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결말 Introduction 한 해를 돌아보니 잘했던 것보다 잘못했던 것이 더욱 많이 생각이 납니다. 알게 모르게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실수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혹 저로 인하여 가슴 아팠던 적이 있었다면 한 해를 보내면서 다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의 편협함과 부족함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볼 때도 참 용서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이 있는데, 곁에서 보는 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제 집사람은 가끔씩 제 모습을 보면서 “정말 인정머리 없어 보인다 싶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가장 사랑한다는 사람의 눈에도 그와같다면 다른 이들에게는 더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해를 마감하면서 섭섭하고 괴로웠던 것, 때로는 분노가 일었던 일이라도 그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 말은 항상 좋은 말, 사랑한다는 말만 하는 공동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랑의 공동체로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연말과 연시가 되면서 사람들은 술 한 잔 마시고, 모든 것을 툴툴 털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까닭인지 꽁 해서 마음을 열지 못하고,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술을 마시고서라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신다고 용서가 된다면 열잔 스무잔 아니 말술이라도 마시겠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참된 사랑이 있어야 진정한 용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Main Subject 1.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결코 쉽기 때문에, 우리의 억울함과 가슴아픈 일을 모르기 때문에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는 것을 참으로 어렵습니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것을 어떻게 용서합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인공은 그 일로 괴로워 합니다. 원수를 갚자니 사랑하는 아내가 울고,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자니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살아온 아버지와 가족들의 아픔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시간 모든 가족들이 그 일로 함께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한 마디로 가정은 지옥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 본문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공생애 기간동안에 주님은 갈릴리와 유대를 다니시면서 많은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으로 가르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위로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시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송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날로 치솟아 오르게 되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직 선한 일만을 행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시기심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시기심이 발동하면 그것을 결국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되어집니다. 시기심이 결국 살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웃이 잘 되고 성공하면 축하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심보가 그렇지 못합니다. 누가 잘 되는 꼴을 못 봅니다. 배 아파합니다. 얼마전에 연쇄살인 강도의 공판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랬답니다. “부자들을 더 많이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빨리 죽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천인공로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하는 말이 “부자를 더 죽이지 못해서 한이 된다니” 말입니다. 그는 비뚤어진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그에게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부자가 이 사회를 향해서 무슨 큰 죄를 지었습니까? 물론 죄지은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다수의 부자들은 참으로 부지런했고 근면했습니다. 그렇다면 칭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부자를 칭찬하고, 그들에게 감사할 수 있는 사회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이 비뚤어져 있습니다. 나보다 부자는 모두가 도둑놈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부자인 것은 괜찮은데 나보다 부자는 모두가 아주 나쁜 놈이고 생각합니다. 증오합니다. 결국 연쇄살인범과 같은 행태를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부자를 증오하는 세상입니다. 결코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만족이 있을 수도 없고, 축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시기심이 사람을 죽입니다.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예수님의 능력, 그리고 그분에게 모여오는 수많은 사람, 예수님의 인기.. 이런 것이 결국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시기심을 발동했고, 십자가를 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튼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기심 때문에 억울하게 십자가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대하며 복수심을 불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저주스럽게 쳐다보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내가 저승에 가서도 네 놈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하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전설의 고향에서 나오는 것처럼 밤귀신이 되어서 입술에 피를 물고,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하얀소복을 입고 음산한 소리를 내며 찾아오겠노라고 악담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시면서도 용서하셨습니다. 본문 3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누가복음 23:34)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복수심으로 분노를 쏟아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 있으시면서도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까 염려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너나 잘하세요.” “네가 메시야면 너나 스스로 구원해 보세요..” 하면서 비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끊임없이 용서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성도는 죽을 때에 눈을 부릅뜨고 죽으면 안 된답니다.” 돌아가신 분이 눈을 부릅뜨고 있으면 얼마나 무섭겠느냐는 것입니다. 죽을 때도 온화한 모습으로 죽어야 한답니다. 그 주검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이 물씬 풍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저 역시 동감했습니다. 그리고 제 죽음에 관해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지 않게 해 주세요. 눈을 까뒤집고 죽지도 않게 해 주세요. 자는 듯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죽을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면서 ㅅ기도합니다. (젊은 목사가 벌써 죽는 기도를 한다니 우습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기도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죽음이 아름다운 결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저주와 분노를 폭발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사랑과 용서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2006년을 마감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2006년을 아름다운 결말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처음과 과정에 문제가 있었더라도 결말이 아름답다면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2006년 12월 31일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이 날을 주님 보실 때에 가장 아름다운 결말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사람이 되면, 2006년은 저절로 아름다운 한 해였노라고 주님이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용서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대하여는 하나님 역시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 우리 주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위에서 처참한 형벌을 다 감수하셨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인내하셨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용서를 받은 성도들을 마땅히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친히 모든 것을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에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에 높이 매달므로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우리가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그의 인생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용서가 사라집니다. 무서운 심판, 용서함으로 지는 십자가보다 더 끔찍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의 모습을 보니 도무지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돈을 갚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모든 돈을 다 갚지 못하면 결코 나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인의 엄한 명령 앞에 그는 꼼짝 없이 감옥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에게 간청했습니다. “한번만 봐주세요. 힘 닿는 데까지 수고해서 반드시 빚을 갚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주인에게 청했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저 내 보내준다고 해도 그는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놓아주면서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일만 달란트의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으니 그는 이제부터 자유였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쁨으로 집에 돌아오다가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였습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일백 데나리온은 돈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친구를 보자 멱살을 잡고 내 돈 내놓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친구를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주인이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분노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용서함을 받고도, 일백 데나리온도 용서하지 못한다니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 들어가 모든 빚을 다 갚기까지 나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온전히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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