 599 이하 쪽).




2.5 에큐메네의 전망


에큐메니칼한 사상과 특정한 선교적 신학은 그의 종말론과 결합되었다. 코메니우스는 에큐메니칼한 종교회의의 소집을 위해 투신한다. 인류의 통일성은 만물의 개선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인류의 통일은 다시금 기독교의 통일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는 통일을 기독교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선교되어야 한다. 선교사상은 인류의 통일사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 “코메니우스는 실천적으로 교육하고 힘쓰는 선교신학을 썬다”(van der Linde 1980, 44쪽). 그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교리적 문제들을 그 당시의 시대에는 놀랄 만한 관용으로써 다루고 에큐메니칼한 합의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인류의 통일은 그렇지만 성직자적 통일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참으로 에큐메니칼한” 종교회의에는 신학자들 외에도 “종국적으로 인류의 구원을 완전하게 하고 지키며 확산시키는 일을 상의하기 위해”(CC, II, 659쪽; Hofm. 402쪽) 전 세계로부터 오는 철학자들과 정치가들도 속한다. "Consultatio"가 세계 종교회의를 위한 대화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철학, 새로운 신학, 새로운 신앙고백과 새로운 시민적 질서가 도입되어야 한다(CC, II, 669 이하 쪽; Hofm. 405쪽). 세 가지 “세계 위원회들”이 설치되어야 한다: 빛의 콜로퀴움, 평화의 재판소와 거룩성의 종교국: 이러한 세계 종교국은 신앙과 경건성을 주목하여야 하고 선교를 배려하여야 하는 교회의 우주적 기관이다(CC, II, 670쪽; CC, II, W. 658 이하들 쪽을 참조하라; Smolik 1983, 199 이하 쪽).




3. 신학과 교육학


신학에 대한 서술에서부터 벌써 교육은 루터에게 있어서처럼 “세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교육은 오히려 신학적으로 정초된 개선(emendatio)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교육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즉 인간을 다시 전체의 중심에 지정하는 것, 그로 하여금 다시 거기에서 그의 과제를 이행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인간은 타락의 상태로부터 이끌려 나와서(educare) 바른 위상에 세워져(in-stituere)야 한다(Schaller 1963, 13쪽을 참조하라). 교육은 인간이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는 장소변동을 이행한다. 이러한 과제는 종결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코메니우스는 전체 삶을 학교로 보며, 그리스도는 전체 교육과정의 모범이시다. 인간이 그릇된 추구로부터 이끌려 나와서 진리의 장소에 데려와지면, 만물의 질서가 그를 교육한다. 일치와 일반적인 조화의 옟 사상은 코메니우스에게서 교수법적으로 방향전환 하였다. 현실의 기본 구조들은 전적으로 사물들의 기저에 놓여있고 모든 구체적인 것에서 간취되어질 수 있고 밝혀질 수 있다(사물들의 원 형상들[exemplaria]). 그의 교육론은 여기에서 전개되어질 수 없다(Heydorn 1971; Buck 1984를 참조하라). 우리의 관계에 중요한 것은 코메니우스가 교육을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근본관련성 안에서 끄집어내는 일반-인간적인 교육이해를 발전시킨다는 사실이다. J. Patocka는 그러므로 그를 이러한 관계 안에서 “교육적 신학자”(1984, 133쪽)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교육은 하나의 “하나님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본질에 관한 첫 번째 주장은 회개이다. 이 회개는 세례와 함께 시작되며 교육을 통하여 완성되어야 한다. 코메니우스는 여기에서 아동세례를 완전성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에로의 “출발점”으로 이해한 교단의 토대 위에 있다. 그러므로 세례는 교육을 그 결과로 필요하게 만든다; 교육은 개선의 사역이 시작되도록 한 이 원천을 되풀이하여 해명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기초에서 무엇이 범-교육학 일반으로 타당한 지가 뚜렸해진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교육학은 하나님을 통한 하나님께로의 길 안내이다”(Schaller 1967, 165쪽). 인간에 대해서는 순종이 기대된다; 왜냐하면 “훈련이 없이는 지도관계가 결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상동서, 167쪽). 훈련(구성되는 기독교적 삶) 사상에는-개별적인 것에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형제단의 신앙고백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 일치한다(Roessler 1986, 160 이하 쪽을 참조하라;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의 칼빈주의에 대해서는 Bectova 1985를 참조하라). 여기에-그리스도의 왕권의 강조에 있어서처럼- 체코 종교개혁과 스위스 종교개혁 사이에 밀접한 관계들이 있다면, “희망의 신학”과 실천적, 사회적 변화들을 목표하는 교육학 사이의 상관관계는 루터에게서도 칼빈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교육학과 신학의 이러한 결합은 천년왕국, 곧 현세적으로 소개되는 천년왕국의 배경 위에서만 이해된다. 코메니우스는 처년왕국적 충동을 헤르보른에서의 그의 개혁적 선생들로부터 받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수용을 위한 전제조건은 그러나 체코 종교개혁의 종말론적 사고방향이 형성하였다(Molnar).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또 하나의 사태가 이해된다. 신학과 교육학의 긴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코메니우스는 교육학의 교권적 후견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었다. 한편으로 그의 교육론의 깊은 민주주의는 그의 신학과 관계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신학과 교육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J. M. Lochman이 모든 영역들에 대해서 확정한, 신학으로부터 나오는 동기들과 관심들이 교육학에로 끊임없이 넘어가는 현상이 시작되고 그 역의 현상도 시작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Perichorese"). 신학은 교육학에서 그 당시의 정통파 신학들에 있어서처럼 폐쇄적인 체계가 관건이 될 때가 아니라, 교육학이 개방적인, 경계를 넘어가는 분과로 이해될 때라야 만이 교육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이러한 방식으로 문을 열어줄 수 있다(Lochman 1982, 33쪽; 1985, 95쪽). 바로 신학과 교육학의 긴밀한 관계가 신학의 개방을 야기 시켰다. H. Schroeer는 계몽과 희망을 더 나은 시대에 풀어놓는 교리학의 ”교수법화“에 대해서 논한다(Diskussionsbeitrag in: Schaller, 1985, 240쪽).


