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ible & Church/Shema Isreal

나눠야 합니다 (사도행전 20:33~35)

성령충만하려면(9)

- 나눠야 합니다 -

사도행전 20:33~35

Entrance Prayer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시편 42:1, 7~8)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간을 은혜가운데 인도하시고, 오늘도 거룩한 성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간을 돌이켜 보니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스러운 것 뿐입니다. 오늘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유하시고, 예배하는 심령들 마다 하늘의 놀라운 축복으로 더하여 주시옵소서. 은혜를 방해하는 악한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승리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Introduction

오늘은 간단한 질문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물론 여기에 대하여 여러가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적나라한 대답은 아마도 복받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은 분명히 복받기 위해서 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만이 복의 근원이 되시기에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망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복이 이 땅에 국한된 세상적인 복이든, 저 하늘 나라에 속한 영원한 복이든 간에 우리는 복을 원하고, 또한 그것을 사모하므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복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복이 있습니다. 많은 재물을 얻게 되는 복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되는 복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온 땅을 주관할 수 있는 복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단지 땅에 속한 것입니다. 대단하고 화려해 보여도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처럼 이 땅에서의 생애가 끝나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헛될 뿐인 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들을 가리켜 복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도 복은 복입니다. 조금 질이 떨어지는 복일 뿐인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세상의 행복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그것이 불신앙적이며, 세속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필요를 따라 구할 것을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세상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했지"(마태복음6:31)구하지 말라” 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4:6)고 말씀하고 있지, 세상에 대하여는 완전히 초연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복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앙도 없고, 믿음도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힘써 세상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달라고 청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복 받을 만큼 멋지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세상적인 복만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복을 얻어야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인줄로 압니다. 이 복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돈 앞에, 명예 앞에, 권세 앞에 비굴해집니다. 사랑과 구제와 섬김에 비겁해 집니다. 그리고 세상 것을 모아들이는데만 급급합니다. 여기에 목숨을 겁니다. 그것만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의 축복에 목을 메며 살아갑니다. 그것 때문에 주일도 범하고, 말씀도 범합니다. 하나님을 골방에 가두어 두고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고난이 다가오고, 경제적으로 힘들게 되면 예수 믿어봐야 소용없다고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복도 복은 복이지만, 목숨을 걸만한 수준의 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수준의 복이 아니요, 그것은 질이 낮은 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복도 허락하시는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에게 그보다 더욱 가치있고 뛰어난 고품격의 복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복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고품격의 축복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가장 가치있는 고품격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피부로 느끼며, 천국의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가장 고품격의 복은 성령충만이다.”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은 천국의 행복이다.”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을 통틀어 가장 고품격의 복은 성령충만과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은 천국의 행복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복은 근시안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썩어질 것이 아니며, 찰나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썩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는 없는 놀라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세상적인 건강의 복, 물질의 복, 명예의 복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만 매달려서는 안됩니다. 그 질 낮은 복만을 추구하다가 주님이 우리 앞에 펼쳐두신 복 중의 복이요, 최고의 복인 성령충만과 그로 말미암은 행복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왕에 예수를 믿고 복받는 사람이 되기를 시작했다면, 질이 떨어지는 복을 붙들고 통사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고품격의 축복, 복 중의 복, 최고의 복이 되는 성령충만을 사모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사는 삶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중의 복인 성령충만과 그로 말미암은 천국의 행복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며, 세상의 질이 떨어지는 복을 위해서 힘쓸 것이 아니라, 가치있고, 의미있는 고품격의 성령충만과 그 은혜로 말미암은 축복을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 복을 위해서 죽기 살기로 매달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중의 복인 성령충만의 복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약 두 달에 걸쳐서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고, 주어진 사명을 목숨보다 귀하게 알고 감당해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티다.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서 힘쓰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충만의 놀라운 축복, 고품격의 축복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은 행복을 받는 것이 고품격의 축복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 고품격의 축복을 받는 것보다 더 뛰어난 명품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충만 가운데 최고의 성령충만과,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은 행복 가운데 최고의 행복을 얻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3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사도행전 20:35)

