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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사랑한다면 용서하라

사랑한다면 용서하라

요한복음 8:1~11

Introduction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주님께로부터 사랑을 명령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5:12)고 하시면서 우리가 사랑할 때 사람들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인정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의 명령을 받은 사람인 것을 인식하고, 어떤 경우에도 주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373장에 보면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는가?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사랑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을 원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사랑을 구하기가 진주를 찾기보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유행가 가사 속에는 끊임없이 사랑이 노래 되고 있지만, 참된 사랑은 찾을 수가 없고, 변질된 사랑들 뿐입니다. 빗나간 사랑들로만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먼저 예수 사랑을 전하므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세상에 갈급함을 해갈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두워진 이 세상을 밝고 환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서 사랑의 완성은 용서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하게 될 때에 사랑이 완성되고, 용서하게 될 때에 비로소 참된 사랑의 능력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를 품지 않고서는 절대로 사랑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 분노와 복수를 품고서는 도저히 사랑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면, 또 사랑하려고 한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게 될 때에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고, 그 사랑으로 영원한 승리를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를 용서하시고, 남편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며느리를 용서하시고, 시부모님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고서라도 이를 악물고서라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 안에 사랑이 생겨나고, 평화가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말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에서 흑인들의 권익을 위해서 힘써 헌신했던 분이셨습니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백인들의 부당한 차별을 받고, 억압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기시며, 흑인의 자유를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숭고한 뜻이 지금은 미국 전역에서 기억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생일을 국가기념일로 지킬 정도입니다. 그러나 킹 목사가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킹 목사와 그가 행하고 있는 자유운동,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결코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백인들은 여전히 흑인들을 싫어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흑인들을 증오했습니다. 심지어는 호된 핍박을 가하기도 했고, 때로는 무장 공격으로 흑인들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킹 목사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사랑하므로 용서하는 것만이 영원한 승리를 이룰 수 있노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능력을 계발하고 보존해야 한다. 누구든 용서하는 능력이 없으면 사랑하는 능력도 없다. 악하게 굴고 피해를 끼친 사람을 거듭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용서하는 행위는 부당한 취급을 받은 사람들, 큰 피해를 입은 사람,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 당한 사람, 끔찍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용서는 악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절실한 것이다. 탕자처럼 결국 정신을 차리고 먼지 뽀얀 길을 걸어와 가슴 졸이며 용서를 갈구할 것이다. 오직 고통을 당한 이웃만이 돌아온 탕자를 사랑한 아버지처럼 따듯한 눈물을 흘리며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부당한 일을 무시하거나 악한 행동에 가짜 꼬리표를 알아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악한 행동이 더 이상 관계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용서는 새로운 시작과 출발을 가져오는 촉매이다.

지금 나는 우리의 가호한 적대자에게 알린다. 고통을 주는 당신들의 능력에 고통을 인내하는 능력으로 맞서리라. 당신의 물리적 힘에 영혼의 힘으로 맞서리라 당신들이 우리에게 하려는 짓을 해 보라. 그래도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리라.

우리는 선한 양심 때문에 당신들의 부당한 법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선에 협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감옥에 넣어보라. 그래도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리라 폭력을 휘두르는 하수인을 깊은 밤에 우리에게 보내서 우리를 때리고 반쯤 죽여보라. 그래도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리라. 그러나 명심하라. 우리는 고통을 인내하는 능력으로 당신들을 이기리라.