4. 신앙(경건)교육


코메니우스가 교육학의 본질을 규정하는 방식으로부터 교육학 외의 특수한 문답교시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뚜렸해진다; 교리문답적 측면들은 오히려 본질상 기독교적 교육론인 보편적 교육론의 부분이다. 코메니우스는-전적으로 옳지 않다-문답교시의 역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와 관계가 있을 수 있다(예외들: Mueller 1950, 236족; Roessler 1986, 473쪽).


4.1 의도와 다른 교육학적 과제들에 대한 관계


“범교육학”의 최상의 목표는 “모든 사람들을 참된 지혜를 통하여 계몽시키고, 올바른 국가헌법을 통하여 그들에게 다시 올바른 질서를 부여하고 그들로 하여금 참된 종교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여서 어느 누구도 세상에 보내진 자신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Pamp. I, 9, 17쪽). 신앙(종교), 윤리적 교육과 인식의 형성은 이러한 공동의 목표에 소용된다; 이 세 가지 교육학적 과제영역들은 인간의 규정, 즉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자기 자신과 및 더불어 피조된 다른 피조물들을 통치하며 그의 이성을 사용하는 규정에 일치한다. 경건은 시간적 및 사태적인 우위를 갖는다; 왜냐하면 신앙에는 현세와 장래의 삶에 대한 약속들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모든 도야와 교육은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동시에 구원론적인 성격, 즉 인간을 그가 현세의 삶과 장래의 삶에 있어서의 자신의 과제들을 준비할 수 있는(praeparatio vitae aeternae) 올바른 장소에 되돌리는(reparatio) 성격을 갖는다. 인간은 세 가지 거처를 갖는다: 어머니 몸 속, 이 땅과 천국. “첫 번째 삶에서는 우리는 두 번째 삶을 준비하고 두 번째 삶에서는 세 번째 삶을 준비한다; 그러니 세 번째 삶은 그 자체로 끝이 없게 될 것이다”(BD II, 27쪽; Pamp. IX, 28, 245쪽을 참조하라). 이러한 과제는 최종적인 종말론적 지평 앞에서 모든 수업 과목들과 수업 대상들을 결합시킨다. “우리는 영원을 조망하면서 지혜로워야 하며, 지혜롭지 못하게 이 세상에서 행보하지 않아야 한다”(Pamp. I, 9, 17쪽).


