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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20

Introduction

지난 한 주간도 은혜 가운데 지내신 줄 믿습니다. 오늘도 거룩한 성일을 맞아 예배하러 오신 여러분에게 우리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앞뒤좌우에 인사하겠습니다. 보고싶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저는 자주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니? 하고 묻습니다. 물론 정답은 아빠 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가 훈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물어보든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 아빠 입니다. 그리고 또 제가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아빠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지? 하고 물으면 세 녀석이 난리입니다. 서로 자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빠는 우리 가족을 제일 사랑한다는 결론을 맺습니다.

정말 유치한 질문과 대답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을 때에 제일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을 향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고, 또 아이들에게도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확신을 시키며, 사랑 속에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을 웹 서핑하는 중에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면 사랑이 떠나간다고 하는 많은 글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꽤나 설득력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재차 확인을 구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무시무시한 고문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을 확인한다는 미명하에 고문을 가하는 것을 결국 상대방으로 지쳐서 떠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의 확인이 절대로 고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불신에 근거한 것이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는 사랑은 무의미하며, 또 다른 고통일 수 있으므로, 서로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통해서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확인시켜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을 서로에게 고백하고 나타내므로 더욱 깊은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가정도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주님은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확인하시고자 하는 것은 의처증 환자가 자기 아내를 믿지 못해 끊임없이 아내를 괴롭히며 사랑을 확인하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확인은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확신케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으니, 이 승리의 현장을 바라본 제자들은 이 복된 소식을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일단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증인 됨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의 직업, 갈릴리로 돌아가서 어부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도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증인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보다는 갈릴리로 돌아가 어부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왜 갈릴리로 돌아왔습니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했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호언장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리고 떠난다 할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마태복음 26:33) 베드로는 자신감에 넘쳤습니다. 요한이나 야고보, 도마 같은 사람은 주님을 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 같은 의리의 사나이는 절대로 주님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며, 모든 제자들 가운데 자신이 최고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에게 엄청난 일이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유대 병정들에게 잡혀 대제사장의 집에 심문을 당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용기 있게 주님을 따른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치던 베드로는 온데 간데 없고, 예수님의 심문당하는 장면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비겁한 베드로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채찍질을 당하실 때에 아무 소리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 보았습니다. 너도 저 갈릴리 사람과 한 패로다 그는 여종의 말을 무서워 하며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쳐다보고 있는 눈앞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큰 소리 치던 사람이었는데,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줄 알았었는데, 대제사장의 위협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이 예수님을 처참하게 부인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길에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던 자신을 생각하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기는 했지만 감히 주님의 일을 위해서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양심이 도무지 주님과 가까이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베드로에게도 가장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더 이상 주님과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패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으로, 배신자의 모습으로 어떻게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양심의 고발은 그를 짓눌러 무시무시한 자괴감(自愧感)에 사로잡히게 했습니다. 그는 사명의 자리를 떠나 갈릴리 바다로 돌아온 것입니다. 예전에 하던 대로 고기잡이나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세상을 살아가면서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조금만 곤란한 자리가 생기면 예수님 여기 잠깐만 계세요. 예수님은 조금만 눈감아 주세요. 하면서 예수 안 믿는 사람처럼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신앙적 삶에 대하여 우리의 양심은 끊임없이 고발합니다.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이렇게 우리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양심의 지적을 받으면 자괴감에 빠집니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주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은 안 된다 고 하면서 절망에 빠집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주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렇게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뭘 합니까? 나같이 무능하고, 교회에 큰 손해를 끼친 사람이 이제 뭘 하겠습니까? 하면서 나는 할 수 없다고, 나 같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사명을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사람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회개합니다. 그러나 그 소리 때문에 주님과 주님의 사명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혹 실수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 양심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할 때 베드로처럼 갈릴리로 돌아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부르시는 은혜로운 초청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 사명의 자리에 나아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2.

베드로 갈릴리로 돌아간 것을 우리 주님을 가장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비록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시 주님의 제자로 사명을 감당하며, 온 천하에 부활의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낙심한 베드로에게 찾아가셨습니다. 난 안돼 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낙향한 베드로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물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그렇게 치졸한 분이 아니십니다. 베드로의 실수를 부각시키고, 그를 더욱 괴롭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씀이 베드로를 꾸짖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크게 두가지 의도가 있습니다.

