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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

야고보서 1:12~15

Introduction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올라와 예배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처럼 예배하는 것입니까? 골프를 치러 가는 것처럼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신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휴일의 귀중한 시간을 쪼개서 왜 이처럼 예배하는 자리에 앉아있습니까? 분명히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아무런 이유나 목적없이 이곳에 앉아 계신 분이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이유와 목적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이곳에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딱히 할 것이 없으니 그래도 좋은 말씀이나 들어보자고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이 교회를 찾는 것은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저주 받기 위해서, 고난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목사가 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축복을 전함으로 더욱 존귀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설 수 있기 위해서 목사가 된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면 그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는 차원이 다른 넘치는 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잠시잠깐의 복이 아닌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 심히 존귀하게 되는 그런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하나님 앞에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시대의 특성을 알 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이 시대를 일컬어서 말세라고 합니다. 말세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끝 자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기 때문에, 세상에 참된 사랑이 사라지고, 온갖 병든 사랑, 왜곡된 사랑이 사랑으로 가장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와 같습니다. 거짓이 난무합니다. 어디에 참된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에 두고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누구에게 진리가 있고, 어디에 거짓이 있는가를 좀처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온갖 거짓과 음모가 가득합니다. 그 뿐입니까?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음란과 타락의 모습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추악합니다. 노아 시대가 아무리 타락했다고 한들 지금보다 더 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거룩함과 순결함은 촌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에 비추어보면 부끄러운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 되고, 하나님의 앞에서 영광스러운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욕된 것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목전에 있는 마지막 시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세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악이 난무하며, 거짓이 판을 치고, 참된 사랑이 사라진 말세의 기간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는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믿음의 사람이 이 말세를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으로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얼른 생각을 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 무슨 고통이 있겠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심판을 피함으로 행복해야지 왜 고통을 받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세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거하던 의로운 롯이 그 마음에 심히 고통스러워 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진리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자기와 같지 아니하므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사람에게 찾아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베드로전서 4:2)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말세에는 성도들에게 시험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는 줄 알고, 발악을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서 온갖 시험꺼리를 가져다 줍니다. 때로는 무시무시한 환난과 고통을 가져오고, 때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때로는 인간적 자존심이나 이기적 욕심을 충동질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잃고, 축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마지막 시대가 어떤 때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는 마귀의 수고가 극에 달한 때입니다. 세상을 죄악으로 물들이고, 병들게 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흠뻑 취하여 살게 하는 때입니다. 이것은 비단 역사적 종말의 때에만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에, 한 해의 마지막에, 또 한 세기의 마지막에 이와 비슷한 종말적 현상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에 큰 시험이 찾아오는 것은 대개 연말에 찾아옵니다. 나라와 민족에 큰 환란이 오는 것도 세기말, 집권 말에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나라는 집권 말의 시대에 있고, 또 교회와 성도들의 삶은 연말이라는 시기를 살아갑니다. 마귀의 유혹이 극성을 부릴 때입니다. 시험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곳곳에 시험꺼리가 봇물 터지듯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기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하며, 위험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시험꺼리가 없는 곳에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왜 세상에는 시험꺼리들이 가득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왜 이런 시험을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12)

야고보 선생은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시험꺼리를 허용하시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의 삶으로 심히 존귀하고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는 우리 주님께서도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시험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시험꺼리를 근본적으로 없애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허용하십니다. 시험꺼리를 그들의 앞에 툭 던져두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게 하시기 위함입니까? 우리가 힘들어하면 하나님께서 기분이 좋아지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본문 13절의 말씀은 그것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험꺼리를 전혀 던져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꺼리가 인생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에게도 시험꺼리는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맹렬하게 공격하는 마귀의 시험이 우리의 삶에 있습니다. 마치 욥이 의로운 삶을 살았지만, 그의 인생은 상상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있다고 하여서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기력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시험을 허용하시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어 심히 존귀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런 시험 꺼리를 주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시험이 크면 클수록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더 크고 영광스럽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보고 1:2절에 말씀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그 뒤에 있는 상급과 축복을 기억하면서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세는 시험이 가득한 때입니다. 무시무시한 여러 시험이 우리의 믿음의 길을 가로막고,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에 덫을 치고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가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눈 앞에 있는 시험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을 보시기 보다는 시험 뒤편에 있는 우리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힘을 내시고, 시험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시험을 허용하시는 것은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결코 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시험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아주 똑똑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제자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의 재능을 보시고, 그에게 재정은 맡기셨습니다. 돈 관리를 맡기셨습니다. 돈 관리는 아무나 맡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중에는 세리 출신인 마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돈을 맡긴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에게 돈을 맡기셨습니다. 그는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능력있는 사람이고, 열심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마귀가 그의 마음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그의 마음에 찾아왔을 때에 마귀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험에 빠졌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못하고, 마귀의 생각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계산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한복음 13:2)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오면 대적해야 합니다.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생각으로, 성령의 생각으로 충만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를 파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맙니다. 영광된 사도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는 마귀의 종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창자가 터져 죽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졌던 것입니다. 시험에 넘어지면 이처럼 끔찍한 결말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주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 도 시험은 이겨야 합니다. 결코 시험에 져서는 안됩니다. 시험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됩니다.

