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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마18:23~35, 용서해야 합니다 (주일대예배설교)

성령충만하려면 (5)

- 용서해야 합니다 -

마태복음 18:23~35

Entrance Prayer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시편 72:17)

무더운 한 주간을 은혜가운데 보내고,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주의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주님의 이름을 송축할 때에 주는 하늘에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성도들의 삶에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은혜를 허락하옵소서. 예배하는 중에 악한 마귀는 틈타지 못하게 하시며, 바다 같은 주님의 은혜만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아멘 ?

Introduction

우리는 지금 정의라는 이름으로 복수가 주장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명분적 정의만을 주장하면서 정적들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은 부자와 여인들을 상대로 빗나간 정의를 외치며 복수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얼마전 우리는 노인과 연약한 여자들을 상대로 약 20여명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 유영철 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악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의 살인의 동기가 정의였습니다. 부자들이 부정한 재산으로 돈을 모았기 때문에 자기가 가난하게 되었고, 정절없는 여자 때문에 자기의 인생이 망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그들을 심판했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을 죽였고, 부정한 여인들만 골라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면수심의 살인자가 경찰서에서 당당하다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괜스레 입맛이 씁쓰레해집니다. 그는 나름대로의 정의를 외쳤으며, 그 정의라는 이름으로 복수를 감행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위험한 것이 있다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들려진 복수의 칼입니다. 아니 복수의 칼을 들고 외치는 정의는 결코 정의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왜곡된 정의가 우리의 형제, 고 김선일 씨를 죽게 했으며, 수많은 사람을 고통 속으로 밀어넣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바로 이런 위험한 칼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도 결코 예외는 아닌 것만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복수하는 사람들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들 셋을 둔 부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자녀들을 불러 놓고는 너희들 중에 가장 선한 일을 한 아들에게 집안의 가보를 물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들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행한 선한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아들이 말했습니다. 나는 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해주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그리고 결국은 그 착한 일을 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영웅담을 말했습니다. 첫째 아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째 아들도 자기의 선행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모닥불 사이로 들어가고 있기에 불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아이를 구출해 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선행이 결코 큰 아들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은 좀처럼 말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막내에게 재차 물었습니다. 네가 행한 선한 일은 무엇이냐? 막내 아들은 주저하다가 자신의 선행을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집안의 원수가 낭떠러지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기에 그 사람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형들은 일제히 어리석은 일을 했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집안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 놈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왜 살려주었느냐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셋째 아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바로 그 일을 했구나! 칭찬하면서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가보를 셋째에게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수의 사람이 되기보다는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빛이요, 소금으로 사는 믿음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는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우리 안에 서로를 향한 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무슨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주었거나 신체적인 상해를 입혔거나, 가문의 망신을 시킨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앞길을 막아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성령충만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결코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은 천국의 기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충만을 원한다면 물론 기도도 해야 하고, 말씀도 묵상해야 할 것이지만 분노나 복수심 대신에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용서로 충만할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시고, 그 은혜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Main Subject

1.

마태복음 18:21~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마태복음 18:21~22)

본문은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어느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일곱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관례에 의하면 세 번 용서하는 것도 관대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이야기했으니 그는 참으로 대단한 용서의 사람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을 받으시고는 일곱번만 용서해서는 안된다. 일흔번에 일곱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490번 용서하면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숫자에 매여있는 제한된 용서는 참된 용서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란 무엇입니까? 따라 합시다. “기억도 하지 않는 것.” 그렇습니다. 기억도 하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지난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에 대하여 전혀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어떤 성도 때문에 얼마나 목회가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사사건건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교회와 목사님을 비방하고 폄하했습니다. 간혹 교회에는 그런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다행이 우리 교회에는 그런 분이 없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교인들이 종종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목사님은 그 성도 때문에 너무나 목회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인지, 무슨 일인지 그 성도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분은 교회를 옮기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목사님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 성도님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지난 날 목사님의 목회에 방해를 하며, 교회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그 편지를 받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용서했습니다. 잊었습니다. 영원히” 이 말을 영어로 해야 제 맛이 납니다. “Forgive, Forget, Forever” 얼마나 멋진 답장입니까? 목사님은 그 성도의 지난 날의 모든 것을 잊었다고 합니다. 영원히 잊었다는 것입니다. 기억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하여 감사했던 것입니다.

용서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 영원히 그것에 대하여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용서했다고 하면서, 옛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지 모릅니다. 과거사를 전혀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가슴 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다가 다시금 꺼내어 곱씹어보며 와신상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반드시 복수할 것을 결심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용서는 기억도 하지 않는 용서입니다. 우리의 죄가 흉악하지만 그것을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죄인이지만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반역자였지만 주님은 한 번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나의 택한 백성이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용서하셨으므로 우리는 서로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용서하는 사람, 우리 주님처럼 용서하는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용서하기를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날,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합시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예수님의 용서를 기억하고, 우리 하나님의 용서를 기억하고 이를 악물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2.

본문 23 이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용서하지 않는 성도들의 실상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천국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용서와 함께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시고자 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2.1.

