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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J. A. Comenius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에 대한 연구(I)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에 대한 연구(I)

정일웅교수(실천신학/기독교교육)

[서언]
코메니우스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제시한 모든 지혜를 배우도록 모든 포괄적인 방법을 적용했던 교육학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지혜를 배워 창조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돌보는 사역을 중심적인 교육적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모든 인류가 잃어버린 창조주 하나님을 되찾고, 그의 뜻을 헤아리며,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복음의 선교적 관심에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마28:19). 그리고 그의 인간교육에 대한 가장 중심적인 철학이라 할 수 있는 ‘범지혜’는 이제 그의 대표적인 교육의 작품인 범교육론(Pampaedia)에서 가장 체계적이며, 구체적인 교육방법론으로 제시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코메니우스의 범교육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육의 근본원리에 대하여 그 기본적인 것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의 범교육론(Pampaedia)은 원래 미완성 작품으로 알려진 ‘인간사물의 개선에 대한 보편적 제언’(De rerum humanarum emendatione consultatio catholica)이란 그의 7권으로 구성된 책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4번째의 책이다. 이 책은 코메니우스의 생전에 잘 알려진 ‘대교수학’(Didactica magna)과는 달리, 하나의 명백한 인간교육을 위한 학문적 체계로서 교육의 원리와 인간의 전 생애를 걸쳐 교육되어야 하는 평생 교육적 차원에서의 각 세대의 교육과정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면에서 그의 교육적인 깊이와 넓이를 느끼게 하는 코메니우스의 대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범교육학은 코메니우스가 얼마나 신학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교육의 문제를 다루었던가를 알게 해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이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의 원리를 살펴보는 일은 현대기독교교육과 실천신학의 역사적 근거를 밝히는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며, 동시에 기독교교육과 실천신학의 학문연구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발견에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주지되어 있지 않은 한국 상황에 이 연구는 새로운 학술정보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될 것으로 여긴다. 물론 여기 소개되는 코메니우스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들은 이미 독일에서 코메니우스학(Comeniologie) 연구에 정통한 학자들의 이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특히 샬러 교수의 연구는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1. 범교육학의 역사적 배경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독자적인 교육이론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7권으로 구성된 ‘인간사물의 관계의 개선을 위한 보편적 제언서’(De rerum humanarum emendatione consultatio catholica)와 깊이 관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범교육학은 바로 7권의 다른 책 가운데서 네 번째 책으로 그 책들의 가장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보편적 제언서’ 전체를 살펴보면 범교육학을 중심으로 앞으로 3권(1-3권)의 책들과 뒤로 3권(5-7권)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범교육학은 그의 ‘보편적 제언서’의 중심에 위치한 책으로써 앞뒤 각각의 3권의 책들과의 연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범교육학에 거는 기대와 비중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해 주고 있다. 즉 코메니우스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인간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범교육학을 통하여 먼저 문제가 된 인간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인간을 통하여 다시금 주어진 세상의 변화(개혁)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 걸맞게 7권의 책 가운데 첫 번째로 제시된 책이 ‘범각성론’(Panergesia)이다. 이것은 구라파의 지성인들을 향하여 30년간의 종교전쟁으로 인하여 어떻게 삶의 구조가 붕괴되었으며, 세계의 불행의 원인이 어디에 놓여 있으며, 그것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함께 의논해 보자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즉 폐허가 된 구라파를 새로이 건설하기 위하여, 그들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진리의 빛을 비추는 책임을 인류와 하나님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책임 있게 감당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지성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대화를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부패된 부분을 고치고, 유혹과 혼돈의 주인인 사탄에게 공포를 주고, 인간에게는 구원이 임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표를 제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은 ‘범 빛의 길’(Panaugia)에 대한 것으로서, 세상이 이와 같이 빛을 떠나 어두움으로 덮여있으니, 빛 되신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일을 시작하자는 제안의 내용이 담긴 책이다. 여기서 그는 기독교의 복음 선교와 인간교육의 책임을 다시 상기시켜주고 있다. 또한 세 번째 책은 ‘범지혜’(Pansophia)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은 특별히 코메니우스의 일생동안 후원자로 있었던 화란의 ‘루이스 데 기어’(De Louis Geer)의 가문에 감사하는 뜻으로 이 글을 쓸 당시에 생존했던 ‘데 기어’의 손자 ‘게르하르트’(Gerhard)에게 헌정(獻呈)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 담겨진 범지혜론은 인간이 알고 실천해야 할 삶의 지혜로서, 그것들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근원적인 내용인 자연(Welt), 정신(Geist), 성경(Bibel)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지혜야말로 인간이 알아야 할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 앞에서 모든 책임을 다하기 위한 삶에 필요한 인간의 지혜라고 코메니우스는 강조한다.
7권의 가장 중심에 있는 네 번째 책 ‘범교육학’(Pampaedia), 다음에 ‘범언어론’(Panglottia)과 ‘범개혁론’(Panorthosia)이 연결되어 있으며, 마지막 7번째의 책은 ‘범훈계론’(Pannuthesia)으로 명명된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책인 범언어론은 역시 인류의 가장 큰 문제가 언어에 대한 것으로, 무엇보다도 올바른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으로써 범세계적인 언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그 방법적인 것을 제안한 책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의 책 “범개혁론”(Panorthosia)은 구체적으로 개선되고 고쳐져야 할 개혁의 대상이 국가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기본 질서인 ‘과학’(Wissenschaft)과 ‘정치’(Politik)와 ‘종교’(Religion)의 세 가지 영역의 일들이라고 보았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이 세 가지 영역의 올바른 질서의 확립을 개혁의 주된 과제로 삼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가 앞에서 범지혜의 배움을 강조한 구체적인 책임의 장(場)이 바로 이 여섯 번째의 책과 연관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개혁을 위한 제언을 담은 7권의 책에 대한 구상은 164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670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권과 3권을 출판했지만, 다른 책들은 출판하지 않은 채 미완성작품으로 남겼던 것이다. 그리고 7권의 원고는 코메니우스 사후에 그 행방이 불확실 했다가 1935년에 독일의 할례에 세워진 프랑케의 고아원을 위하여 세운 도서관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제 이러한 세계의 개혁을 위한 중대한 작업을 코메니우스는 그의 범교육론을 통하여 실천하려고 하며, 그것은 바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일, 즉 교육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은 구체적으로 범교육학을 통하여 교육의 목표와 방법으로 제시하게 된다. 특히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그의 책 7권 전체와 관련하여 범지혜에 근거한 세계개혁을 위한 제안서는 세 가지 목표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첫째, 사물의 세계를 질서 가운데로 옮기는 것이며, 둘째, 인간의 정신이 사물세계를 직시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 모든 백성들에게 정신의 사용과 사물의 합리적인 사용에 대하여 경고하는 일 이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목표에 이르게 하려는 데는 지금 세 가지 장애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것들은 끝없는 다양성과 사물의 차이점, 인간의 수 없이 많은 일 때문에 정신의 훈련을 위한 시간이 제한을 받고 있는 문제, 그리고 거대한 다양성과 언어의 혼잡성들에 대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장애들이 제거되고, 세상 만물의 전체가 질서 가운데 존재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에게는 ‘범지혜’(Pansophia)가 요구되며, 범지혜는 그러한 사물 전체가 어떻게 사용되고, 이용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그 방법적인 것들을 배우도록 하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범교육학은 인간적인 삶의 규범을 일깨우고, 연습하며, 훈련하기 위한 인간교육의 지침서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범언어론’(Panglottia)은 역시 세상의 모든 백성들 사이를 연결하기 위한 하나의 띠로서 그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범지혜의 배움인 인류 전체의 교육을 위한 코메니우스의 의도는 단지 범교육학에서 뿐 아니라, 이미 그의 유명한 책 ‘대교수학’(Didactica magna)에서도 드러나고 있으며, 역시 대교수학이 작성되기 이전, 가장 초기에 섰던 그의 위로의 글들, 예를 들면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천국’(Die Labyrinth der Welt und das Paradies des Herzen), ‘가장 안전한 장소’( ) 등의 문서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할 것이다.