성령충만을 받는 것보다 더 큰 복은 그 받은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복을 나누어 주시므로 성령충만 중의 최고의 성령충만, 명품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수많은 예언자들이 사도 바울을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결박을 당하게 되고, 로마로 잡혀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결박을 당하게 된다는 말을 들으며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여러 교회의 헌금을 모아 가지고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죽더라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가면 다시는 에베소교회와 성도들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에베소의 장로들은 함께 만나 이별의 아픔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유언적 권면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그의 신앙의 역사를 통하여 가장 중요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그 말씀 가운데 견고하며 믿음을 잃지 말 것을 권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말씀 대로 살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앞에서 모든 것에 수고함으로 내게 주어진 것을 내 욕심을 위해 쓰지 않고, 내 권세를 주장하지도 않고, 오직 너희를 섬기며, 너희와 함께 나누는 일에 힘썼던 것처럼,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지 물질적인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너희에게 주는 자가 되었던 것처럼 너희도 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될 때에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또 사명을 감당하는 등 온갖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받은 은혜보다 더 큰 은혜,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보고, 또 교회의 여러가지 직분으로 섬기는 등의 활동을 통해서 받게 되는 성령충만보다 더 풍성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성령충만이 아닌 더욱 풍성한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주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미시간대학 사회연구소의 심리학자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는 심리학 전문지 '심리과학' 최신호에 발표한 연구보고서에서 자기만 아끼고 남을 돕지 않는 사람이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보다 일찍 죽을 가능성이 2배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브라운 박사는 무작위로 선정된 423쌍의 노인 부부를 대상으로 5년간(이 기간 중 134명 사망)에 걸쳐 실시한 조사분석 결과 이같은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하고 이는 연령, 성별, 신체-정신 건강 등 수명과 관련된 여러 요인들을 감안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도우며, 수고하게 되면 더 빨리 병들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섬기고 나누며, 베푸는 삶을 살게 되면 더욱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베풀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부자가 될 수 있다.' 상식적으로는 얼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베풀면 우리의 것이 빠져나갔으니 우리는 전보다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베풀 때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베풀면 그것은 더욱 크게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로마서 8:3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마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며, 지금도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를 위해서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로마서5:8) 우리가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신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치있고 존귀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고, 주님을 배신하며, 부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주님을 매어달며, 주님의 옆구리에 창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시되 더욱 풍성하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므로 받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받기를 간구하는 가운데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후히 주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처럼 우리의 모든 것으로 기꺼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에 최고의 축복, 명품의 축복, 성령충만의 은혜가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2.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은혜 받고, 축복 받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예수 믿고 복받기를 힘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이 떨어지는 세상의 축복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보다 조금 신앙이 있는 사람은 고품격의 영적 축복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받는 데만 급급했지 주는데는 인색했습니다. 무지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축복인 성령충만중의 성령충만, 명품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복을 구하기는 합니다. 성령충만을 구합니다. 그런데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 축복을 구합니다. 영적인 축복도 자기만을 위해 구합니다. 자기의 가족만을 위한 영적인 축복을 구합니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만의 성령충만을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겠습니다. 올해 초부터 원불교 앞에 교회가 하나 세워졌습니다. 새롭게 건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건축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얼마나 신속하게 건물이 세워졌는지 모릅니다.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그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건물은 허름한데 그 교회는 새 건물로 멋지게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대로 된 목사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사라면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니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부끄럽게도 저는 그 교회가 아름답게 건축되는 것을 보면서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교회를 아름답게 건축하기도 하고, 또 교인수가 급격히 불어나기도 하고, 선교적 사역 뿐만 아니라 봉사 구제의 일들을 참으로 아름답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입으로는 축하를 합니다. 얼굴로도 밝게 웃습니다. 그런데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이런 마음이 치밀어 올라 옵니다. “그런데 뭐가 어땠다는 말인데…그래 너 잘났다 너 잘났어!” 