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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마음껏 웃을 수 있는가? (고전10:1~5)

마음껏 웃을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 10:1~5

Entrance Prayer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베드로전서 4:7~10)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한 해를 은혜 가운데 인도하시고, 2004년 마지막 주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봅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보다는 망각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기 보다는 우리의 고집을 내세울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용서하여 주옵소서. 한해의 저물어감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날에 주님의 심판대가 있음을 기억하고 깨어 근신하게 하시고,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옵소서. 오늘 주의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합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케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Introduction

2004년을 시작함이 불과 얼마 전 같은데 벌써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며 후회도 많고 아쉬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감사가 훨씬 더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인도하셨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잊으셨다면 얼른 주보를 살펴보는 센스를 지니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마음껏 웃을 수 있게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한 해의 목표는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성도들의 가정과 사업에도, 직장에도 학교에도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귀한 축복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표어를 돌이켜 보며 웃을 일이 많았는가? 하고 자문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웃을 일을 많이 주셨는지, 그리고 우리는 정말 마음껏 웃는 축복을 누리며 살았는지 돌이켜 봅니다. 물론 웃을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우리는 마음껏 웃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의 삶의 상황은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그런 상황들이 아니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모든 환경은 우리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 뿐이었습니다. 마음껏 웃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소망을 갖게 하심은 헛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 일들로는 기뻐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마음껏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삶의 상황, 세상에 속한 기쁨으로 기뻐하는 존재가 아닌 하늘에 속한 기쁨으로 마음껏 기뻐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기를 항상 기뻐하라…… 이는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늘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바 되어있으면서도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해서 늘 말씀했습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성도들은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기뻐했던 사람입니다. 매를 맞았지만 기뻐했습니다. 때로는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좌절하지도 낙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기뻐했습니다. 그는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으로 마음껏 기뻐했습니다.

오늘 마지막 주일에 우리 안에 잃어 버린 기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만족을 뛰어넘는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지만 우리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을 보며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복된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이 한 해 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마음껏 웃을 수 있기를 소망하고, 또 이를 위해서 기도와 간구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 것으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개그 콘써트를 봐도, 웃찾사를 봐도 도무지 그저 웃는 것을 가능하지만 마음껏 웃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왜 이처럼 참된 웃지 못함이 찾아오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세상의 환경이 나쁘기 때문에 웃지 못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바울 사도 같은 사람은 세상의 환경이 나빴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강도의 위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억울한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웃을 수 있었고, 마음껏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웃음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것에 울고 웃고 하지만 성도가 울고 웃는 것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사람에 웃음이 사라진 것은 크게 세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욕심이 찾아오게 되면 그 순간부터 웃음이 사라지게 됩니다.기쁨이 사라지게 됩니다. 행복이 가득한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1:15절 말씀에서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욕심은 사망을 불러온다는 말씀입니다. 욕심은 웃음을 빼앗아가고 지옥과 같은 고난과 고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는 것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제가 얼마전에 사진을 정리하다가 제 어린시절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6,25시절이 아닙니다.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당시의 모습이 초라한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에 살고 있던 집을 보았습니다. 지금으로는 그런 집에 살라고 하면 도무지 못 살 것 같은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불평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무렵을 회상해 보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이며, 환경이며, 또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보면 그 당시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나게 좋은 것들 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지 않고 사시 사철 싱싱한 과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최고급의 옷을 입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시는데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그대로 패션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 가도 전혀 손색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형편을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좋아진 형편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불평하고 살아갑니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한 욕심에 끊임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껏 웃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세상 것에 모든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업이 잘 되지 않고, 우리의 가계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가득한 욕심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내 것으로 빼앗아 보려는 탐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면, 마음껏 웃을 수 있기를 바라신다면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욕심을 버리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마음껏 웃을 수 있습니다.

2.