2. 범교육학에 제시된 교육적인 의도
코메니우스가 제시한 범교육학의 기본명제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모든 포괄적인 방법으로 철저하게 배우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라틴어로 된 세 개의 낱말 옴네스(Omnes: 모든 사람), 옴니아(Omnia: 모든 것), 옴니노(Omnino: 모든 포괄적인 방법으로)를 발견하게 된다. 이 말들은 코메니우스 범 교육학의 명제를 세 가지 원리로 구분하여 이해하도록 해 주는 기본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이 말들은 역시 헬라말 판테스(Παντεσ), 판타(Παντα), 판토스(Παντωσ)에서 끌어 온 것으로,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개념의 근본적인 것을 성경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역시 이러한 세 가지 원칙을 그의 범교육학 2장, 3장, 4장에 걸쳐 상세히 밝혀 주고 있다. 물론 제 1장에서는 범교육학의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종합적으로 설명해 주었으며, 이어서 3가지 범교육의 원리를 밝혀 주었다. 이러한 세 가지 원칙에 따라 교육의 실천을 위한 세 가지 방법적인 구성요소를 제시하였는데, 그것들은 ‘범 학교에 관한 이론’과 ‘범 교육서에 관한 이론’, 그리고 ‘범 교사’와 ‘올바른 가르침에 관한 이론’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5장, 6장, 7장).
여기서 판(Pan)이란 말은 범지혜에 대한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기초된 사물세계의 전체에 대한 관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 인간, 자연의 관계에 대한 전체는 범교육의 개별적인 결과들에서도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코메니우스가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사상에 근거하여 밝혀주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교육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세계 전체의 중심인 인간본래의 위치에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었으며(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 골로새서 1장 28절에 명시된 말씀대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이 되도록 하는 것에 두었기 때문에, ‘범 교육학’은 단순히 인간의 성장세대에게만 한정하여 적용할 수 없으며, 성인세대를 포함한 인류의 전 세대에게로 행하는 범교육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범교육학은 전 세대의 연령단계에 적용되도록 의도되었고, 그것에 대한 적절한 교육과정으로 일생동안 배움을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범교육학 8장에서 15장에 걸쳐 인생의 전 세대를 7단계로 구분하였고, 8가지 학교의 이름으로 명명하여 각 단계에 적절한 교육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이름들은 ‘태아기 학교’, ‘유아기 학교’, ‘소년기 학교’, ‘청소년기 학교’, ‘청년기 학교’, ‘장년기 학교’, ‘노년기 학교’, ‘사망의 학교’ 등으로 불려졌다. 마지막 장은 이러한 계획의 적절한 이용에 대한 암시와 빛 되신 그리스도의 도움을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코메니우스는 범지혜의 배움인 ‘범 교육학’을 통하여 성취하려는 교육적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코메니우스의 교육적 의도를 바르게 판단하기 위하여 우리는 코메니우스가 제시하는 ‘범지혜’(Pansophia)란 개념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범지혜의 배움은 인간 이성의 독자적인 사용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관계에서 배워야 하는 교육적 방법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범지혜를 통한 배움에 적용된 인식론에서 데까르트(R.Descates)가 제시한 인식방법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코메니우스는 인간의 완전한 자율적인 이성사용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의 이성사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론에 비하여 데까르트는 인간의 이성 자체가 홀로 인식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사물의 진리를 밝혀 주는 가장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인식론 부분에서 이성의 자율적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이성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판단의 완전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지 않았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이 온전한 능력을 회복하려면 먼저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추이는 빛 가운데 머물러야 하며, 그 빛을 의지하여 함께 범지혜를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범지혜의 배움인 범교육은 인간적인 이성사용의 수동성이 전제되어 있으며, 먼저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타락된 인간을 다시 끌어내는 일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을 타락의 위치에서 올바르게 이끌어 낼 수 있는 근거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오직 구원의 은혜에 의지해야하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는 범교육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의 사역에 결코 인간의 독자적인 능력과 이성사용의 자율성이 개입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범교육은 모든 것에 관한 앎인, 범지혜의 앎에로 인간을 인도하는 일이며, 그러한 인간을 책임 있게 돌보는 사역이 바로 범교육의 목표인 것이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이제 이러한 일은 두 단계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첫째, 죄의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을 이끌어 내는 일이며, 둘째, 원래 창조 시에 하나님이 세워 주셨던 본래의 자리에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에서이다. 역시 이점에 있어서 샬러 교수는 범교육을 통하여 이루려는 코메니우스의 교육적 의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첫째, 범교육학은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인 그의 본래의 위치에로 인도하는 일을 실제로 성공시키는 기술론이 되는 것이며, 둘째, 범교육학은 인간이 범지혜와 관계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또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범지혜에 관하여 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세상의 전체에 대하여 무지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셋째, 범교육학은 더욱이 인간을 다만 참다운 인간존재에 이를 수 있는 장소에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인도는 궁극적으로 인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하나님과 자연과 이웃에 대한 과제와 책임 때문에 이루어져야 한다”.

샬러 교수의 이러한 해석은 정당할 뿐 아니라, 코메니우스가 범교육을 통하여 성취시키려는 교육적 의도가 얼마나 성경적이며, 기독교 교육이 목표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 결과적으로 코메니우스가 범교육을 통하여 성취하려는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사역의 계속적인 진행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 시에 부여한 하나님의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며, 그 일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코메니우스의 범지혜와 범교육은 하나의 절대적 의미를 가진 전 인류를 위한 교육의 방법론이 되는 것이다.

3. 범교육의 필요성이 무엇인가?
코메니우스는 범교육의 필요성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완전해 지도록 돌보는 일에 대한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범교육학이야 말로 근본적으로 인간을 돌보는 사역이며, 그러한 돌봄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숨기신 목표와 관련하여 인간이 거짓말하지 않도록 하시며,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통(구원)에서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함이요, 사물세계에 대해서는 인간들이 그것을 잘못 사용할 때,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행하지 않을 때도, 그것들이 무가치에로 던져지지 않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알고, 조정하며, 보존하는 책임을 부여받았음으로, 그 책임을 잘 수행하는 것이 존재목적으로 보았다. 그 때문에 범교육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다.
둘째, 범교육은 인간 자신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본다. 범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이 부여한 창조세계의 과제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모습으로 바꿀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나타날 때로서 진정한 인간이 된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셋째, 범교육은 사물세계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코메니우스에게는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사물세계를 올바른 질서에로 되돌려야 하는 과제와 관련하여 생각된 필요성이다. 그 때문에 범교육학은 인간이 이 세상의 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상태에 이르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러한 범교육학이 없으면 결국 자연의 세계는 인간의 고난과 함께 고통 가운데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코메니우스는 모든 인간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배우고 익히게 함으로써 모든 지혜를 획득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자연 피조물까지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올바른 질서에로 확립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그 안에서 인간들이 참 복된 삶을 누리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골1:28).

4. 이러한 범교육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앞서 살펴본 코메니우스의 인간론에서 확인되는 대로, 코메니우스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타락된 존재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타락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하나님께로 되돌아 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면 타락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인가? 코메니우스는 그러한 가능성이 인간 자신에게 없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주장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오히려 그의 범 교육론은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인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코메니우스의 인간론과 관련하여 범 교육의 가능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코메니우스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그 어떤 그루터기도, 근거도, 능력도 전혀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특히 그는 시편14편 3절의 인용과 관련하여 인간의 전적타락은 분명한 사실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범교육의 가능성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 스스로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서의 가능성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전적으로 뒤틀려진 인간세대의 변화를 위한 출발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성을 전제하게 된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없는 범교육은 헛된 일일뿐이며, 인간세계의 개혁도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강조 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義)를 통하여 인간은 다시금 하나님을 향한 출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 안에서 개선의 가능성(은혜)을 기초할 때, 사람들은 세계를 개선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계획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가 하나의 개선의 가능성을 기초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은혜의 선물인 죄용서의 은혜(칭의적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전적으로 의지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코메니우스는 그리스도를 통한 개인의 변화를 전제하여, 변화된 그를 통하여 사회의 개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 인류를 향한 기독교의 선교는 부여된 세계개선의 과제와 함께 기독교에 속한 일로 보았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먼저 범교육의 출발을 기독교의 세례에다 두고 있다. 또한 기독교의 세례가 바로 이러한 범교육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례 가운데서 인간개선의 사역이 시작되었으며, 범교육을 통하여 그것은 완성되어야 한다고 말 한다. 여기서 기독교의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부르심임과 동시에 구원의 은혜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역시 하나님의 백성의 돌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존재로 바뀌어 진 뒤, 그 안에서 지속적인 배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성장과 성숙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코메니우스에게서 범교육은 세례의 필연적인 결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특별히 코메니우스의 형제단 교회의 세례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며, 또한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와 역사적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형제단 교회는 유아세례에 대하여 부모들의 신앙적 모범과 교회의 신앙의 가르침(요리문답교육)을 통하여 후차적으로 보완해야 할 교육적 과제와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세례의 이해는 종교개혁의 신학과, 특히 개혁신학의 세례에 대한 이해와도 깊이 연결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세례에 근거한 범교육의 착상은 근본적으로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인 선교교육의 명령에 근거하고 있다. 코메니우스에게 세례는 기독교 교육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범교육의 출발이며, 수단이라 하겠다.


5. 범교육학에 제시된 기본적인 교육원리는 무엇인가?
앞에서 이미 소개된 대로 코메니우스의 교육의 대원칙은 ‘세계의 모든 인류가 범교육을 통하여 세계 전체를 근본에서부터 배우고, 모든 것의 표준에 따라 익혀서, 그대로 실천함으로 인간성의 이 완성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하여 철저하게 가르쳐지고 배우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원칙 하에 코메니우스는 그의 범교육학(2장,3장,4장)에서 범교육의 3가지 원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먼저 교육의 주체로서 ‘모든 사람’(Omnes)에 대한 것이며, 교육의 대상, 또는 교육의 내용으로써 ‘모든 것’(Omnia), 즉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에 대한 것을 말하며, 교육의 방법으로써 ‘철저하게’, 또는 ‘완전하게’(Omnino)란 개념을 사용하여 분명한 이해와 분명한 학습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개념은 범교육학의 근본적인 교육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범교육론에서 제시된 세 가지 기본 개념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모든 사람(Omnes)
코메니우스는 범교육학 제 2장에서 범지혜를 추구해야 할 범교육의 대상을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범지혜를 추구해야 할 교육의 주체로서, 또는 교육의 대상으로서 ‘모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즉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 모든 족속들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아야 할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그 아무도 구별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범교육학에서 모든 인간이 교육받아야 할 이유를 다음의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1) 한 핏줄로-행17,26 - 즉 같은 재료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며, 모든 인간들을 2) 신적인 동형상에 참여자로서 -창1,26-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며, 모든 사람을, 3) 동일한 창조자에 의한 피조물로서 - 위와 같음- 즉 한 근원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며, 모든 사람들을, 4) 동일한 영원한 상속자로서 -롬25,3- 즉 한 목표에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며, 5) 우리는 세상이라는 동일한 학교에 모두 파송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영원한 세계를 향한 준비의 과정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기회가 부여되어야 함을 강조 한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동일한 목표를 향한 운명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 이 땅에서는 농부와 거지들, 미개인들과 왕족이나, 귀족들, 그리고 철학가들의 신분과 능력에 차이가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 범지혜를 배우는 일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 시킨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에게 범지혜를 배우도록 동일한 내용을 허락하셨으며(자연, 정신, 성경), 배울 수 있는 방법까지도(감관, 이성, 믿음) 동일하게 부여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코메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본성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인식의 기능과 천성적인 능력들을 모두 주셨음을 전제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며, 그것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지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도록 교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모든 인간은 모든 사물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범지혜를 추구함에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모두 사람들은 한 사람도 배척당하거나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배척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모든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동등하게 출생되었다는 전제에서 이해하는 것이며, 또한 동일하게 지음 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이해가 전제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생각은 가장 성경적이며, 정당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라고 했을 때, 그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직업과 신분의 다양성은 고려되지 않았는지, 또는 성별의 차이는 어떻게 고려되었는지, 그리고 개인적인 연령의 차이와 천성적으로 가지고 온 재능과의 차이는 고려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개개인의 신분과 능력의 차이점에 대하여
코메니우스의 시대에도 신분의 차이와 능력의 차이에 대한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질문되고 있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 자신에게도 귀족과 비 귀족, 부자와 가난한자들,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에 따른 문제들이 질문되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범교육을 통하여 그러한 차이의 모순을 스스로 조정하고, 그것이 도리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기회로 이용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든 사회적인 실제적 차이들을 무너지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결코 공산주의 이념처럼 계급 없는 사회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모든 현세적인 차이들을 하나님 앞에 들어내며, 하나님 안에서 해결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근본적으로 신분의 차이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만 서로의 관계가 잘 견지되도록 오히려 화해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화해의 관계는 신분차이의 제거를 통하여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모습에서 서로의 모순들이 해결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샬러 교수는 코메니우스가 그의 편지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는 계급 없는 사회를 교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서 계급투쟁의 제거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명해 준다.