언젠가 우리는 자유를 얻을 테지만 우리 힘만으로 는 것이 아니리라. 우리는 당신들의 마음과 양심에 호소하여 당신들을 이기리라. 그리하여 우리의 승리는 이중의 승리가 되리라. (말틴 루터 킹 목사(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모든 상황들에 대하여, 또 그런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복수나 원망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사랑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뜨겁게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용서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함으로 사랑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아무리 못된 짓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완전히 파괴시킨 사람이라고 해도 예수 사랑을 품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용서하신 것처럼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용서하므로 온전한 사랑을 이루며, 영원한 승리를 이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명하셨는데, 선생의 생각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질문은 참으로 고약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라 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로마의 법을 따라 여인을 처리하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어집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아무리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함부로 돌로 치는 형벌을 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런 고약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서기관과 바래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향해서는 율법적 정죄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향해서는 율법이든, 로마법이든 올무를 만들어 놓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와같은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미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정의를 주장하고,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공의가 없었습니다. 오직 분노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생각한 것은 복수와 응징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향해 복수심을 품습니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발견되면 어떻게든지 그를 몰락시키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던 사람의 배신 앞에서 불타오르는 복수심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통쾌한 복수가 이루어졌을 때에 만족한 미소를 짓곤 합니다. 아바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이 송두래째 빼앗기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을 향한 사람들과 관심과 인기가 점차 예수님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미움과 복수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복수심을 발산하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의 잔꾀로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고 있을 즈음에 이들은 통쾌함으로 몸서리를 쳤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미움과 원한과 복수는 결코 우리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미움과 복수는 자기 통쾌함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처절한 자기 파괴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찢는 우는 사자를 몰아내라 는 책에 보면 델레웨어에 사는 앤 콜맨이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2)1985년 어느날 앤에게 자기 딸이 괴한의 총에 맞아 처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비통한 마음으로 딸이 살고 있던 캘리포니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육군 하사로 있던 그의 아들 대니얼과 앤은 경찰서에 함께 갔습니다.

강력계 담당자는 자신들이 나흘 안에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면 더 이상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관할 구역에서 살인 사건이 많기 때문에 한 사건에 나흘 이상의 시간을 소요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격분하고 말았습니다. 경찰이 누이의 살해범을 검거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자 아들 대니얼은 바에 나가서 총을 사서 모두 쏴 죽이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앤과 대니얼은 딸의 차를 찾으러 차량보관소로 갈 때까지 경찰은 아무런 조치도 취해 놓지 않았습니다. 차를 가지러 가보니 딸은 차 안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있었습니다. 몇 발의 총알이 딸의 대동맥과 심장, 양 가슴을 관통했습니다. 딸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딸은 주일 아침에 살해 되었고, 차를 가지러 간 것은 화요일 늦은 오후였는데 그 때까지 방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딸의 시신에서는 심하게 부패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 냄새는 아들 대니얼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대니얼은 가장 지독한 방법으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2년 반 이상의 괴로운 삶을 살다가 누이의 무덤 옆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결국 살인범을 향해 품었던 증오와 복수심이 자기의 몸과 영혼을 회복할 수 없도록 심각하게 파괴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수심과 증오심은 자기를 파괴하는 무서운 사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간혹 어린 시절에 성적학대를 당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심각한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증오심과 복수심이 이글거리고 있을 때는 결코 행복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복수심을 이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교회가 행복해 지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절대로 증오와 복수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모를 향한 증오,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남편을 향한 증오를 버려야 합니다. 시부모를 향한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철저하게 제거하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행복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복수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근자에 과거사 청산을 운운합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과거에 잘못한 사람들을 단죄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옳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심을 만족하려고 하고 있지 않는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최근의 사회 정서가 부자의 몰락을 기대하는 듯합니다. 가난 속에 설움을 겪어왔던 사람들의 한 맺힌 원성이 자자합니다. 물론 그것이 정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심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때 행복할 수 있다면 복수심을 뽑아내야 합니다. 정의의 이름이든, 법의 이름이든 무슨 이름이든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복수심은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할 뿐입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향한 복수심과 함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하여 증오심을 불 태웠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또는 공의의 이름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를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주님은 그들에겐 정죄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5~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5)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한복음 8:5~8)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보면서 저렇게 더러운 여자는 당장에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좀 해 보세요.. 마치 자기들은 정당한 것처럼, 자기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정의의 칼날을 세우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간음한 여인에게 대하여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는 예수님을 향해서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때에 승리감에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용서할 줄 모르는 단단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향해서 독촉하며 자기들의 주장의 옳음을 외치는 사람들을 묵묵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말씀 없이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이라고 쓰셨을까 추측해 봅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악한 계략을 아시고,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언을 하지 말라는 출애굽기 23:1절의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합니다. (Derrett)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너희가 가진 못된 계략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글을 보면서 양심에 가책을 받았겠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또 어떤 학자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의 죄악이 무엇인가를 기록하시지 않았겠느냐 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의 죄가 기록될 때에 양심에 가책을 받고 부끄러워서 신속히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땅에다가 무엇인가를 기록하시면서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철저하게 율법에 근거한 말씀이었습니다. 신명기 17:7절 말씀에 보면 돌로 치는 규례가 나옵니다. 그것은 증인이 먼저 돌로 치고 뭇사람이 그 뒤에 돌을 들어 던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율법을 요구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돌을 들어 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율법을 따라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복수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원수 갚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정당하고 너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복수할 자격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일 뿐입니다. 성경은 증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한 사람도 죄에서 열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두가 무서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진노하심 앞에서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들이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복수심을 품고 증오하고, 연약한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못 되먹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정죄의 권세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이미 일만 달란트의 빚진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우리 앞에 실수한 100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하며, 응징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수의 자격이 없음을 기억하고, 복수를 포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증오를 포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부끄러워 자리를 떠났던 사람들처럼 복수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신속히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돌로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여인을 정죄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 역시 그 여인과 다름없는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흉악한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오직 한 분 의로우신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그렇습니다. 주님만은 의로우신 분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모두 양심에 가책을 받고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본문 10~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0)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0~11)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여인을 정죄할 수 없었지만 주님만은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심판자가 되시기 보다는 사랑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심판이나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허물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용서로 완성됩니다. 베드로전서 4:8절 말씀에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감옥살이 하는 것을 보면서 부모의 마음은 차라리 내가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자식이 그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바랍니다. 왭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내가 감옥의 형벌을 감당하면서라도 자식은 풀려나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면서 까지도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그랬습니다. 수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난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술책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시므로 사랑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용서는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내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용서하심은 한 여인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는 용기를 잃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용기를 회복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용서하게 되면 우리의 자녀들은 힘을 얻게 됩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당당히 승리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어집니다. 용서를 아는 사람은 또한 용서하는 너그러운 사람들이 되어집니다. 세상에 생명의 빛을 줄 수 있게 되어집니다.