신앙과 종교성은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개념들이다(예를 들어 DM 4,6 35쪽과 24,1 158쪽을 참조하라). “종교성”은 “인간의 정신이 지고한 신성과 결합되고 하나로 되는 내적인 경외이다”(DM 4,6). “신앙(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 마음의 끊임없는 향함”(BD XXIV, 172쪽)이다; 신앙(경건)에는 우리의 마음이 도처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를 따르며 그를 기뻐한다는 것이 속한다(DM24, 2, 158쪽을 참조하라).4)


인간은 신앙, 윤리성과 인식형성을 통하여 “교정”을 받도록 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능력을 부여받고 “유능하다”(Pamp. II, 16, 35쪽을 참조하라). 이러한 가능성이 상응하는 제안들을 통하여 현실화될 때, 인간은 신앙(경건)에 대해 교육되어질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신앙(경건)은 훈련이 가능하다(disciplinabilis), “즉 신앙(경건)은 실례들, 지침들과 모방을 통하여 가르쳐질 수 있고 학습되어질 수 있다. 이때, 우리가 진솔하고 겸손하게 노력한다면, 성령께서 같이 사역하신다”(Pamp. V, 14, 127쪽).
신앙(경건)에로 이끄는 도상에서의 수업의 과제는 어린 사람이 “신앙의 사태들과 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획득하는 것이다(DM 24, 2, 158쪽). 올바른 이해의 습득은 이성, 의지와 양심을 통하여 발생한다.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관건이 되는 것은-정통주의의 문답교시에 있어서처럼- 순수한 지식전달과 구원의 진리들의 습득이 아니라, “영을 굴복시켜 하나님께 순종케 하고 그에게 복종하도록 하는” 힘을 소유하고 있는 참된, 보편적인 종교의 이해이다(CC, II, 365쪽; Hofm. 344쪽). 코메니우스가 형제들에게서 발견하는 “참된 기독교”의 옟 이해를 그는 받아들이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더 진척시킨다. 코메니우스가 경건의 세 가지 원천들에 대해서 논하고 성경연구 외에도 자연고찰 및 자기고찰을 내세울 때, 형제단의 전통에 대하여 어떤 새로운 것이 존재한다(Heubach 1952, 100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서의 계시를 통한 올바른 신 인식의 원천이다; 계시로부터 전체 피조물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들은 해명된다. 세 번째 원천은 인간 자신이다; 자기 관찰과 다른 사람들의 실례(욥, 다윗)는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보존하시며 인도하신다는 점을 지적해줄 수 있다. 우리는 삼중의 방식으로 이 원천들로부터 퍼낼 수 있다:: 명상, 기도와 시련을 통하여. 이러한 삼총사에 대해서는 코메니우스는 명백하게 루터를 의거한다(BD XXIV, 173 이하 쪽을 참조하라; DM 24, 6, 158쪽).
특히 “시련”(tentatio)의 관점은 자기관찰(양심의 연구)에 있어서 코메니우스에게 관건이 되는 것은 경건에 있어서의 진보, 신앙에 있어서의 성장과 경험의 획득임을 보여준다. 경건을 위한 교육의 의미는 즉 실천적인 지도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벌써 첫 순간부터 이론적인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실천적인 기독교인들을 형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 종교는 살아있는 어떤 것이다. ...” (DM 24, 22, 163쪽). 신 인식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성경도 우리가 성경적 본문들을 믿음, 사랑, 소망에 연관시킴으로써 그 생생한 경험의 토대에 대해 조회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계시하신 모든 것은 믿음, 소망과 사랑과 맥을 같이 한다. 이것들은 성경의 “핵심내용”이며 실천이다(Pamp. X, 165쪽을 참조하라).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눈에 띄게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삼총사 안에는 성경의 해석과 적용을 위한 해석학적 단서가 존재한다. 실천은 “성화”, “사랑에 넘치는 훈련”을 목표한다. “믿음의 열매들”은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는 절제, 정의, 자비와 인내와 같은 가시적인, “외면적인 일들”에서도 존재한다(DM 24, 26, 165쪽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교육은 경건과 윤리성에 대하여 특히 긴밀한 결합을 맺는다(Pamp. IX, V, 267쪽을 참조하라; XI, 335쪽 등 등).