코메니우스의 시대는 아직도 봉건주의 사회의 기본질서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그 사회에 존재하는 신분의 계층은 세 가지로 구분되었다. 귀족, 사제와 노동자 시민의 계층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계층의 구별은 그리스도 안에서 중지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르침은 모든 신분의 구별을 하나로 통합시켜주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모든 삶이 교육의 관점에서 주목되게 하는 코메니우스의 교육적인 시각이 나타난다. 그리고 인생의 길은 가르침과 교육을 통하여 특징 지워졌다고 할 것이다. 역시 코메니우스는 그의 범교육학에서 교육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형태를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세 단계의 학급으로 구분한 형태에서이다. 특히 장년기 학교의 교육과정과 노년기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초보자와, 진보자, 그리고 숙달된 자의 삼 단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모든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에서는 그 어떤 특권층이 구별될 수 없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았다면, 구원자 예수에게로 향한 길에서는 결코 그들 신분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이해의 정도에 따라 초보자와 진보 자, 그리고 완성단계에 이른 자의 구별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하였다.

오늘날 천재들을 교육하는 일에서 것처럼, 천성적인 능력과 자질을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난 자들의 교육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코메니우스가 원하는 범교육은 개인의 능력과 자질의 개발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지혜를 얻게 되기를 바라며(딤후3:15),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드리는 일에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가진 자들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 이었다. 그런 뜻에서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은 학식 있는 자들을 위한 특권을 극복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의 주체와 대상으로서 모든 사람을 전제한 코메니우스의 생각은 모든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야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이다.

(2) 성별의 차이와 연령의 차이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벌써 그의 대교수학 제 9장에서 남성과 여성의 교육의 균등한 기회가 함께 주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 모두는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며, 같은 방식으로 미래의 시대를 위한 은혜와 국가에 참여되었으며, 같은 방식으로 우리 세대 보다 더 많이 지혜를 위하여 수용할만한 활달한 정신이 무장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성차별 없는 교육의 균등과 평준화에 대한 생각들은 벌써 종교개혁의 전통과 특별히 형제단 교회의 전통과 연결된 것으로 보여 진다. 특히 그 당시에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에 따른 것이며, 남녀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의 읽음과 가르침 받아야 할 권리를 강조했던 루터의 교육적인 생각들이 더 많이 알려져 있었으며, 코메니우스는 그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역시 연령의 차이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코메니우스는 같은 입장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연령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동일한 인간론을 범교육에 적용하고 있다. 다만 신체적이며, 정신적인 성숙도에 따라서 학교로서의 구별을 들어내기는 하지만 범교육은 모두에게 오히려 연령에 따라 더욱 확대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도 같은 것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3) 천성적 재능의 차이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역시 재능의 차이에 대하여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사물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인식의 수단들을 갖지 못한 맹인들, 귀머거리들, 벙어리들도 이러한 교육에 끌어들여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1)인간이 아닌 피조물들은 완전하게 되는 돌봄의 교육에서 제외되었다. 모든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가진 한,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동참하게 된다. 특히 내적인 결핍 때문에 그 본성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바로 그것 때문에 밖으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2) 본성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곳에서 역행되면 힘을 더욱 발휘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돌봄인 교육은 더욱 필요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 사실이 더욱 명백해 진다. 출생에서 맹인이 된 사람은 청각의 도움으로 유명한 음악가나 법률가, 또는 연설가가 되는 일이 허다하며, 귀머거리인 사람은 특출한 화가나 조각가나 장인으로 양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손이 없는 사람이 발로 글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언제나 이성적인 영혼들을 위한 출구가 어디선가 존재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반드시 광명이 비추어진다. 하지만 그 영혼에 통로가 없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자신의 보금자리와 가구들을 마련한 영혼이 밖으로 향한 창이나, 자기 자신에 이르는 통로를 제시하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모든 대답에서 신체와 정신적 조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출구를 열어주셔서, 범지혜의 습득의 가능성이 있음을 긍정적으로 해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이해는 역시 원리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본체의 동등성(同等性)이 주어져 있다는 시각에서 대답된 것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모든 동등성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차이는 정신적인 능력의 차이가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는 예리하나, 다른 이는 우둔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이는 약하고, 유순하며, 다른 이는 강하고, 곧은 이가 있다. 어떤 이는 학문 지향적이며, 다른 이는 수공 하는 일로 기뻐하는 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교육의 실제에서는 방법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할 수 없는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맹인과 귀머거리, 벙어리, 그리고 결핍된 인식 수단 때문에 어떤 일에 충분히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자들까지도 모두 범교육의 방식에 부분적으로 참여 될 수 있다. 그것은 신분과 능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방향에서 서로의 모순이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재능의 차이에 있어서도, 범교육은 같은 맥락에서 모순의 극복가능성을 생각하도록 코메니우스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세상의 모든 것’(Omnia)
코메니우스는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교육의 내용을 ‘모든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인간이 배워야 할 교육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과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할 광의(廣義)의 교육적 범위를 생각한 것이라 할 것이다.

먼저 문자적으로 그것은 ‘모든 것’, 즉 교육내용의 범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정신에 속한 것의 회복, 즉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몸과 혼과 영이 인간의 전체성으로 불려진 살전 5:23절의 말씀과 연결하여 인간을 위한 중요한 의미로 이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포함한 전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란 사물세계의 전 범주를 생각한 것이며, 여기에는 자연(Physica)과 정신(Metaphysic), 그리고 초자연(Hyperphysic), 즉 세상적인 것, 정신적인 것, 그리고 신적인 모두를 포함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범교육학 제 3장에서 모든 것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통하여 범지혜를 얻고, 그것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게 한다. 즉 그것들은 인간의 완성을 위하여 필요 되는 모든 지혜를 얻기 위하여 구체적으로는 감관을 통하여 배우고, 정신을 통하여 배우며, 믿음으로 배워야 할 모든 내용을 전제하여 말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배워야 할 범지혜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인식의 원천적인 근거로서 세계(자연)의 책과 정신의 책, 그리고 성경책을 전제한 바가 있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감관을 통하여 배워야 하는 사물세계,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의 것들이며, 이성적인 활동을 통하여 배우는 정신의 책이며, 또한 믿음을 통하여 배워야 하는 인간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주신 성경책이다. 모든 사람은 이것들의 배움을 통하여 범지혜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모든 것’이란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한 인간성의 모습, 즉 지성과 덕성과 경건성을 들어내는 능력을 얻게 되는 그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코메니우스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범교육학 3장에서 계속적으로 모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보다 모든 것을 알아 가는 방법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먼저 “인간은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전체를 알되 기초부터 알아야 한다고 강조 한다. 여기서 그는 사물의 기초를 알기 위하여 특별히 사물이란 무엇인가? 어디서 유래했는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을 권 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의 배움은 곧 삶의 지혜로 이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코메니우스에게는 방법이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것은 모든 사물의 근원을 바로 알게 될 때에 사물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을 얻게 되고, 사용 목적에 따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며, 더 나은 것이며, 최상의 것이 되는지에 대하여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선택과 함께 자유로운 실천이 성취되게 되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계속해서 범지혜를 얻도록 가르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일러준다. 그리고 피조물을 다룸에 있어서 수고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넘치는 풍요 가운데 살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와 일하는 것과 만족하는 것을 제시 한다. 중요한 것은 더 근원적인 것을 찾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이란 것을 일깨운다. 이러한 근원과 함께 일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역시 마지막에 범지혜의 교육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역시 인간의 마음에 신앙을 심어주는 일이라고 강조 한다. 여기서 성경의 배움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아이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기 위한 방법론의 구체적인 것을 그의 대교수학 24장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코메니우스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범교육의 원리는 역시 대교수학, 제10장에서도 제시하였다. 여기서도 코메니우스는 아이의 온전한 인간성의 자질을 얻게 하기 위하여 세 가지, 즉 지성과 덕성과 경건성을 들어 낼 수 있는 능력에 관련된 그 모든 것이란 자연과 정신과 성경의 배움에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모든 포괄적인 방법’과 ‘철저하고’ ‘완전하게’(Omnino) 알게 하는 것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의 원리는 “모든 인간은 전체를 통하여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방법으로 철저하고, 완전하게 그들의 인간성에로 이끌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세 번째 원리인 옴니노(Omnio)가 나타난다. 이것은 ‘모든 포괄적인 방법으로 철저하게’, 또는 ‘완전하게’ 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흔히 이 말을 ‘모든 방법’ 이란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말은 마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모든 방법, 총체적인 방법으로 오해될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그런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이해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코메니우스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여기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방법으로 철저하게’ 란 말은 가르쳐진 것이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역시 앎의 세 단계와 관계해서 볼 때에, 그것은 사물의 무엇(Was)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물의 유래(Woher)와 미래(Wohin)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실제로 안다는 것은 그가 사물의 근거와 목적 이해하기를 배웠을 때이며, 그는 올바른 사용을 통하여(in Chresis) 세계를 하나님께로 되돌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모든 방법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방법으로 철저하고, 완전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범교육학이 인간을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방법으로 철저하고, 완전해 지게 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진리 가운데로 옮기도록 해 주는 것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은 일이다. 범교육학, 즉 인간의 완전한 돌봄은 바로 거기서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그것은 인간이 진리에 적합하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을 그렇게 올바른 방법으로 가르칠 때, 거기서 오류와 위험의 심연 밖에 위치한 각자의 확고한 신분이 획득되는 것이며, 비로소 진리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앎이란 배움의 대상, 즉 존재하는 것의 ‘무엇’(Was)과 ‘어디에서’(Woher), ‘어디로’(Wohin)에 관하여 알게 되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앎의 세 단계로 제시된 이론(theoria)과 실천(praxis)과 사용(chresis)의 공동작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본보기들과 규범과 훈련(사용)을 통하여 가르쳐져야 한다는 방법론적인 지침은 이러한 세 가지 모습에 다시금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이제 그의 범교육학 4장에서 세계의 개선과 관련하여 옴니노(Omnio)에 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근본적으로 개선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외관상으로 개선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로의 인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삶을 확실히 보장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진리, 능변 그리고 숙련성, 거기에 걸 맞는 예의범절과 경건성을 갖추려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식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중간하게 아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전문 기술자를 의미하는 것이지, 허풍 치는 서투른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것의 껍데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결국 위선자가 아닌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경건하고도 거룩하게 경배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얼마나 방법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방법을 통하여 도달되어야 할 목표, 즉 인간성(지성, 덕성, 경건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실천적 모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 이론에 관한 연구(II)
<범학교론, 범교재론, 범교사론 중심으로]
정일웅교수(실천신학/기독교교육)



