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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사랑한다면 섬기라

사랑한다면 섬기라

갈라디아서 5:13~15

Introduction

교회에는 사랑이 가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이는 교회가 절대로 교회다운 모습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랑이 없는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자격과 능력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은 교회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교회는 통일성을 지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물고 뜯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같이해서 사랑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목회를 하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저절로 웃음이 납니다. 물론 몸은 힘들고 피곤합니다. 많은 일들이 있기 때문에 지쳐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사랑의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오가는 말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서로간에 대면하는 얼굴에서 사랑의 미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농어촌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모인 한 선교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여러 목사님들과 만나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는 중에 교회와 당회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참석한 선교회였기에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교회와 당회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저는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자랑에, 우리 장로님들 자랑에, 성도들 자랑이었습니다. 목회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합니다.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왜 목사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마음껏 교회와 성도들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행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가득한 천국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언제나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를 용서하며, 서로를 이해하며, 기쁨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헌신이 우리의 삶을 천국으로 만들고, 교회를 크게 부흥케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3:18절 말씀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구체적인 헌신과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거짓된 사랑의 고백일 뿐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사랑의 고백은 헛된 사탕발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 가지 실천의 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3절에 보니 사랑한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철저하게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기적을 베푸시며, 선한 손길로 인도하셨고, 불가능한 기적으로 승리를 얻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서 사랑을 고백하셨습니다. 슬픈 짝사랑의 노래를 외로이 부르고 계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아름다운 것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는 죄 덩어리인 인생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인생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인생이라고 합니다. 죄에 매여 종으로 살아가던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우리 앞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을 조건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우리의 잘생긴 외모를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돈이 많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똑똑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연약할 뿐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우리를 향해 간절한 사랑을 고백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본문 13절 말씀의 서두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조금도 자유가 없었습니다. 죄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마귀의 온갖 술책에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도무지 자유의 기쁨이 없이 죄와 사망의 멍에를 짊어지고, 고통 속에 괴로워 하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우리는 자유와 구원을 향해 절대 무능력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통입니다. 아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 마사다 요새의 항전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 장군 실바가 이끄는 로마군단과 3년간의 치열한 항전을 벌였지만 이제 날이 밝으면 마사다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남자들을 모두 한군데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로 마지막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형제들이여,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새벽이 오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지 않도록 아내와 자식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우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입니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라는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읍시다!”

벤 야이르의 말이 끝나자 몇몇 마음 약한 사람이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벤 야이르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여러분,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우리가 여기 모여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 없는 유태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다마스쿠스에서는 1만8,000명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 이집트에서는 6만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우리는 험준한 요새와 넉넉한 식량을 가지고도 이 싸움에서 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주겠다고 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합니다.”

벤 야이르의 말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의 눈동자에 불꽃이 어른거렸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습니다. 그들을 둘러본 벤 야이르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습니다.

“성을 불질러 로마군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마시오. 그러나 식량 창고 한두 군데는 남깁시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은 것이 아니라 초지일관하게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자유의 열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만방에 과시하도록 합시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구하시오.”

남자들은 경건한 얼굴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아이들을 부드럽게 껴안고,눈물이 그득한 채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죽였습니다.

남자들은 다시 한곳에 모였습니다.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가려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처자들의 주검 옆에 눕자, 열 사람은 집집마다 다니며 그들을 칼로 베었습니다. 살아남은 열 사람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습니다. 뽑힌 사람이 다른 아홉 사람을 죽였습니다.

마지막 생존자는 모두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자 성 안에 불을 놓고 나서 자신의 몸에 깊숙이 칼을 찔렀습니다. 서기 73년 4월15일 저녁. 죽은 사람은 모두 960명이었습니다.

마사다 요새는 현대 이스라엘의 군장병들의 선서식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Never again 이라고 외치며 1948년 독립한 이스라엘이 다시는 외적에게 정복당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노예로 비굴하게 사느니 자유를 가슴에 안고 죽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자유를 잃고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아도 자유를 잃고 있다면 그는 시체일 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린 존재들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여 종살이하는 비참한 신세입니다. 마사다 요새에서 유대인들은 자결을 하므로 로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죄의 종으로, 지옥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의 노예신세는 무엇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는 우리를 향해 주님은 성경을 통해 사랑을 고백하셨습니다. 사랑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친히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주기 위함이라”(마가복음 10:45)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기꺼이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추한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자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시대의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극악한 살인자들이나 당하는 고통이었습니다. 피가 마르고, 살이 찢어지고, 괴로움과 고통으로 절규해야 하는 사망의 자리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십자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고통과 괴로움만이 서려있었습니다. 하나님 조차도 그 비참함 앞에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잔인한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죄와 사망에 매여 종살이 하는 우리를 구원하여 참된 자유를 얻게 하시려고 주님께서는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기꺼이 자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친히 참으셨습니다. 그곳에서 생명을 내던지셨습니다. 주님의 이와 같은 십자가의 희생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결박하시고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속박에서 자유케 했습니다. 이제는 종이 아니요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율법과 사망과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감격하여 함성을 지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린도전서 15:55~57)”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 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은 지옥의 백성이 아닙니다. 멸망의 자식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와같은 자유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고통을 인내하시면서도 이처럼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놀라운 권세와 신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본문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라디아서 5:13)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유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율법의 종이 아닙니다. 멸망의 자식이 아닙니다. 이제는 자유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서 큰 소리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함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자유함을 얻은 사람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의 섬김으로 인하여 지긋지긋한 죄의 굴레를 벗고 자유함을 얻게 된 사람이 그 자유함을 육체의 기회로 삼아 다시 죄의 종이 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사망의 구덩이로 걸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섬김을 본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사랑함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1.