4.2 신앙(경건)을 위한 교육의 장소


경건을 위한 “교육”은 양친 집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삶 자체에서 시작된다.
코메니우스 자신은 하나의 교리문답서를 썼고 감독으로서 그의 교회에서의 신학교육에 책임을 지고 있긴 하였지만, 우리는 교회 내적인 교육작업에 대해서는 비교적 거의 듣지를 못한다. 개혁의 저서들에서 그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머니학교의 소식(“Informatorium der Mutterschul")과 일반 학교제도의 갱신이다. ”대교수학(Didactica magna)"에서 그는 인간의 학습과정은 24세로 막을 내린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삶의 경험과 그의 범지학적 작업들은 그로 하여금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삶과 신앙을 학습한다는 통찰에 이르게 했다. 그래서 그는 “범교육학”에서 전체 삶을 일곱 단락으로 나누고 인간이 단계적으로 완성에 이르는 일곱 학교들에 부속시킨다: 1. 출생 전 생성의 학교; 2. 초기 아동기의 학교(어머니의 품 속); 3. 소년기의 학교(모국어 학교); 4. 성숙기의 학교(라틴어 학교); 5. 청년기의 학교(대학); 6. 장년기의 학교; 7. 노년기의 학교(Pamp. V, 121/123쪽을 참조하라;DM에서는 “학교들”이 괄호 안에 들어있다). 구성원칙은 특히 코메니우스가 그 개혁 필요성 때문에 특히 집중적으로 몰두한 “성숙기의 학교”에서 잘 관찰된다(Michel 1978, 178쪽을 참조하라).


범지혜의 학교(Schola pansophica)에서 학교는 일곱 학급을 가진다: Classis vestibularis, ianualis, atrialis, philosophica, logica, politica, theologica(ODO III, 47, 20단).5) 첫 번째 세 가지 학급들은 인간이 세 가지 ”하나님의 책들“을 읽는 세 가지 ”눈들“의 순서에 일치하게 감각들을 자극해야 한다; 그 다음의 세 학급들은 사물들(res)의 이해를 밝혀야 한다; 끝으로 신학적 학급은 ”계시된 빛을 매개로 정신들을 하나님께로 고양시키는 일에 소용이 되어야 한다“(ODO III, 46, 20단: postremum pro elevandis Mentibus, vi revelata luci, ad DEUM"). 경험의 과정은 감각적 및 정신적 지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성적인 사고와 순수한 통찰능력을 거쳐서 행위 자체로 나아간다(이러한 단계 구성은 학교들의 순서에서도 발견된다: Pamp. VII, 29, 201쪽을 참조하라). 두 번째의 구분 원리는 세 가지 존재방식들이다: 실제적인 존재자, 정신적인 존재자, 언어적 존재자. 일곱 번째의 (신학적) 학급은 장래의 삶에로 이르는 길과 벌써 이 땅에서 이 길을 걷고있는 자들의 축복을 포괄한다(ODO 46, 20단을 참조하라). 세 번째 구조요소는 벌써 세 가지 마지막 학급 명칭들에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인간의 세 가지 활동 영역들(학문, 정치, 종교)인 세 가지 실현형식들이다. 일곱 번째 학급을 코메니우스는 우리가 단순히 이 시대의 자녀들이 아 니라, 또한 천국의 상속자들을 형성토록 하기 위하여 첨가했다(ODO III, 48. 21단: "ut ne filios tantum seculi hujus formemus, sed Coeli etiam heredes").
인간의 삶과 그의 학교들 그리고 학교들과 그 학급들은 창조의 질서에 일치하게 창조에 대해 조화의 관계를 맺고 있다(Michel 1978, 179쪽을 참조하라). “신적인 연구”는 그러므로 범지학의 전체에 “조화롭게” 편입된다. “범지학”에서 코메니우스는 신학적 분과에 “전체에로 인도하는,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장래의 삶에로 삼투하는” 특별한 과제를 부여한다. “이것은 모종의 숙고들을 통하여, 세상에서 우리에게 대면되는 사물들과 하나님의 비가시적 본질과의, 그의 은혜가 벌써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과의, 혹은 그가 천국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과의 비교를 통하여 실현되어질 수 있다”(Pamp. XII, 363쪽). 이것은 비교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삼중의 책에 포함된 모든 사물들의 비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Schaller 1967, 44 이하들 쪽을 참조하라; Buck 1984, 63 이하들쪽). 감각적 지각, 이성적 삼투와 종교적으로 동기 부여된 행위는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상호적인 조건 및 긴장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여러 가지 경험들을 하며 지각-사고-의지-행위의 단계순서를 거침으로써 새로운 경험들에 개방적으로 된다(좀 다른 개념성으로는 Michel 1978, 182쪽을 참조하라). 성년기로 더불어 세계 안에서의 행위가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에, 학교는 경험과정에 대해서 단지 경험공간으로써 진지한 삶의 전주들로써 가능해질 수 있도록 하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 종교의 작용영역과 관련하여 학교는 “하나님 찬양과 거룩한 연습이 가득한” 하나의 작은 교회, “소위 말해서 숙고를 자극하기 위해서 뜻밖에 단순한 기쁨으로 이행되거나 계획에 따라 이행되는 기쁨들, 아름다운 산보들과 대화들로 가득한 작은 낙원이 되는”(Pamp. V, 28, 137쪽) 것처럼 보일 수 있다.