<서언>
필자는 신학지남, 지난 여름호에 ‘코메니우스의 범 교육학’(I)을 소개한 바가 있다. 그 내용은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 1-4장에서 다루어진 교육원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즉 범지혜를 가르치고 배우게 하기 위한 범교육의 원리로서, 범교육의 역사적 배경, 범교육학이 의도하는바와 그 필요성,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모든 방법을 포괄하여 철저하게 가르치려는 그의 교육방법의 원리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 이론의 두 번째 부분을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II)란 제목으로 논의해보려고 한다. 이 부분의 내용은 코메니우스가 그의 범교육학 5-7장에 걸처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범학교의 이론’과 ‘범지혜서에 대한 이론으로 범교재론 그리고 ‘범교사론’ 등을 중심으로 소개하게 될 것이다. 전자(1-4장)가 코메니우스 ‘범 교육의 원리’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것(5-7장)은 그 원리의 적용을 위한 방법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기존교육원리의 구조적 측면에서 보면 전자가 교육의 목표와 대상과 교육내용에 관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교육의 실천적인 것으로 교육 대상들의 구체적인 학습에 적용되어야 하는 수단으로써 학교의 이론과 교재에 관한 이론, 그리고 교육의 실제를 이끌어야 하는 교사들의 사명과 역할에 대한 것이 그 중심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살핌으로써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 이론에 대한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적인 의도를 밝힐 뿐 아니라, 이러한 이해에 근거하여 오늘날 우리의 인간교육의 실제를 되돌아보며, 나아가 기독교교육이 자기 과제 실현을 위해서 그 원리와 방법이 과연 어떠해야 할 것인지 그 근본에 관하여 밝혀보려는 것이다. 역시 우리의 목회사역이 역시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부르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우치고 양육해야 하는 일이라면,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역시 오늘날 우리의 교육목회의 새로운 방법론으로서 주목할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독자들의 평가에 맡기기로 한다.

1.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범지혜의 학교는 어떤 것인가?
코메니우스는 역시 범지혜의 학교에 대하여 그의 범교육론 제 5장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여기서 그는 학교가 곳곳에서 어떻게 설립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을 비롯하여 학교설립의 필수성과 가능성을 다루었다. 그리고 학교의 의미와 본질, 학교의 조직, 학급의 구분, 학교의 장소와 학교에서의 수업 시간표 운영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학교의 한 모범적인 운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학교설립의 계획이 잘 이루어진다면, 범교육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 범지학교에 대한 의미와 그 본질에 관하여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역시 학교를 필요로 한다. 그는 먼저 세상이야말로 그 시작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 인류를 위한 하나의 학교라는 이해를 가지고 시작한다. 그 때문에 각 개개인의 전 생애는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 세상이라는 하나의 학교에 머무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배운다는 것은 어떤 나이에도 늦지 않다”라는 세네카(Seneca)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각 세대의 연령은 배움을 목적하고 있으며, 모든 인간의 삶과 모든 추구하는 바도 배움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천상의 아카데미아’(Die himmliche Academia)라 할 수 있는 영원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전제하면서, 이제 그 모든 것이 현세에 머무는 동안에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코메니우스에게는 인간의 이 땅에서의 삶은 세상의 학교에 보내진 배움의 존재로서의 삶이며, 영원한 세계를 향하는 삶의 준비과정이요, 그 일터가 되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코메니우스는 인간의 현세적인 삶의 전 과정이 학교라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였다. 그리고 자연인 사물세계와 관련하여 학교는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창조세계의 과제수행에 적합하게 사물의 상태를 개선하는 일에 봉사하는 사역의 장으로 이해된다. 물론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학교에서의 교육을 국가와 교회를 위한 근본바탕의 의미를 제시하는 곳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코메니우스의 학교는 삶의 전주(前奏)로서, 확실히 배움을 통한 삶의 준비와 연습의 장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역시 학교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들의 무리가 함께 있는 곳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학급의 구분”(Deliberatio)이란 글에서 학교에 필요한 4가지 구성요소, 즉 학교는 교사와 교실과 책과 학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역시 그의 범 교육학에서도 코메니우스는 학교의 구성요소를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한 학교에는 본질적으로 교사와 학생과 좋은 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들에서의 배움은 교사들의 선한 덕성과 경건이 학생들에게로 유도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작업에는 학생과 교사가 함께 만나는 학교의 건물이나, 교사들에게 지불해야 할 보수나, 이러한 일들을 맡아 돌보는 상부의 감독청은 오히려 부수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여전히 교사와 학생인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책(하나님의 책)들은 어디서든지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교사와 학생, 이 두 주체는 어디서든지 학교의 설립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학교의 구성요소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을 벌써 그의 “범지학교의 구분”(Scholae pansophicae delineatio)이란 글에서 7가지 질서라는 이름으로 제시해 주기도 하였다. “1. 가르치고 배워져야 하는 일들, 2.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교사), 3. 학습의 도구들(책), 4. 공적인 연습을 위한 장소들(교실), 5. 연습을 위한 정해진 시간들(수업시간), 6. 스스로 배우기(자습), 7. 휴식과 방학 등에 관한 것들이다”. 여기 첫 번째 내용, “가르치고, 배워져야 하는 일들”은 구체적으로는 “범지혜를 통하여 작업된 사물세계 전체에 관계된 것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보며, 전체에 대한 실제적인 앎에 근거하여 먼저 학교의 적합성과 조화가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학교’란 그 어떤 그룹이나, 단체가 이러 저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사회적인 조직체가 아니며,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서 인간의 깨우침이 이루어지게 하는 장(場)으로 이해하였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코메니우스는 인간의 전 삶의 과정을 학교로 보았으며, 동시에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이러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하셨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전 인류는 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참다운 인간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그 본래의 장소를 떠나버렸으며, 그 때문에 인간의 삶은 이러한 교육적인 의미를 스스로 잃어버리게 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교육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도록 은혜의 기간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타락한 죄의 상태에서 인간을 다시 이끌어 내어(educatio), 본래의 자리에로 세워주는 회복(institutio)과 구원(restitutio)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학교는 개별적으로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모두를 위한 공적인 학교가 되어야 함을 요구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학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범지혜를 가르치는 학교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 학교의 목표는 세 가지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지성(知性)과 덕성(德性)과 경건성(敬虔性)에 관한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전체가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세 가지 책들에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 학교에서는 이 세 가지에서 그 어떤 한 부분적인 것만이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연과 정신에 관한 것과 초자연적인 것들이 구체적으로 관계 속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모든 것이 일곱 단계의 연령에 따라 형성된 학교들에서 단계적으로 초보와 근본 바탕에서부터 시작하여 더 높은 단계에로, 그리고 최고의 정점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범지혜의 학교에서는 특별히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 제공되지 않아야 하며, 모든 것이 쉽게 진행되게 해야 하고, 교재와 교사들의 역할이 방법적으로 학생을 괴롭히거나, 귀찮아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고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을 위한 책들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주위의 자연 속에서는 여러 피조물들이 즐비해 있으며, 범 지혜의 참된 앎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또한 필수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며, 역시 교사는 다시금 모두 책을 가지며,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을 정상적으로 관찰하며, 우리에게 내면으로부터 교훈을 주는 하나님의 영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범지혜의 학습에는 간단하고 쉬운 방법들이 주어져야 하며, 그것은 사물자체에 대한 파악으로 이론에서 시작하여, 가치에 대한 파악으로 실천에서 확신하고, 그 가치들이 창조주와 인류를 위하여 유익하고 올바르게 사용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학교의 조직과 구성에 관하여
앞서 말한 것처럼 코메니우스는 학교를 인생의 전 삶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실제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전 삶의 과정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야곱의 사닥다리에다 비교하여 교육의 과정의 조직과 구성원리로 이용하게 된다. 특히 그의 학교론은 교육의 실제를 성취시킬 수 있는 단계적인 조직체로서 학교를 전체의 맥락에서 구성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식물의 새싹이 자라서 상승하는 것처럼 사닥다리의 상승관계에 의존하여 출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연령단계에 따라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학교를 제시하고 있다.