우리 주님의 사랑은 섬김으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사랑은 반드시 섬김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사랑한다면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섬겨주신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위해서 사랑으로 섬기듯이,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모든 수고를 감당하듯이 교회와 성도들은 사랑으로 서로를 섬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섬기라는 말 대신에 서로 종 노릇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 노릇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철저한 섬김입니다.

헬라어에서 종이라는 말은 둘로스(dou'lo")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굴레 씌워져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이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노동과 봉사에 예속되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이지만 도무지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모든 수고와 노동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랑의 포로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해서 스스로 수고와 노동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수고하는 것이 자식들에게 무슨 댓가를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 때로는 대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는 것이 바로 종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모든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교회에서, 또는 가정에서 이런 저런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섬김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에 겸손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종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군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인행세를 합니다. 높아집니다. 그런데 교회를 섬기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자기를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수고를 감당하게 되어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당합니다. 이것이 종의 자세입니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종으로서 섬기는 자입니다. 종은 내 마음대로 섬기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주인의 뜻에 따라서 섬깁니다. 내 기분 내키는대로 살지 않습니다. 주인의 기분에 나를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섬김의 자세입니다. 섬김은 절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섬김은 겸손합니다. 섬김은 자기 중심적이 아닙니다. 타자중심적입니다. 섬김은 내 기쁨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구합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사랑함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기꺼이 서로가 종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를 온통 사로잡아 섬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되어야 합니다. 주방에서 수고하는 여전도회원들을 보면서 힘든 일이 있으면 기꺼이 거들어 줄 수 있는 남전도회원들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형편을 살펴 힘써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사랑이 가득한 아름다운 천국이 될 것입니다.

2.2.

목회를 하다보면 중한 질병으로 고통하는 가족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정에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것이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가족들이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모든 삶이 황폐하게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한 가정에 중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가족들을 위해서 정신과 상담을 해주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인 저는 고통 중에 있는 가족들을 두고 있는 가정에 가끔씩 이런 말씀을 전하곤 합니다. 지금이 섬김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사랑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몸은 힘들지만 섬김과 사랑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기쁨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연약한 사람이 발견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섬김의 기회가 내게 왔다고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사랑을 품고,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십자가를 기꺼이 참으시고, 나를 섬긴 것을 기억하시고, 기!쁨으로 섬길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변에 뭔가 부족한 것이 보입니까? 연약한 것이 보입니까? 그렇다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비난하기에 앞서서 내게 섬김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여기시고 기쁨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김의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건강할 때에 섬김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병들고 연약하면 섬길 수 없습니다. 지금 돈이 있습니까? 섬김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지금 내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섬김의 기회입니다. 예수 사랑을 가슴 속에 품은 사람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섬김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리고 전혀 귀찮아 하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아이를 업고서도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무게의 돌덩이를 업고 있어보라고 하시면 상황을 완전히 달라지고 말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너무 힘들다고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손자나 손녀를 업고 있으면 힘이 들긴 하지만 사랑 때문에 힘든 것도 잊어버립니다. 괴로운 것도 잊어 버립니다. 그리고 기꺼이 아이들을 위해서 몸을 희생할 수 있게 됩니다. 손자 손녀의 모든 것은 다 좋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입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어도 괜찮습니다. 기쁨으로 입을 맞춥니다. 사랑은 기꺼이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서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가식적입니다. 참된 사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기꺼이 섬겨주어야 합니다. 연약함을 비판하기에 앞서서 그 연약함을 채워주기 위해서 섬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사랑함으로 용서하는 교회가 될 뿐만 아니라 사랑함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꺼이 섬겨야 합니다.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능력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지금이 섬김의 기회입니다. 지금을 놓치면 후회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섬기기 위해서 오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기꺼이 섬기는 자들이 되어지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기꺼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명실공히 우리 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주님께 인정함을 받으며, 더욱 풍성한 주님의 사랑으로 행복하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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