미국에 존 플러머라는 감리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버지니아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목회를 하셨지만 월남전 무렵에는 헬기 조종사였다고 합니다. 그는 1972년 트랑방 마을을 폭격하는 책임자였습니다. 이 폭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때의 참담함이 한 장의 사진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검은 연기 기둥이 소용돌이 치면서 하늘로 치솟는 가운데 몸에 불이 붙어 벌거벗은 채 도망치는 아홉살짜리 킴푹이라는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참담한 모습이었습니다. 존은 이 사진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는가를 알았고, 극도의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존은 그 소녀를 찾아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점점 우울해졌고, 두 번의 결혼에 실패했습니다. 매일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킴푹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를 부둥켜 안고 연신 미안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때 킴푹은 괜찮아요, 당신을 용서합니다. 용서의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킴푹의 용서의 한 마디는 지금까지의 그의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용서의 한 마디는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오랜 죄책감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을 살려냅니다. 그 용서의 한 마디는 큰 용기를 줍니다. 또한 황폐한 영혼으로 생동감이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의 능력은 위대합니다. 용서하면 용서받은 사람에게도 평안이 찾아오지만, 용서하는 사람에게도 넘치는 기쁨이 있게 되고, 새로운 힘과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여인의 죄악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용서하셨습니다. 친히 율법의 심판자가 되실 수 있었지만 그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비난을 감수하시면서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삶은 이러해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까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하지 않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혹 우리에게 용서하지 않고 정죄할 자격이 주어지게 된다고 해도 그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용서하려고 할 때에 가슴 아픈 악몽들이 살아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용서하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하게 되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모든 죄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억만 죄악으로 영영한 심판과 저주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해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시고, 모든 모욕과 저주를 참으시면서 결국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는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무지 용서되지 않지만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게 될 때에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가정에는 행복한 웃음이 피어나게 되고, 다시금 이 세상에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 앞에서 결단합시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법과 정의를 핑계로 용서하지 못하는 황량한 심령이기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복수의 모든 기회를 내려놓고,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힘써 용서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왭니까? 우리는 용서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들인데, 그런 중에도 용서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을 자격이 없으니 용서해야 합니다. 일흔번에 일곱번이라도 아니 그 이상이라도 진심어린 용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에도 용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마저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려 한다면, 우리 교회가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려한다면, 이 민족이 사랑이 가득한 나라가 되려고 한다면 주님의 용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복수와 정죄의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행복이 된 것처럼 우리의 삶에 사랑과 용서로 인한 행복이 가득하고, 늘 승리의 축복이 넘쳐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김진웅 옮김, 내 마음을 찢는 우는 사자를 몰아내라”, 규장, pp.90-91.

(2)Ibid . pp.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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