코메니우스의 학교의 구성과 조직에 대하여는 두 가지 계획이 그의 글을 통하여 제시된다. 첫째는 대교수학에서 제시된 학교의 모습이며, 둘째는 범 교육학에서 제시된 학교의 모습이다. 전자는 기존 학교교육을 전제하여 제시되었다면, 후자의 것은 인간의 전 삶의 과정으로 단계별로 구별하여 학교로 이해한 것이다. 전자는 성장세대의 교육을 생각하여 6년씩 나누어 4단계의 학교를 제시한 것이라면, 후자의 것은 모태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교육을 전제하여 7단계, 또는 8단계의 학교를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대교수학에서는 성장세대가 성인이 되기까지의 기간을 24년으로 보았다. 이 기간 동안에 인간의 교육과 훈련은 가능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이 기간을 6년씩 나누어 네 단계의 학교로 구분한다. 그것은 유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학교에 대한 것이다. 이 단계를 다시 구체적으로 유아기는 어머니 품에 머무는 기간으로 ‘어머니학교’(Mutterschule)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소년기는 오늘날 우리의 초등학교에 비교된다. 또는 공적으로 모국어를 배우는 학교이기도 하다. 그리고 청소년기는 구라파의 시각으로는 ‘라틴학교’, 또는 ‘김나지움’(Gymnasium)으로 불려졌다. 흔히 ‘인문학교’라는 이름이 적절한 것이며, 오늘날 우리의 중. 고등학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청년기는 대학으로 명명되었고, 대학에서 범세계적인 학문, 또는 직업을 위한 전문성을 훈련받는 학교로 이해되었다. 코메니우스는 네 단계로 구분되는 성장세대의 학교들을 년 중 사계절에 비교하여 재미있는 이름을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코메니우스의 학교이론에 대하여 개별적인 연령단계에 근거한 이러한 학교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코메니우스연구의 대가인 샬러(K.Schaller)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이러한 학교의 구분은 인간에게 전제된 천성적인 잠재력의 상승과 발전에 근거한 것이기 보다는, 사물을 파악하는 자질과 그 가능성이 전체 안에서 어떻게 허용되고 있는지, 그 정도에 의존하여 구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 허용의 범위는 바로 나이에 의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연령단계는 인생길에 있어서 나타나는 그 단면들의 순서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항상 계속해서 전체에로 이끌어 가며, 전체 안에서 항상 더 깊은 통찰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연령단계들은 전체를 향한 정점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사다리의 단계마다 자라나는 새싹들로 인식되며, 하나의 풍성한 전체에 대한 개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코메니우스가 범 교육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학교이론은 앞에서 밝힌 대로 학교를 인간의 전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였고, 이러한 이해에 따라 태아에서부터 인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전 과정을 학교로 명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류에게는 세상이 태초부터 종말까지 하나의 학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각 개인들에게는 자신의 전 생애가 출생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코메니우스는 각 연령별 단계에 따라 7가지로 구별되는 학교를 제시하게 되는데, 그 학교의 이름들은 ‘태아기 학교’(모태에서의 형성과정), ‘유아기 학교’, ‘소년기 학교’, ‘청소년기 학교’, ‘청년기 학교’, ‘장년기 학교’, ‘노년기 학교’ 등으로 명명된다. 물론 코메니우스는 모든 학교에 다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된 한 학교를 종합하여 ‘사망의 학교’로 명명하였고, 이것을 합하면 8개의 학교를 제시한 셈이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코메니우스가 이러한 7단계의 학교를 역시 년 중의 사계절과 열두 달에 비교하여 설명해 준 점이다. 즉 ‘출생이전의 학교’(태아기학교)를 한해의 시작인 1월에 비교하였고, ‘유년기학교’를 꽃 봉우리를 피우는 2월과 3월에 비교하였다. 그리고 ‘소년기학교’는 꽃으로 치장한 식물과 같은 달인 4월로 비교하였고, ‘청소년기 학교’를 열매가 생기기 시작하고 성장하는 5월로 보았으며, ‘청년기학교’를 모든 종류의 열매가 익어서 처음으로 맛보게 하는 6월로, ‘장년기학교’는 모든 종류의 열매를 수확하고,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는 7월에서 11월의 기간으로, 그리고 ‘노년기학교’는 일년을 마감하며, 완성시키는 12월로 비교하였다. 이러한 이해들은 인생의 삶의 전 과정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해하였고, 그것을 교육적으로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역시 코메니우스는 범 교육학에서 각 단계마다 이끌고, 밝히는데 유효한 것들로서 마땅히 주어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단계별 학교의 교육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대교수학에서 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유년기에는 사물의 지식에 대한 것을 배우며, 청소년기에는 사물의 의의(意義)와 목적에 대한 것을 배우는 것으로, 그리고 장년기에는 실제적인 그 사물의 목적대로의 가치들이 사용(使用)되도록 함에 대하여 밝혀주고 있다. 즉 첫 단계에서는 단순히 사물에 대한 통찰을, 둘째 단계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통찰을, 셋째 단계는 목적과 사용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범 학교론은 참으로 그의 성경의 깊은 통찰 가운데서 제시된 이론이며, 범 지혜를 배우게 하려는 교육적 의도에 적합한 학교론으로 이해된다.
3) 학급의 구분
코메니우스는 연령의 단계별 구분을 학교의 조직과 구성의 근거에 적용할 뿐 아니라, 개별학교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학급을 구분하는 원칙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연령단계의 구별은 어떤 학교에 학생들에게 배움의 과정으로서 구체적으로 학급이 어떻게 구분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성격을 암시해 주고 있다. 코메니우스가 제시하는 올바른 학습시간의 순서를 주목할 때, 학교는 하나의 놀이하는 곳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실제로 코메니우스는 학교가 하나의 놀이터와 같은 곳이 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연령 단계들을 잘 살펴서 각 단계에서 보이는 특성들을 활용하면, 이러한 것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학급은 동일한 학과목을 배우는 과정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는 학생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은 동일한 시간에 같은 규칙을 배우며, 동일한 훈련을 받으며, 서로 서로의 경쟁을 통해서 자신을 이기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동일한 학급 내에서도 세 부류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을 전제하여 초보자와 중급자와 숙련자에 대한 단계로 구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 학급 내에서 역시 세 그룹이 상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코메니우스는 각 학급에는 한 분 교사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한다. 그는 항가리 사로스 파탁(Saros-Patak)에서 범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일곱 학급에 7명의 교사와 한 분의 학교 책임자를 요구했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한 분 교사는 약 100여명 정도의 학생을 지도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현대 교육적인 이해에 따르면 무리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대교수학에서 수업기술의 효과적인 이상론을 말하면서 적게 가르치고도, 많이 알게 하는 방법을 희구했던 것처럼, 범지혜 습득의 효율적인 가능성을 피력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학교의 장소와 학습시간의 운영
코메니우스는 범지혜의 학교를 어디에 세워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서 첫 단계의 학교는 인간의 생명이 탄생되는 어머니의 태중이며, 두 번째 학교는 부모와 함께 있는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세 번째 학교는 마을 곳곳에서 아이들이 쉽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함을 말했다. 그리고 네 번째 학교는 각각의 소도시에 세워져야 하며, 다섯 번째 학교는 각 지역의 수도나, 큰 도시들에 세워져야하고, 여섯 번째 학교는 범세계적으로, 곳곳에 세워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곱 번째 학교는 노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학교는 부모의 보호와 배려 가운데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적인 학교’(Private Schule)로 구분하였고, 세 번째에서 다섯 번째 학교까지는 국가나 지방관청과의 관계에서 ‘공공의 학교’, 또는 '공립학교'로 명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섯 번째 와 일곱 번째의 학교는 역시 '개인학교'라고 불렀다.

역시 코메니우스는 년 중의 시작과 종결짓는 연말이 있는 것처럼 학교도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의 범 교육학에서 학교의 시작과 끝마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제시한다. “모든 학교는 목표들에 이르기 위해서 지나가야 하는 각각의 간이역들과 함께 정해진 목적지와 출발과 도착지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학교와 학급은 한해가 경과하는 것처럼, 배우는 일과 관계해서 하나의 순환기를 거치게 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한해의 시작과 끝이 겨울에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개학 역시도 겨울에 시작되어야 하며, 다른 시기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첫째, 모든 개체적인 것을 전체적인 것과 일치시키기 위함이고, 둘째, 이 시기에 사람들은 다른 시기보다 공적인 의무에 덜 얽매이기 때문이고, 셋째, 인간의 정서는 - 아이들 역시 - 봄, 여름, 가을보다는 겨울에 내적으로 조용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시기가 농축된 공기가 모든 생물에게 자연의 힘을 집중시켜주기 때문이다”. 코메니우스는 원래 ‘학급 나눔’(Delineatio)라는 그의 글에서 가을과 년 초에 학기가 시작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여기 범 교육학에서는 그의 입장이 약간 수정된 것으로 보여 진다.

하루의 수업시간 적용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범 교육학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대교수학에서는 하루에 4시간의 수업이 오전과 오후로 구별하여 이루어지기를 제시하였다. 오전 두 시간은 정신과 기억력의 연습을 위하여, 그리고 오후의 두 시간은 손과 소리의 연습을 위하여 시간을 규정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하루 24시간을 8시간씩 나누어 사용되기를 권고하였다. 각 8시간은 잠자는 시간과 다른 여러 가지 일을 위한 것과 공부를 위하여 분배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 ‘학급의 구분’(Delienatio)에서는 아이들의 경우에 하루에 6시간 정도 공부하는 시간을 권하였다. 특히 공공학교에서의 공부가 그 이상 이루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외의 시간은 자신의 건강과 몸을 돌보는 일에, 그리고 가정의 일들에 사용토록 하였던 것이다.