4.3 신앙교육의 내용들과 매체들


성경은 예배적 훈련들과 외적인 사역들 외에도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기독교적 학교들에서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초기부터 매개되어야 한다(DM 24, 19 이하 쪽, 161쪽).


성경 수업은 소년기(6-12세)에서는 유희에서처럼 습득되어질 수 있는 신중하게 선별된 경구들로 시작되어야 한다(Pamp. X, 1, 287 이하 쪽); 선정의 판단기준은 믿음, 소망, 사랑의 삼총사이다. 제 삼 학급에서는 학생이 “성경적 참고서”를 받기 전에(Pamp. X, 299쪽) “성경사” 수업을 받는다(Chronicon Biblicum). 1658년 코메니우스는 그의 교회의 흩어진 지체들을 위해 이러한 참고서(전체 성경의 참고서 혹은 핵심)를 편찬하였다. 제 사 학급에서는 벌써 이러한 참고서의 소개(“Vorraum")가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역사적-성경적 연극들이 배려되었다(Pamp. X, 299 이하 쪽을 참조하라). 교사들이 학생들을 경건으로 인도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야 하는 제 오 학급에서는 성경적 핵심 경구집(Medulla Biblica)이 제공된다. 여기에서는 벌써 중심적인 성경적 본문들에 의거하여 예를 들어 칭의론과 같은 신앙 항목들에 대한 상세한 지도가 배려된다(Pamp. X, 307쪽을 참조하라).
성숙기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은 그들과 함께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성직자를 가져야 한다(Pamp. XI, 345쪽을 참조하라). 성경사를 중심으로 한 학교 연극들에 있어서는 전체 시대순서와 세계사가 아홉 개의 시나리오적 순서로, 즉 창조로부터 노아, 모세, 다윗,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일곱 가지의 순서로 이루어져야 한다(Pamp. VII, 205쪽을 참조하라). 마지막으로 청년기에는 성경 전체가 신앙의 능력에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전체 교본을 위한 실천적인 지침들을 주고 있다(Pamp. XII, 347, 361 이하 쪽을 참조하라).
그는 단계적인 성경소개-부분적으로는 자체적인 성경적 독본들의 도움으로-를 고려한다; 학생의 직관과 자립성을 장려하는 성경적 장면들을 통하여 그는 형제단의 문답교시적 전통에 어떤 새로운 것을 도입한다.
완전한 신 인식과 전체에 관한 지식은 “그 자체 안에서 조화적으로 균형잡힌 성경 자체”를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또한 “자연의 빛으로부터 획득된 모든 사물에 관한 이성적 사고(rationes)”를 통하여 그리고 “진리의 감각적 구체화”를 통하여 획득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Pamp. VI, 28, 167; ODO III, 47쪽을 참조하라), 지금까지의 형제단의 수업에서 성경을 의미보다는 수업내용으로 사용하는 일은 후퇴한다. 성경은 그 권위를 유지하지만, 그러나 더 이상 전과 같이 유일무이한 우위의 위상은 갖지 못한다; 범지학적 가르침과 우주의 자연적 직관이 종교수업의 내용으로 된다(Heubach 1952, 122 이하 쪽을 참조하라). 중요한 것은 문답교시의 갱신이다.