여러분, 천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죽으면 가게 되는 그곳이 천국이지요.. 이것을 아니라고 하면 안됩니다. 어떤 분들은 그곳이 천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 믿고, 얻게 되는 마음의 평안을 가리켜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도 천국이긴 하지만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우리 안에 찾아오게 된 평안조차도 천국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속아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되는 나라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우리 앞에 분명히 다가오는 그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갖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용서가 충만하다는 특성입니다.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태복음 18:23)

27절을 보겠습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더니 (마태복음 18:27)

여기의 말씀에 보니 천국은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임금은 종들과 회계하는 임금입니다. 그 종들의 자잘못을 판결하는 임금입니다. 그런데 그 판결 이후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2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빛을 탕감하여 주는 것 이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손해를 끼친 사람, 마땅히 그 소유를 다 팔아서 갚게 해야 하고, 아내도 아들과 딸도 팔아서라도 그것을 갚게 해야 할 것이지만,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며, 그 갚아야 할 것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이처럼 주님의 용서가 가득한 곳입니다. 전는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던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원수되었던 행동들이 기억되지도 않은 듯이 용서받고, 이해되고, 포용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을 전혀 그런 죄가 없는 것처럼 감싸주고, 안아주고,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원한이나 복수나 응징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어렵게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천국가려고 믿습니다. 예수 믿는 이유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풍성한 천국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가 풍성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으며, 자기의 삶에 용서가 인색하다면, 어떻게 그곳에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 천국같이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용서가 충만해야 합니다. 이곳에 주님의 용서하심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 뿐입니까? 우리가 서로를 향해서 용서함이 충만해야 합니다. 용서에 인색하게 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천국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천국의 행복은 전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 우리의 마음 속에 복수심이나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이런 복수심과 분노가 가득하다면 우리는 결코 천국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은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용서를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무지 용서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를 악물고서라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용서를 연습하시기를 바랍니다. 용서로 풍성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여러분에게 충만할 것이며, 여러분의 삶에 천국의 기쁨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2.2.

본문에 보니 일만 달란트의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용서받은 기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뛰면서 돌아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중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일백 데나리온은 물론 큰 돈입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그것은 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빚진 그 사람을 만나자 기세등등해졌습니다. 그리고 언제 일만 달란트의 빚이 탕감되었느냐는 듯이 그 얼굴이 차디차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향해서 험악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갚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 갚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자 옥에 쳐넣고 말았습니다. 돈을 갚을 때까지는 결코 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욕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수십억대의 빚을 용서받았다면 몇백만원 정도 자기에게 빚진 사람은 기분 좋게 용서해줘도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일에는, 성경의 인물에 대하여는 이렇듯 관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한없는 용서하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는데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던 데서 놓임을 받고 주님의 용서하심의 은총을 얻은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천국의 기쁨을 상실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용서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용서하심을 기억지 못하고, 형제가 우리에게 아프게 한 일들만 기억하고 있으니, 우리 안에 보복심이 생겨납니다. 증오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무섭게 공격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용서가 풍성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반면에 지옥은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용서 대신 응징과 보복과 분노가 풍성한 곳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조금도 없는 곳입니다. 모든 죄악이 철저하게 기억되고, 응징되며, 복수를 당하게 되는 곳입니다. 천 배 만 배로 보복을 받는 곳이 지옥입니다.

본문 34~3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34)

일만 달란트의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일백 데나리온의 빚진 자를 만나게 되었을 때에 복수하게 되었습니다. 보복했습니다. 그가 진 빚을 갚기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복수했습니다. 그런데 보복하고, 복수할 때는 신났을지 모르겠지만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지옥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축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진노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용서없이 보복으로 일삼고 있던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보복으로 징계하셨습니다. 용서없는 보복의 지옥을 소유한 바로 그 사람이게 하나님은 보다 무섭고 잔혹한 보복으로 진노하시며 그에게 지옥을 주셨습니다. 지옥의 고통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시대를 가리켜 지옥이라고 단언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고 단언합니다. 왭니까? 지금 온 나라는 복수로 들끓고 있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하려고 합니다. 민주화의 이름으로 복수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개혁의 이름으로 복수와 응징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보복과 응징이 살아 역사하는 곳, 바로 그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성도들도 여기에 함께 합니다. 저는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성도는 복수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응징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지난날의 일들을, 억울한 것들을 기억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 앞에 천국이 펼쳐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는 열심히 다니는데 왜 천국의 기쁨이 없습니까?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용서받은 사람이 그 용서받음의 기쁨을 왜 빼앗겼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원받은 사람에게 왜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고, 지옥과 같은 고통이 찾아오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원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사람이 되므로 성령충만해야 하는데 용서하지 못하니 성령에 충만하지 않고, 성령충만이 없으니, 우리 안에 천국이 아닌 지옥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넘쳐나는 천국같이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분노함과 보복과 응징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됩니다. 각각 그 중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날의 앙금은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지 않으시는 천국을 예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음으로 천국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용서를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수나 분노대신 사랑과 화해의 포옹과 악수가 우리 안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용서가 가득한 천국을 이루어가는 이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충만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사랑과 용서함으로 성령충만하게 되어

천국과 같이 행복한 교회를 이루어 가기로 소망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