2.1.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첫째로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인케 하시면서 그에게 용기를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예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힘들어 하는 자리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대제사장의 뜰에서 매를 맞고 있는 그 상황에서 베드로는 비겁하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누가복음 22:60~6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복음 22:60~62)

베드로는 예수님의 목전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얼굴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고난 당하시고, 힘들어 하실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에 힘이 되었던 사람이 아니라 비겁하게도 예수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슬픔을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니 예수님 앞에 나설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할 모든 기운을 잃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 물음은 예수님의 핀잔이나 꾸짖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너를 가장 사랑한다. 나는 세상을 다 잃어도 너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그의 마음에 잃어버린 용기를 부여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는 비록 주님을 배신하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주님의 근심거리였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용서하시며,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지난 날의 실수를 꼬집어 물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실수로 아파하는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십니다. 헤아려 용서하시고, 다시금 은혜를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용서하심을 힘입어 우리의 영적 침체의 자리에서 용기있게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2.

둘째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의도는 주님과의 사랑을 추억하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초청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가 예전에 주님께 고백했던 사랑의 고백들을 되물으신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느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부인하고 떠난다 할지라도 자신 만큼은 주님곁에 있을 것임을 확신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마태처럼 계산이 뛰어나지도 못하고, 도마처럼 합리적이지도 못하고, 안드레처럼 지혜롭지도 못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했었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에 주님을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이후에 그 주님을 향한 사랑을 잊고 있었습니다. 사랑하지만 주님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께 고백했던 사랑을 다시금 확인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자리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비록 실수하여 나를 배신했지만, 그래도 너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냐? 그렇지 않으냐?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다시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 주님께서는 양심의 소리에 억눌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베드로에게 주님과의 옛 사랑을 다시 기억케 하시고, 새로운 사명의 자리로 그를 초청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리에 더이상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사명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 아니냐며, 전에 죽기를 위해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으니 이제 주님을 위해서 일어서라고 독촉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너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 갈릴리에 돌아와 어부나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사랑을 확인시키시며, 그의 마음에 사명의 불을 지피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을 우리에게 사랑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노라고 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 실패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사명의 길을 잊어버린 채 세상에 파묻혀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전에 네가 나를 향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었느냐?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주님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었느냐? 주님은 이와 같이 물으시며, 우리의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다시금 영적 용기를 얻고 주님을 향해서 헌신하도록 하십니다. 축복의 길을 힘껏 달려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갖고 다시금 사명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릴리로 돌아갔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되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주님께서 낙심함으로 떠났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주님, 제가 전에 나약해서, 부족해서 주님을 부인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때도 지금도 주님을 미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나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아니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물음에 대하여 자신의 사랑을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2000년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해서 물으셨던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마포중앙교회 성도들이여, 그대들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상의 어느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물으십니다. 주님의 이와 같은 물음에 베드로와 같이 주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주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의 자리로 용기 있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위로가 되시기 위해서, 새로운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듣고 싶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있지 않고서는 결코 다시금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너무나 힘든 길이었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결박 당해 끌려 다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눈물이 아니면 절대로 걸을 수 없는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최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야 하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어떻게 걸을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절대로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걸쳐 물으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죽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희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듣고 싶어하셨고,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멋진 사랑의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기 위해서는 돈이 많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력이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방언하고, 예언하는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없어도 좋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대단한 은사를 요구하시지도, 돈을 요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의 고백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뜻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다른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 있으면 주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에 언제든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고백하므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사랑하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생명을 다해 그 양 떼를 돌보신 것처럼 생명을 다해서 그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그의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집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생명을 다해 사랑한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다해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좇아 갈릴리에서 고기만 잡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살아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그 자리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이 너무 좋습니다. 나는 세상의 쾌락이 너무 좋습니다. 친구가 너무 좋습니다. 나는 주님을 결코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겠습니까? 여기에 참석하신 분들은 모두가 이렇게 대답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비록 내가 베드로 만큼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지만, 내가 비록 야고보나 사도들만큼은 주님을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생애를 다하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마음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세상에 빠지게 되고, 넘어지게 되고, 쓰러지게 되고, 낙심하게도 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위로와 격려하심을 받고 있는 우리,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을 때,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다시금 용기를 주시는 그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베드로를 향해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뜨겁게 사랑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최선을 다해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이 물음은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우기 베드로의 양심을 건드려 그를 괴롭히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다시금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낙심했을 때에 무작정 매를 들어 때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연약함을 아시는 주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감싸안으시며, 다시금 힘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 사랑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품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를 사는 동안에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어떠한가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했습니다. 실패한 믿음에서 다시금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고백자가 되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주님을 향해 항상 뜨거운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나를 떠나도 나는 주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을 위해서 난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에 온 몸을 떨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는 증인이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실수하고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양떼인 교회와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온몸을 다 바쳐 사랑해야 합니다. 생명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가 주님의 마음에 큰 기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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