하나님은 그의 작품들에서 대표되시기 때문에, 그는 가시적인 작품들로부터도 인식되어질 수 있다. 우주의 직관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숭배하는 일에 소용이 있다. “Schola Ludus"에서 우리는 자연 대상들을 다루는 첫 번째 부분에서 코메니우스가 이러한 수업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상상하는 지에 대한 한 가지 실례를 얻게 된다. 바람과 같이 피상적으로는 아주 약한 요소에서 그는 창조주의 힘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서술은 -모든 단락 후에처럼- 성경말씀으로 종결된다(시147: 5). 큰 신학적-범지학적 관계가 두드러져서 실천적인 경건에 이바지하여야 한다(SCHL I,30쪽을 참조하라).
교리문답서는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순수한 교리”의 총체가 아니라, 믿어야 하고 행해야 하며 소망해야 할 것의 요약이다; 교리문답서는 신학적 개요라기 보다는 교화서에 더 가깝다(Pamp. IX, 6, 271쪽을 참조하라; Heubach 1952, 132 이하 쪽을 참조하라). 이 수업은 두 살 때 짧막한 기도를 말함으로써 시작되며 6세까지는 종결되었어야 한다: 주기도문, 저녁과 아침의 축복(Informatorium 64 이하들 쪽을 참조하라, DM 28, 21, 192쪽을 참조하라). "Informatorium"(45 이하들쪽)은 올바른 찬송지도를 위한 지침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영적인 노래는 교단에서는 바로 수업의 고정된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코메니우스는 기도교육에 특별한 주목을 한다. 어머니학교의 소식(Informatorium)은 임신한 여성들을 위한 기도서로 시작하여 부모들과 자녀들을 위한 다수의 상론된 기도들을 포함하고 있다(65쪽을 참조하라; Pamp. IX, 271쪽을 참조하라). 코메니우스는 “범교육학”의 각 단계들을 위하여 신중하게 기도의 형식과 내용을 숙고하며 스스로 연령의 단계에 적절한 기도문들의 실례들을 저술한다(IX, 271쪽을 참조하라; X, 299쪽, 341 이하 쪽 등 등). 자연적인 직관수업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교회사 및 종교사의 주제들을 통해서도 코메니우스는 지금까지의 수업내용들을 확대시킨다. 교회사 및 종교사는 그에게 있어서 보편사의 측면들이다. 왜냐하면 세계사와 구속사는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자가 “인류에서의, 중요 제국들에서와 교회에서의 의미 있는 변화들”에 대하여 질문함으로써 교회사적 고찰방식은 역사수업에서 운영되어질 수 있다(BD XXX, 261쪽). 역사 지식은 도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이 소재를 라틴어 학교의 모든 여섯 학급에 분배한다: 역사수업은 첫 번째 학급에서 “성경역사의 발췌”로 더불어 시작된다; 네 번째 학급에서는 요점적으로 도덕적인 것들의 역사, 즉 탁월한 덕성의 견본들이 다루어지고, 다섯 번째 학급에서는 “예배적 관습들의 역사 혹은 민족들의 다양한 종교관습들”이, 여섯 번째 학급에서는 전 세계의 일반 역사가 다루어지는데(BD XXX, 265쪽), 그것도 역사의 종말론적 퍼스펙티브 안에서 다루어진다. 이러한 퍼스펙티브 안에서는 하나님의 섭리(Providentia Dei)의 구속사역이 믿음의 모범들에서 인식되어진다(ODO III, 48쪽을 참조하라).
종교적 관습들에서 코메니우스는 기독교적 의식들과 상징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의 습관과 비교하는 서술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문답교시의 역사에서 그는 아마도 첫 번째로 다양한 종교들을 다루는 작업을 “참된 종교”의 증명을 위하여 제안하였는데, 그것도 각기 적절하고 확대되는 형태로 다양한 연령단계들을 통하여 그렇게 하도록 제안하였다. 벌써 Orbis pictus에서는 네 가지 중요한 종교들이 다루어진다: 이교, 유대교, 기독교와 “마호멧교”. 이러한 수업의 최종 단계는 Schola ludus에서 인식되어 진다: 여덟 번째 연극에서 24명의 신학자들은 종교들을 고찰하는데, 그것도 언급된 순서로 고찰한다(SCHL, 356-372쪽).