3.1.

그렇다면 어떻게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인내해야 합니다. 본문은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아야 합니다. 여기에 있는 이 말씀은 마지못해, 억지로 버티라는 뜻이 아닙니다. 입에는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버텨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참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해 약속하신 상급을 주실 것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견디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다시 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시험을 통하여 마귀의 생각을 우리 가운데 집어 넣으려고 하지만, 그 때에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시험에 잘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경우에도 시험 앞에 의연하고 꿋꿋이 시험을 잘 이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험에 잘 넘어지는 사람은 교회에서 인사를 해도 시험에 들고, 인사를 안 해도 시험에 듭니다. 심방을 가도 시험에 들고, 심방을 안가도 시험에 듭니다. 직분을 맡겨도 시험에 들고, 안 맡겨도 시험에 듭니다. 이런 경우에 목사는 환장합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시험에 들기 위해서 작정하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와는 정 반대입니다. 심방을 못해도 감사하고, 심방을 해도 감사합니다. 직분을 맡겨도 감사하고, 직분을 안 맡겨도 감사합니다. 범사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시험을 참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입술에 원망과 불평이 가득해서 그 십자가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채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해서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비웃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면서 중보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시험을 묵묵히 견디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뒤로 물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고난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 하면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을 견디시기를 바랍니다. 고난과 아픔으로 시험이 왔습니까? 마음이 상하는 일들로 시험이 왔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시험이 찾아왔던지 그 뒤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마귀의 생각을 집어넣고, 시험에 넘어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허락하신 시험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놀라운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는 복된 생애가 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2.

두번째로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 14~1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4~15)

본문은 사람이 시험에 넘어지는 이유를 소개하면서 그것은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욕심이 마음에 자리하게 되면 결코 찾아오는 시험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유욕, 명예욕, 권력욕, 인정을 받으려는 욕심, 높아지려는 욕심.. 등등의 수없이 많은 욕심이 우리 인생을 주장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어도 욕심을 다 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나니아 삽비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의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명도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 부분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바나바가 높임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나바의 헌신이 귀중히 여겨지고, 그가 인정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교회 앞에서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겠노라고 공언을 했던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보니 또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 재산을 다 바치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났습니다. 교회 앞에서 공언한 바는 있으니 재산을 다 바치지 않을 수도 없고, 재산을 다 바치자니 아깝고 그래서 그들은 약속을 합니다. 재산의 일부를 감추고, 교회 앞에서는 전부를 바친다고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성령을 속인 것이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욕심이 그 속에 있으면 결코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욕심이 죄를 만들어내고, 욕심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욕심없는 사람은 없다는데 우리의 비극이 있습니다. 목사에게도 욕심이 있고, 장로에게도 욕심이 있습니다. 고매한 신앙의 인격자에게도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욕심을 죽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욕심을 죽일 수 있습니까? 산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욕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결코 욕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욕심이 없어지려고 한다면 공동묘지에 묻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묻힌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두가 크고 작은 욕심을 따라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죽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철저하게 죽을 때에 비로소 욕심은 사라지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하고, 욕심을 버리려면 죽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오늘 다 목매달고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여기에 죽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된 욕망이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지 못하도록 말씀과 기도로 끊임없이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자신의 죄악된 것, 더러운 것을 찔러 쪼개야 합니다. 말씀 앞에 온전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우리의 죄된 욕망을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깨어있어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불 같은 시험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믿고, 기도함으로 깨어있기만 한다면 감히 죄된 욕심, 이기적인 욕심이 틈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에 승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욕심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우리 자신의 욕심을 죽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실현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마귀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시험하려고 해도, 그 가운데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는 자가 되며,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하나님은 우리가 복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복된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반드시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시험에 넘어지게 된다면 하나님의 복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영적으로 가룟유다의 파멸을 경험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험을 이기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심히 존귀케 하십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하십니다. 복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에 다가오는 어떤 시험에도 절대로 넘어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시험이 다가올 때, 마귀의 생각을 영접함으로 넘어지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시험을 견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범사의 모든 일에 기도함으로 시험에 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 속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이 함께 하고, 우리의 5삶은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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