둘째로 우리가 마음껏 웃지 못하는 것은 영적 무감각 때문입니다. 본문1~4절 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돌보심을 받았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하나님은 한 순간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거두시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낮은 사막과 같이 뜨거운 곳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도무지 걸을 수 없는 길입니다. 반면에 밤은 너무나 추워서 겨울과 같은 곳입니다. 일교차가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왠만한 생명체는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인도하시는데 그들의 삶에 항상 인도자가 되시고, 돌보시는 보호자가 되셨습니다. 낮 시간 동안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구름기둥을 그들의 진영에 두셨습니다. 태양의 열기를 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시원한 낮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밤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위에 불기둥을 두셨습니다. 따뜻한 난로를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한결 같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만약에 뜨거운 여름날과 같은 낮 시간을 에어컨으로 시원하게 하려고 했다면, 또 추운 겨울과 같은 밤시간은 온풍기로 따뜻하게 하려고 했다면 그들에게는 엄청난 난방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철저하게 돌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늘 기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이 땅에 속한 것으로 먹고 마시게 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것으로 먹이셨습니다. 만나를 보내시고 메추리를 보내셨습니다.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원수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무감각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영적 무감각이 그들로 하여금 웃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민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향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축복에 대하여 철저하게 민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부족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입니다. 죄악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원수 되었던 존재들입니다. 천국과는 상관없이 지옥에 속한 사람이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의 눈물과 희생으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축복하셨습니다. 피와 눈물을 흘리시면서 저와 여러분을 천국의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뿐입니까? 우리의 삶의 순간마다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로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생각밖의 놀라운 기적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심 못지 않게 우리를 사랑하셨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민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결코 낙심하고 좌절할 수 없습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마음껏 웃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 불감증에서 하루 속히 우리를 회복하시므로 마음껏 기뻐할 수 있는 축복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번째로 우리가 마음껏 웃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0:5)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의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저희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는 삶은 우리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 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요, 축복의 본질인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생각할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하면서 찬양하는 그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이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원수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물론 복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에 복음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복음을 방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를 비방합니다. 목회자를 비방하고 저주합니다. 때로는 성도들끼리 이간질 시키고 적대시합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복음을 방해하는 것이 되어집니다. 우리가 쉽게 내뱉는 한마디 말들이 지옥불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3: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야고보서 3:6)

혀는 지옥불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심코 내뱉는 한 마디가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속한 공동체에 지옥을 가져다 주는 것이 되며, 그 말하는 사람은 결국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혀가 비판과 저주, 원망과 불평의 말을 쏟아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삶에 지옥불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에 파숫군을 세워야 합니다. 지옥의 말이 나오지 않기를 위해서 철저하게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축복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3.1.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넘치는 기쁨으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세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늘 축복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씀입니다만 우리 교회는 항상 축복의 말을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앞에서만 그렇게 하지 마시고, 어느 곳에서든지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역자들을 향해서 축복의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장로님들을 향해서 축복의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수집사님, 권사님, 그리고 모든 제직들을 향해서 사랑과 축복의 말을 풍성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우리 교회를 천국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천국같이 행복한 교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축복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3.2.

둘째는 우리의 입에 늘 찬송을 달고 사는 것입니다. 찬송이 넘치면 행복이 있게 됩니다. 저절로 웃을 수 있게 되어집니다. 복음성가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찬양이 언제나 넘치면 은혜로 얼굴이 환해요 성령의 충만한 모습을 서로가 느껴요. 할렐루 할렐루 손뼉치면서 할렐루 할렐루 소리 외치며 할렐루 할렐루 두 손을 들고 주님을 찬양해요 얼마나 아름다운 찬양인지 모릅니다. 찬양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그 기뻐하심 가운데 그의 백성들에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를 맞아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자신의 몸도 가눌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복음전하다가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원망이 나올 법했습니다. 짜증이 날 만도 했습니다. 지칠대로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울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그들은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들의 찬양이 계속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셨습니다.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드십니까? 고통스럽습니까? 주저 앉아서 울고만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울고있는 형제여 왜 찬송을 잊었는가 어둠 속에 찬송은 기적을 부른다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다고 고통의 문을 찬송 찬송으로.. 찬송 찬송으로 그렇습니다. 찬송을 부르게 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울수 밖에 없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결국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절대적 행복의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3.3.

세번째는 우리의 입에서 복음을 증거함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함을 얻게 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것을 가장 크게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 친지들, 가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시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전도해 보셨습니까? 힘들지요.. 힘들뿐만 아니라 지옥과 같이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하고 내가 전도한 것 때문에 한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되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되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 기쁨을 어떤 세상의 기쁨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믿음에 굳게서고 아름다운 영적 진보를 이루는 것을 보면서 너희는 내 상급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기뻐하심 가운데 허락하시는 상급을 받게 하는 통로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하는 입술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의 문제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삶에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축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이 한 해 뿐만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천국의 웃음이 가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웃지 못하는 것은 세상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간혹 속아넘어갑니다. 세상의 환경 때문에 우리가 마음껏 웃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은혜에 대한 영적 무감각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할 수 있는 복된 삶을 살아 주님이 주시는 그 기쁨으로 항상 마음껏 웃을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 마음껏 웃을 수 있기를 소망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