이게 목사로서 가져야 할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좋아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으며,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든 또는 영적인 것이든 자기만을 위해서 복받기를 구합니다. 다른 사람이 복받으면 안되고, 내가 복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가 더 많은 축복을 받으면 안되고 우리 교회가 더 잘되고, 더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기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이런 축복에 대한 생각을 탐심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본문 33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을 설명하면서 “탐하지 아니하였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세상적인 것을 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은 폭넓게 해석해 보면 “받은 축복을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물질도 구하고 건강도 구합니다. 그리고 성령충만과 그로 말미암은 행복도 간구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 간구하는 축복이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런 실수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은혜를 간구합니다. 성령충만을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탐심을 가리켜 우상숭배라고 합니다(골로새서 3:5).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을 구한다고 해도, 또 성령의 은사를 구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우상숭배가 될 뿐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예배하고, 또 기도하고, 찬양하며, 말씀을 묵상한다고 해도, 그것의 목적이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 우리의 가족만을 위한 것, 오직 우리 교회만을 위한 것에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멋진 경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령충만을 힘써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을 구하고, 더욱 풍성한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사람은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사도행전4:32)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10:8) 그러므로 하나님께 성령충만과 그로 말미암은 축복을 선물로 받는 것보다 더욱 복된 명품축복을 소유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 둘째 아들은 좀 특이한 녀석입니다. 워낙에 엉뚱한 소리를 잘해서 엄마에게 가끔 미움을 사기도 하지만 저는 그 녀석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어느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늦잠꾸러기인 그 녀석이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내 곁에 슬며시 눕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나는 커서 부자 될거예요. 돈 많이 벌거예요. 그러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까지 얼마 되지 않는 생애를 살아왔지만 돈에 목숨을 건 적이 없습니다. 돈을 꼭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습니다. 다만 신앙인으로서 사람답게 살 수 있기를 위해 힘썼을 뿐입니다. 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생각했고, 굳이 많은 것을 집에 쌓아놓고 살아야 한다고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에 일찍 일어난 잠꾸러기가 제 곁에 찾아와 슬며시 눕더니 하는 말이 “난 돈 많이 벌거예요. 부자될거예요”하니 기절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 녀석이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조금있으니 이 녀석이 다시 말을 잇습니다. “아빠, 나는 부자가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거예요.” 이러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는 감탄을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꼭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철없는 녀석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생각하고 그저 지나쳤습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느닷없이 이러는 것입니다. “아빠 난 부자가 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거예요.” 저는 이 녀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겨우 일곱살 짜리이긴 했지만 사랑하는 아들 녀석의 마음에 명품축복을 받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버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혹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까? 만약에 우리가 돈을 벌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가 성공하고 출세하려는 목적이 우리와 우리의 가문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하고 출세하는 목적은 바로 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들에게 베풀기 위해 모든 좋은 것을 풍성히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받고 성령충만 받고, 은사(恩賜)받고 능력받으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 또한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요,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식구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경건생활들이 우상숭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고 성령충만, 은사 충만하게 되는 것은 철저하게 남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로마서 14:7) 또한 고린도전서에서는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린도전서 10:2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사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힘써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자기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남을 섬기고, 그들에게 베풀며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나눗셈을 잘해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더하기와 곱하기에 능숙한 사람들이 이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남을 위해서 나누기와 빼기를 잘하는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해주시는데 성령충만의 축복에 더하여 더욱 풍성한 성령의 충만과 천국의 기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받기에만 뛰어난 신자가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는 일에 탁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우리 자신에게 고정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남을 섬기며, 그들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허락하여주시는 더 좋은 축복, 명품의 축복으로 더욱 풍성한 성령충만과 더욱 풍성한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도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힘써 나누어 줌으로 더욱 풍성한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