4.4 신앙교육의 방법들
개혁원리들, “직관”(특히 Orbis pictus를 참조하라)과 “자기 활동”(특히 Schola ludus를 참조하라)은 우리의 과제영역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경험의 공간으로서의 학교는 “쾌적한, 그러나 진지한 삶의 전주들”(SCHL, Titelbl.), 기쁨을 주는 유희적 학습을 가능케 하여야 한다. 어린 사람들은 경건의 세 가지 원천들로부터 자립적으로 퍼올리기를 학습하여야 한다. 경건은 윤리론과 인식형성에 대해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는 특정한 커리큘럼적 규칙들을 확정한다: 1. 초기의 것은 더 초기에, 2. 탁월한 것은 더 탁월하게, 3. 공속하는 것은 동시에(ODO III, 36쪽, 18단: Rerum Ordo를 참조하라).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1) 감각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 앞에, (2) 더 탁월한 것은 인간보다는 하나님이며, 다른 사물들보다는 인간이며, 현세적인 것보다는 천상적인 것이고 시간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인데, 이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면 윤리형성보다는 경건이고 학문보다는 윤리 등등이다(ODO III, 37 이하 쪽, 18단).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하기에, 코메니우스에게는 하나의 유일무이한 방법만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범지학적 방법은 경험학습의 기본도식에 근거한다: 지각함-이성적으로 처리함-의지의 결단을 내림-행위함(Michel 1978, 198쪽을 참조하라). 이러한 과정이 인간적인 경험의 행위에 특징적이라면, 이 과정은 교수과정들 및 학습과정들에도 전가되어야 하며 특수한 방법론들로 분화되어야 한다. 교수론의 기본 규칙은 다시 삼 단계, 즉 실례들, 지침들, 적용에서 성립된다(Pamp. VII, 16, 179쪽을 참조하라).


이 과정은 코메니우스가 이론(theoria, 대상의 제시; 분석), 실천(praxis,견본; 종합)와 사용(chresis, 사용, 지침들; 비교)란 개념들로 서술하는 지식의 세 가지 단계들에 상응한다(Pamp. VII, 16, 179 이하들 쪽을 참조하라. 괄호 안에는 방법적인 상론이 있다). 각각의 학습과정이 감각적 지각에서 시작되고 이성적 처리를 거쳐서 활동적으로 적용되고 사용되듯, 철저한 학습과정도 자연적인 학습과정에 일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연과정은 확실하게, 빠르고 쾌적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 단계에서의 차별화들은 특히 내용들로부터 생긴다(Michel 1978, 202쪽을 참조하라).


코메니우스는 경건은 가르쳐질 수 있다는 자신의 테제를 (1) 실례들에 대한, (2)경건의 형성을 위한 지침들과 규칙들에 대한, 그리고 (3) 매일의 검증과 끊임없는 모방의 기회들에 대한 시사로써 정초한다(Pamp. III, 47, 89 이하쪽). 초기 아동기의 학교를 위해 그는 세 가지 처리방식들을 상론한다: 실례들, 지도와 훈련(Pamp. IX, V, 271 이하 쪽).


실례들은 각각의 가정은 작은 교회이며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교회에 데리고 온다는 점에 있다. 지도에는 기도, 하나님에 관한 상황에 연관된 논의와 기독교적 종교의 토대들을 각인시키 는 일이 속한다. 훈련을 코메니우스는 학습과정이 장려되어지도록 하는 수단으로 이해한다; 폭력 적인 혹은 혹독한 훈련은 이 과정을 파괴한다(상동서, 273쪽을 참조하라).