코메니우스가 그의 ‘학급의 구분’에서 제시한 하나의 표준적인 시간표는 다음과 같다.

“[오전시간]: 1. 6:00-7:00: 독서와 노래와 성경과 기도의 반복
2. 7:30-8:30: 학급의 주된 과제, 더 많이 이론적인 것을 배우게 한다.
3. 9:00-10:00: 같은 것을 실제적으로 연습하기

[오후시간]: 4. 1:00-2:00: 음악이나, 산수의 연습
5. 2:30-3:30: 역사
6. 4:00-5:00: 문장 쓰기 연습”.

위의 시간표에 나타난 대로 매 시간의 중간에 휴식시간을 30분씩 첨가했으며, 10시부터 오후 2시가지 휴식시간으로 제시되었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주간에 두 번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시간은 온통 수업을 하지 않게 하였고, 개인적인 일이나, 휴식하는 시간으로 돌렸다. 매년 기독교의 축제일, 성탄절과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에는 그 전 한 주간 동안 학교 수업을 쉬게 하였다. 그리고 초가을의 포도 수확기에는 한 달을 방학을 하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규칙적으로 배운 것들을 복습하고, 시험하는 것들이 수업하는 시간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코메니우스는 학교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하여 교사와 학교의 장 이외에도, 학교를 감독하고, 지키는 교육관청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학교가 일단 설립되면, 학교를 질서 있게 경영하기 위하여 학급선생과 교장을 제외하고 학교마다 이른바 감시 감독하는 책임자가 있어야 한다. 관청이나 시민 계급에서 선택된 사람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공적인 권위를 그들에게 부여해야 한다고 하였다.

2.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범지혜서(범 교재론)는 어떤 것인가?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범지혜서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 범지혜서(범교재론)는 역시 직접 가르침과 배움에 사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책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은 역시 범지혜를 담고 있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즉 전체로부터 정돈된 것으로 인간의 완성에 필요한 도구로서 사용될 책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범지혜서는 원리적으로 먼저 그의 세권의 책 이론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1) 하나님이 주신 세 권의 책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서는 앞에서 밝힌 대로 기본적으로는 범지혜서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들은 역시 하나님이 주신 책으로서 ‘자연의 책’, ‘정신의 책’, ‘성경의 책’에서 찾아져야 하는 ‘모든 지혜’(Pansophia)를 담고 있는 책들을 뜻한다. 그리고 이 세 권의 책에서 범 지혜는 인간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모든 것에 대한 알아야 할 것들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세 가지 책들에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간에 관한 한 모든 지혜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역시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이 세권의 책은 상호 연관적인 것으로 보았다. 즉 자연의 책에서 부족한 것들은 정신의 책에서 찾을 수 있으며, 정신의 책에서 부족한 것들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완전한 계시인 성경책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입장을 전제한다. 여기서 성경은 코메니우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의 최고의 권위를 가진 책으로 전제된다. 그리고 7단계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성경교육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정신의 책과 관련하여 정신의 가치를 일깨우는 일에 유익한 것들은 인정하면서도, 이교도가 저술한 책들의 사용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제시한다. 특히 이교도들이 저술한 책들은 우리의 학교에서 추방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그의 빛의 길(via lucis)에서도, 책들의 사용에 있어서 최종적인 권위를 따라야 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과 ‘자연’과 ‘성경’ 뿐이라고 역설하였다. 설사 그것이 이교도의 것이던, 기독교적이던 간에 빛의 고유한 근원 앞에서 하나님의 책들은 인간적인 권위에 압도당할 수 없으며, 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는 책들은 오히려 세상을 어둡게 할 뿐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책이 가장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책 가운데서만 오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세 권의 신적인 지혜의 책들이야말로 인간이 현세와 영원토록 알고, 믿고, 희망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참되고 완벽한 책들이며,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규범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책들은 모두 순수한 지혜로 인간을 인도하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하나님의 책들에 대한 이러한 전제와 함께, 범교육을 위한 교재의 필요성을 요구하게 되며, 역시 그 교재들은 다양하게 모두 하나님의 세 권의 책들에 의존하여 해설서나, 주석서로 만들어지게 하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2)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재로서의 책
코메니우스는 먼저 학교에서 범지혜의 가르침을 위한 책으로서 적용했던 것은 언어를 배우는 교재와 사물을 익히고 범지혜를 배우게 하는 책으로서 ‘세계도해’(世界圖解)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교재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지혜의 세 가지 근원적인 책들을 주석한 것이거나 해설한 책들로 이해된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무한한 신적인 근원적인 지혜의 책들에 비하여 개울과 같은 것으로 비교하였고, 하나님의 책에 각주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명확한 정신에 의해서 서술된 명쾌한 책들을 통하여 세 권의 하나님의 책에서 하나님의 빛을 퍼내는 일밖에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범지혜를 배우게 하기 위한 학교의 교재로서 새로운 책이 만들어져야 함을 말해 준 것이다. 특히 그는 새로 출판되는 모든 책들, 학교의 교과서들은 범지혜와, 범교육과 범 언어와 범 개혁에 사명과 과제를 충실하게 담아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책들이 만들어지게 하려면 12가지의 근본원칙을 따라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간략히 요약해 보면, 1. 새로운 책들을 만드는 것 대신에 먼저 기존의 책들 가운데서 나쁜 책이나, 무용한 책들을 선별하여 그것들을 적합한 내용과 형식을 갖춘 책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2. 그리고 책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남의 것을 베껴 쓰지 않아야 하며, 3. 조잡한 것이나, 별 의미가 없는 책들은 만들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4. 새롭고 훌륭한 인식을 담은 책만이 출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이전에 알려진 것들은 혼합시키지 않고, 그대로 알려야 한다고 권한다. 6. 새로운 책은 인간에게 빛을 더해주거나, 유익을 끼치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7. 사람들은 개관적으로 보증될 수 있는 진리를 발표해야 한다. 8. 새로운 책들은 수학적인 방법에 다라 기술되어야 하며, 말로 치장해 놓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증명되도록 해야 한다. 9. 성급하게 책을 만들어내서는 안되며, 다시금 검토하여, 착오가 없도록 힘써야 한다. 10. 색인이 없이 책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11. 새로운 책들은 하나님의 책에 대한 열쇠와 안내서로서의 역할이 되게 해야 한다. 12. 빛의 동료 회원들의 지적과 동의를 통하여 책이 만들어지게 하라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만들어진 범교육서가 요구된 기준에 의하여 올바르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누가 판단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그의 범 개혁론에서 말하고 있는 “빛의 동료들의 모임”(collegium lucis)에게 그 책임이 위임되어야 할 것을 제안한다. 이 모임은 세계의 학자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생각한 것이다. 이 모임의 책임자들이 우선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책들로서 범우주론, 범연대기, 범역사기, 범교리론, 범지혜론, 등과 같은 책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밖에도 훌륭한 성경언어학자들에 의하여 성경말씀에 대한 주석들이 만들어지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도 제시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이 밖에도 연령별로 구분한 각 학교의 단계에서 어떤 책들이 범지혜의 배움에 적용되어야 하며, 만들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원칙들에 적합한 책을 코메니우스는 직접 저술하여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두 가지 관계에서였다. 하나는 언어학습을 위한 교재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도해(世界圖解)라는 그림의 책이었다. 특히 이러한 책들은 코메니우스가 의도하고 있는 범지혜의 배움을 위하여 적용했던 것들로서 범교육서에 속한 것들이라고 하겠다.

코메니우스는 먼저 언어학습에 있어서 중요한 방법론에 대한 교훈을 그의 체코어로 된 교수학 책에서 처음으로 소개하였다(didaktika ceska, 1616). 그리고 그는 연령발달에 따른 네 단계 언어학습의 방법을 거기서 제시하였다. 이러한 연령단계는 다시 대략 세 단계로 증명되는 것들이다. 즉 첫 단계에서 사람들은 귀로 먼저 듣고 이해하기를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서 펜으로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해야 하며, 그 다음에 혀로 말하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첫 단계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두 번째 단계는 좀더 어렵게 될 것이고, 세 번째 단계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 될 것이다. 서술된 네 단계 방법은 가장 좋게는 라틴어 학습을 위하여 적용되었다.

여기서 코메니우스는 특히 네 권의 책이 사용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는 ‘초보적인 것’ (Rudimenta),또는 티로키니움(Tirocinium)으로 시작하고, 세미나룸 라리네 링구에(Seminarum Larinae linguae)와 피리다리움(Firidarium)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배우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테사우루스(Thesaurus)로 끝마치게 하였던 것이다. 각 책에는 세 단계로 구성되었으며, 그것들은 백 개 이상의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구문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체코 언어로 된 텍스트와 모국어로 저술된 작은 읽기와 표현에 대한 가르침도 포함하였다. 그리고 라틴어 낱말의 명사 변화와 동사변화를 담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혀로 라틴어의 표현이 유창하도록 전체를 암기하게 하였던 것이다. 대교수학에서는 네 단계의 책으로써 정원(Vestiblum), 출입문(Janua), 복도(Palatinum), 그리고 거실(Thesaurus)등을 체코의 교수학에서 수용하였고, 문법과 사전을 거기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범지혜서를 중심한 범교재론은 오늘날 우리의 교회학교와 기독교학교들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원리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자연과 정신과 성경의 지혜에 관한 조화로운 학습을 위한 방법은 코메니우스가 제시하는 방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3.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범교사는 어떤 사람들인가?
코메니우스는 범지혜의 배움을 위하여 범학교와 범지혜서와 함께 역시 범교사를 필요로 한다. 코메니우스가 필요로 하는 교사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통하여 완전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완성에 이르도록 인도해 줄, 스승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체라는 맥락에서 모든 것을 근원부터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서 범교육을 위한 범 교사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범교사들에 의하여 전체를 포괄하는 책들에서 읽고 그것들을 파악하고, 실천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러한 범교사에 대한 이론은 역시 범교육학 7장에 상세하게 제시되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코메니우스가 보는 교사는 과연 어떤 분들인가? 코메니우스는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스승이시라는 전제에서 그의 교사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가르친다는 것은 인간을 인도해 주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이해와 함께 인도자로서 하나님을 교사로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러한 교육사역의 지도에 주도적인 역할 자가 되는 셈이다. 범교육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떻게 교사의 역할을 수행하시는가? 이러한 물음에 있어서 코메니우스는 하나님이 이러한 지도를 한편으로는 직접 행하시기도 하는데, 벌이나 경고를 통하여 사람을 훈육하시며, 간접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리고 그의 지도적인 책임자들의 협동적인 중간 지체들의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지도적 방식으로 그의 활동을 들어내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하나님의 교사로서의 교육은 에덴동산에 살았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학생들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동산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그들에게 성취해야 할 과제를 부여하신다. 그러나 에덴에서의 교육은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초의 인간들이 그들의 죄를 통하여 낙원의 학교인 하나님의 학교를 떠났기 때문이다. 죄의 타락으로 그는 참된 교사에게서도 멀어져 간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타락으로 인하여 사라지게 된 이러한 모든 인간의 교육을 다시금 회복해 주는 은혜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에로 되돌려 주셨다. 신적인 지혜가 되신 그리스도는 인간을 다시금 올바른 질서의 상태에로 되돌리기 위해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새 아담을 통하여 ‘신적인 위상’(nexus hypostaticus)은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연결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모든 범교육의 가능성이 새롭게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학교와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 준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다시금 인간을 교육하기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교사권은 구원받은 사람을 위하여 실제화 되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가 구원의 백성을 위한 참된 교사가 되신 것이다. 사람으로 인하여 나누어진 신적 위상은 새롭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범교육과 범학교와 범교재와 범교사는 실제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체와 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한 관계는 회복되었으며, 범교육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것의 배후에서 하나님은 다시 실제로 활동하시는 분으로 계신 것이다.

그런데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교사의 역할은 하나님이 나타내신 모든 사물이 스스로 교육의 단계에서 인간을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그 사물 위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물은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교육자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사물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참된 교사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은 사물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물들이 거기서 인도자의 역할을 하기되기 때문인 것이다. 사물과의 관계에서 사람이 학생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자기의 모습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이 인간에게 말이 아니라, 자기 모습 스스로를 통하여 의미를 일깨우는 교사적 역할을 코메니우스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범교육자의 자격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범교육에 대한 학자이어야 하며, 범교육에 대하여 박사이며, 모든 인간을 근본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으며, 인간의 본성을 완성시키며, 완전함에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런 수준의 교사들로는 역시 초대교회의 사도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시대가 끝나고, 사도 이후시대임으로 이에 상응하는 능력을 가진 자들을 우리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범교육을 책임지기 위한 교사는 범철학 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범철학을 완전히 이해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근본적이며,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자는 정선된 사람으로서 경건하며, 신중하며, 진지하며, 근면하며, 총명한 사람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인류를 완전하게 전인격적으로 개선시켜야 한다는 목표와 그것에 대한 남다른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범교사가 지향해야 할 교육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인도하는 일이며, 선을 선택하고 악을 버릴 수 있는 자유의지를 회복시키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교사는 먼저 진리가 무엇이며, 선을 소망해야 하며, 필수적인 행동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범교사의 교수법에 대하여 세 가지 관점으로 충고한다. 첫째, 전체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필요하며, 이것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전체를 가르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확실한 방법으로 확실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단순성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셋째, 하나의 놀이처럼 모든 사람을 받아들여 즐거워 할 수 있도록 하는 신성함의 필요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역시 범교육학의 세 번째 명제인 “철저하게”(Omnino)라는 말의 의미를 이 범교사론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철저하게 가르치라는 말은 1. 정신, 언어, 손의 꾸준하게 병행된 연습을 통하여 숙달되게 하는 것이다. 2. 항상 모든 모범들과 법칙들과 훈련들을 서로 연결시킬 때 가능하게 된다. 3. 완전한 방법론을 연습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으로 분석, 종합, 비교연결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인생의 첫 단계에서의 교사는 역시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부모가 돌보아야 주어야 할 하나님의 일로 보았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는 부모의 교사의 역할은 한계를 가진다는 것을 상기 시킨다. 코메니우스는 그 이유를 그의 범교육학에서 몇 가지로 언급한다. 첫째,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위해서 교육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 둘째, 제대로 교육하려면, 아이들은 가정에서의 노동을 줄이고, 전문가인 교사가 지도하는 공공의 자리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교회와 국가생활을 위한 사전 준비와 연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대하여 깊은 교훈을 주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양자의 관계는 사랑과 부성적인 심정을 통하여 특징 지웠다. 교사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교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에게 배려하게 해야 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교사는 학급에서 언제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며, 학생들이 배움에서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코메니우스는 3가지 방법을 제안하였다. 첫째, 엄격한 교육과 체벌이 절대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설사 체벌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하며, 반드시 사랑을 보여주는 관계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배움에 있어서 능력이 부족하거나, 권태로움으로 배우기를 싫어하는 학생에게 체벌하지 않도록 권한다.

그 외에도 범교육에 참여한 교사는 성장 발달에 따른 연령단계를 언제나 유념해야 하며, 그 단계에서 무엇을 배우고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그리고 적합한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권한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범학교의 이론, 범교재에 관한 이론, 범교사에 관한 이론 등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그의 범교육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코메니우스가 생각하는 범교육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지혜로 철저하게 모든 것을 포괄하여 가르치려는 전 인류를 위한 교육계획이기 때문에 기독교 선교와 맞물려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기독교교육의 사역을 말해 준 것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범 교육계획은 먼저 그의 학교론에서 역시 평생교육의 관계로 전개된다. 즉 인간은 잉태의 과정에서부터 배워야 하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에 처한 교육적 존재로 해석되었고, 이에 따라 7단계의 학교(또는 8단계)가 세대별로 구분하여 명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교육적 수단으로써의 범지혜서들은 크게 하나님이 주셨다고 보는 세권의 책(자연, 정신, 성경)에 근거하여 범지혜를 담아낸 다양한 교재들을 코메니우스는 제시하고 있다. 자연의 책과 관계된 범 지혜서는 오늘날 자연에 대한 연구를 책임지고 있는 자연과학자들의 연구에서 파생된 정보를 중심한 것들을 말해 준 것이며, 정신에 관련된 것들은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에 관련된 정보와 시와 문학, 예술 등과 관련하여 제시되는 책들이 이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과 관련하여 파생되는 책들은 역시 오늘날 신학자들에 의하여 제시되는 다양한 신학서적을 뜻하는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의 정신에 따르면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시각에 의하여 제시된 책들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범교육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관계로 실현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이러한 범학교에서 범지혜서로 범교육을 책임 있게 수행 할 수 있는 범교사를 필요로 한다. 범교사의 자격은 오늘날 기독교세계관에 근거한 기독교신앙에 신실한 모습을 갖춘 자이며, 전체의 맥락에서 올바른 지혜를 알고 실천하도록 지도하는 교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칭하는 것이며, 그것은 단순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중심의 창조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기독교세계관을 체득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신실하게 고백하며, 성경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를 깨우치도록 힘쓰는 자를 말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범교육론은 오늘날 세상의 교육에서는 평생교육의 과정으로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일반교육에서의 평생교육은 그 원리적으로 창조주와 자연과 기독교의 구원의 경전인 성경과 관계되지 않은 기독교적 시각의 결여 때문에 인류의 미래와 현재에 대한 개개인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갖지 못한 교육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범 교육으로서의 평생교육은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여 자연과 정신과 성경과의 유기적 관계를 통한 범지혜 추구의 교육으로서 전인구원과 전인완성으로서의 참교육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그런 뜻에서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이야 말로 오늘 우리 사회의 공교육(학교교육)과 사회교육(평생교육)에, 더 근원적으로는 부부교육과 가정교육에서 실현되어야 할 분명한 기독교선교교육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범학교론과 범교재론과 범교사론은 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사역 현장에서 교육교육, 또는 교육목회의 모습으로 새롭게 시도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진다고 하겠다.


4.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범 교육사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필자는 샬러 교수의 평가에 의존하여 코메니우스의 범 교육사상의 특징을 몇 가지로 결론짓고자 한다.

첫째,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서의 교육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코메니우스의 교육은 현대교육학이 목표하는 것처럼 인간의 자율성과 잠재능력을 극대화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을 가진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을 인간답게 교육하려는 근본적인 의도에 있어서는 일반교육학이 지향하는 것과 다르지 않지만,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은 그 목적자체가 인간 밖에서 제시된 존재목적과의 연관 속에서 성취되어야 하는 기독교교육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코메니우스는 하나님이 부여한 창조세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인간을 부르며, 그리스도 안에서 범지혜의 추구를 통한 올바른 사용을 목표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 교육에서의 범 교사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수용하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며, 범지혜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의 교육학(Padagogik)은 샬러교수가 평가하고 있는 대로 단순한 인간의 자율성과 잠재능력을 확대하고 개발하는 교육의 방법론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가 행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가르침의 사역을 말한 것이며, 실천신학(Praktische Theologie)인 것이다. 역시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단순한 교육이론이 아니라, 교육하는 신학(Padagogische Theologie)인 셈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가 교육을 통하여 이루려는 구체적인 목표는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여 지식경연대회에서 지식의 자랑을 통하여 승자가 되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제시한 범지혜를 습득하여 인류와 창조주의 뜻의 구현에 그 지혜가 올바르게 사용(Chresis)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은 지금 인류사회를 지탱하는 사회적 구조의 실체인 세 가지 영역, 즉 과학(Wissenschaft)과 정치(Politik)와 교회(Kirche)의 영역에서 올바른 질서가 확립되고 삶이 이루어지도록 봉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영역의 일들을 코메니우스는 인간의 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을 올바른 질서에로 가져가기 위하여 범지혜가 필요하며, 그 지혜로 성취되게 하는 일이 인간의 본질에 적합하게 부여된 과제로 본 것이다.