신앙(경건)에는 교사의 인성이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모범이 중요하기 때문이다(Pamp. VII, 4, 171쪽을 참조하라). 그는 그렇지만 자신을 넘어서 그의 실례를 통하여 앞서 가시는 그리스도를 지적할 수 있다(Pamp. VII, 16, 179쪽을 참조하라). 코메니우스의 교육학적 신학은 가르침보다는 경험학습을 더 강하게 꾀한다. 코메니우스는 종교개혁적 성경원리(sola scriptura)를 경험원리(sola experientia)와 결합시킨다. 기독교적 경험은 믿음-사랑-소망의 삼총사를 통하여 특징지워진다; 기독교적 경험은 예수의 제자 됨의 구속적인 형태들 가운데서와 “사랑에 가득 찬 훈련”에서 표명되며, 곧 인식, 믿음과 행위를 포괄한다. “참된 종교”의 수업은 범-교육학의 부분이다; 이 범교육학은 신학적 인간학에 기초되어 있으며 변화시키는 희망의 충동을 풀어놓는 종말론을 향해 있다. 이러한 전체구상은 모든 교육학적 과제영역들을 부분들이 상호적으로 제약되는 하나의 통일성으로 요약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경험의 단초에 일치하여 신 이해는 하나님에 의해 해명되며 “하나님”이란 단어는 상황적으로 도입된다. 종교수업에서는 전체 세계, 자연과 역사가 하나님을 위하여 주제화 되어질 수 있다. 우선적인 행위영역은 평화이다. 성경, 인간과 세계에 연계하는 수업은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우리가 현재의 종교교육학에서 관찰할 수 있듯, 두 가지 “유형들”로 떨어지지 않는다. 범지학적으로 (비교, 견본주의를 통하여) 우리의 인식, 믿음과 행위를 위한 진리가 발견되어질 수 있다는 그의 전제를 우리는 물론 더 이상 같이 할 수 없다. 이러한 진리는 새로운 방법으로 찾아져야 한다.
코메니우스의 실천적 신학의 종교교육학적 의미를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가 우리에게 그에게 있어서와 같이 에큐메니칼한 폭과 생태학적 전망(Michel 1985를 참조하라)을 가진, 그러나 또한 세계 해석의 다채로운 전제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교육이해의 재구성에로 도전한다.6) 코메니우스는 정확하게 교육이해의 신학적 해석을 위한 출발점, 즉 하나님의 형상의 사상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을 위한 출발점 획득한다.




[각주들]


1. 그럼에도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는 vita activa에 대한 신앙고백이 vita contemplativa보다 우위를 점한다. 이것은 그의 천년설로부터 귀결된다(Schaller 1985a, 206쪽).
2. 그리스도는 그의 승리의 사역을 눈에 띄지 않게 행사한다(CC, II, 378쪽).
3. 코메니우스는 신플라톤적 형이상학과 종말론 사이에서 아무런 긴장도 보지 않는다. 이념들의 구조와 세계사는 일치한다. “이것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서야 비로서 이것들은 우주를 구조와 동시에 사건으로 보여주고 세계들의 역사로서 세계사의 철학에 대한 모종의 단초들도 보여주는” 이 큰 건축물을 완성시킨다(Patocka 1984, 150쪽)
4. “Informatorium"(26 이하 쪽)에서 그는 초보화의 의향을 ”축복“의 토대로써 서술한다.
5. DM(30,4 200쪽)에서의 라틴어 학교의 학급들은 다음과 같다: 문법, 물리학, 수학, 윤리학, 변증법, 수사학(신학에 대해서는 상동서, 2, XIII를 참조하라).
6. “omnes omnia omnino"(Pamp. I, 15쪽)의 원리는 도야의 규정들 중 하나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도야 프로그램의 실현에서 코메니우스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나라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가능성을 보았다. ”Omnia in Deum transfere"가 도야과정의 목표라고 한다.




[문헌]


[코메니우스의 저작들]


Johannis Amos Comenii Opera Omnia. Praha 1969ff.
학문, 종교와 정치에 있어서의 개혁에 대한 선정된 저서들은 H. Schoenebaum, Leipzig 1924에 의해 번역되고 정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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