둘째,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메타노이아로서의 교육의 의미를 제시해 주고 있다.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에 제시된 교육적 의도는 근본적으로 오늘날 기독교를 통하여 실현되는 복음전도와 인간구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같이 인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부르심과 회개가 중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회개에 대한 부름은 개별적으로는 영혼의 구원이지만, 회개의 결실은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 연결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위임한 세계의 질서를 개선하는 일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준비하는 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하나님의 권속들, 즉 택함 받은 자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일에 협동적으로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 하나님의 일이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여기 회개의 사역은 하나님의 독자적인 사역이요, 성령의 사역이지만,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에서는 성령의 함께 하시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학과 교육의 공동사역의 결실로 이해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과학과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범지혜의 배움과 함께 가치인식의 올바른 통찰을 통하여 올바른 사용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으며, 회개의 사역이 그곳에서 구체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이 회개할 뿐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올바른 질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인간의 복된 구원의 삶이 범세계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코메니우스는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전 인류가 그리스도에게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것이며, 창조주에게로 돌아와 범지혜인 그의 뜻을 배우고, 그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자가 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인간이 주도하는 인간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로서의 하나님의 교육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역시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구원사역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남으로 무용한 자가되었다. 범교육은 이러한 인간을 타락의 자리에서 끌어내어 다시금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구원의 길로서 인도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로서의 교육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은 바로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그것이 전개되도록 하기 위한 교육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구원의 길에 인도자이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교육은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인도해 가는 하나의 길 인도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길 인도에 능력으로 직접 개입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길을 열어놓으셨으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세례 가운데로 나아오도록 인도하신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앞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일의 동역자들(그리스도인)의 복음전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배후에 함께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운데서 이루어 가신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세례는 범교육을 위한 신적인 근원적인 일로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고대교회로부터 세례는 신적인 빛을 부여하는 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샬러 교수의 해석에 의하면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에서 이끌어 내어(educatio), 하나님이 본래 세워 두었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의 위치에로 인도해 주(institutio)는 관계의 교육으로 이해된다. 이 둘의 관계는 범교육학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로서의 교육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섬김이며,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5. 실천신학으로서 범교육학의 학문적 의의는 무엇인가?
그러면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 이론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실천신학의 학문적 의의는 무엇인가? 우리는 기독교 교육적 시각에서 몇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지혜의 실천적 의의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의의와 그 목적은 실제로 지혜의 근본이신 창조주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와 가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존재의 모든 가치는 자연과 인간과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하며, 그 올바른 관계를 코메니우스는 지혜로 표현하였으며,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지혜를 가리켜 코메니우스는 범지혜(Pansophia)라고 불렀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이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을 뜻하며, 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책임 있게 살도록 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 되는 것이 범지혜인 것이다. 역시 범지혜는 인간의 삶에 요구되는 실천적인 근거이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과 무관한 관계에서 인간교육을 힘쓰는 세속교육, 일반 학교교육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교육은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하며, 어지럽게 하며, 결국 인간 중심의 세계로서 인간성의 황폐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목적과 삶의 책임을 분명하게 해 주지 못하는 일반교육의 문제성 극복의 가능성이 범지혜의 이해에 달려 있다. 그리고 반대로 범지혜는 현재 기존하는 기독교교육, 또는 교회교육의 모습에도 도전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에 관한 것들을 하나님의 것과 지나치게 분리하게 함으로써, 또는 의도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전체를 하나의 관계로 보게 하지 못하게 하는 극단적인 이원론적인 신앙양태의 문제성이다. 코메니우스의 범지혜는 이 모든 양자의 극단적인 분리를 극복하고 전체를 통합적으로 인지하게 하는 통전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점이다. 이러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식, 자연에 대한 인식이 하나로 연결되게 하는 강점을 가진다. 이러한 범지혜는 실천적인 의미를 지닌 신학적인 것이다.

2) 범세계적인 인간교육의 의의
코메니우스의 범세계적인 교육관은 교육의 대상과 내용을 모든 사람들과 세상의 모든 것에다 둠으로써 범세계적인 의미를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와 전 인류를 위한 것임에 상응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현대 교육학도 범세계적인 관점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교육의 평등주의라든가, 기회균등의 원칙, 그리고 인간성교육 등은 성경적이며, 기독교적인 가치들에 상응하는 것들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속교육의 인간관은 교육기회의 균등과 평등, 그리고 진정한 인간성 교육에 대한 명백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교육의 정도가 단계적으로 전문화되고, 특수화 될수록 지나치게 자유경쟁을 전제한 사회적 가치관에 매몰되어 평등의 원칙과 인간성교육의 주제는 분명하게 실천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진다. 계속적으로 시대적 가치관의 변화와 관련하여 인간성교육의 문제는 미해결의 상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이 보여주는 범세계적인 교육관은 이러한 현대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가 된다고 보며, 그 자체가 기독교의 실천적인 것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3) 기독교의 평생교육의 과정의 의의(태아에서 죽음까지).
인간의 존재와 삶은 배움과 끊임없는 관계를 가진 존재이며, 특히 그의 연령단계에 따른 범학교론은 현세적으로는 영원한 세계로 향한 준비의 과정으로서 자연과, 정신과 성경의 책을 배워야 하는 평생교육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교육론이 강조하고 있는 직업기술 재교육으로서 평생교육과 정신문화의 교양을 위한 것과도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범 교육에서의 평생교육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된 미래의 영생에 대한 준비이면서, 현세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앞에서의 책임을 감당하게 하기 위한 지혜습득의 교육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땅에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실현되게 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것이라 할 것이다.

4) 복음 선교의 과제와 교육의 관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범교육의 대상으로 전제한 것은 코메니우스 자신이 범교육을 바로 예수님이 모든 족속으로 하여금 제자를 삼도록 명령하신 말씀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한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마28:19-20). 물론 코메니우스는 그 당시 구라파의 사회가 이미 기독교화 되었다는 전제에서 제시된 인간교육론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전 세계의 인간모두를 교육의 주체요, 대상으로 전제하는 한, 기독교 선교와 직결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역시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이방문화의 타종교와의 관계에서도 종교들의 가치비교를 통하여 기독교의 선교를 전개하는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선교적 과제와 연결된 교유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기독교 선교와의 연결점은 다시 다른 기회에 논의되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5) 실천지향적 교육의 의의
그것은 원래 범지혜의 습득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인간성의 완전함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것이다(골1:28).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완전한 인간이란 도덕성으로, 윤리적으로 실수 없는 완벽주의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완전함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범지혜의 배움에 대한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하였고(이론, 실천, 사용), 배움의 목표를 지혜의 습득과정에 두기보다는 습득된 지혜를 삶의 실제적인 상황에서 그대로 사용(실천)하게 되는 것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코메니우스는 지혜의 사용(Chresis)이란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착상은 그의 교육신학적인 생각자체가 교리의 이론적인 요구보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실천적인 면을 얼마나 깊이 있게 생각했던가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실천신학이며, 오늘날 우리의 실천신학이 무엇을 지향하며, 어떻게 구체화되도록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에 하나의 모델이라 할 것이다.

6) 현대교육목회의 이론으로서 범교육학의 의의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목회사역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물론 코메니우스는 그것을 목회사역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범교육학이 기독교교육한인 한에 있어서, 그리고 선교와 연결된 것이며, 기독교학교교육과 연결된 한에 있어서, 우리는 목회사역과도 연결된 것임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현장의 사역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평생교육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개개인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이라고 한다면,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이야 말로 교육목회의 이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범교육을 통한 완성된 인간의 모습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의 모습이며, 그 안에서 기뻐하는 자의 삶의 모습을 전제한 것이다.

7) 사회개혁론으로서의 범교육학
범지혜의 습득을 통하여 긍극적으로 사회 문화적 영역으로 불려지는 학문, 정치, 종교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범교육의 절정은 평신도 교육에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범지혜의 앎에 이르는 삼 단계와 관련하여(이론, 실천, 올바른 사용),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적합한 사용을 실현하는 삶의 모습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의도와 착상은 그의 6번째의 책, 범질서론(Panorthosia), 또는 범 개혁론에서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부분은 20세기 초엽에 화란의 신학자 아브람 카이퍼가 제시한 칼빈주의 사상은 전 문화적 영역과 연결시키려는 해석을 시도했던 신 칼빈주의적 입장에 상응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신학의 문화적 영역과의 관계성을 교육의 명제를 통하여 실천적으로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코메니우스는 카이퍼의 생각을 앞서고 있으며, 그는 실제로 이러한 착상을 연대적으로도 벌써 17세기에 제시했다는 면에서 분명히 카이퍼를 앞서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코메니우스 역시 칼빈주의와 창조신학에 근거하여 문화적 명령을 교육 신학적으로 제시한 것은 실천신학적으로 그 중요성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범 교육을 통하여 우리 교육의 실제, 그것이 일반교육이던, 기독교 교육이던, 그리고 교회교육이던 간에 그 교육의 실제에 나타나는 왜곡을 바로잡아 주는 가장 성경적인 원리일 뿐 아니라, 우리 교육의 실제를 더욱 새롭고, 건강하고, 풍성하게 해 주는 훌륭한 교육방법적인 근거와 유산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 이론이 보여주는 교육적 의도와 방법은 결론적으로 샬러교수의 해석처럼 기독교 복음선교와 목회사역의 그 실제적인 방법을 교육이란 맥락에서 해석해준 하나의 실천신학이라 할 것이다. 특히 그의 범지혜를 전 생애의 과정을 통하여 배우고 깨달아 창조주의 뜻에 부합한 삶을 살도록 하려는 것은 기독교의 사역과 조금도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범교육의 정신을 이어받고, 이 시대에도 그 교육을 책임 있게 실천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범 교사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